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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화엄 수행의 몇 가지 측면에 대한 연구
대다수 동아시아 불교, 특히 선에서처럼 화엄에서도 철학적인 기초로 돈오(頓悟)의 교리를 선호한다. 모든 중생들 안에 청정하고 빛나며 오염되지 않는 불성, 일심이 이미 존재하기도 하지만 상즉상입이라는 화엄의 교리는 깨달음을 향하는 보살도의 초지(初地)에 불성이 이미 존재한다는 사상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장은 ‘각각의 단계’에서 ‘수행자는 보살이고 붓다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초발심에서부터 해당한다. 법장에 따르면 만약 보살이 처음 발심을 하였거나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이미 붓다이고 『화엄경』의 관점에서 이것은 전체를 의미한다. 보살은 자신을 붓다로 보아야 하고 그에 맞게 행동해야만 한다. 『화엄경』과 화엄사상의 기반 위에서 수행 정신의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한 위대한 한국 승려 지눌(知訥, 1158-1210)이 추종했던 이통현(李通玄, Li Tongxuan, Li T’ung-hsuan, 635-730)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자의 초발심이 본래 도의 완성이고 바로 궁극적인 불성의 실현이다. … ‘믿음’ 또는 깨달음의 가능성에 대한 신심은 선행적이고 인과적인 양상에서 보면 깨달음 그 자체이다.
법장에게 돈오는 필수적이다. 본체, 즉 진여는 언어를 초월한 것이므로 기껏해야 일시적인 효력을 갖는 수행의 단계를 넘어선 것이다. 수행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깨달음의 상태를 창조할 수 없고, 그러므로 수행과 깨달음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불교에서 돈오를 주장하며 깨달음이 일어나기를 좌선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이다. 오히려 계율과 선정 수행이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화엄경』 독송은 수많은 중국 재가불자 결사(結社)의 주된 관심사였다. 이 재가 결사단체들은 중국불교 수행의 중요한 특징이다. 본래 이들은 중추절 등과 같은 명절을 지키는 채식주의자들을 후원하기 위해서 결성된 것이다. 그들은 이 후원에 참여하면 공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재가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 후에 결사는 좋아하는 경전을 독송해서 공덕을 쌓기 위한 모임이 되었다. 그들이 바라는 공덕은 가족과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거나 조상을 기리거나 내세에 더 나은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거나 또는 대승의 최고 목적인 모든 중생들의 행복을 바라는 것 등 수없이 많았다. 『화엄경』은 그러한 결사단체들에서 특히 선호한 경전이었다. 그것은 아마 『화엄경』에 나타난 장엄한 광경과 신비한 내용의 결과와 독송과 관련된 신통력 때문이었을 것 이다. 화엄결사는 보안이나 두순처럼 『화엄경』 독송을 일상 수행으로 삼은 신통력을 지닌 승려들 주변에서 발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승려들은 재가 신도회를 조직하였고, 신통력을 부리는 자신들보다 경전 자체에 중점을 둔 의식(儀式)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의식과 축제는 자연스럽게 중국 사회에 뿌리내려 그 지역의 토착신들에게 희생을 바치는 지역 공동체의 축제를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재가자들의 경전 독송이 축제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 화엄결사 가운데 일부는 규모가 매우 커졌고 잘 조직되었다.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러한 결사는 후대 중국 역사에서 중앙정부와 대립하는 비밀결사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붕괴되면서 이 재가신자의 화엄결사는 불교 교단과 불사(佛事)를 위한 후원자로서 보다 중요하게 되었다. 이 지역사회의 후원이 커진 것은 당나라 후기에 화엄사상에 기초한 수행의 비중이 커졌고 대중이 화엄사상에 더욱 관심을 두었다는 점을 반영한다. 반면 화엄종은 독립된 종파로서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점차 실천적이고 현실적이며 또한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는 선종과 같은 종파에 융합되었다(Gregory 1983: 278 이하를 보라)
6. 불교예술에서의 『화엄경』과 비로자나불
자바섬의 정글에 있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에 만들어진 보로부두르(Borobudur)의 불탑은 대승불교 문화의 기념비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전체가 언덕에 계단식으로 단을 만든 만다라(曼茶羅)를 형성한다. 그 언덕은 밑에서부터 차례로 다섯 개의 직사각형과 네 개의 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순서대로 올라가게 되어 있다. 원형 평면은 카다란 중앙의 탑을 정점으로 하는 세 개의 작은 탑들의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직사각형 평면에 있는 회랑과 벽감(壁龕)의 조각과 부조들은 유적 위로 올라온 예배자를 우주의 낮은 단계에서부터 위쪽의 붓다들에게, 그리고 마침내 중앙의 붓다에게 가는 길을 인도한다. 이 조각과 부조들은 수행자들에게 업과 윤회를 가르치고, 석가모니불의 생애를 말해 주고, 보살로서의 붓다의 전생 이야기인 『자타카』를 묘사하고 있다. 또한 그것들은 「입법계품」의 전체 내용을 묘사한다. 그러므로 기쁨으로 가득 찬 선재가 한 번에 세 걸음씩 뛰어오르는 장면을 묘사 한 판화도 있다. 그 보살은 모든 중생들의 귀의처가 될 것을 서원하고 지옥과 윤회의 다른 세계에 중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보현보살이 한줄기에 세 송이의 꽃이 달린 연꽃을 들고 선재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는 장면이 보이기도 한다. 격렬하게 북을 치거나 나팔을 불고 여러 다른 악기들을 연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고요한 선정에 들어가 있는 중앙의 붓다에게 음악을 공양하는 것도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보현의 서원 가운데 하나는 ‘허공이 다할 때’ 그의 서원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허공의 끝을 찾으려고 허공을 나는 보살을 교묘하게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중앙아시아에서 분명히 『화엄경』과 관련된 인물들을 묘사한 최초의 예술작품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 안에 다른 붓다들과 우주의 모든 등장인물들을 포함하고 있는 우주적 붓다로서의 비로자나불을 묘사하고 있다. 6세기 코탄 지역에는 광배(光背)에 둘러싸여 있고 가슴에 다른 붓다들을 품고 있는 채색(彩色) 입상불(立像佛)이 있는 석굴이 남아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 무역로 북부 쿠차(Kucha)와 가까운 키질(Kyzyl)에 6세기 혹은 7세기의 동굴벽화에 입상불이 남아 있다. 이 불상들은 오른손을 들고 있고 다섯 명의 붓다들이 가슴에 엇갈려 새겨져 있고, 다리 아래에 인물상들이 있다. 인물상들도 또한 광배의 빛 속에 있다. 카라샤르(Karashahr)에 있는 거의 동시대의 벽화에서 광배는 연꽃, 물속의 용, 백조가 있는 바다(우주의 바다?)의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거기에는 붓다와 다른 인물들이 반대편에서 가슴, 팔, 다리를 마주하고 있고, 무릎에 있는 두 인물상은 해와 달을 형상화한 것으로 밝혀졌다. 마지막으로 7세기 벽화로 특히 유명하며 실크로드의 남쪽에 위치한 발라와스테(Balawaste)의 벽화는 선정에 들어간 비로자나불로, 어깨 위에는 해와 달, 그리고 가슴에는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 같은 우주적 상징으로 덮인 몸통과 팔들이 묘사되어 있다. 거기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하고 같은 시기에 도금을 한 입상의 비로자나불이 남아 있다. 이 비로자나불은 수미산을 안고 있고, 그의 앞에는 해와 달이 있고, 뒷면에는 육도(六道) 윤회의 길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중국에서도 6세기 비로자나불상이 있는 데 이것은 그의 가사(袈裟) 안이나 가사 위로 붓다들과 중생들을 묘사하고 있다.
이 불상들은 비로자나불의 우주적 본질을 매우 생동감 있게 묘사하 고 있다. 이것의 다른 조각 기법은 오로지 크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한 기법은 위에서 보았듯이 정치적으로 비로자나불과 황제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던 중국과 일본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약 5세기경부터 인도의 방식을 따른 거대한 석굴사원들이 건축되었다. 그곳은 오랜 시간과 야만적 이민족들의 파괴를 견디고 남아 있는 불상과 회화들로 장식되어 있다. 석굴사원은 뛰어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항구적이고 (물이 새는 지붕이 없으므로) 유지·보수가 쉬우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또한 이 석굴사원들이 대중들에게 감화를 주는 심리적 상징이 되고 대중들을 통일시키는지는 의문 이다. 석굴사원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낙양(洛陽) 근처의 용문(龍門)석 굴이다. 측천무후는 용문에 있는 사원과 불상들의 건축에 엄청난 지원을 하였다. 사원은 강 협곡 절벽의 사암(砂巖)을 깎아 만들었고, 중앙에 조각된 불상은 바닥에서 후광(後光)까지 약 15미터 높이의 비로자나불이다. 이 불상은 672년부터 675년까지 3년에 걸쳐 조각되었다. 그 때는 측천무후가 재위하고 있었고 법장이 살아 있던 시기였다. 이 불상은 한 겹의 가사를 걸친, 표정이 딱딱하고 무뚝뚝하고 거대한 불상이다. 중앙 본존불의 후광에는 아주 작은 불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8세기에 수많은 중국 승려들과 인도 승려 보리선나(菩提僊那, Bodhisena)가 화엄불교를 일본에 전했다. 성무천황, 보리선나, 행기(行 基, Gy?gi; 불교를 전파하고 왕을 보좌하면서 행정에 참가함)보살과 또한 승정(僧正) 양변(良辨, R?ben)은 함께 동대사(東大寺)를 건립했다. 이 사원은 1970년대에 7만여 명의 신자를 지닌 일본 화엄종의 본산이다. 일본불교는 초기부터 국가의 기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나라(那郞)시대(710-94)에 특히 성행했다. 735-37년 일본에서 천연두가 유행하였을 때 왕은 각 지방에 5미터 높이의 불상을 세우고 반야경을 사경하도록 하였고, 이어서 사찰과 탑을 건립하도록 명령하였다. 모든 사찰들은 동대사가 감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주된 관심은 근본적인 천연두 예방책으로서 동대사에 16미터가 넘은 거대한 청동 비로자나불을 건립하는 것이었다. 또한 신도(神道)에서 모시던 태양의 여신이 그 불사를 허락했다고 한다. 여신은 비로자나불이 태양이라고 하였고 이것은 불교와 신도의 결합은 물론이고 나아가 불교 포교 활동의 유용한 기반이다. 이 불상은 거대한 중국 불상에 기초한 듯 하지만 동대사의 불상은 부분적으로 쇠로 주조되었다. 불상이 완성된 후에 부처님의 자비로 일본에서 처음 금이 발견되었고 이로써 전체 불상에 금도금이 가능해졌다. 동대사 비로자나불이 있는 목조건물은 가장 거대한 목조 건물로 남아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2세기의 것은 불타 버렸고, 16세기에 재건한 것도 불타 버렸다(석굴에는 이런 일이 없다). 현존하는 건물은 원래 크기의 2/3에 불과하지만 단일 지붕 아래 있는 목조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비로자나불상 자체는 크기를 제외하면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특히 화재로 인해 몹시 손상되었고, 복원이 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본예술에서 보현보살은 종종 그가 타고 다니는 흰 코끼리와 함께 묘사된다. 그러나 일본예술에서 비로자나불의 중요한 협시보살로서 (문수보살과 함께) 나타나기도 하는 보현보살을 숭배하는 더 큰 이유는 화엄종보다는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법화경』과의 관련 때문이다. 이에 이 『법화경』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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