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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募兵, 拜置諸將, 天子欲自行, <신당서 고려전>
庚辰, 以任雅相爲浿江道行軍總管, 契苾何力爲遼東道行軍總管, 蘇定方爲平壤道行軍總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並進. 上欲自將大軍繼之,<자치통감>
四月, 詔兼兵部尙書任雅相, 爲浿江道行軍總管, 左衛大將軍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總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平壤道行軍總管, 幷率諸蕃軍, 將總三十五軍, 川陸分途, 先觀高麗之釁. 帝將親率六軍, 以繼之.<책부원구>
蘇定方, 爲平壤道大總管.<책부원구>
661년 8월 11일
八月甲戌, 蘇定方及高麗戰于浿江, 敗之.<신당서 고종본기>
八月, 定方破虜兵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신당서 고려전>
秋, 七月, 甲戌, 蘇定方破高麗於浿江, 屢戰皆捷, 遂圍平壤城.<자치통감>
八月, 蘇定方破高麗之衆於浿江, 頻戰皆捷, 奪其馬邑山, 因山爲營, 遂爲[圍]平壤城.<책부원구>
皇帝命 邢國公 蘇定方 爲 遼東道行軍大摠管以六軍長驅萬里迕麗人於 湏江 江擊破之遂圍<삼국사기 김인문전>
→ 자치통감의 7월은 8월의 오기로 보이며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이 마읍산을 점령하고 평양성을 포위하였음. 삼국사기 김인문전에서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6군을 이끌었다고 한 기록은 평양도행군대총관의 오기이며 35군 중 평양도행군이 6군을 지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661년 9월
九月, 次于鴨綠水, 其地卽高麗之險阻, 莫離支男生以精兵數萬守之,衆莫能濟. 何力始至, 會層冰大合, 趣卽渡兵, 鼓譟而進, 賊遂大潰, 追奔數十里, 斬首三萬級, 餘衆盡降, 男生僅以身免. 會有詔班師, 乃還.<구당서 계필하력전>
次鴨綠水, 蓋蘇文遣男生以精兵數萬拒險, 衆莫敢濟. 會冰合, 何力引兵譟而濟, 賊驚, 遂潰. 追奔, 斬首三萬級, 餘衆降, 男生脫身走. 有詔班師.<신당서 계필하력전>
九月 高麗 蓋蘇文遣其子男生以精兵數萬守鴨綠水,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冰大合, 何力引衆乘冰渡水, 鼓譟而進, 高麗大潰, 追奔數十里, 斬首三萬級, 餘衆悉降,男生僅以身免. 會有詔班師, 乃還.<자치통감>
→ 요동도행군 계필하력이 압록수에 상륙하여 압록수 이남의 천남생이 이끄는 수만 명의 대군과 대치 중 압록수가 언 것을 기회로 도하하여 천남생을 대파하여 3만 명을 죽이고 추격하던 중 귀국 명령이 떨어져서 귀국함. 철륵의 반란이 계기인 것으로 보아 10월중 귀국한 것으로 추정됨.
661년 9월 25일
二十五日進軍圍 甕山城<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於是 庾信 以兵進而圍城使人近城下與賊將語曰而國不龔致大國之討順命者賞不順命者戮今汝等獨守孤城欲何爲乎終必塗地不如出降非獨存命富貴可期也 賊髙聲唱曰雖蕞爾小城兵食俱足士卒義勇寧爲死戰誓不生降 庾信 笑曰窮鳥困獸猶知自救此之謂也 乃揮旗鳴皷 攻之大王登髙見戰士淚語激勵之士皆奮突鋒刃不顧九月二十七日城䧟.<삼국사기 김유신전>
→ 문무왕이 김유신을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백제부흥군이 있는 옹산성을 포위하고 투항을 권유하나 거절함.
661년 9월 27일
至二十七日先燒大柵斬殺數千人遂降之<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捉賊將戮之放其民論功賞賚將士 劉仁願 亦分絹有差於是饗士秣馬欲徃㑹唐兵<삼국사기 김유신전>
→ 옹산성을 함락시킴.
661년 10월
十月,丁卯,上畋於陸渾;戊申,又畋於非山;癸酉,還宮. 回紇酋長婆閏卒,侄比粟毒代領其眾,與同羅ㆍ仆固犯邊,詔左武衛大將軍鄭仁泰爲鐵勒道行軍大總管,燕然都護劉審禮ㆍ左武衛將軍薛仁貴爲副,鴻臚卿蕭嗣業爲仙萼道行軍總管,右屯衛將軍孫仁師爲副,將兵討之.<자치통감>
其年, 九姓叛, 以何力爲鐵勒道安撫大使. 乃簡精騎五百馳入九姓中, 賊大驚, 何力乃謂曰: 「國家知汝被詿誤, 遂有翻動, 使我捨汝等過, 皆可自新. 罪在酋渠, 得之則已.」 諸姓大喜, 共擒僞葉護及設·特勤等同惡二百餘人以歸, 何力數其罪而誅之.<구당서 계필하력전>
時鐵勒九姓叛, 詔何力爲安撫大使. 何力以輕騎五百馳入其部, 虜大驚. 何力喩曰: 「朝家知而詿誤, 遂及翻動, 使我貰爾過, 得自新. 罪在凶渠, 取之則已.」 九姓大喜, 其擒僞葉護及特勒等二百人以歸, 何力數其罪, 誅之, 餘衆遂安. 士卒道死者, 令所在收瘞, 蠲護其家.<신당서 계필하력전>
平壤 麗人固守故不能克士馬多死傷糧道不繼<삼국사기 김인문전>
→ 회홀부 추장 비속독으로 인해 철륵이 당에 반기를 들어서 부여도행군총관이었던 소사업을 선악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철륵을 진압하게 하고 뒤이어 천남생을 대파하고 추격하던 요동도행군대총관이었던 계필하력을 철륵도안무사로 삼아 철륵을 진압하게 함. 삼국사기 김인문전에 의하면 어느 시기(대략 10월로 추정)부터 고구려가 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소정방군이 신라에게 의지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됨.
661년 10월 26일
루방도 행군이 고구려와 전쟁을 치루는데, 큰 봉황새가 이지러지기 시작하여 하늘을 날던 날개가 떨어져 드리우고, 큰 고기가 길을 잃고 헤메어 큰 파도에 비늘이 떨어지는 등의 사건이 벌어져서 그가 58세의 나이인 661년 10월 16일에 양사선이 군대에서 죽어서 묻혔음.<양사선 묘지명>
→ 양사선은 정명진의 참모로 정명진이 이끈 루방도행군이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과 양사선의 죽음을 은유적으로 묘사함.
661년 10월 29일
庾信 等休兵待後命 含資道 揔管 劉德敏 至傳勑㫖輸 平壤 軍粮<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含資道 揔管 劉德敏 等至奉勑遣新羅供運 平壤 軍粮<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含資道摠管劉德敏等至, 奉勅令, 我國供運平壤軍粮.<전당문>
大王前遣太監 文泉 移書 蘇將軍 至是復命遂傳 定方 之言曰我受命萬里渉滄海而討賊艤舟海岸旣踰月矣大王軍士不至粮道不繼其危殆甚矣王其圖之 大王問羣臣如之何而可皆言深入敵境輸粮勢不得逹矣大王患之咨嗟 庾信 前對曰臣過叨恩遇忝辱重寄國家之事雖死不避今日是老臣盡節之日也當向敵國以副 蘇將軍 之意 大王前席執其手下淚曰得公賢弼可以無憂若今玆之役罔愆于素則公之功德曷日可忘 庾信 旣受命至 懸皷岑 之岫寺 戒即靈室閉戶獨坐焚香累日夜而後出私自喜曰吾今之行得不死矣將行王以手書告 庾信 出彊之後賞罰専之可也<삼국사기 김유신전>
文武王元年 唐 皇帝遣 蘇定方 討髙句麗圍平壤城 含資 道惣管 劉徳敏 傳宣國王送軍資 平壤<삼국사기 열기전>
→ 평양도행군 소속의 함자도총관 유덕민이 신라에게 평양으로 군량을 보내라고 하고 김유신이 출정을 자청함.
661년 12월
高麗言 惟十二月 於高麗國寒極泪凍 故唐軍雲車衝。鼓鉦吼然 高麗士率膽勇雄壯 故更取唐二壘。唯有二塞。亦備夜取之計唐兵抱膝而哭 銳鈍力竭而不能拔。噬臍之耻非此而何.<일본서기 제명천황조>
→ 평양성과 그 주변에 결집한 평양도행군,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과 고구려의 전투 상황을 고구려가 왜국에 보고함.
661년 12월 10일
十二月十日與副將軍 仁問 真服 良圖 等九將軍率兵載粮入髙句麗之界<삼국사기 김유신전>
→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는 문무왕이 김유신에게 명을 내린 시기를 1월이라고 하였으나, 열전의 날짜 및 내용이 보다 구체적이므로 열전의 12월 10일이 설득력있어보임.
662년 1월
王命 庾信 與 仁問 良圖 等九將軍以車二千餘兩載米四千石租二萬二千餘石赴 平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 문무왕이 김유신 등에게 군량을 평양에 보내라고 함. 김유신전에는 1월이 아닌 12월 10일이라고 함.
662년 1월 23일
二十三日渡 七重河 至 䔉壤 貴幢弟監 星川 軍師 述川 等遇賊 兵於 梨峴 擊殺之<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壬戌正月二十三日至 七重河 人皆恐懼不敢先登 庾信 曰諸君若怕死豈合來此遂先自上舩而濟諸將卒相隨渡河入髙句麗之境 慮麗人要於大路遂自險隘以行至於 䔉壤 庾信 與諸將士曰麗濟二國侵凌我疆埸賊害我人民或虜丁壯以斬戮之或俘㓜少以奴使之者久矣其可不痛乎吾今所以不畏死赴難者欲藉大國之力滅二城以雪國讎 誓心告天以期隂 助而未知衆心如何故言及之若輕敵者必成功而歸若畏敵則豈免其禽 獲乎冝 同心恊 力無不以一當百是所望於諸公者也諸將卒皆曰願奉將軍之命不敢有偸生之心 乃皷 行向 平壤 路逢賊兵逆擊克之所得甲兵甚多<삼국사기 김유신전>
→ 신라 보급군이 칠중하를 건넜는데, 큰 길에는 고구려군이 있을까 염려하여 좁고 험한 길로 갔으나 여기서도 고구려군을 만나서 싸워 깨뜨림.
662년 1월 30일
至獐塞之險㑹 天寒烈人馬疲憊徃 徃僵仆 庾信 露肩執鞭䇿馬以前驅衆人見之努力奔走出汗不敢言寒遂過險距 平壤 不逺 庾信 曰 唐 軍乏食窘迫冝先報之乃喚歩騎監 裂起 曰吾少與爾遊知爾志節今欲致意於 蘇將軍 而難其人汝可行否 裂起 曰吾雖不肖濫中軍職况辱將軍便令雖死之日猶生之年<삼국사기 김유신전>
王命大角干 金庾信 輸米四千石租二萬二千二百五十石到 獐塞 風雪沍寒人馬多凍死麗人知兵疲欲要擊之距 唐 營三萬餘歩而不能前欲移書而難其人<삼국사기 열기전>
→ 김유신의 보급군이 평양성 근처에 다달음.
662년 미상
龍朔二年卒, 贈右衛大將軍, 諡曰烈.<구당서 정무정전>
歷晉·蒲二州刺史, 鏤方道總管. 卒, 贈右衛大將軍, 謚曰烈.<신당서 정무정전>
→ 정명진은 루방도행군총관을 마지막으로 죽음. 661년에 루방도행군이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전사했을 가능성이 큼. 김용만 소장은 전사로 추정함.
662년 2월 1일
二月一日 庾信 等至 獐塞 距 平壤 三萬六千歩先遣歩騎監 裂起 等十五人赴 唐 營是日風雪寒沍人馬多凍死<삼국사기 신라 본기 문무왕조>
遂與壯士 仇近 等十五人詣 平壤 見 蘇將軍 曰 庾信 等領兵致資粮已逹近境 定方 喜以書謝之 <삼국사기 김유신전>
時裂起以歩騎監輔行進而言曰某雖駑蹇願備行人之數遂與軍師 仇近 等十五人持弓劒走馬麗人望之不能遮閼凢兩日致命於蘇将軍 唐 人聞之喜慰逥書<삼국사기 열기전>
→ 1월 30일 평양성 근처까지 도착한 김유신 등이 보기감 열기 등 15명을 보내고 열기 등은 이틀만인 2월 1일에 당 군영에 도착하여 보급군이 도착했다는 사실을 전해줌.
662년 2월 3일
裂起 又兩日<삼국사기 열기전>
→ 소정방 군영에 갔던 열기 등이 김유신 군영에 이틀만에 귀영함.
662년 2월 6일
六日至 楊隩 庾信 遣阿湌 良圖 大監 仁仙 等致軍粮贈 定方 以銀五千七百分細布三十匹頭髮三十兩牛黄十九兩 定方 得軍粮便罷還<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庾信 等行抵 楊隩 見一老人問之具悉敵國消息賜之布帛辭不受而去 庾信 營 楊隩 遣解漢語者 仁問 良圖 及子 軍勝 等逹 唐 營以王旨餽軍糧 定方 以食盡兵疲不能力戰及得粮便逥唐 良圖 以兵八百人泛海還國<삼국사기 김유신전>
仁問 與留鎮 劉仁願 率兵兼輸米四千石租二萬餘斛赴之 唐 人得食以大雪解圍還<삼국사기 김인문전>
→ 김유신이 김양도를 보내어(2월 4일에 출발한 것으로 추정) 소정방군에게 군량을 전달에 성공함. 삼국사기에서는 소정방이 군량을 받자마자, 퇴각했다고 하나, 중국측 기록에서는 적어도 2월 18일 이후에 퇴각을 함.
662년 2월 미상(적어도 6일 이후)
庾信 等聞 唐 兵歸亦還渡 川 髙句麗兵追之迴軍對戰斬首一萬餘級虜小兄 阿逹兮 等得兵械萬數<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
時麗人伏兵欲要擊我軍於歸路 庾信 以皷及桴繫羣牛腰尾使揮擊有聲又積柴草燃之使煙火不絶夜半潛行至 䕯河 急渡岸休兵麗人知之來追 庾信 便 萬弩俱發麗軍且退率勵諸幢將士分發拒擊敗之生禽將軍一人斬首一萬餘級王聞之遣使勞之及至賞賜封邑爵位有差 <삼국사기 김유신전>
人得食以大雪解圍還羅人將歸髙句麗謀要撃於半塗 仁問 與 庾信 詭謀夜遁麗人翌日覺而追之 仁問 等迴擊大敗之斬首一萬餘級獲人五千餘口而歸<삼국사기 김인문전>
→ 김유신이 당군이 퇴각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귀국하던 중 고구려에 추격을 받았으나, 역습을 하여 1만 명을 죽이고 소형 아달혜 및 5천 명을 포로로 잡고, 군품 1만 점을 획득함. 소정방군은 2월 18일 이후에 퇴각을 했으므로 김유신이 접한 당군이 퇴각했다는 정보는 오보이거나 소정방이 퇴각을 할 계획을 했으나, 모종의 이유(고구려군의 존재 등등)로 철군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음
662년 2월 14일
二月 …… 甲戌, 司戎太常伯·浿江道總管·樂安縣公任雅相卒於軍.<구당서 고종본기>
甲戌,浿江道大總管任雅相薨於軍.<자치통감>
→ 패강도대총관 임아상의 죽음. 김용만 소장과 서영교 박사는 전사로 추정함.
662년 2월 18일
二月 戊寅, 龐孝泰及高麗戰于蛇水, 死之.<신당서 고종본기>
明年, 龐孝泰以嶺南兵壁蛇水, 蓋蘇文攻之, 擧軍沒.<신당서 고려전>
二月 戊寅, 左驍衛將軍白州刺史沃沮道總管 與高麗戰於蛇水之上, 軍敗, 與其子十三人皆戰死.<자치통감>
龐孝泰 , 爲左驍衛將軍. 高宗遣將征高麗, 孝泰爲沃沮道總管. 時孝泰率令南水戰之士, 軍於蛇水之上, 高麗 蓋蘇文益兵擊之, 孝泰大敗. 或勸突圍就劉伯英·曹繼叔之營. 孝泰曰: 「我伏事國家兩代, 過蒙恩遇, 高麗不滅, 吾必不還, 伯英等何必救我. 又我將鄕里子弟五千餘人, 今並死盡, 豈一身自求生邪.」. 賊內薄攻之, 死者累萬, 箭如蝟毛, 遂與其子一十三人皆死之.<책부원구>
→ 옥저도행군은 지휘관인 방효태와 그의 아들 13명은 물론 그가 데리고 온 향리 자제 5천 명과 병사 수만 명이 전사하였음. 유백영과 조계숙은 패강도행군 소속인지 아니면 평양도행군 소속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음. 그러나 정황상 패강도행군대총관인 임아상이 전사했을 가능성이 크고 유백영이 원래 평양도행군대총관이었던 것과 유백영과 조계숙이 663년 이후에도 활동하고 평양을 포위한 3개 행군 중 기록상 유일하게 철군에 성공한 부대가 평양도행군이라는 정황을 보면 유백영과 조계숙은 소정방의 평양도행군 소속으로 추정되며 그렇다면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은 대총관인 그의 죽음으로 짐작컨대 옥저도행구과 마찬가지로 전멸했을 수도 있음. 그리고 여러 사료에서 나와있듯이 그나마 건재했던 평양도행군도 사정이 여의치 않아 옥저도행군을 도와줄 여력이 다소 부족했던 것으로 추정됨.
662년 2월 18일 이후
蘇定方圍平壤久不下, 會大雪, 解圍而還.<자치통감>
遂圍平壤. 會大雪, 解圍還.<신당서 소정방전>
時蘇定方奉詔代高麗, 進圍平壤, 不克而還.<구당서 유인궤전>
時定方伐高麗, 圍平壤不克.<신당서 유인궤전>
→ 평양성을 공격한 3개 행군 중 유일하게 소정방의 평양도행군만이 철수에 성공함.
662년 3월
三月 …… 癸丑, 幸同州. 蘇定方破高麗于葦島, 又進攻平壤城, 不克而還.<구당서 고종본기>
明年三月, 勒兵而還.<책부원구>
→ 2월 18일 이후 철군했던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3월에 이르러서야 도착함.
663년 7월
高宗敕書與仁軌曰: 「平壤軍迴, 一城不可獨固, 宜拔就新羅, 共其屯守. 若金法敏藉卿等留鎭, 宜且停彼, 若其不須, 卽宜泛海還也.」 將士咸欲西歸, 仁軌曰: 「春秋之義, 大夫出疆, 有可以安社稷·便國家, 專之可也. 況在滄海之外, 密邇豺狼者哉! 且人臣進思盡忠, 有死無貳, 公家之利, 知無不爲. 主上欲呑滅高麗, 先誅百濟, 留兵鎭守, 制其心腹. 雖妖孽充斥, 而備預甚嚴, 宜礪戈秣馬, 擊其不意, 彼旣無備, 何攻不克? 戰而有勝, 士卒自安. 然後分兵據險, 開張形勢, 飛表聞上, 更請兵船. 朝廷知其有成, 必當出師命將, 聲援纔接, 凶逆自殲. 非直不弃成功, 實亦永淸海外. 今平壤之軍旣迴, 熊津又拔, 則百濟餘燼, 不日更興, 高麗逋藪, 何時可滅? 且今以一城之地, 居賊中心, 如其失脚, 卽爲亡虜. 拔入新羅, 又是坐客, 脫不如意, 悔不可追. 況福信兇暴, 殘虐過甚, 餘豐猜惑, 外合內離, 䲭張共處, 勢必相害. 唯宜堅守觀變, 乘便取之, 不可動也.」 衆從之.<구당서 유인궤전>
高宗詔仁軌拔軍就新羅與金法敏議去留計. 將士咸欲還, 仁軌曰: 「春秋之義, 大夫出疆, 有可以安社稷·便國家者, 得專之. 今天子欲滅高麗, 先誅百濟, 留兵鎭守, 制其心腹. 雖孽豎跳梁, 士力未完, 宜厲兵粟馬, 乘無備, 擊不意, 百下百全. 戰勝之日, 開張形勢, 騰檄濟師, 聲援接, 虜亡矣. 今平壤不勝, 熊津又拔, 則百濟之燼復炎, 高麗之滅無期. 吾等雖入新羅, 正似坐客, 有不如志, 悔可得邪? 扶餘豐猜貳, 表合內攜, 勢不支久. 宜堅守伺變以圖之, 不可輕動.」 衆從其議, 乃請益兵.<신당서 유인궤전>
丁巳, 熊津都督劉仁願, 帶方州刺史劉仁軌大破百濟於熊津之東, 拔眞峴城. 初, 仁願·仁軌等屯熊津城, 上與之敕書, 以「平壤軍回, 一城不可獨固, 宜拔就新羅. 若金法敏藉卿留鎭, 宜且停彼, 若其不須, 卽宜泛海還也.」 將士咸欲西歸. 仁軌曰:「人臣徇公家之利, 有死無貳, 豈得先念其私! 主上欲滅高麗, 故先誅百濟, 留兵守之, 制其心腹, 雖餘寇充斥而守備甚嚴, 宜礪兵秣馬, 擊其不意, 理無不克, 旣捷之後, 士卒心安, 然後分兵據險, 開張形勢, 飛表以聞, 更求益兵. 朝廷知其有成, 必命將出師, 聲援纔接, 凶醜自殲.非直不棄成功, 實亦永淸海表. 今平壤之軍旣還, 熊津又拔,. 則百濟餘燼, 不日更興, 高麗逋寇, 何時可滅! 且今以一城之地居敵中央, 苟或動足, 卽爲擒虜, 從入新羅, 亦爲羈客, 脫不如意, 悔不可追, 況福信凶悖殘虐, 君臣猜離, 行相屠戮, 正宜堅守觀變, 乘便取之, 不可動也.」衆從之.<자치통감>
→ 당은 2차 고당전쟁 패배의 여파로 당고종은 거의 웅진도독부를 포기하려 하였으나, 유인궤의 설득으로 유지하게 됨.(노중국, 노태돈)
663년 8월
八月, 御內殿, 謂侍臣曰: 「比爲海東負釁, 須申弔伐, 是數年已來, 頻有勞役, 所在百姓, 誠大辛苦. 況緣軍機調發, 科喚百端, 貪殘之徒, 恣意侵暴, 兼復造舩, 諸州辛苦更甚. 前令借問, 異欲知其事實, 然四方使至, 略不盡言, 表疏所陳, 皆涉順旨. 我密加廉察, 在下非無怨咨, 如聞隋朝破亡緣爲征役不息, 隋亡何必不繇此, 相傳其有此議. 且越海行兵, 備經難阻, 或斃鋒刃, 或遭沉溺, 追想非命, 有悼於懷. 昔漢武帝征伐四夷, 戶口衰减, 晩年感悟, 封丞相爲富民侯, 此卽故事分明, 足爲龜鏡. 前令三十六州造船舫者, 今欲總停, 使遠近百姓無役, 豈不善邪.」.<책부원구>
→ 2차 고당전쟁에서 패배한 당고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백성이 어려움을 겪고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익사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고 하여 36주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있는 것을 중단하고 민심을 살피라는 조서를 내리고 이후 천남생이 내부할 때까지 고구려 공격을 일절하지 않음.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나중에 이 사료들을 토대로 글 한 번 써보려고 합니다.ㅋㅋ
후지와라 가전이라는게 대체 뭔가요? 실제로 존재하는 사료인가요? 아니면 인터넷에 떠도는 건가요?
단순히 자료 뿐만 아니라 '졸견'이라 쓰신 분이 저로서는 '탁견'이라 여겨집니다. 자료 정리만도 힘이 들 터인데 탁견까지 붙이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은 저것들 보다 더 많은 자료들을 모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