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양면 우망리 양지바른 언덕 위의"낙빈정"을 찾아서 겨울을 즐기는 樂山, 海山, 野草의 모습....10:36:34
※ 정지(鄭沚) : 1563년(명종18년~1642년 인조20년)풍양면 우망리 359번지 출생. 자는 청원(淸源),호는 낙빈(洛濱) , 본관은 동래, ‘낙동강 물가에 살겠다.’라는 뜻으로 낙빈을 호로 정한 정지는 일찍이 학문을 닦았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증조(曾祖)께서 연산(燕山) 갑자(甲子)에 직언(直言)하다가 화(禍)를 입은 일 때문) 강과 더불어 살았다. 응교(應敎) 환(渙)의 증손, 진사(進士) 원충(元忠)의 둘째 아들, 덕행으로 천거되어 훈도, 용양위부호군, 동 호군, 천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581년(선조14년)에 백씨(伯氏)가 요절하여 형수를 어머니처럼 모시면서 두 조카(榮後, 榮邦)를 모두 큰 선비가 되게 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조카, 형제, 친척들을 데리고 마을 뒷산 대동산(大同山)으로 피난하니, 바위서리 으슥한 곳이요, 앞에는 낙동강이 가로 놓였는데, 여기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적병 수10명이 산중으로 들어오니, 사람들이 그 수가 적음을 보고 몰려가서 그들을 쫓아버리니, 적병들이 들을 온통 뒤덮어 몰려와서 長姪婦 韓氏와 姪女인 처녀정씨가 강으로 몸을 던져 순절했고, 강물은 크게 벌창을 하는데, 두 조카와 집안사람과 함께 물살을 헤집고 강을 건널 때 적병들이 칼을 휘두르고 추격해 오다가 익사했으므로 탈 없이 온 집안이 간신히 화를 면하고 용문면 용문산으로 피난시켜 집안을 부지하였다.
晩年에 고향집의 동쪽 기슭인 풍양면 우망리 359번지에 낙빈정을 짓고 文士들과 시와 술로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만년에 두 아들에게 이르기를,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깊숙한 가슴 속에 어찌 사랑과 미움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제사를 그칠지언정 조상의 香火를 끊을 수 없을지니 宗家에서 대가 끊어질지라도 春秋享祀는 길이 끊지 말 것이로다.”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집안을 생각하는 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또한 낙빈정은 낙빈 정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정자라고도 하니. 후대에 와서 낡고 허물어진 것을 후손들이 고쳐 낙빈 정지를 기렸을 것이다.
※ 동래정씨 낙빈공파 제실이 자전거 길가에 있다.
樂山의 수고로 대동산 기슭에 주차하고 "쌍절암 생태숲길"을 탐방한다....09:32:36
찬바람을 막아주는 데크길에는 殘雪이 남아있다.... 09:39:02
추운 날씨에도 마주치는 동행들이 있어 반갑게 인사를 했다.... 09:44:47
강가의 양지 바른 곳에 모여 있던 백로들이 인기척에 놀라서 날아 오른다.....09:46:24
강가에 모여 있던 물오리들도 인기척이 있으니 강 중심으로 달아 난다...09:49:20
대동정이 보이는 대동교를 건넌다.... 09:51:44
밝은 햇살이 눈부신 쌍절암의 전망대를 지난다... 09:52:18
눈이 얼러 붙어 미끄럼을 주의하면서 지난다... 09:55:33
원두막에 도착하니 비발디의 "사계'가 울려 퍼지고,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우며 간식을 즐겼다..... 10:02:04
알운봉의 늠늠한 자태는 수려하고, 우측 길을 돌면 "동래정씨 낙빈공파"의 제실이 있다....10:16:43
7월달 폭우로 논이 무너져서 피해가 엄청 크다....10:18:56
우망리 마을 속으로 탐방에 나선다. 정면의 고색 찬란한 "낙빈정"이 우리를 맞이한다....10:33:01
우망리 회관 옆에 있는 "지운 류근영선생 숭모비"를 살펴보았다.... 10:51:55
芝雲 柳近永 先生 崇慕碑(지운 류근영 선생 숭모비)
근세 발전 과정에서 낙후된 우리사회에 20세기를 전후하여 일부 선각자들이 현대문명을 지향한 민중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계몽의 한 가닥 瑞光은 어두운 장막에 싸였던 우리 고장에 비추어져 서기1921년에 유일한 현대식 교육기관인 永新義塾이 이곳 우망동에 창설되고 柳近永先生이 25세의 약관으로 훈육교사로 초빙되어 생애의 정렬을 기우렸다. 선생의 호는 지운이고 1898년에 세거지인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일산리에서 진주 류씨의 儒家名門에서 출생하였다. 온건 독실한 성품과 중후하고 절도 있는 言動은 君子의 風貌를 갖추어 품격 있는 교육자로서 또한 성실한 인간으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校舍로는 낙빈정(洛濱亭)이 사용되었다. 시설은 태무(殆無)하고 財政은 貧弱하였으며 선생의 사생활은 극히 궁핍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始終一貫 臨機 處變하여 갖은 고난과 풍상을 극복하면서 수십 년에 긍하여 수많은 자녀들을 훈육하여 전진을 밝혀 주었다. 선생이 아니고서 그 누가 이를 감당하였으리오. 선생과 영신의숙은 숙명적인 인연이었다. 선생의 덕성과 식견은 이 고장 일반인사 계몽에도 영향이 지대하여 지역사회 근대화에 역군이기도 하였다. 이렇듯 선생의 젊음과 반생을 받친 영신의숙이 그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1943년에 막을 내리자 선생은 예천대창학교와 우망국민학교에서 자녀 교육에 여생을 기울이고 1949년 6월에 우망 일우(一隅)에서 서거(逝去)하니 衆人 哀悼裡에 알운산 東麓에 禮葬되었으며 유족으로 初配 반남 박씨는 無嗣하고 後配 안동 권씨와 嗣子 래형(來亨)이 있다. 世事는 덧없어 선생이 가신지도 어언(於焉) 30유여 星霜 古色 짙은 낙빈정사에는 예나 다름없이 白雲이 悠悠히 오가며 古事를 연상케 한다. 인생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아 전하는 것 선생의 불후(不朽)의 공적 길이 빛나리라. 이에 선생을 추모하는 문생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공로를 기리며 이 비를 세운다.
西紀 1980년 9월 16일 前 國會議員 門生 鄭鎭東 謹撰(근찬: 삼가 짓다)
우측의 작은 표석
류근영 선생님의 숭모비는 일제 강점기 1921년 이곳 낙빈정에 창설한 영신의숙(사설작은학교)에서 25세의 약관으로 궁핍한 사생활을 마다않고 젊은이들을 지도하시다가 1943년 영신의숙이 문을 닫자 예천대창학교와 해방 후 풍양동부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던 중 1949년 향년 51세로 타관에서 생을 마친 신분으로 그 은덕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를 옛 우망초등학교 입구 잡초 밭에 방치되어 있어 이곳으로 옮겨 오래도록 보전코져 합니다.
추록 : 1919년 고향에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른 후(피신 차 우망에 머물렀음) 위 사실로 1992년 광복절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습니다. 유족으로는 래홍, 래희, 래형 삼남매가 있습니다.
2014년 7월 우망리 회관 신축 추진위원회
우망리 회관 건너편에 있는 "쌍절각"의 모습으로, 좁은 공간에 높게 있어서 접근이 어려웠다...10:58:45
우망리에서 나와 청곡제를 돌아오는데 칼바람이 눈을 아프게 했다....11:07:27
중무장을 한 상태로 원두막을 배경으로 野草, 海山, 樂山의 모습....11:17:22
주차장에 돌아와서 귀가를 서두른다.... 11:48:03
오늘도 손님이 많은 고목나무 식당에서 따뜻한 설렁탕을 즐겼다....12:24:47
첫댓글 大同山 入口에는 殘雪과 寒波가 상당하여 쉬운 길인 雙節巖으로 進行하니 强風에 데크길이 淸掃되어 淸涼感이 더해진다.寒波主意報 狀況이니 빈 길은 오직 우리 一行의 情談 뿐이고 이따금씩 洛東江 陽地쪽 水邊에 休息하던 白鷺 무리가 화들짝 놀라 飛上한다.人跡 끊긴 觀世庵엔 沈默만이 흐르고 雙節巖 展望臺에도 바람소리만 요란하다.憂忘里 園頭幕엔 謁雲峰에서 몰아치는 强風 때문에 憂忘里 古跡 探訪次 入道하니 洛濱亭이 우뚝하여 단숨에 올라보니 左靑龍 右白虎의 天下明堂에 正面4칸의 東萊鄭氏의 氣品이 威嚴있게 展開된다.背山臨水의 地形에 넓은 憂忘 들판이 끝간데 없이 展開되고 飛鳳山이 가깝게 眺望되는 近洞第一景이나 遺憾스럽게도 放置되고 있어서 안타까움이 더해진다.마을 어귀엔 우복 鄭經世님의 雙節巖碑가 雙節閣으로 保護되고 있으나 耽讀이 困難한 位置여서 案內板 設置 必要性을 느꼈다.마을會館 周邊에는 芝雲 柳近永 先生 崇慕碑와 學區單位老人會碑,會館 由來 等 마을의 산 歷史가 한 눈에 든다.마을을 돌아볼수록 東萊鄭氏 集姓村인 憂忘里가 크게 보이고 先祖들의 遺業이 壯大하니 지금까지도 人才가 끊임없이 輩出되고 있다고 思料된다.이젠 原點回歸를 서둘러 淸谷堤에 올라서니 强風에 몸 견주기가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