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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경제위기와 군부의 대두
2 · 26 사건(1935년 ~ 1936년)
그때 세계는
1936년 : 손기정,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1936년 : 영국 · 이집트 동맹조약
군부쿠데타 2·26 사건.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중국 대륙의 항일 운동이 거세지자 상해사변을 일으키고, 이어 만주에 일본의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또 산해관을 점령하고, 이어 열하성도 만주국의 영토라고 선언하는 등 중국에 대한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중국은 만주사변이 일본의 계획적 행동이라고 국제연맹에 제소했고, 열강도 일본의 거침없는 행보를 우려했다.
국제연맹이 만주에서 철군할 것을 요구하는 대일 권고안을 채택하자, 일본은 자리를 박차고 회의석상을 퇴장하여 곧 국제
연맹에서 탈퇴했다.
만주사변으로 인한 국민적 앙분 속에서, 일본은 국제적 고립을 향한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이는 단순히 국제 관계 악화의 차원이 아니었다.
일본은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행동을 취함으로써, 이제 자신의 힘을 능가하는 세력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아직 결정적이지는 않았다.
국제연맹 탈퇴 이후 일본 사회는 전쟁을 향한 체제로 굳어지고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 경제는 전쟁 체제로 재편되었다.
1931년 다카하시 고레키요(高橋是淸) 경제부 장관은 전쟁에 필요한 군사비를 국가 재정에서 충당하고자 했다.
일본은 팽창 재정으로 급전환했다.
군사비는 급속히 증가하여 1935년에서 1937년까지 재정 가운데 군사비 비중이 45~50%에 이를 정도였다.
이처럼 급증하는 군사비를 충당할 재원이 없었던 일본국은 공채 발행이라는 임시적 방법을 사용했다.
공채는 원래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 발행하는 것인데, 다카하시의 방법은 공채 발행의 본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일단 공개 시장을 조작하여 공채 수요를 신용 창출하고, 그것으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민간 자금이 늘어나면 공채를 시중에 파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신용 창출에 의한 은행권 증발이 악성 인플레가 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정책이 뒤따랐다.
다시 말하면, 다카하시의 공채 발행은 애초부터 가공의 자금 수요를 창출해 놓고 그것을 수습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조작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경제가 다시 파산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공채는 1935년까지 민간에서 대부분 소화할 수 있어 악성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군사비가 증가하자 군수 물자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중화학 공업이 발달했다.
무역에서도 비약적인 증진을 가져왔다.
1932년 가을부터 경제 상황이 호전되면서 일본은 영국, 미국, 독일보다도 먼저 경제 공황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만주 붐'이라 불릴 정도로 일시적이긴 하지만 재빠르게 생활의 안정감을 회복했다.
그러나 공채 발행은 미봉책이었다.
국가 권력이 경제의 전과정에 개입해 공채를 임의로 발행하여 얻은 안정은 '모래밭 위의 안정'에 불과했다.
1935년에 들어서며 시중에서 공채를 더 이상 소화할 수 없게 되자 악성 인플레이션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이는 물가 폭등
으로 이어졌다. 1935년의 지표는 군사비를 줄이지 않으면 경제가 파산할 것이라는 위험 신호를 알려 주었다.
결국 다카하시는 비생산적인 군사비를 줄여 공채를 점차 감소해야 한다는 절박한 주장을 하게 된다.
군사비를 줄인다면 지금까지 만주와 중국으로 확산되던 전쟁이 축소되는 것을 의미했다.
현재처럼 군사비를 확대한다면 경제는 절단나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한 번 일본은 기로에 서게 되었다. 다시 전쟁 정책을 재구성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것이다.
갈림길에서 전쟁으로 물줄기를 확실히 돌리게 한 것은 과격파 청년 장교들의 필사적인 마지막 시도였던 1936년 2월 26일의 군사 봉기였다.
이날 도쿄의 제1사단 병력 가운데 1,400여 명이 거병하여 정부의 핵심 지구를 장악했다.
미리 계획된 암살단은 군사비를 줄이고자 하던 다카하시 장관을 살해하고, 이어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살해를 계획했다. 반란군은 "천황을 둘러싸고 있는 간신들을 제거하여 국가 개혁의 길을 닦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천황은 측근 중신이 살해당하고 군기가 파탄에 이르자 놀라며 반란군의 진압을 강력히 명령했다.
게다가 정 · 재계도 쿠데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국민도 군대의 반란에 대해 공감하지 않았다.
"천황이 반대하고 있고 그대들의 부모형제가 국가의 적이 되었다고 모두 울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원대로
복귀하라"는 전단이 살포되고 방송되었다.
장교들은 열광적인 천황주의자였기 때문에, 반란군으로 취급되자 전의를 잃고 자살 또는 투항했다.
2 · 26 사건은 1,400여 병력을 동원했는데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과격파 청년 장교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기존의 민간 정치가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총칼 없는 민간 지도자가 군부 쿠데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민간 지도자 스스로도 정국을 이끌어 갈 자신감을 상실했다. 2 · 26 사건으로 정당의 영향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반면 군부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진압과 계엄령의 시행을 배경으로 정치에 대한 발언권을 공공연히 요구했다.
육해군 대신 현역제가 부활되었는데, 내각은 반드시 현역을 군부대신으로 삼아야 한다는 제도이다.
군부대신 현역제의 부활로 군부는 내각의 사활권을 쥐게 되었다.
군부는 법적 권한의 범위를 넘어 정치 담당자로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35, 1936년이라는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일본은 전쟁 정책을 수정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전쟁 상태를 종식시킬 수 없었다.
2 · 26 사건 이후 일본은 전면적인 군사 동원 경제로 가는 본격적인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더 확장하면 파산한다"라는 다카하시 장관의 절박한 외침을 외면하고 군사비 확대를 결정한 일본에게, 미래를 푸는
열쇠는 전쟁뿐이었다. 적은 비용으로 재빨리 점령하여, 정복한 땅에서 최대로 많은 재원을 탈취하는 길이었다.
1936년 8월에는 다음과 같은 전쟁에 대한 구상이 국책으로 결정됐다.
동아시아 대륙에서 제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동시에 남방 해양으로 발전을 계획한다. ······ 북방 소련의 위협을 제거하고
미국과 영국에 대비한다.
이 국책대로 남쪽으로 진출하려면, 이미 남쪽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히 미국과 영국과의 전쟁을 대비해야만 했다.
국제적 고립을 면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반공을 구실로 독일과 '일독방공협정'을 맺었다. 그리고 중국 북부를 식민지화
하면서 대규모의 군비 확장 계획을 추진했다. 이런 계획은 일본의 힘으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계획이었다.
82. 단기전으로 계획된 전쟁
중일전쟁(1937년)
그때 세계는
1938년 : 독일, 오스트리아 합방 선언
1939년 : 독 · 소 불가침조약 체결
중일전쟁.
군부가 전면적으로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전쟁을 위한 군비 확장 정책을 착착 진행하였다.
그리고 중국과의 전면전에 돌입하게 된다.
1937년 7월 7일 노구교(蘆溝橋)에서 중국군과 일본군 사이에 작은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 본영은 이 기회에 중국 화북의
현안을 무력으로 단숨에 해결하자는 기운이 팽배했다.
화북의 현안이란 무엇인가?
일본은 만주사변으로 만주에 괴뢰 정권을 세우고 나서, 1935년 중국 북부에 친일 괴뢰들을 동원하여 분리 정권을 수립했다. 다음 해에는 화북 5개 성을 일본의 세력 하에 둔다는 방침을 결정했다.
만주와 화북 지방은 미래에 소련과의 전쟁에 대비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풍부한 자원 공급지로도 중요했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항하여 항일 구국 운동이 고조되었다.
중국의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던 정책을 바꾸어,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기로 했다. 중국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제국주의 일본의 앞을 크게 가로막아 선 것이다.
이러한 정세로, 일본은 화북에서의 위치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일본 군부는 노구교에서 일어난 작은 충돌 사건을 계기로 이것을 단숨에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라디오와 신문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국민의 전쟁으로 내모는 기사를 채웠다.
일본은 중대 결의로 단호하게 대군을 파견하면 중국이 쉽게 굴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예상은 처음에는 맞아떨어졌다.
중국군에 비해 잘 훈련되고 잘 무장된 일본군이 남쪽으로 진격함에 따라 전쟁은 급속히 확대되었다.
노구교 사건 이후 반년 만에 별다른 저항 없이 중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되었다.
승리에 의기양양해진 지휘관들은 여섯 달 안으로 장제스를 패배시킬 수 있다고까지 장담했다.
계속되는 승전보에 도취한 일본 내각은 전투마다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군 당국자의 말을 믿고 새로운 작전을 승인했다.
1938년 1월 초기의 군사적 승리에 고무되어 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장제스를 무력으로 굴복
시킬 것을 결정했다.
1938년 3월에는 국가총동원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국가총동원법은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어떤 조치를 즉각 취할 수 있는 법이다.
이 법안이 의회에서 심의가 이루어질 때의 일이다.
육군성에서 온 한 군인이 법안을 설명하는 도중에 민정당의 어느 의원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법안을 설명하던 군인은 "시끄럽다!"고 고함쳤고, 이에 대해 의회는 한 마디의 항의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총력전에 대비한 국가 총동원 체제의 구축, 이것은 바로 군부가 오랫동안 애써서 준비해온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세계의 모든 국가 위에 군림하는 최강의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방안이었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시 체제가 구축되고 초반에 승승장구하는 듯했지만, 중국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전 민중의 항일 운동이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공산당 토벌에만 전념하던 방책을 이미 바꾸었다. 공
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일치하여 항일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중일전쟁 직후 1937년 9월, 국공합작이 성립되었다.
전투가 시작된 지 6개월 만인 1937년 12월, 수도 난징이 함락되면서 30만 명에 달하는 중국 민간인 · 패잔병 · 포로 등이
일본군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대학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난징 대학살로 인해 중국 민중은 더욱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수도를 빼앗긴 중국 정부는 무한으로 옮겨 항전을 이어갔다. 다음 해 10월 무한도 점령당하자, 더 오지인 중경(重慶)으로 후퇴하여 계속 항전했다.
일본군은 도시와 철도 노선을 공격하여 손쉽게 그것을 점령할 수 있었다.
난징 대학살
그렇지만 백만이라는 일본군의 숫자도, 철저한 항전 결의로 단결한 6억 중국 민중, 그리고 중국 대륙의 광활함에 비추어
볼 때 초라한 규모였다. 일본군은 광대한 지면 위에 단지 몇몇 점과 선을 확보한 것에 불과했다.
애초 중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은 치밀한 작전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단기전으로 쉽게 끝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중국에 전면전을 도발했다.
그러나 중국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은 장기간에 걸친 소모전으로 변해버렸다.
장기전의 양상을 띰에 따라, 풍부한 자원과 시장을 획득하고 대륙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경제 위기의 돌파구로 삼으
려던 원래의 목표는 산산이 부서졌다.
83. 막다른 절벽의 선택
태평양전쟁(1941년)
그때 세계는
1940년 : 한국, 창씨개명 실시.; 임정, 한국광복군 창설
1940년 : 프랑스, 파리 함락

가미가제
단기전으로 쉽게 끝낼 수 있다던 예상이 깨지면서, 중국과의 전쟁은 장기전 양상을 띠며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게다가 대외적으로 미국과 영국의 압력이 죄여들고 있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을 명백히 했다.
미국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군대를 철수하여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1939년 미국은 미일통상항해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했다.
다음 해에는 철강의 수출을 금지하고, 그 다음 해에는 영국, 네덜란드와 함께 석유의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철강, 석유, 기계류 등 전략 물자를 미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일본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특히 일본의 석유 수입량의 90퍼센트가 끊기게 되었다.
1939년 여름이 지나면서 경제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다.
기초 물자가 심각하게 결핍되었다. 농업 생산이 감소하여 식량 문제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본토의 부족한 식량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 대만과 조선의 쌀을 공출했다. 이에 식민지의 식량 위기가 심각해졌고,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배에 대한 식민지의 반항이 거세져 갔다.
앞을 가로막은 절벽에 맞닥뜨린 것이다.
중국과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고 본토의 경제는 파산직전인 데다가, 석유와 철 등 근대 전쟁의 필수
적인 기초물자 수입마저 끊어졌다. 미국과는 대립이 격화되어가고, 이 대립의 끝이 무엇인지 불투명했다.
1939년 말까지는 만주사변 이후 계속된 침략 정책을 전환하여 중국에서의 불안한 위치를 벗어던질 마지막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중국 대륙에서 군대를 철수시키든가, 또는 장제스 정부와의 협상 조건을 완화하든가 하는 방법이었다.
대외적 위기 속에서도 일본은 전쟁을 종식시킬 자신이 없었다.
중일전쟁의 실패를 인정하고 전쟁 정책을 전환할 경우, 일본 본토에 공산 혁명이 일어날 수도 있다.
군부의 새로운 쿠데타도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을 대단히 두려워했다.
국민들은 정보를 차단당한 채 승전보만 들었다.
그 때문에 전쟁 정책을 중단할 때, 기만당한 국민의 분노가 공산 혁명과 쿠데타와 결합되어 어떻게 분출할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전쟁 정책의 전환은 10여 년간 엄청난 인력과 재원을 쏟아부은 스스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일본은 중일전쟁 때보다도 한참 멀리 와 있었고, 되돌리기에는 그때보다 더욱 어려웠다.
궁지에 몰린 일본에게 눈이 번쩍 뜨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1940년 6월, 독일군이 프랑스와 네덜란드를 함락시키는 등 승승장구한 것이다.
당시 지배 계급은 독일군의 승리에 편승하고자 했다.
유럽이 독일군에게 장악되면서 동남아시아의 유럽 식민지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힘의 공백을 일본은 노렸다.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마련하면 전쟁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고무, 주석, 석유 등을 장악하여 중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유럽에서 나치의 승승장구는 일본의 군부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이 최강대국 미국과의 대립을 자초하는 길임을 내다보지 못했다.
일본은 북부차이나로 진격한 바로 며칠 뒤인 1940년 9월, 독일 및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군사동맹을 베를린에서 조인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미국은 계속 일본에게 중국에서 철수할 것과 삼국동맹에서 탈퇴할 것을 종용했다.
결국 일본은 1941년 9월 6일, 전쟁지도자최고회의에서 미국과의 전쟁, 태평양전쟁을 결정했다.
이 회의석상에서 히로히토(裕仁) 천황은 육군 참모총장 스기야마(杉山) 대장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언제쯤 끝낼 수 있겠
느냐고 물었다. 스기야마는 남태평양에서의 작전은 3개월 이내에 끝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스기야마의 말처럼 군부와 정부 지도자들은 단기전으로 끝낼 경우에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일본 해군 수뇌부의 대부분은 장기전으로 갈 경우 태평양전쟁에 대해 승리의 확신이 없었다.
그 외의 지배층도 패전의 위험성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만약 장기전이 될 경우, '중국이 붕괴되고 영국이 독일에게 굴복하면 미국이 전쟁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지극히 낮은
가능성에 기대를 걸었다.
사실 미국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승산도 없는 노름판에 비유될 정도로 무모한 짓이었다.
일본은 미국에 비해 자연 자원과 공업 생산력에 있어서 마치 어린애와 어른에 비유될 정도로 비교도 되지 않는다.
결코 이긴다는 전망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일본의 지배층은 승산 없는 전쟁을 중지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철군하여 10여 년 전 만주사변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전론의 선두에 선 도조(東條) 수상은 전쟁에 임하면서 다음처럼 결의에 차서 말한다.
"인간은 일생에 한 번은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일도 필요하다."
태평양전쟁의 결단은 합리적인 판단을 초월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태평양전쟁은 만주사변부터 시작된 비합리적인 결단이 방대하게 퇴적하여 이루어진 결과물이다.
패전 이후 미국은, 일본이 세계 최강국에 전쟁을 걸면서 그렇게도 부실한 계획과 조직의 허약성 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미국인들은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을 '열광주의와 과대망상증에 걸린 광인들, 돈키호테의 선택'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선택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국체의 절대적인 우월성을 되뇌이며, 일본 지배층은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절대신 천황은 전쟁의 절체절명에서 두려움을 떨치고 승리를 꿈꾸게 하는 환상이었다.
일본인들은 국체의 절대성을 갖고 모든 것을 해석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억압도 항상 황도(皇道, 천황의 도)의 선포이며 자비스러운 행위라고 한다.
그들은 '한 알의 탄환'에도 황도가 들어 있고, 총검의 끝에도 황도가 타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구체적인 행위의 구석구석까지, 심지어 살육 행위까지도 국체에 따른 의로운 행위로 간주했다.
중일전쟁 당시 파견군 총사령관 마츠이 이와네(松井石根) 대장은 중국으로 떠나는 송별회 자리에서 "나 자신은 전쟁하러
간다기보다 형제를 달랠 계획으로 간다"라고 인사말을 했다.
그런 다음의 행위가 난징 대학살이었다.
30만 중국인을 장작더미 쌓듯이 차곡차곡 쌓아 살육한 난징 대학살이 '형제에 대한 사랑'으로 표현되고 있다.
또 미국과의 전쟁을 '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
대동아전쟁이란 서구 제국주의자의 오만과 인종적 우월 의식을 분쇄하여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고 세계의 신질서 건설을 목적으로 하는 전쟁을 뜻한다고 선언했다. 천황의 도를 세계에 선포하는 성전이라는 논리였다.
국체는 치명적인 허구 사상인데도, 일본 사회에서 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존재했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집단은 철옹성 같이 하나가 되어 파멸의 전쟁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극단적 전쟁의 위기 앞에서, 살육을 아름다움이며 진리라고 말하는 치명적 허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고도의 동일성으로
밀폐된 하나의 종교 집단이 되었다.
도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국에 대한 승리는 일본 군대에 최고의 영광이 될 것이며,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보다도 훨씬 더 빛나는 업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 속 일본의 역량을 한층 고양시키게 될 것이며 후손들에게 동아시아 통치를 보장해주며 시장을
확보해 줄 것이다."
일본의 천황, 군부, 재벌, 그리고 국민은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당시처럼 새로운 민족적 자신감과 국가
목표에 대한 사명감의 열기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지극히 불리한 현실을 외면하고, 일본 사회는 만세일계의 천황이 다스리는 일본국의 우월성이라는 집단 환상 속으로
몰려갔다.
84. 전쟁의 추이
옥쇄와 가미카제 특공대(1941년 ~ 1945년)
그때 세계는
1943년 : 테헤란 회담
1944년 : 한국, 여운형, 건국동맹 조직
태평양전쟁 전개상황.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군은 미국 하와이 주 오아후 섬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는 데에 성공하고, 항공모함으로
되돌아가면서 도쿄의 히로히토와 해군 본부에 성공을 알리는 암호 '도라! 도라! 도라!(トラ!トラ!トラ!)'를 계속 타전했다.
일본인의 용맹성과 미국의 피해 상황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담긴 진주만 공격 소식이 전해지자 도쿄는 축제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모든 사람들은 기습 공격의 성공을 1905년 러시아에게 거둔 승리와 비교했다.
중국과의 전쟁, 미국의 압력으로부터 받았던 좌절감과 자존심의 상처는 단번에 회복되었다.
국체에 대한 신비에 가까운 신념은 더욱 강화되어 라디오에서 크게 울려나오는 승전 소식에 이 전쟁이 의로운 것임을
확신했다.
1942년 5월까지 초기 전투에서 일본군은 미리 준비된 계획에 의해 허술한 미국, 영국, 네덜란드의 식민지 수비군을 일소
하고, 홍콩, 말레이시아 반도, 싱가포르, 미얀마,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필리핀 제도 등을 점령해 나갔다.
점령 지역이 대부분 해양 지역이긴 했지만, 일본은 세계의 1/7 정도를 통치하게 되었다.
전쟁을 시작한 지 1년간 히로히토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천황은 어린 아이처럼 열을 올리며, "전쟁의 열매가 너무나 빨리 우리의 입 속으로 들어오고 있소.
그러나 나의 선조들은 아직도 더 많은 것을 나에게 요구하고 계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부터 판세가 달라졌다. 해전에서 일본은 가장 우수한 항공모함 4척을 잃고, 태평양상의
제해 · 제공권이 무너지면서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군사적 주도권을 찾은 미국은 반격을 개시하여, 일본이 구축한 방어선 가운데 외곽의 약한 지점을 골라 공략했다.
1942, 1943년에 걸쳐 미국의 상륙 부대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섬들을 점령해 갔다.
다른 쪽에서는 뉴기니로부터 필리핀을 향해 위쪽으로 나아갔다.
1944년 6월 사이판을 둘러싼 공방전은 혈전에 혈전을 거듭했다. 사이판이 함락되면 일본 본토에 대한 직접 공습이 가능해
지기 때문에 일본군은 사력을 다해 방어했다.
바다와 육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결국 사이판은 미군에게 함락되었다.
10월에는 필리핀에, 1945년 2월에는 유황 섬에, 4월에는 오키나와에 각각 미군이 상륙했다.
더구나 미국은 가공스럽고 혁신적인 신무기,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데에 성공했다.
일본도 독일의 기술을 빌어 원자폭탄을 제조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일본 과학계는 원자폭탄 계획을 추진하면서 1945년에는 두 개의 원자폭탄 생산을 목표로 정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원자폭탄을 만들어 결정적으로 불리한 이 전쟁을 끝내고자 했다.
그러나 원자폭탄 경쟁에서 미국이 승리했다. 일본의 패전은 시간 문제였다.
태평양전쟁에서 패배만 거듭하던 1944년에 이르러 도시에서의 생활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유흥업소는 폐쇄되고 창녀들까지 공장 노동자로 보내졌으며, 식량배급은 줄어들어 영양실조로 인한 결핵, 곱사병, 눈병이 크게 늘었다. 미군기의 공습이 심해지면서 도시 생활은 더욱 처참해지고, 지붕을 덮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여길
정도로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당시 도시에 살고 있던 1천만 명 이상이 공습을 피해 시골의 친척이나 친구 집으로 피난을 갔다.
전국 어느 곳에서든 고통의 평준화가 이루어졌다. 고통 속에서 엄한 통제와 철저한 정보 조작, 그리고 초국가주의적인
교육에 의하여 국민의 불만이 억압당했으며, 전쟁에 대한 혐오도 늘어갔다.
그러나 공개적인 투쟁이나 폭동, 반전 운동으로 폭발하지는 않았으며, 독일의 히틀러 암살 기도와 같은 반지하 활동도
나타나지 않았다.
파멸의 늪 속으로 하루하루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도 일본 사회는 여전히 하나로 묶여 있었다.
힘들고 지쳐가는 전쟁 속에서, 천황은 그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수용하도록 했다.
한 언론인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이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일본 신문에는 믿을 만한 기사라고는 하나도 없었는데도 우리는 스스로 믿어보려고 했고 죽을 각오
까지도 되어 있었다. 사업이 망할 것을 눈앞에 둔 부모가 괴로우면서도 거짓말을 할 때, 누군들 자식에게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겠는가? 자식은 그저 운명에 따라 부모와 함께 말없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 말은 국가를 '사업이 망하려 하는 부모'로 여기며 국민은 '국가라는 부모'를 따라 말없이 죽으려 하고 있음을 뜻한다.
위기 앞에서 일본인들은 천황의 국가를 운명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본토의 일본인들이 고통을 참아가면서 운명에 따라 국가와 함께 말없이 죽어가려 했듯이, 미국과 격렬한 전투에서 패배한 각 싸움터의 일본인들은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는 것보다 규율을 지키고 옥쇄(玉碎)의 길을 택했다.
대표적으로 1944년 혈전의 사이판 전투에서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완전히 무너지며 전멸 상태가 되었을 때이다.
전투를 지휘한 나구모 대장이 사이판 방어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동굴 입구에 앉아 스스로 할복했다.
지시를 받은 대로 나구모의 뒤에 서 있던 부하는 자기 대장의 뒷머리를 총으로 쏘아 마지막 숨을 거두게 했다.
살아남은 일본군은 미 해병대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수류탄을 몸에 감고 적진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종군 기자로서 사이판을 취재한 로봇 쉐로드는 다음과 같이 그 옥쇄를 기록했다.
일본 방어군은 거의 싸우다 전멸했다. 가장 무서운 것은, 미군 소총수들이 당황하여 바라만보고 있는 가운데, 수백 명의
일본 민간인들이 사이판 북단의 절벽에서 그들의 자식과 함께 투신한 일이었다.
북태평양 알류샨 열도 가운데 앗츠 섬 수비대는 1943년 5월 29일 미군의 상륙 부대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 2,500명 가운데
29명만 포로로 남았다.
이어 남태평양의 마킨 섬, 타라와 섬, 길버트 제도의 섬들, 유화 섬 등도 모두 옥쇄의 본보기가 되는 곳이다.
옥쇄를 통해 천황에 대한 마지막 충성을 표현했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는 '폐하의 신민으로서 국체를 지키기 위해 옥쇄를 각오한다'는 사상에 의해 만들어졌다.
자살 공격을 위한 훈련은 자살에 맞게 건조된 비행기를 사용했다.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원은 지원자 가운데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해군이든 육군이든 그곳에 입대한 청년들은 각 부대의 기류에 억눌려 거의 예외 없이 지원하게 되었다.
일본 신문들은 가미카제 특공대를 보도하면서 그들의 출발 장면을 찍어서 알렸다.
또 이 젊은이들의 용맹성을 편지나 유언, 또는 노래를 실어 전했다.
뉴스나 영화도 이 청년들의 영웅 같은 출발 모습을 만들어 알렸다.
공격에 참가한 수많은 청년은 자신의 행동에서 가치를 확신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가마카제 특공대원이 국가신으로 봉해져 야스쿠니 신사에 묻힐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는 일본 신도와 밀접히 관련되는 점이다. 일본의 신앙, 신도에서는 사후 신이 될 때 상하구별이 있다.
최고신은 천황이 제사를 받드는 국가신이되며, 보통 평민은 국가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천황 폐하를 위해' 명예롭게 전사한 경우에는 국가신으로 올려져 야스쿠니 신사에 묻힐 수 있게 된다.
사후 이생의 처지에 따라 신의 상하차별이 생기는 것은 일본의 오랜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허구임에 분명하다.
그렇지만 죽음을 앞둔 인간에게 이것은 위로일 수 있다.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출격했다. 이처럼 천황과 신도는 일본인의 사생관(死生觀)까지 지배할 만큼 전쟁에서의 역할은 크고 넓었다.
85. 항복과 히로히토 천황
일본의 패망(1945년)
그때 세계는
1945년 : 맥아더, 조선분할점령책 발표
1945년 : 김일성, 소련군과 함께 입북
1943년 9월에 이탈리아가 항복하고 1945년 5월에는 독일도 무조건 항복하여 유럽의 전화는 종결되었다.
삼국동맹에 참가한 나라로는 일본만 남았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전후 처리와 일본에 대한 대책이 토의되면서, 일본의 지배층 내부에서 전쟁 종결을
꾀하는 기운이 흐르기 시작했다.
신중한 강화파 관료들이 나타났다.
그렇지만 육군 측은 명백히 불리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1945년 4월 오키나와가 마침내 미군의 손에 들어가자 명예로운 평화를 주장하던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가 총리가
되었다.
전쟁의 종결에 임한 일본 지배층은 강화파건 강경파건 간에 핵심은 '천황제(국체)를 유지할 수 있느냐'였다.
일본 지배층은 천황제가 승전국에 의해 폐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일본의 지배층은 패전 후 '천황의 권위를 이용한 국민 통합'이 아닌 다른 방식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1945년 7월 26일 미국, 중국, 영국, 소련이 참여한 포츠담 선언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하든지 아니면 전면적인 멸망에
직면하든지 양자택일"을 요구했다.
또 "일본국민을 기만하고 오도하여 세계 정복에 종사케 한 사람들의 권위와 영향은 영원히 제거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트루먼 미 대통령은 겨우 두 발에 불과하지만 원자탄을 손에 쥐고 있었고, 이 가공할 신무기는 일본을 항복시킬 결정적인
힘이라 생각했다.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자, 강화파들도 '무조건 항복'이란 항목이 국체 유지를 분명히 하지 않아 위축되었다.
여전히 육군 측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이에 스즈키 수상은 포츠담 선언을 묵살하고 승리할 때까지 싸운다고 일본 국민에게 선언했다.
그러자 미국은 가공할 미지의 신무기 원자폭탄을 전폭기에 싣고,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한 발, 9일 나가사키
(長崎)에 한 발을 투하했다. 여태까지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가공할 무기에 의해 두 도시는 한 순간에 폐허로 변했다.
히로시마의 원폭돔.
2차대전 당시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파괴된 건물. 폐허가 된 상태로 철거와 보존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보존하기로 결정되어, 원폭의 피해를 상징하는 건물이 되었다. 1996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9일 새벽 소련 대군은 만주로 물밀듯이 진격했다.
그때까지 소련의 참전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던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8월 9일 한밤중, 도쿄의 작은 방공호 안에서 최고전쟁지도자회의가 열렸다.
방공호 속 회의실은 무덥고 습한 8월의 열기로 숨이 막혔다.
천황이 회의실로 들어와 상석의 등받이 의자에 앉을 때까지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스즈키 수상은 참석자들에게 포츠담 선언을 낭독하도록 내각 간사장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토고 외상에게 의견을 물었다.
토고는 천황의 신분과 왕위가 존중된다는 보장을 얻으려면 더 이상 지체 없이 선언을 수락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군부는 엄청난 재앙에도 불구하고 반대를 굽히지 않았다.
육군상 아나미 장군은 펄쩍 뛰면서 국민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메즈 장군은 아나미의 의견에 찬성하면서, 일본은 아직 적보다 우월한 상태이며 지금 만약 무조건 항복을 한다면 장렬
하게 전사한 일본인의 명예를 더럽힐 뿐이라고 말했다.
해군 참모총장 토야다 대장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1명의 참석자 전원에게 의견 개진의 기회가 주어졌다.
8월 10일 금요일 새벽 2시, 천황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소. ······ 분명히 국민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없고, 모든 해안을 방어할 수 있는 능력도 의심스럽소.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 할 시간이 닥쳐왔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상이 약술한 기초 위에서 연합군의 선언을 수락하자는 제안을 재가하오."
히로히토 천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공호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천황이 퇴장한 후 침묵 속에서 참석자들은 각자 흰 손수건을 꺼내어 이마에 맺힌 땀과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스즈키 수상이 말문을 열었다. "폐하의 결정은 또한 이번 회의의 결정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황의 결단에 의해 외무대신 안, 즉 천황 지위의 보장만을 조건으로 항복할 것을 결정한 것이다.
천황제 유지를 조건으로 한 항복 안을 연합국 측에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8월 14일 다시 방공호에서 최고 회의가 열렸다. 군인들은 항복에 끝까지 반대하며 조국을 지키다가 죽기를 원했다. 모든 의견이 제시된 후, 히로히토는 "전쟁의 계속은
파괴만을 지속시키는 결과가 된다는 소신을 갖게 되었소"라는 말로,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다음 날 8월 15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방송을 타고 흘렀다.
항복 결정이 번복될 수 없음을 안 육군상 아나미 고레치카(阿南惟幾)는 할복으로써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
그리고 수많은 일본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중에는 가미카제 특공대를 조직한 오니시(大西) 해군 중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이 같은 명령을 내린 책임자로서 할복자살을 했던 것이다.
천황은 10명의 어린 군인들이 자신의 왕실에서 할복하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86. 전쟁과 일본공산당의 전향
사노 마나부의 전향 발표(1933년 ~ 1945년)
그때 세계는
1945년 : 독일, 히틀러 자살, 항복
1945년 : 얄타 회담
공산당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사노 마나부는 전향의사를 밝혔다.
전쟁 이전 일본공산당은 일본 사회에서 천황제를 부정하던 유일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일본공산당은 검거된 당원의 99%가 전향했고, 공산주의 운동은 몰락했다.
더구나 일본공산당의 전향은 단순히 공산주의 신념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전쟁과 천황제를 적극 지지하는 모습을 나타
냈다. 이러한 양상은 일본의 사회 운동 전반에서 나타났고, 전전 일본의 저항 운동은 파산에 가까울 만큼 몰락했다.
이러한 저항의 붕괴 과정은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탄압이 극심하다고 해서 99%에 이르는 거의 모두가
전향하지는 않는다. 도대체 천황제(국체)가 일본인에게 무엇이기에 이런 결과를 가져왔는가?
전쟁이라는 위기의 시기에 일본의 전통, 신도와 천황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존재였는가?
최고의 지식인 사노가 어째서 공산주의를 버리고 전쟁과 천황을 지지해 갔는가? 사노의 전향은 일본을 이해하는 열쇳
말이다.
1933년 감옥 안의 사노 마나부는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政親)와 함께 전향 성명서를 발표했다.
사노는 공산당 내에서 최고의 이론가이며 국제 공산당 조직 집행위원을 역임할 만큼 공산당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나베야마는 노동 운동가 출신으로 노동자 사이에서 절대적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었다.
사노는 1933년 전향하여 1943년 출옥할 때까지 그의 전향 논리와 심정이 심화되고 성숙되어 갔다.
전향하기 이전 사노의 심정은 공산당 확대를 위해 죽으리라는 신념이 있었다.
사형에 처해진다 해도 공산당 확대를 위해서는 기꺼이 죽겠다고 투지를 불태우던 그가 무엇 때문에 공산당을 버리고
전향했을까?
사노는 이미 무기 징역을 언도받았기 때문에 전향 의지를 표명할 경우 감형 조치를 생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전향 성명 이후 사노는 무기 징역에서 15년 형으로 감형 조치를 받았다.
사노의 전향이 이러한 감형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사노 역시 전향의 동기에 대해 '영원히 회색의 감옥 생활에서 보낼 것이라는 두려움, 인간적 생에 대한 본능적 동경'의
여부를 자문한다.
사노가 전향해 가는 데에 생명의 문제, 죽음의 문제는 기본적인 전제다.
생에 대한 미련은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사노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그의 전향을 모두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감옥 안의 사노는 대공황으로 심화된 사회적 모순이 대중을 혁명으로 인도할 것이라 기대했다. 1
931년, 사노는 검거된 공산당원들과 재판 석상에서 공판 투쟁을 주도했다.
공판 투쟁은 재판 과정을 하나의 혁명 도구로 여기고, 재판정을 공산당 선전 투쟁의 장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사노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전력투구한 공판 투쟁은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오히려 대중은 군부 등 지배 세력이 일으킨 만주 침략에 열광했다.
사노는 대중이 공산당을 버리고 새로운 국민주의적 운동으로 급속히 경도되어 간다고 느꼈다.
대중으로부터의 고독은 감옥 생활이 주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자신이 목숨을 바쳐 추구해 온 목표가 현실 안에서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자각은 사노로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일본공산당이 대중으로부터 철저히 고립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일까?
사노는 그것이 코민테른이 결정하고 일본공산당이 주장한 '천황제 폐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다수 인민은 천황 숭배에 충실하며 일본의 전쟁 목적을 지지하고 있었다.
만주사변 이후 대대적인 천황 숭배를 통해 나타나는 국민적 일체감은 사노에게 격렬한 패배감을 안겨주었다.
천황은 단순히 근대 메이지 정부가 조작해 만든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천황은 거대하고 강력한 일본의 전통과 맞닿아 있어서 대중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살아있는 신화이다.
사노는 강인한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 천황의 실체를 비로소 감지하고, 목격한 것이다.
공산당의 천황제 폐지 주장은 "민족의 머리를 절단하고 민족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히 실패한 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사노는 비판하게 된다.
더 나아가 사노는 일본이 우수한 민족일 수 있는 근본에 천황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했다.
천황제는 강고한 민족적 통일을 표현하는 총체적 지점임을 거론했다.
사노 마나부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사명감에 넘치고 있었다.
사노는 중일전쟁을 신성한 전쟁의 시작이라 말하며 이것은 거대한 민족적 사업으로, 국민의 가슴에 큰 희망과 큰 기대가
넘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한편 1940년 봄부터 새로운 전쟁의 위기가 도래하자, 그는 자신에 대한 불만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신성한 전쟁 앞에 다시금 자기 성찰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는 "조국은 총력을 기울여 성전을 하고 있는데 나는 감옥 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영광스러운 일본인의 한 사람, 너의
모습이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스스로를 질타하기도 한다.
전쟁의 위기 속에서 사노는 "마음의 웅성거림, 막연한 성냄과 불안이 엄습하여 지독히 내성적으로 되었다"고 고백한다.
사노가 경험한 전향 과정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무한한 적막감 때문에 통곡하면서 옛날의 자신을 잔혹할 만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철저함, 그리고 자기 부정의 과정을 겪었다.
그래서 전향은 정신적인 지옥과 죽음과 같은 고통을 통과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어려운 과정이기 때문에 전향이란 '천황에 귀일(歸一)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밑바닥에서부터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1943년 출옥하기 3, 4년 전부터였다고 말한다.
사노에게 전향의 본질은 천황의 적자라는 국민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을 천황에 일치시킨 이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천황의 적자라는 말에는 진솔한, 강한 즐거움에 빠진 절대 신앙, 절대 순종이라는 국민감정이 넘치고 있다.
87. 일본땅의 조선인, 재일동포
폐쇄된 사회에 피어난 민족의 꽃(1910년 ~ 1945년)
그때 세계는
1946년 : 파리강화회의 개최
1946년 : 필리핀 독립
재일조선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와 그 궤를 같이하면서 출발했고 형성되었다.
식민지 한반도에서 토지조사사업(1910), 산미증식계획(1920)으로 일제의 토지 · 식량 수탈이 본격화되자 많은 농민이
토지를 잃고 급속히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유랑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만주로, 일본으로 새로운 터전을 찾아 건너가게 되었다.
일본으로 향한 조선인 도항자는 초기에 당연히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창 일할 나이인 10대에서 40대까지의 장정들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 정책으로 생업을 빼앗기자 가족들을 고향에 남겨
두고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 땅에 건너갔다.
재일조선인의 숫자는 1925년에 13만 명이었으나, 1930년대에 들어 조선에 남았던 가족을 불러들여 정착하는 사람이 속속
생겨 3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이 결정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시기는 강제로 노동자를 징용하기 시작한 1940년대부터였다.
즉 1940년대에는 150만 명의 노동자가 강제 징용되어, 1945년 8월에는 재일조선인의 숫자가 240만 명으로까지 급속히
불어났다. 이 숫자는 당시 조선 전체 인구의 1할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인이 기피하는 위험하고 불결한 일을 맡아 토목 노동자, 잡역부 및 일용 노동자, 탄광 노동자 등
밑바닥 생활을 영위했다.
임금은 모든 직종에서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밖에 받지 못했고, 빈민굴에 사는 일본의 최하 빈민층보다 더 열악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도 조선인들은 가능한 한 악착같이 저축하고, 고국에 남은 가족에게 돈을 송금했다. 열악한 영양 상태하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은 장시간의 노동, 위험한 작업 환경 등으로 늘 산업 재해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
또한 곳곳에 민족 차별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충돌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1910년 야마나시(山梨) 현에서는 400명의 노동자가 충돌하여 조선인 2명, 일본인 2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922년 니이가타
(新潟) 현에서는 강가에 버려진 한 조선인 노동자의 시체가 발견되기도 했다. 당
시 분쟁을 조사한 한 자료를 보면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키가 큰 것이 건방지다고 느꼈고, 게다가 자존심까지 있는 조선인은 일본인의 신경을 거슬리는 얄미운 존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6년 미에(三重) 현 학살사건은 일본 주민이 조선인 노동자 합숙소를 집단으로 습격하여 조선인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들이 조선인을 습격한 이유는 '방약무인하다'는 것이었다.
1923년 관동(關東) 대지진 때, "조선인이 흉기를 들고 방화 · 약탈하고, 우물에 독을 넣으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각지에
유포되면서, 거리의 자경단에 의해 조선인 6,000여 명이 살해되었다.
이 유언비어는 경찰과 군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작 · 유포된 것이다.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그 저항은 강력했다.
초기에는 조선인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연구 서클을 만들고 사상 단체를 결성했으며, 점차 노동자 중심의 조직을 만들어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조선인 노동자는 일본인보다 해고의 부담이 훨씬 컸음에도 조직률이 일본 노동자보다 훨씬 높았다.
일본 당국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메이데이(May Day, 매년 5월 1일에 행하여지는 세계노동절)나 각종 반제 시위운동 현장
에서 조선인 노동자는 선두에 서서 경관의 포위망을 뚫고 나아갔다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의 주제는 '민족'이었다.
이는 일본인 노동 운동이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고, 식민지 체제하의 국내 운동조차 주된 투쟁의 목표는 경제 문제였던
것과 비교된다.
조선인의 노동 운동은 1945년까지 지속되었다. 일본의 노동 운동이 1930년대 중반부터 급속히 줄어들면서 1940년대 멸절
되어 가는 중에, 조선인들이 일본노동 운동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 마을은 1920년대 전후 거주자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오사카, 시모노세키 등 조선인이 거주하는 일본 각지의 주요
도시에 만들어졌다.
일본인은 조선인에게 집이나 방을 빌려주지 않았고, 조선인은 임금이 매우 열악하여 집을 빌릴 수도 없었다.
강제 퇴거 등에 항의하는 주택 분쟁은 매우 많았다.
일본 당국은 조선인이 집을 빌릴 수 없는 이유를 '집세 체납이 많고, 싸움을 잘하며 소란스럽고, 집을 훼손하는 등 임대인
으로서의 악질적 요소 때문'으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1932년의 조사 자료를 보면, 집세를 체납하는 비율이 조선인은 47.7%인데 비해 일본인은 54%로 도리어 일본인이
더 높았다.
일본인 집주인은 집세 체납이 발생하면, 일본인에게는 부드럽게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만, 조선인임이 드러나면 태도가
돌변하여 혹시 도둑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함부로, 그리고 지나치게 다루었다.
조선인은 하는 수 없이 하천 제방, 국유지 등 일본인이 살 수 없는 곳에 움집이나 가건물을 짓고 살아야 했다.
한 집에 20~30명씩 모여 사는 경우가 흔했으며, 적게는 40명, 많게는 1,000명이 넘게 모여 한 마을을 형성했다.
그곳은 일본인의 눈으로 보면 가난하고 불결한,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다.
재일조선인 가운데 경상남북도, 전라남도, 제주도 출신이 많았다.
그들은 부산에서 관부연락선을 타거나, 오사카와 제주도를 잇는 정기 연락선을 타고 일본에 와서는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조선인촌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로 취업을 알선해 주고, 공동 구매나 계 형태로 서로 도왔으며, 1920년대 후반부터는 소비조합을 결성하여
조선인 마을끼리의 연합을 통해 경제적인 이익을 극대화했다.
조선인 노동자는 하루 14시간 이상씩, 위험하고 불결한 작업장에서 일해야 했으므로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위험이 있었다. 목화솜 먼지가 눈처럼 하얗게 뒤덮인 방적 공장 작업장 같은 곳에서는, 그 먼지가 폐 속으로 들어가기 일쑤였고 기계에
팔다리가 끼여 크게 다치는 등 크고 작은 위험이 뒤따랐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인 마을에 진료소와 한약방을 만들어 조선인 의사와 간호사, 한약사를 두어 공동으로 운영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인 마을에서는 상부상조의 전통이 이어져, 비록 가난하긴 해도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1920년대 노동조합이 조선인 마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조선인 마을은 노동조합이 주도하는 여러 활동, 각종
대중 시위에서 주요한 동력이 되었으며, 민족 운동의 근거지 역할을 담당했다.
경제난으로 일본인 학교에 갈 수 없는 조선인 아이들을 위해 야학과 학원을 설립하여 교육했다.
야학에서는 조선인 노동 운동가나 사회 운동가가 교사가 되어 한글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며, "항상 대한 독립 만세를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용감히 말하는 등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 마을은 문자 그대로 조선인 거리였다.
조선인 마을에 일본인 주택이 들어오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조선인과 조선어, 조선어 야학이 활개를 치는 장소였다.
일본 사회에서 일본어도 제대로 모르는 채 항상 경찰에게 감시당한다는 긴장감을 풀고 안심하며 생활할 수 있는 곳은 조
선인 마을뿐이었다.
식민지 시기, 학대와 차별이 삶의 현장이라 할 정도로 극단적 소외 속에서도 재일조선인은 민족, 조국, 고향, 가족에 대한
애착과도 끈끈하게 연결되어 가족을 보호했고, 일본의 노동운동을 견인할 정도로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88. 패전과 점령, 그리고 일본국민
Ⅴ 현대사회의 전개
일본제국의 멸망(1945년)
그때 세계는
1946년 : 한국,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년 :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성립
1945년 8월 15일 정오 전국에 히로히토 천황의 종전조서가 낭독되었다. 일본국민은 처음으로 천황의 목소리, 옥음(玉音)을 들었다. 일본의 패배와 항복이 명백했지만, 천황이 발표한 조서에는 항복, 패배, 종전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고, '전쟁
상황이 호전되지 않고', '세계의 대세와 일본의 현상을 고려해서 비상조치를 통해 시국을 수습하고자' 연합국의 선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요지였다.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식.
1945년 9월 2일 미국의 미주리호 갑판에서 일본 외상 시게미쓰 마모루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 실린 기사내용도 천황이 원폭피해를 우려하여 4국선언을 수락하였고 반드시 국위를 떨치도록 하겠
다든가 하는 표현들로 채워져 있다.
각지에서 다양한 종전이 이루어졌다. 종전 조서가 있던 다음 날 8월 16일, 대본영은 전 육해공군 부대에 대해 즉각 전투
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후 우시지마 미쓰루(牛島滿) 군사령관은 자결하였다.
가장 비참한 패전을 경험한 지역은 오키나와와 만주였다. 집단 자결, 죽음의 도피행이 이어졌다.
당시 한 소학교에서 천황의 종전조서를 듣고 난 후에 남긴 기록에는 '학교에서 선생님에게서 패전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모두 책상 위에 엎드려 울었습니다', '일본국민의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정말로 천황전하에게 면목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잘못해서 일본이라는 좋은 나라를 망하게 했습니다'라는 내용이 많았다.
전쟁에 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한 일본인은 교정 한쪽 구석에 천황의 사진 어진영(御眞影)이 안치된 봉안전을 들여다
보니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신주쿠역 근처에는 부랑아들이 먹을 것을 구하느라 배회하고 있던 광경을 회상하기도 했다.
1945년 12월 실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났을 때 '후회 · 비판 · 유감'이라고 느낀 사람이 30%, '놀람 · 충격 · 곤혹'
이라고 느낀 사람이 23%인 반면 '안도감 · 행복감'이라고 느낀 사람이 22%였다.
종전은 낙담과 비분강개, 놀람, 충격, 곤혹함을 안겨주었지만, 많은 일본인은 비탄과 충격 속에서도 전쟁의 공포로 벗어
났다고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한편 식량난과 인플레이션은 가차 없이 국민을 덮쳤다. 1인 1일 쌀2홉 1작의 배급은 콩깻묵 · 감자 · 고구마 등으로 대체
되었는데 그것도 지연되기 일쑤였다. 도시 주민은 농촌으로 식량을 구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충격 속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사회는 마치 자신도 모르고 휩싸였던 광기에서 문득 깨어난 것처럼 모든 것이 낯설
기만 했다. 사회 전반에 걸쳐서 뭐라고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좌절감과 혼돈이 팽배해 있었다.
한 일본인의 회상에 의하면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 칠판에 엄청나게 큰 글씨로 '헌법'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제부터 일본은 신헌법 아래에서 평화국가, 민주국가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