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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버블 경제 전, 후 한방에 보기! 1980년대 중반 ~ 2010년)
일본은 20년전에 부동산 버블 붕괴를 겪었습니다. 그 여파로 인해서 아직도 고통에 신음중입니다.
처의 장인이 일본에서 부동산 업을 크게 하고 계시지만...
아직도 여전히 일본의 경기는 최악의 상황이며, 현재도 그 여진으로 인하여 고통은 진행중이라고 합니다. T.T
올해 2010년 일본정부에서 전국의 부동산을 전수조사 했습니다.
98% 이상이 아직도 하락중이며, 대도시 오피스와 상업중심지구 2% 가까이만 겨우
보합 또는 약간의 상승에 그쳤다고 합니다.
비정규직 양산 및 실업률 증가 - 내수부진, 기업실적악화 - 비정규직 양산 및
실업률증가의 악순환이 계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다고 합니다.
어제... 네이버 지식에서 1억, 10년 후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라는 질문이 있었는데...
일본의 상황이 궁금해져 처(일본인 ^^;)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20년 전의 엔화가치와 지금의 내수물가대비 엔화가치의 체감은 거의 비슷하다고 합니다.
(가끔 부동산과 은행에서 돈의 가치는 지속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원칙이니... 땅이나 집을 사라고 유혹을 하죠?
그러나 일본은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
현재까지도 일본의 집값은 아주 조금씩 떨어지고 있으며, 불황으로 소비자들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물건들은 팔리지를 않아 생산자들과 판매자들은 10엔이라도 가격을 더 낮추려고 한답니다.
얼마전 일본에서 한국의 버블이 일본과 유사하다고 하는데... 정확히 비슷한 면이 많은 거 같습니다.
MB정권에서 비슷하게 따라하는 측면도 있는거 같구요!
나라 말아먹고, 먹튀하려는 걸까요?
호기심에서 출발하여... 밤을 꼴~ 딱~ 세워 번역 했습니다.
번역이 서투르고, 오역과 오타가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나름 밤세워 힘들게 번역해 보았으니... 유익하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전문번역가 분들... 번역 못한다고 욕하지 마염! ㅡ,.ㅡ;
버블이란?
비정상적인 투기열풍에 의해서 자산 가격이 일시적, 비정상적으로 상승...
고점을 찍고, 그 후 투기열은 차갑게 식어버려 급속한 자산가치의 하락이 일어나는 현상.
일본의 버블 시기?
대체로, 1986년 12월부터 ~ 1991년 2월까지 4년 3개월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기간을 “버블시기”라고 합니다.
일본의 버블 붕괴 기간?
각 도시마다 시기적으로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1990년 하반기부터 버블의 과열 양상은 조금씩 붕괴되고 있었다.
그 여파로 인한 고통은 현재까지 진형중입니다.
본론으로...
버블 전, 후의 현상들에 대해서...
1985년 달러고에 의한 무역적자에 고민하는 미국은 G5국가와 협조하여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것에 의해 급격한 엔고가 진행되었으며, 1달러에 240엔 전후였던 환시세가 1년 후 1달러에 120엔대까지 급등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나카소네 내각은 무역마찰 해소를 위해 국내 수요의 확대를 공약해
지금까지의 긴축 재정으로부터 벗어나 공공 사업의 확대 정책을 시행하였다.
급격한 엔고에 의한 불황을 막고, 내수 수요를 확대하기 위해, 정부는 금리를 한 때 2.5%까지 인하하였다.
그 후에도 저금리 정책기조는 계속되었다.
저금리 정책은 당시 국제적 추세였으며, 일본정부의 강력한 의지였다.
이로 인해 저금리 정책은 계속될 거라는 기대심리가 시장에 강하게 작용되었다.
더불어 나카소네 내각이 세제개혁을 실시해 법인세를 42%에서 30%로 12% 인하하였으며,
소득세 최고세율을 70%에서 40%로 인하, 물품세도 철폐시켰다. 이로 인해 국가 세수입의 1/3을 잃어버렸다.
아울러 부유층의 소득은 그만큼 증대되었고, 시중에 풀린 많은 돈은 토지, 건물, 주식시장으로 향했다.
때문에 토지, 건물, 주식시세가 상승하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우량 제조업 전용의 융자 안건이 침체,
은행이 부동산업이나 소매업, 주택에의 융자에 종사하고 있었다.
금리 저하에 의한 수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은행들은 융자의 양적인 확대로 나서게 되었다.
은행은 기업의 자금 조달 방법을 다양화시켜 간접금융으로부터 직접금융으로 전환하였다.
기업들은 자금 조달이 용이하게 되면서, 재무 체질이 개선되어 설비 투자를 용이하게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금융시장은 국제화의 흐름으로부터 국내 시장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
해외 금융기관의 신규 시장 개방이 본격화 되면서, 금융거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기업의 잉여자금 운용을 매스컴이 선전해, 특금 펀드로 법인의 주식투자가 활성화 되었으며,
개인투자가의 주식투자를 유발하였다.
전국적인 매스컴의 영향으로 금융 잡지나 금융상품 평론가, 부동산 거래 평론가등이 출연해
개인의 금융거래를 부추겼다.
NTT, JR, JT등의 국영기업이 민영화되어 사회 전체의 기업 활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나카소네 내각에 의한 대도시 권내의 용적률 규제완화, 도쿄만 횡단도로 건설 프로젝트 추진,
당시 도쿄도 지사에 의한 제2차 도쿄도 장기 계획에 의한 도쿄 임해 부도심 구상의 구체화에 의한
도쿄발의 부동산 거래 활성화. 리크루트사의 부동산 거래 성공이
대대적으로 언론에 보도되어 그 후의 부동산 거래가 활발해졌다.
엔고의 영향으로 수입에 의지하는 일차산품(에너지, 원재료, 식료 가격등 )의 코스트 저하로 인한 기업수익의 확대.
미국의 불황이나 무역마찰의 해소를 위해 수출규제가 걸려, 기업은 국내 시장의 개척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 접어들면서 자산 가격(주식)은 상승하기 쉬운 상황이 되어 있었다.
기업수익의 향상과 함께 개인소득도 증가해, 소비 수요가 상승하였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투기열이 가속화 되었다.
특히 주식과 토지, 부동산 투기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토지는 반드시 가격이 오른다는 이른바 토지 신화에 의지해
전매 목적의 매매가 증가하게 되었다.
지가는 점차적으로 상승해, 숫자상으로 도쿄 23구의 지가로
미국 전 국토를 구입할 수 있다고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은행은 그 토지를 담보로 대부를 확대하기 시작하였다.
자산 가격 상승은 자산 보유자의 심리적 자산효과에 의해서
소비가 자극되어 경기의 과열을 더 더욱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또, 1986년부터 일본 기업의 구미 기업에 대한 M&A가 꽤 진행되었다.
1987년에 접어들면서 이 현상은 경제 전체에 파급되었다.
토지에 대한 수요가 높은 만큼 이 경기는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낙관론이 만연하였다.
특히 주식은 1987년 10월에 일어난 미국 블랙먼데이에 의한 세계동시 주가하락의 영향을
세계에서 최초로 탈출해, 고가를 갱신한 것으로부터 일본주식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 후 투기가 투기를 부르는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이와토 경기”, “진무천황이래 최대의 호경기”에 계속되는 경기의 통칭을 공모하는 기사가, 잡지에 나올 정도였다.
한편, 학계 일각에서는, 이미 지가나 주가는 수익환원법 등에서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격을 넘어
상승하고 있으므로 일본 경제는 언제 파열해도 이상하지 않은 버블 경제에 돌입하고 있다며 경고했었다.
원래 일본의 인구증가율이 저하해, 2007, 2008년에는 인구가 감소로 변할 것으로 예상되는 것부터,
토지의 수요가 이대로 지속적으로 증가할 리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세계의 중심 도시로서의 도쿄는 지속적인 발전을 계속할 수 있으며, 오피스 수요 또한 확대되고 있고,
이것에 대해서 공급은 아직도 부족하다라는 정부의 견해를 시작으로 하는 강경한 반론이 판을 치고 있었다.
원래, 지가가 상승했을 경우는 사업실적을 향상시키기 위해...
토지를 매각해 채권등을 구입하는 것이 합법적으로 된다.
토지 자산등이 장부가액으로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명목적으로 수익율은 변함없어도 토지를 계속 가지는 것이 정당화 되었다.
기업은 장부가액과 시가의 차액이 포함된 이익을 가져와,
담보 가치의 상승이라고 하는 형태로 자금을 도입하고 경영을 확대할 방향으로 움직였다.
손실을 내도 정작 포함된 이익을 이용해 해소할 수 있다고 하여
경영의 다각화를 진행시키거나 하이리스크인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방만한 경영으로 손실이 나와도 중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기업은 수익율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총자산을 증가시키는 것을 제일 목표로 하게 되었다.
대도시 등의 우량한 토지의 상승에 머무르지 않고,
수익을 전망할 수 없는 원격지의 토지도 리조트 개발 명목하에 상당한 가격으로 거래되었다.
이렇게 해 얻은 토지를 담보로, 거액의 융자를 했다.
토지의 유효 활용에 의한 수익이 아니고, 장래 지가가 상승하는 것으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되는 자본상승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많았다.
토지를 담보로 융자를 실시함에 있어 통상은 평가액의70%를 기준으로 융자를 실시하지만,
장래의 토지의 가격 상승을 예측해 과다하게 대출하는 사례도 많았다.
파산한 홋카이도 타쿠쇼쿠 은행에서는 120%를 융자한 사례도 있었다.
단일의 물건에 복수의 담보를 붙이는 일도 행해졌다. 배경에는 금융기관의 대출 경쟁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융자의 일부는 후의 지가 하락(담보 가치가 저하)에 의해서 불량 채권이 되었다.
도로 용지의 취득 가격도 상승하였다.
제2 도메이 고속도로 등의 건설에 필요로 하는 자금의 증대를 부르고,
일본 도로 공단의 경영 압박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고가의 토지는 곧 장해가 되었고, 지방공공단체의 공공 사업 또한 진행되지 않게 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윤택한 자금을 배경으로 대도시의 재개발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도심의 우량 지구에는, 지권이 세분화된 셋집이 다수 혼재해, 권리 관계가 복잡한 케이스가 있었다.
일본에서는 차지차가법에 따라 차주의 권리가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토지를 정리해 대규모 개발을 하는 프로젝트는 필연적으로 추진이 곤란해졌다.
이 때문에, 대도시 주변의 토지 취득문제 때문에, 대기업 부동산 회사를 위탁, 의뢰를 받은 용역(주로 폭력단원)의
무리한 수법에 의한 지반을 다지는 일이 행해지게 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계획을 완수할 수 없는 채로 프로젝트가 중지되는 케이스도 다수 생겨
버블 붕괴 후에는 이용하기 어려운 공터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터가 버블의 조 후 라고 불린다.
지가 상승은, 도시 근교에 적당한 주택 취득을 어렵게 만들었다.
머지않아 적당한 주택을 취득하는 것이 인생의 꿈이자 목표가 되었으며, 그 동기로 저금에 노력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과도의 지가 상승을 느끼고, 더 이상 가격이 오르기 전에 조금이라도 빨리
주택을 취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증가하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지가 상승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주택값이 너무 많이 상승하였고, 도시 월급쟁이의 평균적인 수입으로는 주택 구입이 불가능하다는 이론도 등장했다.
지가와 주택 상승과 함께 상속세도 무시할 수 없는 정도로 증가했다.
특히, 오랜 세월 은행 대출 상황으로 상속이 발생하면, 지불해야 할 상속세를 준비하지 못하는 사례도 발생하였다.
이것에 대응하기 위해, 친척의 젊은이를 양자로 해 일인당의 상속액수를 내려
상속세를 절약하는 수법이 취해지거나 변액보험을 이용하는 절세 수법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는 자산운용의 계획이 어긋나, 궁지에 몰리는 계약자도 있었다.
지가 상승을 전제로 한 주택 취득의 모델도 제시되었다.
젊을 때 작은 맨션을 취득해, 그것을 대금의 일부로 납부하고 순차적으로 넓고 좋은 맨션으로 교체,
최종적으로는 원하는 단독주택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여겨져 주택 주사위라고도 불렀다.
저축만으로는 주택가격 상승을 결코 따라잡을 수 없지만,
맨션을 자산으로 해서 구입해 두면 가격상승을 전망할 수 있어 유리하다는 말들이 횡행했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에는 맨션은 자산가치로써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사실상 자산가치가 없어진 맨션에 대한 고액의 은행대출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편, 너무 상승한 주택의 취득을 서서히 포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고급차와 같은 내구소비재 등에 열중하는 찰나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소비의 과열과 저축율의 저하로 연결되었다.
지가상승으로 인해서 임대 주택의 집세도 상승해, 결국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어 통근 시간이 길어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지가상승과 주택문제는 당시 일본 정부의 염려 사항이며,
후의 지가 억제 정책으로 연결되어, 신용 구조를 압박하게 되었다.
국철 청산 사업단은, 구국철로부터 계승한 미이용지를 판매해 부채 삭감을 도모하였다.
그 중에서도 시오도메역 철거지는 도심에 있는 결정된 우량지로서 주목을 끌었다.
실제로 지가는 피크를 이미 지나고 나서 매각을 하게 되었다.
그 외의 토지도 국철 청산 사업단의 해산을 앞에 두고 모두 처분할 필요가 있는 것부터,
버블 붕괴 후 덤핑과 다름 없는 가격으로 처분해야만 했다. 결국 사업단은 부채를 늘린 상태로 해산하였다.
거의 1987년 동시기에 리조트 법이 제정되었고 도시로부터 멀어진 지역에 있어도 대기업을 유치해
리조트 시설을 개발하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특히 홋카이도에서는 스키장 등의 리조트 사업이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이러한 원인으로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토지가 상당한 가격으로 거래되는 등,
토지 가격의 상승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또 골프장의 회원권 가격은 상승하였으며,
그것과 함께 순차적으로 호화로운 설비를 가진 골프장 개발이 전국적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 야스다화재가 약 57억엔으로 구입한 회화 해바라기가
버블 경제하에서는 금융·자산운용으로 대폭적인 이익을 올리는 예가 되었다.
보유중인 토지나 금융자산을 운용해 큰 수익을 올리는 재테크에 열중하는 예도 있었다.
윤택한 자금에 의해서 페라리, 롤스 로이스, 벤트리 등의 고급 수입차,
사자비즈 등이 개최한 옥션에 의한 고호나 르노워르등의 회화나 골동품에까지,
기업이나 부유층 뿐만 아니라, 일반인까지 일대 소비 붐이 일어났다.
윤택한 자금을 얻은 기업 등은 해외의 부동산이나 기업을 매수했다.
저명한 곳에서는 미츠비시 토지에 의한 록펠러센터 매수(2000억엔),
소니에 의한 코롬비아 영화 매수를 시작으로 하는 사례로, 해외 부동산, 해외 리조트에의 투자, 해외 기업을 사들였다.
또 기업에 머물지 않고, 토지를 담보로 큰 돈을 차입한 중소기업 오너나 개인,
마이 홈 자금을 저축하고 있던 개인중에서도, 해외의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한편으로 미국의 상징적인 빌딩이나 기업을 일본이 매수하면서 미국의 마음을 돈으로 매입했다고 하는 비난도 쏟아졌다.
또 해외 부동산에의 투자는 현지의 지가 상승을 부르는 것과 동시에 자산세를 상승시켜,
정상적인 거래를 해쳐 현지 경제를 혼란시킨 것이라는 비난까지 받았다.
새로운 가치관과 감성을 지닌 젊은 세대들은 신인류라고 칭해졌다.
당시 일본 여성의 결혼 이상형 남성으로서는 엘리트 얀에그(경영진, 30대로 역부)였으며,
복장은 조르지오 알마니로 대표되는 소프트 슈트였다.
염가 항공권의 유통 확대에 맞추어, 해외 여행자가 증가했던 것도 이 시기부터이다.
가정용 게임기 업계에 있어서도 패밀리 컴퓨터의 신제품을 담당하는 신제품 경쟁이 각사에서 시작되고 있었지만,
NEC 홈 엘렉트로닉스가 개발한 PC엔진의 주변기기는, 당시 최고가였던 CD-ROM 시스템을
게임기에 짜넣게 한 제품이 45만엔으로 발매되는 등, 게임에 대해도 고급 지향적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또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커플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나 쉐라톤 그란데 도쿄, 베이호텔,
토쿄 베이힐튼 등의 고급 호텔에 숙박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3개월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예약이 어려울 정도였다.
복수의 일본 기업의 스폰서를 받고 있던 베네통 포뮬러의 F1머신, 1987년의 나카지마 사토루의 F1 참전을 기회로
모터스포츠 붐이 일어나, 많은 일본 기업이 F1팀의 스폰서를 실시했다.
또 산요전기나 토시바, 세이코 엡슨이나 미츠코시등이 많은 일본 기업팀의 스폰서로 입후보했다.
또 일본 국내 모터스포츠의 최고봉인 전일본 F3000 선수권에는, 산토리나 일본 담배,
와코르 등의 대기업으로부터, CHERENA, 산와 도시 개발 등 부동산 거래로 큰 돈을 손에 넣은
부동산 업자를 시작으로 하는 중소기업, 나아가 더 타케후지, 프로미스, 아콤 등의 소비자 금융업자까지
많은 기업이 스폰서에 입후보하였으며, 풍부한 자금을 확보한 것을 배경으로,
1990년의 전일본 F3000 선수권 대회 때는 40대 가까이가 엔트리 하는 등 공전의 참전 대수를 기록했다.
한층 더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한 리조트 개발의 과열과 아울러 일본 국내 서킷의 건설 계획이 다수 일어서,
실제로 계획되어 완성에 이른 것만으로도 오토 폴리스나 TI서킷,
토카치 인터내셔널 스피드 웨이 등이 있지만, 상기의 3개 모두 버블 붕괴 후에 파산했다.
BMW3 시리즈, 닛산 시마나, 토요타 소어러, 토요타 크라운등의 고급차 붐이 일어났다.
특히 1989년에 세제개편되어 고급차에 대한 중과세가 부과되지 않게 되고 나서,
고급차의 판매 대수는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또 1989년에 미국부터 먼저 판매된 토요타 셀시오나 닛산 인피니티 Q45등을, 일본에서의 판매 개시전에
미국으로부터 역수입해 고가로 되파는 방법, 챠량인도까지 1년 이상 기다리게 된 혼다 NSX를
일시불시 즉시 출고가능 등, 고가로 전매하는 업자도 나타났다.
일부 부유층의 스테이터스 심볼로 되어 있던 외국차도, 그 판매 대수의 급증으로부터,
메르세데스 벤츠 190 E가 코(아이) 벤츠, BMW3 시리즈가 록뽄기 캐롤라 등과 야유될 정도로 보급되었다.
특히 고급 외제차는, 도쿄도심이나 오사카 시내등의 대도시의 도로에서 메르세데스 벤츠 560 SEL나
포르셰 911, 재규어 XJ 등이 달리고 있는 장면이 완전히 일상 광경의 일부가 되었으며,
수입 대수가 극단적으로 적었던 고급차인 페라리나 람보르기니,
마세라티나 다임러 조차 대도시 근교에서 드문 존재가 아니었다.
페라리는, 1988년에 창설자의 엔초 페라리가 사망한 이래, 신차 뿐만 아니라 중고차 가격도
세계적으로 상승하고 있던 터였다. 인기 차종의 테스타롯사를 정규 수입 판매하는 대리점의
콘즈, 앤드, 컨퍼니, 리미티드를 신차로 주문하고 나서는 인도받을 때까지
2년에서 3년까지 대기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 탓도 있어 한정으로 생산된 F40은 콘즈 앤드 컨퍼니 리미티드로의 신차가격이 4,650만엔이지만
병행수입 된 신차(현금 일시불)는 수입차전문점에서 2억 5,000만엔으로,
테스타롯사가 같은 신차가격은 2,300만엔에서 현금 일시불시 5,000만엔 가깝게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90년에는 롤스 로이스의 전생산 대수의 약 3분의 1정도가 일본에서 판매되었다.
그 후 버블 경기가 붕괴하면서 이러한 롤스 로이스가 소유자의 손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일본에 있어서의 롤스 로이스나 벤트리의 중고차 시장이 대폭락해
그 결과 대부분의 일본 내 롤스 로이스가 1990년대 중반에 해외에 매각되었다.
소비의 과열은 당연히 록뽄기나 긴자, 시부야 등의 번화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번화가에서는 큰 돈을 손에 넣은 버블 신사에서부터 학생까지 큰 돈을 쏟아 넣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에 영향을 받아 대기업으로부터 중소규모의 부동산 회사까지가 디스코 등의
나이트 레저 개발에도 투자한 적도 있어,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NOVA21 그룹이
마하라쟈나 킹&퀸을 전국에 개업시켰으며, 록뽄기에서는 스퀘어 빌딩 대부분이
디스코 에리어, 시판고, J여행 바 등의 디스코가 난립해 그 대부분이 성황이 되는 등, 일대 디스코붐이 일어났다.
또 유복한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써클이 이러한 디스코를 수십 점포 단위로 동시에 전세내어,
수천인을 동원하는 파티를 실시하는 것도 많이 행해졌다.
덧붙여 버블 경기의 상징으로서 다루어지는 일이 많은 쥬리아나 도쿄이지만,
실제는 버블 붕괴 직전의 1991년 5월에 개점하고 있다.
민간기업 등이 호경기를 바탕으로 더욱 영업규모를 확대하거나 경영다각화를 실시하기 위해서
많은 수의 사원을 모집, 인원수를 확대해, 학생의 획득 경쟁이 격렬해졌다.
많은 기업이 학생의 눈을 끌어 당기는 것을 목적으로 텔레비전으로 기업 광고를 실시해,
훌륭한 기업 팜플렛을 작성, 배포해 학생을 확보하려 하였다.
조기취업의 일환으로서 도시지역의 대학생이 주재하는 이벤트에 협찬을 실시했다.
학생의 확보에 성공한 기업이 내정자를 타사에 놓치지 않게 하기 위해,
연수 등으로 칭해 국내 여행이나 해외 여행에 데리고 나가
타사와 연락을 할 수 없게 격리 상태로 두는 이른바 격리 여행을 실시하였으며,
인사 담당자가 내정을 거절한 학생에게 폭행을 일으켰다는 도시 전설까지 속삭여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급격한 경제 팽창과 업무 확대 때문에 새볔 2시 넘어서까지 잔업을 흔하게 하다보니
심각한 일손부족이 시달려 시급하게 인원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였다.
체육과 계통의 학생들은 참을성과 체력, 좋은 선후배 관계로 인해서 기업에서는 인기가 있었다.
유효 구인비율은 1991년에 1.40배를 기록하였다. 리크루트의 조사에서 1991년졸업 대졸 구인 비율이 2.86배나 되었다.
이 시대에 대량으로 채용된 사원을 가리켜 버블 취직 세대라고도 말한다.
사내에서는 동세대의 인원수가 많아, 경쟁이 격렬해지는 한편,
취직 직후에 버블 붕괴를 받아 업무가 삭감되어 각각의 사원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도 줄어 들었다.
또 이후 채용이 없었던 해로부터 후배 또는 부하가 있지 않고,
기나긴 현장의 최전선에 처해져 승진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민간기업의 실적 및 급여가 급격히 상승했던 반면에 공무원들은 버블 경기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공무원의 급료는 짜다는 풍문이 대학생들 사이에 만연하고,
공무원이 되는 것은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업신여겨졌다.
특히 지방공공단체에는 우수한 졸업자가 모이기 어려웠다.
각 공무원 단체는 공무원의 안정성 측면을 적극적으로 PR하기도 하였다.
농림 수산업이나 제조업 등의 분야와 비교될 정도로 은행이나 증권 등의 금융 분야가 큰 폭으로 수익을 늘렸다.
이러한 업계는 한층 더 고도의 금융상품 개발에 충당하는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과 학생 획득에 발빠르게 움직였다.
또 버블 경기에 들뜬 분위기 속에서 덴츠나 산토리, 가네보 등은 후지텔레비 등의 TV광고를 통하여
기업의 인기도 높아져 문과 학생 뿐만 아니라 이과의 학생에게도 이러한 기업에 인기는 대단했다.
비싼 급료를 제시하는 금융업이나 화려한 업계에의 취직 희망이 증가한 것에 비해서,
제조업에서는 우수한 학생 확보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과의 학생이 산업계 이외의 분야 특히 금융업이나 서비스업에 취직하는 일을 가리켜 문과 취직이라고도 말했다.
이것에 대응하기 위해서 많은 제조업체가 첫 월급을 인상하려는 움직임이 나왔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미 근무하고 있는 사원보다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일도 있어, 불공평하다는 비판도 일어났다.
1940년대 이후의 냉전 아래에 있어서 일본을 포함한 서방제국과 대립하고 있던 소련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의한 피폐로 개혁파의 미하일·고르바초프가 등장한다.
한편 미국은 1980년대 중반의 행복한 시기를 지나 주택 금융의 파탄 조짐이 나오고 있었다.
나아가 신용문제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미국의 국내 경제는 침체되고 있었으며, 실업자 증대 및 기록적 재정 적자로 연결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 정세 속에서 일본은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엄청난 호경기로 인해서 세계 투자자들로 큰 매력을 지니게 되었다.
미국에서도 일본 사회에서 배울 수 있다, 일본에 지지 말아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일본은 호경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미츠비시 토지가 뉴욕의 상징적인 건물인 록펠러 센터를 매수해 일본 위협론이 분출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 동남아시아 각 국가들로부터 일본의 성공을 본받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버블 붕괴가 일어난 1989년에는 몰타 회담이 동시기에 있었고, 천안문 사건이 발생한다.
자산을 이용한 경제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수익이 아니고,
자산 그 자체의 가격 상승에 의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수법은 자산 가격이 상승하지 못하면 곤란하게 된다.
이윽고 자산 가격이 높은 수준으로 도달하면, 그 시점에서 자산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은
최초의 자산을 가진 사람처럼 자본상승이익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높은 고가의 가격을 유지하지 못하고, 가격이 하락으로 반전한다면,
지금까지의 소유자가 이익을 얻은 만큼, 최종적인 자산 보유자는 그 만큼의 손해를 정리하면서 입게 된다.
이와 같이 자산 가격의 상승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는 것에 따라 자산 거래는
점차 실종 양상을 보여 더욱 더 자산 가격의 유지가 곤란해진다.
버블 절정기의 1989년(헤세이 원년)경에는 투자가 활성화 되어 “헤세이 경기”, “히미코 경기”, “고원 경기”라고 불리며
지금까지 유례없는 공전의 초호경기가 되었지만, 실체 경제의 성장에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자산 가격상승을 수반하는 버블 경제였기 때문에 이윽고 축소되게 된다.
주식, 토지, 건물 등의 자산은 하락해 큰 캐피탈 로스(잠재손해, 매각액이 구입액을 밑돈다)를 안는
개인이나 기업이 증가하고 캐피털게인을 목표로 해
과대한 투자를 하고 있던 기업이나 투기꾼이 엄청난 손실을 안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의 일본은 자산 가격상승에 의해 토지나 주식 등의 수익율이 급격히 저하되고 있었다.
또한 오일 쇼크 후의 1973년부터 약 18년간 계속되어 온 안정 성장기는 이 버블 붕괴로 임종을 맞이했다.
버블 붕괴라고 하는 현상은 단지 경기순환에 있어서의 경기후퇴라고 하는 면 뿐만이 아니라 급격한 신용수축과
토지, 주식, 건물 등 고가를 유지해 온 투기 의욕의 급격한 감퇴 그리고 정책의 착오가 관련되고 있다.
닛케이 평균주가는 1989년의 12월 29일 최고치 니케이 38,915을 피크로 폭락으로 급변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수반하는 이른바 걸프 전쟁과 원유가 상승이 일어난 후의 1990년 10월 1일에는
일시 니케이 20,000 붕괴가 불과 9개월 남짓 사이에 반토막 수준까지 폭락했다(경제적인 버블 경제 붕괴를 의미한다).
경기에 대해서는, 일본의 경기동향지수(CI)를 보면, 1990년 10월 피크를 정점으로 경기가 하락하기 시작하면서
1993년 12월까지 쭉 경기가 하락하였다.
지가는 1991년 가을무렵(도쿄, 오사카의 대도시권에서는 90년 가을 무렵부터 이미 시작되었다)에,
변두리는 1992년 초에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돌아와서 1998년 이후는 사회 전체의 고용자의 임금의 감소와 그 이전보다 한층 더 비정규직 고용 사원이 늘어났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열광적인 주가, 지가는 실체를 수반하지 않는 비정상인 투기열 즉 버블이었던 것이 밝혀졌다.
뒤돌아 보면 왜? “버블 경기”라 불리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버블의 붕괴는 한순간에 일어난 현상은 아니다.
그래프(각종 지표)상에 있는 최대치 구간 이후로 이론상
거기서 버블 붕괴가 시작된 것이지만, 그것은 단순한 서장에 지나지 않는다.
버블 붕괴는 개시부터 몇 년간을 들여 서서히 생긴 과도적 현상이다.
현상의 진행은 지역이나 지표의 취하는 방법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면 맨션의 평균 분양가를 봐도 도쿄와 오사카에서는 절정기에 약 일년의 정도의 시기적 차이가 있다.
도쿄에서 버블의 붕괴가 발생하기 시작했을 때, 오사카에서는 또 버블이 계속 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또 홋카이도, 토호쿠, 시코쿠, 큐슈 등의 지방도시는 1992년경까지 지가가 상승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버블이 튀었다라고 하지만 마치 풍선이나 비눗방울이 있는 순간에 파열한 것 같은 순간적인 현상은 아니다.
수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버블의 붕괴라고 체감적인 버블의 붕괴에도 최대로 수년 정도의 차이가 있다.
데이터상 버블의 붕괴는 1990년 11월 무렵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누구나가 즉시 그것을 체감한 것은 아니다.
버블의 붕괴는 경제학적 현상은 아니고 심각한 사회 문제로 파악할 때 기준이 되는 시기는 전국적으로
지가의 하락이 명확해져 유효 구인배율이나 올해 졸업자의 구인 배율이 크게 저하해 기업의 실적 악화에 의해
학생의 내정 취소도 잇따른(취직 빙하기도 참조) 1993년경부터 불량 채권 문제나 주가 침체에 의해서
대기업 금융기관이 차례차례로 파탄에 몰린 1997년경에 걸친 사이이며 그것까지는
(사실로서 버블 붕괴가 시작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낙관적이고 판단해
그렇지 않아도 아직 회복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경제정책의 실패에 의해서 1997년 이후의 경기가 극단적으로 악화되어 정리해고나 채용 억제가
한층 격렬해지고 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실제 손해를 본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전반을 특히
버블 붕괴에 의한 경기악화를 되돌아 보고 파악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일반적으로 버블 절정기란 경기가 좋다고 일반 대중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1988년경부터
경기가 나빠졌다고 인식되기 시작하기 전의 1992년경까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
이 논리는 일조 시간이 제일 긴 하지가 제일 뜨거운 날이 아니고, 8월의 평균 기온이 제일 높다고 하는 자연현상과 같다.
버블 경제 시대에 토지를 담보로 행해진 융자는 지가의 하락에 의해서 담보 가치가 융자액을 밑도는
담보 분열 상태에 빠졌다. 또 각 사업회사의 수익은 전대미문의 불경기에 크게 저하되었다.
이렇게 해서 은행들이 대량으로 안게 된 불량 채권은 은행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게다가 버블 붕괴 후의 일본 정치 상황은 1992년의 도쿄 사가와큐빙 사건으로 발단한 간마루 신의 의원 사직,
경세회 분열, 오자와 이치로의 신생당 개양 등의 정계 재편, 호소카와 정권 탄생에 의한 55년 체제의 붕괴, 정치 개혁,
호소카와 수상의 전격 사임, 하타 츠토무의 단기 정권, 게다가 자민 사민 사키가케에 의한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의
정권 교체 등 대혼란 상태였으며, 정치는 버블 붕괴 후의 경제 상황에 충분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토지 신화 이후, 결코 하락하지 않을 것이라 알러진 지가가 하락으로 변한 이후,
2005년에 이르기까지 지가의 공시 가격은 계속해서 내려만 갔다.
2005년 이후는 일부의 우량한 장소의 공시 가격이 상승으로 변하고 있다.
또 버블 붕괴 직전에 고가로 주택을 구입해 이후 가격 하락으로 손실과 고통을 느끼는 예도 적지 않다.
버블 붕괴 후의 저금리에 은행 대출을 받아 바꾸려고 해도 담보 분열로 인하여 불가능한 경우이다.
고가로 매입한 맨션이 버블 붕괴 후에 파격적인 가격으로 팔리기 시작하면서 자산가치 하락의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도 발생되었지만 대부분은 자기책임으로서 보상을 얻지 못하고 끝나 있다.
벤저민 풀 포드는 와사 류코의 말을 빌리고 1963년 당시의 자치성이 지가의 대폭적인 가격 상승에 대해서
고정 자산세의 과세 상승률을 억제한 정책 때문에 토지가 가장 유리한 투자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일본의 토지 신화내지 버블의 원인으로서 들고 있다.
한편 외부 해외에서는 일본 금융기관이 불량 채권을 숨기고 있었다.
일본의 금융 시스템에 대한 불신감이 생겼으며, 특히 일본의 회계기준이 장부가액 회계 기준인 관계로
고가로 잡은 자산을 숨기는 수단이 되어 불량 채권 은폐의 온상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즉시 불량채권을 자세하게 기록하게 해서, 기업의 경영 상황을 공개할 것을 강요했다.
홋카이도타쿠쇼쿠 은행(타쿠가네), 일본 장기신용은행(장기신용은행), 일본 채권신용은행, 야마이치 증권이,
버블 붕괴 후의 불경기 중에 불량 채권의 증가, 주가 침체의 피해를 받아 파산했다.
파산한 타쿠가네는 지가 상승을 미리 예측해 토지 평가액에 대해서 과대한 융자를 실시했다.
결국 불량 채권이 부풀어 올라 1997년 11월 영업을 중지하였다.
정부는 당초 대기업 금융기관은 파산시키지 않는다는 방침을 택하고 있었지만
1995년경부터 시장으로부터 퇴장해야 할 기업은 퇴장시킨다라고 방침을 변경했다.
장기신용은행은 버블기에 부동산 리스 등 신흥기업에 적극적인 융자를 실시했지만
버블 붕괴 후는 이·아이·이·인터내셔널에의 고액 융자의 회수불능을 중심으로 하는
불량채권 고용 경영 부진에 빠져 1998년 10월에 제정된 금융 재생법 아래에서 파탄 인정되어 국유화 되었다.
일본 채권신용은행은 버블 붕괴로 부풀어 오른 불량 채권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1998년 12월의 금융 조사에서 채무초과라고 인정되어 국유화 되었다.
야마이치 증권은 머지않아 주가의 상승으로 손실이 해소하는 것을 기다렸지만,
은행으로부터의 지원을 잃어 1997년 11월에 자주폐업을 선택했다(실제로는 파산 선고를 받아 해산).
증권 회사에 버블 채용된 사원들은, 입사 수년만에 회사가 도산해 재취직도 쉽게 되지 않았다.
상기와 같이 은행이 파산했을 경우 해당 은행을 메인 뱅크로 하고 있던 기업도 도산의 위기에 직면한다.
대출범위가 축소되는 가운데, 다른 은행으로부터의 재융자를 받는 것 또한 곤란해진다.
은행들은 경기 전반이 나쁘게 진행되어 호경기를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더욱 더 새로운 융자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융자를 얻지 못하고 도산에 이르는 기업도 많았다.
일본 장기신용은행을 회생하는 과정에서, 동은행을 매수한 투자 조합은 거래가 있던 기업을 파탄에 몰아넣어
적극적으로 하자 담보 조항을 활용해 이익을 확보하는 행위에 나섰다.
그 결과, 라이프, 소고, 다이이치 호텔등이 파탄해,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주택 자금 수요에 대응해 설립한 주택 금융 전문회사가 버블기간 전후에
전문회사 스스로 주택융자 시장에 참가하였으며, 전문회사는 주업인 주택융자 이외의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우량한 채권은 주로 은행이 점유했기 때문에, 주택전문회사는 리스크가 큰 물건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버블 붕괴 후에는 대출해 주었던 융자처가 파탄하는 케이스에 가세해 담보설정 되었던
토지의 가격 또한 하락하였으며, 대출 회수를 전망할 수 없는 불량 채권이 증가하였다.
주택 금융 전문회사 7곳 중 6곳이 파탄하였다.
파탄에 즈음해서는 주택 금융 전문회사에 고액의 자금을 대출하고 있었던
농림계 금융기관이나 은행을 보호하기 위해서 공적자금(세금)이 투입되었다.
한편 버블 붕괴 후의 불황기 때는 규모가 작고, 리스크가 적은 개인 상대의 주택융자가
주목을 받아 거기에 주력하는 은행도 나왔다.
버블 붕괴로 인해서 관련 사업의 축소, 경영 부진이 가속화되었고,
프로젝트에 드는 대금 지불의 보증을 하고 있던 것으로 인해서 단번에 부채액이 증가해,
경영 악화가 표면화된 종합 건설업자가 다수 나타났다.
종합 건설업자의 파탄은 고용을 불안하게 만들어 사회에 불이익이 되므로
공적자금을 투입해 구제해야 한다고 하는 의견이 나오는 한편,
시장으로부터 퇴출 되어야 할 기업은 퇴출시킬 것을 권하는 논조 또한 강했다.
또한 하청 회사는 대기업 종합 건설 업자들에게 일을 수주할 시기에 즈음하여,
신용을 전제로 한 결제 바탕인 어음 지불 등을 거절하고 현금지불 조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988년에 공표된 BIS(자기자본 비율) 규제에 따라 1992년 말부터 금융기관에 본격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규제가 적용될 시기에 즈음하여 금융기관은 기업에 대한 대출 범위를
자기자본 비율에 맞추도록 축소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그런데 BIS 규제에 의해서 보유중인 주식도 자기자본으로 편입되어,
버블 붕괴 후의 주가 침체로 보유 자산이 감소해 그 만큼의 대출범위 또한 축소되었다.
금융기관은 경영에 문제가 없는 기업에 대해서도 대출에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새로운 융자건에 대해서 거절하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었다. 기존의 대출금에 대한 대출금 회수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금융기관은 총량규제에 가세하고, BIS 규제, 주가의 하락으로 인하여 대출범위에 족쇄를 채우고,
크게 확장하고 있었던 대출 범위를 자기자본 비율을 맞추도록 축소하는 필요성을 느꼈다.
이로 인해 과잉대출을 규제하고,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경기악화를 더욱 가속시켰다.
금융기관은 돌발적으로 전액 일괄 변제를 요구하는 것 외에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대출을 반복해 오던 것을 일방적으로 정지하는 것을 실시하였다.
대출을 중지, 회수시키면서 금융기관은 향후도 융자를 계속하기 위해서,
내부 처리의 사정으로 인해서, 신규·추가 융자를 모아 하나의 테두리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변명하였다.
대출금을 긴급 회수당하는 경우가 발생하면서 기업의 운용자금은 끊기고, 도산에 몰리는 기업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기업은 금융기관과의 대출약속이 휴지가 되면서 법적인 소송을 시작하였다.
기업에 대한 대출의 경우 금융기관과 기업간의 언약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업은 결정적 증거가 부족해 소송을 단념하는 케이스가 많았다.
그 외 금융기관은 특별한 이유 없이 또는 사소한 이유와 무리한 수법을 동원해 기업에 압박을 가하기도 하였다.
기업의 신규 융자건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으며, 대출거부라는 비판도 있었다.
은행에 융자를 신청해 거절 당하자마자 대출거부라고 하는 기업경영자도 많았지만,
기업의 재무상태가 나쁘거나, 과거에 회사가 도산해 보증협회가 구상권을 갖고 있거나 하는 경우에
융자를 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대출거부라고 하는 것은 경솔한 생각이다.
대출거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건전하고 재무 내용에 문제가 없는 기업이,
일방적인 금융기관의 사정으로 융자를 받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금융기관에서는 대출처 가운데 불량 채권이 증가함에 따라 준비금(대손 준비금)을 증가시키는 필요를 느꼈다.
금융기관의 수익중 준비금으로 해서 확보해야 할 부분이 증가함에 따라 이는 금융기관의 경영을 압박했다.
금융청의 발족과 금융 검사 메뉴얼에 의한 금융기관 검사의 엄격화에 의해서
한층 더 높은 대손 준비금을 쌓는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었다.
경기회복에 따라 불량 채권이 정상 채권으로 바뀌게 되면,
이러한 준비금은 금융기관의 이익에 집어 넣을 수 있게 되어
2005년 이후의 은행의 이익 확대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버블 붕괴 후, 금융 불안이 확대하는 것과 동시에, 자국은행, 일본의 기업,
그리고 일본채에 대한 등급도 차례차례 인하되었다.
그때마다 일본 국내로부터 이러한 평가절하가 부적절하다라는 항의의 소리가 나왔다.
상기의 등급설정 인하조치로 인하여 일본의 대 금융 시스템에 대한 신용이 떨어져
일본의 자국은행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통상적인 이율을 벗어난 비싼 이율이 요구되었다.
이 이율은 재팬 프리미엄(Japan premium)이라 불려졌으며,
1998년 가을에 약1%에 이르렀지만, 1999년부터 저하되어 2000년이 되면서 이 증가는 거의 제로가 되었다.
일찍이 해외의 부동산이나 자산, 기업을 구입해 진출하고 있던 일본의 기업들이,
본업의 실적 악화에 따라 철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미츠비시 토지는 록펠러 센터의 주요 부분을
매수 시가액의 큰 폭으로 밑도는 가액으로 처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큰 손실을 내며 처분되었다.
리크루트 워크스 조사에 의하면 기업의 신규 채용은 버블 경기 피크인
1991년에 약 84만명을 정점으로 찍고, 1997년에 약 39만명까지 감소했다.
1999년에 기업의 신규 채용은 약 68만명까지 상승하다가 2001년에
약 41만명으로 다시 저하되었으며, 1999년 이후 신규채용 규모가 증가하지 않고 있다.
종신고용이 중시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풍토 아래에서는 근무중인 사원을 이유없이 해고하는 것이
곤란했기 때문에 인원을 줄이는 방법으로 신규 채용을 억제하는 방법이 그 큰 이유었다.
이 시기는 인구가 많은 제2차 베이비 붐 세대가 취직하는 시기와 겹쳐졌기 때문에
경쟁이 격화해 취직이 지극히 곤란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취직 빙하기의 도래이다.
취직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많은 젊은이들이 프리타나 니트가 되어, 취직 빙하기 세대로 빠져들었으며,
그들의 불안정한 고용과 생활로 인해서 사회 보장의 부담이 늘어나는 등 큰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었다.
1998년경부터는 경영의 악화로부터 정리해고를 명목으로 한 대규모 해고도 빈발하게 되었으며
전후 최악을 기록해 전국 평균으로 5%를 넘기에 이르렀다.
중도 채용에 대해서는, 억제가 피크에 이른 1999년에는 유효 구인배율이 0.5배로 하락하였다.
당시 일부 대기업들은 약간만 채용하거나, 채용 제로도 적지 않았다.
버블 붕괴 이전에는 일정한 수준의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그 대학에 알맞은 취직처가 사실상 보장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지만 극단적인 채용 불안으로 인해서 좋은 대학의 졸업생조차 매우 곤란한 직종에의 취직을 강요당했다.
일반적으로 당해 대학 졸업자에 대해, 기업내에서 일정한 기간 교육을 베풀고 일꾼으로 길러내어
현장에서 업무에 오르게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기업 실적의 악화를 받아 교육의 여유와 여지도 없어져,
당해 졸업자에 대해서 즉시 현장업무에 적응할 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풍조도 나왔다.
1999년에 즈음하여 공무원의 인기가 매우 높아졌다.
민간기업의 도산이나 정리해고가 잇따라 신규 채용을 줄어든 가운데,
경기의 동향과 무관한 공무원의 특징이 버블기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다.
불안정한 시기의 안정성으로 말미암아 공무원을 희망하는 학생이 증가했다.
한편으로 길어지는 불황하에서도 실업의 걱정이 거의 없고, 수입감소의 고통도 당하지 않고,
연금이나 사회보험 등 복리후생도 보장된 공무원이 민간과 비교해서
너무 우대되고 있다는 비판의 여론도 높아지고 있었다.
안정된 공무원직을 희망하는 학생이 증가하는 한편으로,
불황에 수반하는 세수입 감소로 인하여 나타난 것이 바로 재정난이나,
공무원 개혁에 수반하는 인원 삭감의 영향으로 지방공공단체는 신규 채용을 축소했기 때문에,
공무원은 매우 좁은 문이었다.
지나친 취직난을 돌파하기 위해서 대졸자들이 그 학력을 숨기고 고졸의 채용범위로 공무원에 채용된 예도 있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코베시나 오사카시, 또 요코하마시 등에서 차례차례로 이와 같은 행위가 발각되었고,
이것은 또 다른 문제가 되었다.
2003년경부터 간신히 경기가 회복 기조로 변했을 무렵, 기업을 오랫동안 지지해 온
1948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의 일제 퇴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중견 사원이나 신입 사원이 1948년을 전후로 태어난 세대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나 기술을 계승하는 입장에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치는 채용 억제를 통해서 많은 기업에서 20, 30대 사원이 극단적으로 적으며,
인원의 연대 구성이 비뚤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승이 원활히 행해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여 기업은 서둘러 인원 확보에 주력하였다.
2006년 봄 입사 예정자 총수는 버블기간의 호경기와 동일한 정도로까지 회복되었다.
2006년도에서 2008년도의 졸업 대학생의 구인 사항은
버블 경기시 이상 구인이라고 말해질 정도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또 기업 전반에서는 심각한 일손부족에 딸리고 있었지만, 대학 졸업예정자들의 획득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전의 취직 빙하기 세대의 프리타나 니트, 비정규직 사원들을 정사원으로서 고용하려면
기업은 투자적 측면에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하여 소극적이었다.
2006년에 발족한 아베 신조 정권은 세대간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일환으로서 비정규직의 재챌린지 제도를 내세웠다.
그러나 제도가 정착하기 전에 아베 내각은 퇴진해버리고, 재챌린지 제도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올해 졸업자 채용의 구인이 증가한 한편, 당해 졸업자들은 불경기로 인하여
대기업 지망과 종신고용을 요구하는 보수적이고 안정지향적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대기업의 경쟁률이 매우 높아진 반면, 중소기업은 구인광고를 내고도
당해 졸업자들이 좀처럼 응모해 오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서 인력난에 처했다.
구인수나 취직율이 개선되었는 것도 것도 사실이지만 기업은 공표한 구인수 그대로의 인원수는 채용하지 않는
(채용 인원의 질을 중시하는 엄선 채용)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학생은 내정을 차례차례로 받지만,
그렇지 않은 학생은 내정을 하나 받는데 어려움과 고생이 심한 내정 격차가 생겼다.
이러한 기업위주의 구인시장은 수년간 계속되었지만, 세계 금융 위기가 표면화된 2008년 가을 이후로
버블 붕괴시보다 급격한 기세로 구인수가 침체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다시 취직 빙하기로 퇴보하게 되었다.
기업의 구조조정의 일환으로서 불황시의 경비 절감, 특히 고정비 삭감을 위해 기업의 업무를 담당하는 인원이나,
업무 그 자체를 기업 본체로부터 떼어내 외부로부터 조달하는 방법도 취해지게 되었다.
노동자 파견, 아웃소싱 등 기업은 파견업 회사로부터 인원을 조달해
기업의 업무에 충당하게 되게 하는 것으로 고용을 유동화시켰다.
기업에 입장에 있어서 파견인력은 보험이나 연금 등의 사회 보장을 생략 할 수 있었으며,
또 정년까지의 고용 의무가 없으며, 연금에 대한 부담이 없었으며, 경기에 따라 해고가 용이했으며,
능력에 따라 임금을 지불할 수 있으며, 연공서열에 따른 고임금 지불을 면하는 이점이 있었다.
기업은 또한 재료, 가공 등 제품 그 자체의 제조를 외부에 위탁해, 설비 투자나 고정 비용의 삭감을 도모했다.
또한 서버 관리 업무, DM발송 업무를 위탁하는 사례도 증가했다.
한편 이러한 공급을 실시하는 인재파견 회사와 업무 청부 회사등도 설립되어 그 실적을 늘려 왔다.
열악한 취직 빙하기에 일본의 고용이 확보된 이유는 이들 비정규 고용에 의한 임금 인하의 효과가 크다.
2007년 현재 이들 비정규직 고용은 전취업자의 1/3을 차지할 때까지 증가했으며, 기업의 실적 개선이 되어
이익을 많은 이익을 내어도 비정규직에 대한 기업의 대우와 처우는 변하지 않았다.
몇 년을 회사에서 근무해서 나이가 들어도 언제 해고될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는 커녕 결혼도 할 수 없는 비정규직 인구(특히 남성)가 증가했다고 논란이 되었다.
일본에서는 기업간에 주식을 서로 가지거나 은행이 거래가 있는
회사의 주식을 가져 안정주주를 확보하는 경향이 강했다.
주가 상승시에는 이익을 가져왔지만 반대로 주가 하락시에는 잠재손해가 되어
기업의 회계를 압박하는 부담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은행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안전과 견실을 취지로 해야 할 금융기관이
불안정한 자산, 말하자면 도박에 자금을 투자했다는 비판까지 전해졌다.
또 각각의 은행에 대해서 어디까지 닛케이 평균이 내리면 소유하는 주식이 포함된 이익으로부터
잠재손해로 변하는지를 조사해 거기에 따라 은행의 경영의 우열이나 건전성을 논하는 일도 행해졌다.
또 은행의 대부분이 잠재손해로 변하는 닛케이 평균 지수를 산출해 거기까지 내릴 이유는 없다!
거기까지 내리지 않으면 주가는 반등하지 않는다! 거기까지 내려가면 일본 경제는 붕괴한다! 등 여러 의견들이 나왔다.
동시에 주식을 매각해 서로 서로 가지는 관계를 해소하려는 움직임도 나왔다.
이것은 안정주주의 상실을 불러 왔다. 이해관계자의 대립을 배경으로
이 회사는 누구의 것인가? 라고 하는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기업은 소유중인 부동산이 정말로 경영에 도움이 될까? 정밀 조사하는 경향도 나왔다.
휴양지 등을 매각하는 움직임이 나온 것 외에도 임대료가 싼 지역으로 사무실을 옮겨 고정비를 삭감하거나
본사 빌딩을 매각해 획득한 자금으로 경영의 재건을 도모하는 회사도 나타났다.
빌딩의 매각과 더불어 새로운 소유자에게 임대료를 지불하는 형식으로 전환하는 기업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집 팔고, 월세로 사는 식으로 말이다.
토지에 대한 신화도 있어 지금까지 토지는 단지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자산가치가 있어,
토지에 대한 그 가치는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버블 붕괴 전에는 토지의 가격 산정시 지금까지의 거래 사례와 거래 실적,
주변 토지 거래의 사례에 근거하여 토지의 가격을 결정하는 방법이 주요했다.
그러나 버블 붕괴 후는 그 토지가 임대료 등으로 올리는 수익을 감안하는 수익환원법에 따르는 평가방법이 고려되었다.
버블 경기의 아래에서 지가가 상승하는데 수반해 상속세액도 덩달아 올라,
막상 부동산을 포함한 상속관련 건이 발생하면 소지 자금이 없고, 상속세를 지불하지 못하는 빈곤한 사람도 있었다.
이것에 대비하는 방법의 하나로 빚을 내 변액보험에 가입하는 수법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주가가 오르는 상황에서는 일종의 세금우대 제도가 있어 상속세의 절세가 되고,
유리한 점이 많아 은행으로부터 고액의 빚을 내서라도 가입하는 것을 권유받았다.
버블 붕괴 후는 부동산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는 것과 동시에 투자신탁이 큰 손실을 내었다.
입금되는 보험금액도 계속 감소하는 한편 빚은 고스란히 전부 남아
경우에 따라서는 보험금을 포함한 전 자산이 마이너스로 변하는 등 계약자를 고통에 몰아넣었다.
최저액이 보증되고 있는 사망보험금을 크게 밑돌았을 경우에는,
사망보험금을 획득하기 위해 피보험자가 자살을 선택한 예도 있었다.
후에 고객들로부터 리스크의 충분한 설명을 게을리 했다고 해서 많은 소송이 발생되었으며,
판결문에는 고객과 판매자 쌍방의 과실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판매자 측에 손해배상을 요청한 경우도 있었다.
버블 붕괴 후의 불황의 영향을 받아 계약의 해약이 연달아 발생되었다.
보험 부금 수입이 감소했으며, 주가 침체 영향을 받아 보험 회사의 경영을 압박했다.
버블 시기에는 저축성이 높은 연금 상품을 중심으로 높은 예정이율을 약속한
상품이 판매되고 있었지만 대출 운용의 실적이 예정 이율을 밑도는 상태에 빠졌다.
일부의 보험 회사는 최종적으로 파탄에 이르러 그 고객의 계약이
타 회사에 인계되면서 보험금액의 감소 및 예정이율이 감소되었다.
또 보험 회사의 사정으로 일방적으로 예정이율을 삭감할 수 있는 일도 검토되었다.
일본은 버블 경기가 팽창을 계속해 버렸으며,
버블 붕괴의 한 원인에 대해서는 일본정부와 일본은행의 경제정책의 실패가 지적되고 있다.
우선 버블의 발생 이유에 대해서는 먼저 말한 대로 1985년의 프라자 합의에 의한 급속한 엔고로
경기가 악화되는 것을 무서워하고, 재정, 금융정책에 의한 경기 자극을 했던 것이 원인으로 되어 있다.
일본 정부는 수차례에 걸쳐 경제 대책을 책정했으며, 1987년 5월에는 6조엔을 웃도는 재정 조치를 수반하는
긴급경제대책을 내놓았지만, 경기는 이미 1986년 11월에 바닥을 찍고,
이미 회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기 진작을 이유로 너무 자극했다는 비판이 있다.
두번째로 버블의 팽창을 억제할 수 없었던 이유로서 금융완화를 너무 계속했던 것이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금리는 1987년 2월에 2.5%로 인하되어 이 후 1989년 5월까지 이 수준을 유지했다.
1987년 9월에는 일본은행의 이사들은 금리인상을 단행할 방침을 확인하고 있었지만
10월 19일의 블랙먼데이에 의한 세계적인 주가의 하락이 있어 금리인상이 보류되었다.
금융완화가 계속된 국내의 요인으로서는 첫 번째 정부가 재정재건을 위해서 적자국채로부터의 탈피를
목표로 하고 있어 금융정책에 의한 경기 자극을 요구하는 정치적인 압력이 있었던 적이 있다.
세번째로는 대폭적인 경상수지 흑자를 배경으로 한 엔고 압력이 있던 것으로부터 금융완화에 의해서
엔고를 회피하려는 정부, 여당의 압력이 있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급격한 엔고에 괴로워하는 수출 기업의 체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도 금융정책은 완화적이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버블 팽창은 금융정책에만 기인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세계적, 국제화에 의해서 도쿄의 오피스 수요가 급 확대될 것이며,
오피스 수요가 지속적으로 부족하다는 발표를 하면서 버블기의 부동산 투자를 한층 더 과열시켰다.
재정면에서 나라의 공공투자는 억제되었지만,
호경기에 의해서 세수입이 증가한 지방 자치단체에서는 단독사업의 증가를 불렸다.
이것도 경기를 자극하게 되었다.
지방 단독사업의 증가에는 나라의 재정 적자를 억제하기 위해서
지방 단독사업의 증가를 환영하고 있었다고 하는 배경도 있다.
또 지가의 상승 국면에 국철 청산 사업단의 미이용지 판매에 즈음해서는 지가의 상승을 부추긴다 하여
매각이 동결되었지만 반대로 토지가 부추겨져 지가의 상승을 불렀다고 하는 측면이 있다.
그리고 지가의 상승에 의해서 주택 취득이 곤란해져 국민들은 정부에 대한 비난이 높아진 것이,
부동산 융자의 총량규제와 연결되어 급속한 지가의 하락을 불렀다고 하는 비판이 있다.
이러한 지가에 관한 정책적인 실패는 매스컴이나 국민의 감정적인 비판에
정부가 냉정히 대응할 수 없었다고 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버블 붕괴 후의 대응에서는 초기의 금융정책이나 재정정책에 의한 경기 자극이 소규모였던 것이 지적할 수 있다.
공공 사업에 의한 경기 자극이 그 후의 재정 적자의 확대를 불렀다고 하는 비판도 많았다.
당초의 경제 대책은 재정 자금의 투입양이 적었다. 점차 대규모 재정 자극이 필요한 한 요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일본은행은 1991년 7월에 금리를 0.5%인하했지만 그 후의 금융완화의 속도가 늦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은 외국으로부터 "Too little, too late"
(정책 규모가 너무 작아서 실행이 너무 늦어서 그 때문에 효과적인 정책은 아니다)라고 비판받았다.
은행 등 금융기관의 불량 채권 문제가 심각하게 된 이후는
조기에 재정 자금을 투입해 파탄난 금융기관의 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도 불량주택채권 처리에 6.850억엔의 자금을 투입한다고 하는 정부의
1996년도 예산안에 대해서, 매스컴 등은 금융기관에 대해서 실패의 책임을 받게 하지 않고
구제를 위해서 세금을 투입해서는 안된다고 강하게 반발하게 되었다. 국회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나중에 수십조억엔의 자금이 투입되게 될 것을 생각한다면, 조기에 공적자금의 투입을 할 수 있으면
문제의 확대를 억제할 수 있어 결국은 국민의 부담도 적어서 끝난 것은 아닐까라고 하는 견해도 많았다.
버블 붕괴 후의 침체로부터의 탈각 국면에서는 경기의 회복 경향을 볼 수 있었을 때에
재정, 금융에 의한 경기 자극적 정책으로부터 경기 억제적 정책에의 전환을 너무 빨리 실시한다고 하는 실패를 반복했다.
첫번째 일본정부의 실패는 재정정책의 실패이다.
1993년 10월에 경기는 바닥을 찍고 조금씩 회복하지만, 정부는 재정 적자의 축소를
1997년 4월부터 소비세율 2% 인상, 2조엔대의 특별 감세를 폐지하는 등, 약 9조엔의 부담증가를 실시했다.
그런데 동년에는 아시아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으며, 연말에는 금융기관의 경영파탄이 계속되었다.
경기는 극단적으로 악화되게 되었다.
두 번째 일본정부의 실패는 금융정책의 실패이다.
아시아 통화 위기의 혼란이 들어가면서 1999년 1월에 경기는 바닥에서 회복되기 시작해
일본은행은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2000년 8월에 제로금리 정책을 해제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IT버블이 붕괴하면서 수출이 둔화되면서 2000년 11월을 정점으로 경기는 또 다시 급속히 악화되어,
2001년 3월에는 다시 실질적으로 제로금리 정책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금융완화적인 양적 금융완화정책의 도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버블은 1990년 하반기에 최고치를 기록했으며, 최고치와 더불어 버블은 서서히 꺼지기 시작했다.
-버블의 붕괴 시기에 전국적으로 토지, 건물에 대한 가격 하락이 명확해졌으며, 실업률은 상승하였고,
동 시기에 기업의 고용창출은 없었다.
-1989년 12월 일본 니케이지수는 38.915까지 상승하였으며,
9개월 후인 1990년 10월에 20.000까지 떨어졌다.(거의 반토막)
-1993년부터 일본 기업의 부도가 서서히 시작되었으며, 기업의 부도가 시작되면서 주식은 본격적으로 더 떨어졌다.
-1997년 1998년 일본의 대형은행들과 채권회사들이 버티다가 파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대형 은행들 타쿠쇼쿠(홋카이도)은행과 일본장기신용은행(타쿠쇼쿠은행채권대량보유),
인본채권신용은행, 야마이찌증권회사와 작은금융은행 및 금융기관들이 파산하였다.
-타쿠쇼쿠은행의 경우 파산하기 전 모 TV프로그램에서 사실상 이 은행은 파산이나 마찬가지라는 발언이 터져나왔고,
그 다음날 예금자들의 동시다발적인 인출현상이 발생하면서... 타쿠쇼쿠 주식이 주당 200엔으로 떨어졌다.
-타쿠쇼쿠은행이 파산한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국민들은 3일동안 4.900억엔에 가까운 돈을 전국단위로 인출하였다.
-국민들의 대부분은 금융기관이 파산하기 하루전에 알았다.
그 다음날 은행앞에 맡겨 둔 현금을 찾기 위해 많은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
-버블 붕괴 기간 동안 구직자의 구직이 어려워졌으며,
버블 호황기 동안 비인기 분야였던, 안정적인 공무원에 지원하는 졸업자들이 많아졌다.
-버블기간동안에 일본의 물가는 많이 올랐다. 그러나 버블 붕괴 이후...
비싼 물건은 수요가 급감하며, 더 이상 팔리지 않았다. 일본 국민들은 10원이라도 싼 물건을 구입할려고 했으며,
상품의 생산자와 판매자는 가격을 점차적으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긴 글 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2일간의 피로를 풀어주는... 짧은 댓글 하나 달아주는 센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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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ㅋ 애들 보기 편하라고 띄어쓰기하고 오타 수정, 교열 좀 한거 빼면 다 펌글임..
하나 궁금한게 요즘 엔화가치 원화대비 왜이렇게 계속 고점이냐? 그거좀 설명좀...무식한 공돌이라 잘 모르겠음. 일본이란 나라는 개차반인데 엔화가치는 왜 계속 높은건지.
그건 간단해 미쿡때문이지. 버블이 터지기 전에는 일본이 경제 2위의 대국이었다. 물론 지금은 대륙이지만. 그때부터 미국이 일본 목을 졸랐다고 생각하면 되. 엔화가치가 원화대비 고점이라는게 중요한게 아니야. 결국 달러대비 엔화도 쌔다는게 요점이지.
그렇게따지면 우리나라도 IMF터지고나서..
gg
저때 북송선 탄놈이 진짜 세상에서 젤 병신 아니냐? 북한 도착 하고 담날에 바로 정치범 수용소 끌려가서 강제노동 12시간 ㄱㄱ 지금은 생사도 확인 안되는 애들이 태반
진짜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