<85>횡성 안흥면 경강로 옛 국도 안흥찐빵은 들어 봤어도 안흥이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영동고속도로는 익숙하지만 경강로는 낯설다. 영동고속도로 새말IC로 빠져 나와 평창으로 가는 42번 국도는 경강로의 한 구간이다. 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서울과 강릉을 잇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횡성 우천면 새말에서 재 하나를 넘으면 찐빵으로 유명한 안흥면이고, 안흥에서 다시 고개를 넘으면 평창 방림면이다. 지금은 구불구불한 고갯길을 넘지 않아도 된다. 안흥면을 사이에 둔 전재와 문재 아래에 모두 터널이 뚫려 있다. 이용자 없는 도로에 국내 최장 루지 코스 문명의 편리만큼 중독성이 강한 것도 없다. 일단 새로운 것에 길들여지면 옛 것은 순식간에 잊힌다. 불과 7년 전만 해도 횡성 우천면에서 안흥면으로 가려면 구불구불하게 산허리를 감싼 도로로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2013년 고갯마루 아래에 전재터널이 뚫리면서 옛 도로는 한순간에 용도를 잃었다. 중간에 마을이 없으니 딱히 이용할 주민도 없었다. 그렇게 방치되던 옛길이 지난 8월 놀이터로 변신했다. ‘횡성루지체험장’이 개장한 것이다. 수식이 화려하다. 국내 최초로 폐 도로를 활용한 시설이자, 국내 최장(횡성군은 세계 최장이라 자랑한다) 루지 코스다. 고갯마루에서 산중턱까지 2.4km를 최고 시속30km의 속도로 내려온다. 기존 도로를 활용한 장점이 많다. 안전 펜스만 설치했기 때문에 억지로 산림을 훼손할 필요가 없었다. 왕복 2차선 도로의 3분의 2가 루지 트랙이기 때문에 폭이 넉넉하다. 원래 굴곡이 심한 도로여서 스릴을 더하기 위해 급커브를 만들 필요도 없었다.
루지는 표고와 중력에만 의지하는 레저스포츠다. 가속은 불가능하지만 속도를 줄이는 건 맘대로다. 횡성루지 코스는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는 짜릿함 못지않게 주변 경관이 빼어나다. 일부 구간에 터널을 통과하듯 트릭아트와 조형물을 설치한 것도 재미를 더한다. 매표소에서 출발지점까지는 일반 도로를 이용해 셔틀버스로 이동한다. 2회 이상 탑승자는 도착 지점에서 전동차를 타고 코스를 거슬러 올라간다. 탑승권 가격(평일 기본 1만2,000원)은 횟수와 요일에 따라 다르다. 횡성군에서 사용할 수 있는 3,000원 상품권이 포함돼 있다. 길손들의 간식이자 농부들의 새참, 안흥찐빵 전재터널을 통과하면 안흥면이다. 면 소재지가 가까워지면 ‘원조’ ‘할매’ ‘전통’ 등을 내세운 대형 간판이 ‘안흥찐빵마을’에 다다랐음을 알린다. 면사무소는 아예 찐빵을 사려는 관광객에 주차장을 내줬다. 도로 주변에도 찐빵을 소재로 한 조형물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세워져 있다. 안흥찐빵은 막걸리를 섞어 반죽한 밀가루와 인공 감미료를 첨가하지 않은 국산 팥소로 빵을 만든 다음 하루 동안 숙성시켜 쪄낸다. 재료와 만드는 방식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소박한 먹거리인데, 많이 달지 않으면서도 쫄깃한 맛이 자꾸 구미를 당긴다.
안흥찐빵이 이름을 날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안흥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고립된 지형이기 때문이다. 안흥은 경강로의 중간지점으로 횡성에서 들어오려면 전재를, 평창으로 나가려면 문재를 넘어야 한다. 서울과 강릉을 오가려면 꼭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도로 사정과 차량 성능이 변변치 않은 시절엔 차도 사람도 이곳에서 한 번은 쉬어갈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정류소 주변에 식당과 여관이 성황을 이루었고, 찐빵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길손들이 값싸고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먹거리였다. 높은 고개를 넘다가 차량이 고장을 일으키는 일도 빈번해 찐빵은 비상식량으로도 안성맞춤이었다. 깊은 산중이지만 물자가 드나들고 사람의 발길이 잦으니 주민들로서도 크게 아쉬울 게 없던 시절이었다. 면단위로는 드물게 고등학교가 있고, 오일장의 명맥을 잇는 것도 그 때문이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 완전 개통으로 안흥도 쇠퇴의 길을 걷게 되지만, 찐빵만은 주민들의 새참거리로 꾸준히 사랑받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1998년에는 면소재지 일대에 찐빵특화단지가 조성됐다. 10여개 업체마다 ‘원조’를 내세우지만 1968년부터 시작한 '면사무소앞안흥찐빵'과 '심순녀안흥찐빵'이 원조라는 건 지역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두 업체 주인은 자매 사이다. “눈물이 날 수밖에…” 문재옛길은 걸을 때마다 감동 경강로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관동대로다. 조선시대 아홉 개 간선도로 중 제3대로로 한양과 경기 동부, 강원 영동(현 울진 평해까지)을 잇는 길이었다. 신정일 우리땅걷기 이사장은 ‘관동대로, 서울에서 평해까지 옛길을 걷다’에서 율곡과 신사임당, 허균과 허난설헌, 김시습, 정철, 이색 등 우리 역사를 수놓았던 인물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길이라 적고 있다. 수많은 문객들이 이 길을 통해 관동팔경과 금강산 설악산 두타산 등 빼어난 경치를 답사했다는 의미다. 이름난 문인들 뿐이겠는가. 동해의 해산물과 내륙의 농산물을 교류하던 통로였으니 서민들의 숱한 사연도 길모퉁이 어딘가에 단단히 다져져 있으리라. 관동대로에서도 횡성 안흥면 상안리와 평창 방림면 칡사리(운교리) 사이 문재를 넘는 도로는 한 번도 포장된 적이 없어 옛길의 향수가 어렴풋이 남아 있다. 해발 800m로 높이는 대관령과 엇비슷하고 영동에서 영서로 가자면 꼭 지나야 할 길목이니, 영남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넘었다는 문경새재에 비견되는 길이다.
바로 아래로 문재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폐쇄된 후 홍천국유림관리소에서 옛길 주변에 ‘명품숲’을 조성했지만, 아직까지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우선 입구 찾는 것부터 쉽지 않다. 안흥면 소재지에서 평창 방면으로 약 7km를 이동하면 도로 오른편에 ‘상안리 명품숲’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1호 명품숲’이라는 부연 설명까지 써 놓았지만 내비게이션에도 등록돼 있지 않다. 인터넷 지도에서 ‘안흥면 상안리 217-1’로 검색하면 정확하다. 안흥면도 낯선데, 동리 명칭을 붙였으니 외지인은 알기 힘든 참 어중간한 작명이다. 유서 깊은 고갯길이니 아예 ‘문재옛길’로 부르면 어떨까.
비포장도로로 접어들면 바로 산길이자 숲길이다. 초입은 자작나무숲으로 시작한다. 인공조림이지만 잔가지가 그대로 붙어 있어 자작나무 본래의 수형을 유지하고 있다. 잎은 이미 모두 떨어진 상태여서 400m 순백의 터널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구간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낙엽송 군락이 이어진다. 곧게 뻗은 나무 기둥이 하늘을 찌른다. 가을이 깊을 대로 깊어 나뭇잎은 짙은 주황색으로 변했다. 전체 구간에서 볼 수 있는 솔숲은 인공조림이 아니라 천연림이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이지만 아름드리 소나무가 도로 곳곳에 운치 있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국유림관리소에서 ‘명품숲’이라 이름 붙인 건 문재옛길이 아니라, 이 길에서 연결한 4개 탐방로 구간이다. 가장 짧은 A코스가 0.6km, 가장 긴 D코스는 5.8km다. 등산을 즐긴다면 한두 코스를 걸어 보는 것도 좋지만, 옛길만해도 숲이 무성하기 때문에 명품숲, 명품길의 정취를 즐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단풍철이 지난 문재옛길엔 인적이 뚝 끊겼다. 13일 이 길을 걷다가 엉덩이에 하얀 털신을 매달아 놓은 것 같은 노루 가족을 두 차례 마주쳤다. 산행이 끝날 무렵에야 사람을 만났다. 문재 넘어 방림면 칡사리 마을에 산다는 현모씨 일행이다.
“저 매일 오는데 매일 울어요.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사람이라도 이 길을 걸으면 눈물이 날 수 밖에 없어요. 사계절 감동이지만 겨울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있죠. 나뭇가지마다 얼음 꽃이 주렁주렁 열리고, 바람이 불면 크리스털 부딪히는 것처럼 맑은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져요. 눈 덮인 백덕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하죠.” 현지 주민의 문재옛길 예찬이다. 평창과의 경계인 문재 정상에 이르면 ‘방림 18km’라 쓴 국도 표지판이 페인트가 벗겨진 채 그대로 남아 있다. 주막이었다는 목조건물도 있는데 흉가로 방치되고 있다. 문재옛길 입구에서 이곳까지는 약 5km, 쉬엄쉬엄 걸으면 1시간가량 걸린다.
횡성=글∙사진 최흥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