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을 상상한 적이 있다. 성별이라는 정의가 없는 곳에서 살면 어떨까, 두 가지로 나누지 않는 곳에서 산다면 좀 더 편안했을까, 부질없는 가정을 하곤 했다. 여자아이라고 하니까 으레 그러한 줄 알다가도 의문이 비집고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래도 좋으니 난 아무것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양가 친척을 총동원해도 막내였다. 나이와 성별로 나뉘는 호칭이 싫었다. 엄마는 종이에 누구 오빠 언니 등 호칭을 적어주고 부르는 연습을 시켰으나 그럴수록 반발심만 커졌다. 굳이 호칭을 부르지 않고 용건만 말하는 버릇은 아직도 건재하다.
우리 집에는 다양한 장난감이 있었다. 짧은 머리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보고 남자아이로 오인했거나 보통 남자에게 더 많이 쓰는 이름을 듣고 마음대로 판단한 사람들이 가져온 자동차와 레고 블록과 로봇, 성별을 아는 사람들이 가져온 바비 인형과 미미의 집과 소꿉놀이 세트. 이렇게까지 다르다는 게 우스운 일이다. 난 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레고는 조금 만지작거리다가 흥미를 잃었으며 마론 인형과 그 집은 손도 안 대서 깨끗한 상태로 양도되곤 했다. 그나마 장난감 카메라와 장난감 기차, 음악이 흐르는 오르골, 시시각각 변하는 만화경, 고양잇과 동물 인형 정도만 조금 좋아할 뿐이었다. 책을 읽거나 책 내용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에 더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주로 여자아이가 주인공인 책을 읽었다. 집 주변 놀이 친구는 다 남자아이였다. 성별을 거추장스럽게 여기면서도 여자아이라는 미지의 존재에는 흥미와 호기심을 느꼈다. 동화 속 소녀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친구를 상상했다. 되짚어보자면 나와 동일한 성별에 대한 궁금증과는 다소 달랐다. 작은 아씨들, 소공녀 세라, 빨간 머리 앤, 말괄량이 삐삐를 즐기며 여자 친구를 동경했으나 내 존재와 분리한 듯하다. 보물섬, 정글북, 톰 소여의 모험도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그들에게 어떤 호감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학교에 다니면서 꿈에 그리던 여자아이들을 만났다. 대부분 나와 좀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온통 분홍이었다. 팔랑팔랑한 치마와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신고 공주님 이야기를 했다. 그 당시 동네에서는 어떤 놀이가 유행했는데 무리에서 혼자 다른 사람을 먼저 찾아내면 이기는 것이었다. 혼자 분홍색이 없고 바지를 입었으며 운동화를 신고 인형을 가지지 않은 난 금방 그들에게 지목당했는데, 그 아이들과 비슷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친해지고 싶어서 안 맞아도 졸졸 쫓아다닐 따름이었다.
종종 공감이 어려웠다. 왜 드레스 입은 공주 인형만 그렸냐는 질문을 받은 초등학교 친구가 당연하는 듯이 전 여자니까요, 라고 대답할 때 갑작스러운 거리감을 느꼈다. 나도 주로 여자 그림을 그리긴 했으나 이상향보다는 이상형 표현에 가까웠다.
제법 세상에 동화됐던 시절, 친구들의 말에 다시금 의문이 떠올랐다. 한 친구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이고 싶다고 했다. 예쁘게 꾸밀 수 있고, 작아도 흠이 되지 않는단 이유였다. 친구는 무슨 소리냐며 역시 남자가 최고라고 했다. 돈 벌어준다며 큰소리를 칠 수 있고,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와도 괜찮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저마다 의견을 제시하며 남자가 좋다 여자가 좋다 핏대를 올리는 친구들에게 난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혹시 둘 다 아니고 싶은 사람은 없어? 친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없었다. 뭐야, 아무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살아오면서 이상하다고 느낀 일은 치우다 만 블록처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보통의 여자인 양 연기하면서 거북함을 느꼈다. 이보다 더 재미있는 건 없다는 듯 남자와 여자의 타고난 차이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유별나게 보이지 않으려고 가면을 쓰고 살았다.
우연히 알게 된 청소년 인권 사이트 성별란에서 '무성'을 발견했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기분 좋게 체크하고 가입했는데 장난도 아니고 무성은 뭐냐고 항의하는 게시판 글이 여럿이었다. 물론, 재미로 만들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더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을 텐데, 왜 당연히 둘로 나눠야 한다고 믿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