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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1일 화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 창세 32,23-33
복 음 : 마태 9,32-38
그때에
32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33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35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36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37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38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에 읽었던 ‘수도자처럼 생각하기’(제이 셰티)에서 읽었던 문장을 소개합니다.
“건강한 습관은 처음엔 하기 싫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진다.
건강하지 않은 습관은 처음엔 하고 싶지만, 하고 나면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정말로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저를 ‘새벽형 인간’으로 부릅니다.
워낙 새벽에 일어나 일과를 시작한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 신부 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만 해도
누구보다 늦게 일어났었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저에 대해 사람들에게 ‘올빼미형 인간’이라고 소개하면서 말이지요.
그러나 항상 늦게 일어나는 저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저의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즉, 새벽에 일어나기를 실천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어떠했을까요?
하루 종일 피곤해서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했습니다.
처음에는 하고 싶지만 결국 기분 나빠지는 것이 참 많습니다.
운동 안 하기, 기도 안 하기, 책 안 읽기, 텔레비전 보기,
인스턴트 음식 먹기,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보기….
이렇게 하길 바라고 또 쉽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점점 좋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하기 싫은 것도 있습니다.
운동하기, 기도하기, 봉사나 희생 실천하기, 독서하기,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하기 싫은 것이기에 행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고 나면 행복해집니다.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할까요?
진정한 행복을 위해 처음에는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지는 건강한 습관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모든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마귀를 쫓아내자,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모함합니다.
이 모함은 계속되어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하기까지 합니다.
그런 모함을 멈추기 위해 그들에게 강력한 벌을 내려 어리석음을 꾸짖으면 안 되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사랑만을 전해주십니다.
벌하시는 하느님이 아닌, 사랑의 하느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진정한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의 길로 가는 우리를 바라보며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하기 싫어도 하고 나면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꾼이 필요하다면서,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라고 하십니다.
그런 일꾼들이 가득해야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서 사랑의 삶,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사람들만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특성’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자주 사용한다고 합니다.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동네,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나의 남편, 나의 아내가 맞는 말 같은데
우리라는 말을 자주 하니 우리 아내, 우리 남편이라고 합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우리는 고려, 조선으로 왕조는 바뀌었지만
거의 1,500년가량 한 국가의 통치 체제에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입은 1,000번 이상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외세의 침입에는 똘똘 뭉쳐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는 말에는 친밀함이 있고, 동질감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사말에는 ‘밥은 먹었는지요? 다음에 밥 한번 먹어요.’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나라에는 거의 없는 인사말입니다.
‘십시일반’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주변에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이 있으면
나의 일처럼 도와주었습니다.
지하철에서 아이가 울면 일본 사람은 아이 엄마를 째려보고
아이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다음 역에서 내린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울면 사람들이 가서 아이를 달래 주려고 하고,
아이 엄마가 다음 역에서 내리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있어서입니다.
식당에서도 일하는 분을 ‘이모’라고 부르고, 친구의 엄마도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우리라는 친밀감이 가족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곱은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네가 하느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으니,
너의 이름은 이제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성’은 무엇이 있을까요?
하느님께 선택받았다는 ‘선민의식’이 있습니다.
당대의 많은 나라는 ‘여러 신’을 섬겼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오직 ‘야훼 하느님’만을 섬겼습니다.
‘유일 신’을 믿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록하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구약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과 함께 성경은 21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접하고 있습니다.
한 민족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읽고,
삶의 이정표로 삼는 경우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족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었음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리고 딸을 고쳐 달라는 이방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자 이방인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강아지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은 먹습니다.”
이스라엘은 서양문화의 원류가 되었고, 이스라엘은 신약의 뿌리였으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와 교회는 이스라엘이라는 토양에서 잉태된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받아들였습니다.
한국교회는 100년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신앙 때문에 재산을 버렸고, 벼슬을 포기했고, 고향을 떠났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것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용감하게 순교로서 신앙을 증거 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은 7000킬로를 걸었습니다. 행동으로 신앙을 증거 하였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사제를 영입하기 위해서 얼어붙은 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습니다.
복녀 강완숙 골롬바는 목숨을 걸고 사제를 보호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박해를 받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앙인이 정말 작은 이유로 신앙의 길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고통스러운 현실이지만 같은 현실입니다.
우리는 선조들이 지켜온 신앙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앙드레 지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녁을 바라볼 때는 마치 하루가 거기서 죽어 가듯이 바라보고,
아침을 바라볼 때는 마치 만물이 거기서 태어나듯이 바라보라.
그대의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마다 새롭기를. 현자란 모든 것에 경탄하는 자이다.”
어렵지만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쉽지만 의미 없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일꾼다운 일꾼으로 살아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9,38).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확할 것이 많다는 것은 돌봐줘야 할 사람이 많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보는 일을 할 사람이 적다니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 희생 봉사하는 사람보다
자기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거두는 날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수확을 한다는 것은 일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마태3,12)분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수확한다는 것은 우리 인생 마지막 날의 심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정 심판의 날에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준비시킬 일꾼이 필요합니다.
그 일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입니다.
주님의 도구요, 연장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습니다.
추수 날에, 곳간에 모아들일 알곡이 된다는 것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성장 되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렸으면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내며 관리를 해야 합니다.
햇볕을 쬐어야 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선택받아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뿌려졌다면
그 영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하고 성령의 비추임을 받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사실 매 순간이 마지막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 상황 안에서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천국을 살지 못하는데 훗날 어찌 영원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 여기서부터 천국을 살고 또 우리의 이웃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일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일꾼으로 복음의 선포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고쳐 주셨듯이
교육사업과 선교, 병원 사목과 복지 사업에 헌신할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희망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구원사업이 완성되는 데 한몫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사람들은 마귀 들려 말 못 하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는 말을 못 했으므로 다른 사람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믿음을 요구하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그의 장애를 해결해 주셨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 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33절)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33절)
군중이 이렇게 놀라워하니까, 바리사이들이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33절)
비방한다. 군중이 예수님을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 못 하는 사람이 말을 하고,
한때 그가 거부했던 분께 영광을 드릴 수 있도록 혀가 풀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 모순되는 말을 하며 예수님을 헐뜯는다.
이 말은 그들의 사악함에서 나온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헐뜯는 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오직 선을 행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려고 두루 다니셨다.
하늘나라의 복음과 병 치유라는 두 가지 축복을 하고 그들을 직접 찾아다니셨다.
그것을 주시기 위해 작은 마을도 지나치지 않으시고 두루 다니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왜? 주님께서는 이 사람들이 더러운 영의 손아귀에 든 데다
율법의 짐까지 지고 있어서 가엾이 여기셨다.
그들이 다시 성령의 보호 아래로 돌아가도록 도와줄 목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선물의 열매는 풍성히 준비되어 있는데 그것을 거둘 일꾼들이 필요하였다.
영의 선물은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줄지 않는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37-38절)
주님은 하느님께서 수확하는 일꾼들을 넉넉히 보내시어
성령의 선물이 준비하고 있는 것을 거두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선물을 쏟아부어 주신다.
풍성한 수확은 모든 믿는 이를 의미하고,
적은 일꾼은 수확을 위해 파견된 사도들과 그들을 본받는 사람들이다.
주님의 이 말씀은 그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려준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이 청원도, 기도도 하기 전에
제자들을 사도로 지명하시며, 타작마당을 키질하여 알곡은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버리는 분에 관한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바로 그분 자신이 농부이며, 수확할 밭의 주인님임이 드러난다.
그분이 그들을 수확할 일꾼으로 파견하셨다면 수확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것이라는 것이다.
그분의 일꾼으로 사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 베네딕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사부 베네딕도의 대축일입니다.
‘베네딕도’(Benedictus)라는 이름의 말뜻은 “좋게 말한다.”, “복 받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오 성인은 그의 <대화편>에서 말합니다.
“베네딕도는 은총과 이름으로 복 받은 분이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되리라.”(창시 12,2)
이는 단지 복을 주리라는 것을 넘어서, “네 자신이 복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부 성 베네딕도께도 해당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베네딕도의 후손인 우리도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레고리오 성인의 말씀처럼,
“은총으로도 복이 되고, 이름으로도 복 받은” 삶은 어떤 삶,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 그대로’ 우선 형제들에게 좋게 말하는 것, 형제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닐까요?
곧 입에 항상 찬양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닐까요?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시편 33,1)라고 노래한 시편 작가처럼,
언제나 주님을 찬양하고, 형제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아닐까요?
베네딕도께서는 <수도규칙> ‘머리말’에서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하라.”(머리말 30)고 하시고,
72장에서는 형제들 간에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72,4)고 하십니다.
곧 ‘복받은 이’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형제를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 안에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을 “하느님의 집”(베규 31,19)이라 명명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집”, 이는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베네딕도께서는 그냥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을 위한 집’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집”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함께 사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며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는 사람들이요, 하느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살림”(Economia)라는 말은 아주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이는 ‘집’을 뜻하는 말(oikos)와 '규율'을 뜻하는 말(nomos)이 합쳐진 단어입니다.
이를 우리말로는 “살림살이”, 혹은 줄여서 “살림”이라 표현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이는 서로를 살리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서로를 살리며 서로에게 복이 되어주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살림”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하느님 집”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는 수도원에서 함께 공동으로 드리는 성무일도기도를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이 또한 참으로 놀라운 표현입니다.
그저 ‘기도’라 하지 않으시고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그냥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또는 ‘하느님께 바치는 일’이나 혹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지 않으시고,
굳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명명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며,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가족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일하기보다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분과 함께,
‘섬기면서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고 싶어 하시는 일을 나와 함께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허용해드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관심이나 계획, 혹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며, 하느님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만약,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보이거든,
눈을 돌려 바로 그것을 비추고 있는 빛을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빛이 비추인 곳의 어둠을 보기보다 그 어둠을 비추는 빛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으로 빛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집”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며,
우리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을 찬양”(머리말 30)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
주님!
시달리며 기가 꺾인 이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제 마음에 심으소서.
제 손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게 하시고, 제 말이 꺼져가는 불씨를 끄지 않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있는 그들을 더 이상은 못 본 척 무시하지 않게 하소서.
모르는 척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병고와 세파에 시달리고 절망과 슬픔에 기가 꺾인 이들의 바람막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선포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야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으로써 마태오가 집성한
예수님의 10가지 기적사화에 관한 보도(8-9장)는 일단 막을 내리고,
12제자의 선발과 파견설교(10장)가 새로운 장을 열게 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사건으로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보도한다.
기적사화 집성문의 마지막 열 번째 기적이다.
그러나 기적에서 보다시피 벙어리 치유에 관한 내용(33a절)은 단 한 줄에 담겨있고,
나머지는 치유사화에 대한 군중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상이한 반응(33b-34절)을 소개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에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한
전반적인 복음 선포 활약상(35-36절)을 요약하고 있다.
끝으로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제자들의 협조가 필요함을 암시함으로써(37-38절)
제자 선발과 파견설교를 예고한다.
마태오가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를 이토록 간단하게 보도하고,
오히려 그 반응을 상세히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간단하다 보니 좀 성급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돋우는 일이 있다.
마태오 복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벙어리 치유와 사람들의 반응에 관한
오늘 복음의 대목은 나중에 중복하여 보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22-24 참조)
뿐만 아니라 어제 복음(9,19-26)과 오늘 복음(9,32-38) 사이에
빠진 부분(9,27-31)도 다시 반복됨을 발견할 것이다.(20,29-34 참조)
비교적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마태오가 어떻게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물론 자세히 살펴 하나씩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르게 보이기도 할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같다.
서로 다른 점은 두 가지의 기적사화가 9장에서는 대략적으로 다루어지고 있지만
12장과 20장에는 약간 다른 표현을 사용하여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의문점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마태 11,2-6)에서 풀린다.
특히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진다.”(15절)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하느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적이 증언되기 전에
소경과 벙어리 치유가 先在 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마태오가 예수님의 기적 사화들을 논리적으로 한데 모아
집성하려는(8-9장) 과정에 따른 無理數로 지적된다.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제 복음과의 사이에 빠진 부분을 살펴보아야 한다.
빠진 부분은 예수께서 회당장의 딸을 다시 살려주시고
그의 집을 떠나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일어난 소경의 치유기적사화이다.
이 대목의 原典은 바로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리고의 소경치유사건(10,46-52)이다.
물론 마태오는 원전에 충실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改作한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7절로 이루어진 대목을 5절로 축약하면서
1명의 소경을 2명으로 바꾸었고,
地名(예리고), 소경의 이름(티메오의 아들 바르티메오),
그리고 소경의 간절한 부르짖음과 사람들의 나무람 등을 삭제해 버렸다.
이로써 예수님의 권능이 뚜렷이 부각 되며, 그것도 소경 1명을 2명으로 바꾸었으니,
마르코에서보다 2배로 강하게 드러난 셈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치유된 두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緘口令을 내리신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들은 곧장 달려가 온 동네에 소문을 퍼뜨린다.(30-31절)
예수님은 다 알고 계신다.
당신에게서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사람들의 입을 막으려는 이유를 오늘 복음과 연결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비록 마태오가 단 한 줄로 보도하고 있는 마귀 들린 벙어리의 치유사건이지만,
이 사건은 분명 앞서간 소경치유 끝에 내려진 緘口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예수님의 정체를 똑바로 알고, 그분께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벙어리가 다시 말을 하게 된 것을 보고 군중이
“이스라엘에서는 처음 보는 일이다”(33절)라고 웅성거리며 놀란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 편에 서서 같이 놀라거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저 사람은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34절)하며
빈정거린다고 해서 이들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
군중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기에 감탄했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기적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둘 다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불쌍한 사람들”(26절)일 뿐이며,
예수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은, 진정으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예수님께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도와 세상의 秋收에 필요한 일꾼이 되는 것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이 예레미야 수녀
오늘 복음에서는 열 가지 기적사화(8-9장)의 마지막으로
마귀 들린 말 못 하는 벙어리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 예식 중에 마귀 들린 벙어리를 치유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이런 마귀는 쫓아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벙어리들은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귀 들린 벙어리는 자기의 이름을 알아들을 수가 없으니
치유자가 자기의 이름을 불러도 알아들을 수 없으므로 반응도 없다.
마귀 들린 벙어리를 예수님이 고쳐 주셨는데 군중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한 부류는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일이없다.”라고 하고,
다른 부류는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치유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과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치유의 힘이 하느님의 능력이라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고
마귀의 힘을 빌려 한다는 부정적인 반응이 대조를 이룬다.
신앙인의 태도와 불신앙을 가진 이들의 태도가 극과 극으로 대조를 이룬다.
우리들도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해 동문서답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면 상대방은 답답해한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이웃의 얘기를 듣지 못하니 자기 것만 주장하는
고집과 아집이 나오게 되고, 고집불통이 되면
아예 이웃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음 문이 닫혀 버린다.
나는 어떤 경우에 마음 문을 닫고 이웃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가?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이웃 안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때는 언제인가?
이웃과 소통이 되지 않을 때 그 이유를 주님 앞에 가져간 적은 있는가?
마음 문을 열고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출처] 마태 9,32-38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