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나주역의 역사의 모습
지금은 허름한 나주역,나주시의 승격으로 신역사 나주역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수 많은 역사적인 사연을 담고 있다. 1923 년 일제강점기에 일본학생들이 조선의 여학생을 희롱하고 장난과
행패를 부리는 사건 , 그 여학생의 사촌동생 남학생은 광주고보 남학생 후에는 일본와세다 대학에 유학을
다녔으나 이 남학생 ,박준채가 그냥 가만히 있을소냐?
열차안에서부터 일본 학생들과 조선의 학생들사이에 시비가 오고가고 일본 학생들은 조선의 식민지 약소국
의 한 여학생을 우습게 보고 희롱을 하고 장난을 치고 야만스럽게 대하는 행동에 불만이 터지는 조선의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을 하는 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싸움이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광주농고에서는 광주에서
농기구인 소시렁과 쇠갈퀴등을 들고 나와 일본학생들과 한 바탕의 전투가 벌어진다 .전국의 54.000면의 학생들이
이 사건에 참여하여 민족의 울분을 터트리는 3대 항일 독립운동의 하나로 비화한다.
나주는 유독 천년 목사골로 지금도 4대 성문이 복원되어 고도의 도시로,혁신도시의 개발로 전남의 발전도시로
비약을 하고 있다. 늑히 나주배가 유명하며 , 나주의 김천일 의병장은 아들 김상건과 함께 진주성에 참여를 하여
혈전에 다 하였으나 촉석루아래 진주의 남강에 아들과 함께 투신을 하여 조선인의 자존심을 살려주는 기개 높은
선비로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영산강변의 풍호마을의 잎구에는 '영모정'이라는 정자가 아담하게 영산강을 바라보며 호남의 선비들이 시국의 걱
정과 상호 시.문을 교류하며 향토의 정신적인 문학적으로 겸비를 하며 국문학사에 걸죽한 백호 임재를 낳게 한
문학의 고장이기도 하다. 진사.생원을 합격하고 그 이듬해 과거급제를 하여 벼슬의 자리가 탄탄한 자리인 평양감사
자리도 초개처럼 생각하는 시대를 뛰어 넘는 깨어 있는 문인이며 자유인으로 수많은 기녀들과의 주고 받은 시로
그를 내보이고 있다 ( 다른 작품은 후에.)
평양감사의 부임을 받고도 임지에는 도착을 하지 않고 조선중기의 여루시인인 '황진이'를 찾았으나 이미 황진이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다 .황진의 묘소에 주과포로 잔을 올리면서 "청초우거진 골에 자는냐 누었느냐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남았으니,잔잡아 권할리 없으니 그를 서러워 하노라"라는 명시를 남기기도 하였다.그러나 일게 사대부
가 임지에는 가지를 않고 기녀의 묘소를 찾았다는 이유로 봉고 파직을 당하였다. 그의 시조 임탁은 고려의 신하중에
조선의 개국에 반대하여 숨어버린 '두문동 출신72현인'중에 한 분이시다.
영모정의 주인공 승지공 벼슬을 한 '임붕'은 임재의 조부이시며 승지공을 한 분이시며 정암 조광조 유배에 반대를 하여
한양에서 나주까지 도보로 시위를 한 성균관의 선비이기도 하다. 일명 '금강11인수계"의 일원이다 필자의 16조 김식
도 같이 함께한 나주의 선비이시다.한양에서 나주까지 성균관 유생 200여명이 도보로 시위를 하여 나주의 영산강변의
자그마한 '금사정의 정자를 짓고 , 우리는 봄철의 복사꽃이나 살구곷이 아닌 ,선비의 기상인 동백꽃을 심어 5 백년이 지난
후에도 이른 겨울철에 동백꽃이 피어 옛선비들이 기상을 알리고 있으며 그의 정자앞에는 유일하게 하동정씨 한분 정일손
선비의 시 한 수를 약5년전에 시비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필자도 저의 할아버지 후손의 대표로 참석을 하여 자리를 함께
하였다. 하여야 할 나주의 향토적인 이야기는 많으나 삶방에 너무지루 할 것 같아 여기서 줄임니다 읽어 주신분들에게는
감사를 드림니다.
글쓴이/ 나주향문학회 소속 만장봉 김용상 씀
첫댓글 아. 그 역이 나주역이군요. 가보지 못했습니다.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이나 일제국때나 전라도 분들이 큰일 많이 하셨죠. 제 조상님들은 서울분들이라 아마 선조하고 도망친 분들일지도 몰라요.
허름함 나주역의 한시대를 가슴아프게 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이글에서는 제시를 하지않았지만 참된 일본의 지식인들이 우리나라와 함께 일제 사죄비를 10월17일에
나주 역주변의 역사공원에 세웠읍니다 과거일제가 조선인들의 수많은 동학군들을 죽이는 죄를 사죄하는
의미이지요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사죄비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전 나주 금정산 꼭대기에서 군생활 했기에 나주역을 잘알고 있습니다.
나주의 진산에서 군생활을 하였지요
금성산에서 저멀리 나주평야가 펼쳐지고 영산강이 유유히 흐르고 봄철에는 배꽃들이 하얗게 피어
아름다운 산과 강 그리고 꽃들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고장이며 농산물과 영산강의 해산물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저도 나주인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오래전 광주서 나주 방면 ㅡ마량까지 가본기억이 나네요
멀고도 긴 여정이엿죠
좋은 여행을 하셨군요
강진에서 마량까지의 강진만의 바닷가의 풍광이 아주 멋드러지지요
북쪽으로 만덕산중턱에 다산 정약용선생의 18년 유배지인 다산초당이 자리를 하고 강진의 읍내에는
일제강점기에 시인이신 영랑 김윤식선생의 생가가 지키고 서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오늘 도 한수 배웁니다.
뭐 배울것 있습니까? 그냥 심심하여 그냥 릭어보시고
나주의 역사를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지요 감사합니다
전라도가 전주와 나주에서 한 글자 씩 따온 道名이니
나주가 오랜 세월 풍요롭고 유서 깊은 고장임을 알겠습니다.
남도 여행을 하노라면 여수 목포 신안 등 해안 위주로 다녔는데
유서 깊은 선비의 고장 나주도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
나주에 오시면 한 바퀴를 돌면서 나주의 역사와 해설을 하여준 관광 가이드를
이용 하시면 나주를 많이 이해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직을 하지않고
전라도에서 직장을 갖고 생활을 하였다면 지금쯤은 호남의 사학자가 되었을것 같은 생각도 하여 봅니다
서울에서 50년의 객지생활에서 치열한 경쟁만하였지 별볼일없이 고향으로 낙향을 하여 시간을 소일하고
있습니다 항상 관심을 가지시고 저의 글에 참여하여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씀 해주셔도 큰 공부가 됩니다
만장봉님 늘 쉬지 않고 학문에 몰두 하시니
건강 해칠까 염려 됩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요
나주 역 정말 역사으 현장이군요 저 소박한 역의 모습이
운선작가님의 격려와 수고로움에 항상 감사를 드림니다
거리가 가까운 곳이라면 한번만나서 식사와 고품격의 카페에서 차 한 잔 나누며 고품격의
문학의 이야기 역사의 이야기 등등 할 이야기도 많을 것 같은데 ....
많이 아쉽습니다 지가 년 말 정모도 참여를 하고 싶으나 걷기가 불편하여 참여도 못하고 글로써 만나뵙고 있지요
계속에서 공부를 한 내용이라 특별히 공부를 한 것은 아니고요.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참고자료를 한번 더 훌터 볼 정도입니다
나이도 있고 특별히 무리를 않하고 산책과 걷기를 하고 오후에는 동네병원에서 항상 물리치료를 받고 건강유지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염려를 하여 주시어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지금은 방송통신대도 졸업을 하여 마음 한 편으로 홀가분 마음으로 글쓰기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