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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법화경과 그 영향
1. 법화경과 그 영향(최종)
붓다가 남긴 이 가르침은 붓다가 중생들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이곳에서 수많은 자비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돕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법화경』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주요 내용이다. 붓다는 진정으로 열반한 것이 아니다. 그는 독약을 마신 아들들을 둔 위대한 의사와 같다. 아버지는 재빨리 해독제를 만들어 냈지만 제정신이 아닌 아들들은 아버지가 지어준 약을 거부한다. 아버지는 일부러 죽은 체하면서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다. 아들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해독제를 먹는다. 그때 아버지는 다시 나타난다. 그의 죽음은 방편이었다(제16품). 붓다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나아가 붓다의 생애는 과거의 모습으로 투영될 수도 있다. 이 경전에서 붓다는 자신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모습들로 나타났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이 경전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이 숨가쁠 정도로 계속 등장하여 흥미를 돋운다. 여기서 미래불인 미륵보살은 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겨우 40여 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어떻게 많은 중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는지에 대하여 놀라며 질문한다(Hurvitz 1976: 234).
이처럼 내가 성불을 성취한 이래 한량없는 시간이 있었다. 내 생애는 셀 수 없고 영원하며 소멸되지 않는다. 선남자여, 과거에 보살도를 수행하면서 살아온 생애는 현재도 다 끝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의 것의 두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사실 나는 반열반에 들어 가지 않았지만 나는 곧 반열반을 받아들이려 한다. 이러한 방편에 의하여 여래는 중생을 교화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Hurvitz 1976: 239)
동아시아 불교에서 보통 『법화경』의 붓다는 영원하다고 가르쳐지고 있다. 그러나 불멸의 붓다라는 개념에는 문제가 있다. 만일 붓다가 영원 하다면 아직 붓다가 되지 못한 이들은 누구도 성불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법화경』이 불멸의 붓다를 가르친다면 모든 중생들이 마침 내 불성을 이룰 것이라는 개념이 깨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법화경』 은 여래장사상도 주장해야 한다. 특히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법화경』을 여래장사상을 내포한 『대반열반경』 그리고 『대승기신론』과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법화경』 자체에 여래장사상을 받아들인 흔적이나 증거는 전혀 없다. 따라서 『법화경』에서 말하는 불멸의 붓다에 대한 동아시아 불교의 사상은 화엄불교에서의 대비로자나불과 같이 우주적인 붓다를 가르치기 위해 다른 대승의 요소들을 이용한 천태사상의 맥락에서 이 경전의 가르침을 체계화한 결과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은 명백히 모순된다. 그것은 붓다가 시간에 맞춰 깨달음을 얻은 것을 말하고, 그의 다음 생애에 유한성을 부여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또 붓다의 생애를 ‘영원하고 불멸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불교에서 수명은 공덕을 쌓은 결과를 나타낸다. 그래서 붓다는 바로 『법화경』에서 자신이 보살이었을 때 많은 공덕을 지었으므로 이러한 수명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서 붓다의 생애는 엄청나게 길지만 여전히 유한한 생애를 살았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간의 범주에서 붓다의 생애는 시작과 끝이 있지만 그 영원성에 대한 언급은 경전에 흔히 나오는 전형적인 과장법이다. 그렇지만 붓다가 불멸하건 하지 않건 간에 『법화경』에서 붓다는 사실 열성적인 신자들에게 영원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종교적으로 영원한 것이다.
초기 대승경전들에서 보이는 자기찬양적인 특징은 『법화경』에서도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붓다는 어떤 사람이 이 경전 가운데 단 한 구절의 게송이라도 듣고 한 순간이라도 기뻐한다면 그 사람은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마치 붓다에게 꽃과 꽃목걸이를 바치고, 향을 뿌리고, 향을 사르고, 비단으로 된 덮개, 깃발, 의복, 또는 음악을 바치듯이 이 경전도 암송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Hurvitz 1976: 174, 20-23품 참조). 더욱이 이 경전이나 경전을 유포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죄는 지속적으로 붓다를 비방하는 것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앞의책: 175). 『법화경』에서는 이 경전과 경전의 가르침을 힘써 전하라고 한다(제22품). 이 경전을 설하는 사람들은 붓다를 볼 것이라고 한다(앞의 책: 180-2).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조금이라도 유포한다면 그는 윤택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매우 잘생긴 얼굴로 태어날 것이라고 한다. 즉 “그의 이빨은 넓적하지도 않고, 누렇게 되지도 않고, 시커멓게 되지 않을 것이다. 입술은 두껍거나 오그라들거나 얇지 않을 것이다. 곧 그는 뛰어난 인물로 태어날 것이다”(앞의 책: 262). 법을 설하는 자 또한 붓다처럼 존경받게 된다. 만일 어떤 병든 사람이 이 경전을 들으면 병이 치유될 뿐만 아니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게 될 것이다(앞의 책: 301). 이 밖의 다른 많은 기적들이 이 경전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것이다. 그들의 감각은 초인처럼 완전하게 될 것이다(제19품). 천신의 자녀인 천자(天子)와 천녀(天女)들이 경전을 믿는 사람들에게 다가와 보호해 줄 것이다. 법을 전하는 자가 법을 설할 때 듣는 사람이 없다면 천신들이 다가와 대신하여 들을 것이다. 붓다의 위대한 능력들을 다루는 그 경전의 짧은 21품은 동아시아에서 신통력의 보호를 위해 사용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법화경』을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 신기한 사건 들이 대중들에게 많이 전해지고 있다.
『법화경』이 가진 신통력 때문에 이것이 널리 유포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 다른 이유는 『법화경』에서 매우 어울리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는 조그마한 믿음과 신앙을 찬양한다는 점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붓다의 사리를 모실 탑들을 만들거나, 어린이가 진흙으로 탑을 만드는 놀이를 한다거나, 불상을 조각하거나 조각한 불상을 숭배하거나 또는 그러한 활동을 후원하거나, 거기에 절하거나 단 한 번이라도 ‘붓다에게 귀의한다’고 염불한다면 설령 산란한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이 사람을 불도(佛道)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법화경』에 대한 수많은 믿음은 경전 자체에서 경전을 쓰고, 숭배하고, 읽고, 암송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들이 얻는 공덕은 (보시와 같은 표준적인 도덕적인 행위들이 낳는 것보다 엄청 위대하다고) 예언하는 광대한 공덕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조정의 대신부터 평범한 농민들까지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방식 혹은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할 수 있는 수행들이다. 개인·집단이 얻는 이익 혹은 의례에 대한 후원으로 얻는 이익은 조상의 이익 혹은 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통해 병고를 회복하는 것 혹은 심지어 (멀리 떨어진) 깨달음을 얻는 것까지 이르는 ‘출세간적인 목표 뿐만 아니라 속세의 이익으로 옮겨갈 수 있다.
일본에서는 아미타불의 정토인 서방 극락에 환생하는데 초점을 맞춘 정토불교가 중요시되었다. 그것은 일본인이 『법화경』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은 아미타불과 정토를 『법화경』과 연결시키려고 했음을 의미한다. 『법화험기』에 나오는 이 경에 대한 믿음과 실천의 대부분이 정토 환생과 연관되어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Dykstra 1983: 79). 더욱이 이 경전의 효험은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가장 구제하기 힘든 죄인조차 구제할 수 있다고 한다. 『법화경』 제12품은 아마 후대에 이 경전에 삽입된 마지막 부분 가운데 중요한 부분인 듯하다. 여기에는 붓다가 전생\에 한 선인에게 하인으로 일을 해 주고 그 결과 그에게 대승경전을 들은 일이 나온다. 이 선인은 바로 현세에서 죄를 지은 붓다의 사촌 제바달다(提婆達多, Devadatta)이다. 사악한 제바달다는 사실 붓다의 가장 친근한 벗이었다. 제바달다 덕분에 붓다는 전생에 많은 선행 특히 인욕의 선행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제바달다도 미래에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법화경』에 보이는 사악한 사람의 구제 가능성이 다른 많은 경전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한 사악한 승려는 사냥이나 낚시, 육식 등 불교의 계율을 범하는 행위를 저질렀다. 그렇지만 그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매일 밤마다 『법화경』을 암송하였다. 그 결과 그는 정토에 환생하였다. 계속 사냥을 하고 계율을 어기는 등 여러 죄악을 저지른 한 재가자도 이 경전에 신앙심을 가지면 불행한 환생을 피할 수 있다고 한 「제바달다품(提婆達多品)」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그는 죽음에 임해서는 이 품만을 계속 암송했다. 그리하여 그 또한 정토에 탄생하였다(Dykstra 1893: 122-3). 심지어 강도도 위대한 관세음 보살의 구제력에 의지하기 때문에(『Lotus』: 제25장; Hurvitz 1976) 법에 의해 처벌받을 때 부상당하지 않는다고 한다(앞의 책: 132-3). 이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죄를 저질러
형벌을 받아 죽음에 직면하더라도
관세음을 염하는 힘으로
칼은 조각조각 부서지고
감옥에 갇혀서
손발이 묶여 있어도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힘으로
그것들은 풀어질 것이다.
『법화경』은 사악한 사람뿐만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에서 몹시 차별받았던 여성들에게도 큰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제바달다가 완전한 불성을 얻을 것을 예언하는 품에서 여덟 살에 불과한 용왕의 공주가 등장한다. 그녀는 문수사리에게 가르침을 듣자마자 뛰어난 보살이 되었다. 사리불은 그가 이제까지 보아 왔던 것과는 다른 뜻밖의 일을 경험한다. 여인이 어찌 위없는 도를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용왕의 공주는 신통력으로 사리불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남성으로 변하여 불성을 얻는다. 『법화경』에서는 일단 소녀가 남자로 변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른 대승경전에서의 상황은 더욱 개방적이다. 『유마경』의 유명한 대목 가운데 천녀가 사리불에게 성(性)의 차이는 현상세계에서 환상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번 증명해 보이려고 스스로는 남자로 변하고 사리불을 여자로 변화시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불쌍한 승려가 자신이 계율을 범해서 여자의 몸이 된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천녀는 자비심을 베풀어 그를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해 준다. 앞에서 『승만경』의 주요 인물이 왕비였음을 보았다. (이 문제에 대해 서구 불교도와) 많은 티베트인들은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언제나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선언한 사랑스러운 타라보살을 깊이 신봉하고 있다(제10장을 보라).
『법화경』에서 관심을 기울여야 할 마지막 특징이자 동아시아 불교도들의 실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친 것은 소신공양(燒身供養)이다. 『법화경』 23품에서는 약왕(藥王)보살이 전생에 완전한 불성을 얻기 위하여 붓다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 일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스스로 불태워서 붓다에게 바쳤다. 그의 몸은 오랫 동안 탔으며 마침내 그는 정토에 탄생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여, 이것을 최고의 보시라고 한다”(Hurvitz 1976: 295). 가령 누가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
불탑에 손과 발을 태워 공양한다면 국토와 처자식과 땅과 산, 강, 연못, 삼천대천 세계의 갖가지 보배로 공양하는 것보다 뛰어날 것이다. (Hurvitz 1976: 298)
보통 인도에서 사람들은 종교적 열정의 과장법을 사용했고, 이러한 교훈을 ‘무집착’에 대한 강조라는 수사적인 과장으로 택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제10장에서 볼 것처럼, 그들이 현재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수행들을 시작한다면 미래세에도 할 수 있는 그러한 유달리 용감한, 거의 초인간적인 보살의 행위들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도로 간 중국의 순례승들은 불교도들이 종교적으로 육신을 괴롭히고, 자신의 몸을 불태운 소신공양의 사례를 묘사하고 있다(Joshi 1967: 108-11). 그러나 5세기 초부터 동아시아 불교에서는 몸의 한 마디나 전체를 불태우는 것을 숭배의식의 한 형태로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제임스 벤(James A. Benn)의 상세한 연구2007a)는 완전한 자기희생 혹은 부분적인 자기희생은 중국불교의 아주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결코 소수의 행위 혹은 비주류적인 행위가 결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말하자면 그것은 종종 신통력과 성스러운 사리, 다른 이들을 개종시키는 능력과 그들 안에 종교적 노력을 북돋우는 신통력을 동반한 언제나 일련의 종교적 선택사항이다. 벤이 관찰하듯이(2007a: 190, 201, 193을 참조하라) ‘소신공양은 중국에 서 승가 전체에 널리 퍼진 수행이다. 선승에서부터 학승, 정토 신봉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비구·비구니들은 그들의 몸을 소신공양에 제공하는 정당한 이유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방편의 극히 유연하고 적합한 형태였다.’ 사실 그것은 학자들과 선사 연수(延壽, Yanshou, Yen-shou, 904-75) 같은 영적으로 성숙한 종교적 전문가들이 교리적으로 정교하게 하여 널리 퍼졌다. 다른 선사들도 소신공양을 하기도 했다(Benn 2007a: 154-7). 화엄종의 조사 법장도 종교적 열정에서 손가락 하나를 태웠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사찰에서 손가락을 태우는 행위는 아주 최근까지도 드문 사례가 아니었다. 머리에 계인(戒印)을 하는 것은 현재도 중국불교의 수계의식의 부분이다. 웰치(Welch)는 4년 동안 해마다 손가락 하나씩을 태운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유명하고 존경받는 선승인 허운(虛雲, Xuyun, Hsü-yün) 화상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효심으로 1897년에 손가락 하나를 태우면서 어머니가 윤회에서 벗어나 성불하기를 염원하였다(Welch 1967: 324-5). 이처럼 살을 태우는 것은 분명 정신적 체험이며 치유도 매우 빨랐다. 일본에서 조쇼(J?sh?)는 우연히 한 여인과 부딪친 데 대한 참회의 일환으로 손가락 하나를 태웠다(Dykstra 1983: 66). 완전한 소신공양에 대한 하나의 중국 설명에서 어떤 승려는 그의 소신이 (약사여래의 소신을 모델로 삼아서) 천천히 진행되고 불길이 천천히 타오르는 동안 정법을 계속 설법하기를 발원하였다. 그는 ‘아주 시원하고 쾌적함’을 느꼈고, 전혀 고통이 없었다고 훌륭한 서원을 세우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중국불교에서 소신공양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고, 때로 불교 수행에 헌신하고 인생의 정점에서 진지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택한 것이 분명하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무렵에 여러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고, 일본에서는 『법화험기』에 비슷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행위들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설명은 육신에 대한 강한 혐오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정토에 대한 염원 혹은 사후에 보다 뛰어난 윤회의 단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을 반영한다. 때로 유학자들과 다른 불교도들이 공포스럽게 여기거나 혹은 적어도 못마땅하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것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도 소신공양은 용감함과 종교적 헌신, 자기 헌신을 보여 주는 행동이라고 매우 칭송받았다. 완전한 소신공양은 열렬하게 칭송된다(Benn 2007a: 144-7, 168, 180 참조). 소신공양할 때에 보시를 하는 것은 속히(적어도 보시를 행하는 사람보다 훨씬 빨리; 앞의 책: 35) 붓다가 될 누군가와 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1960년대 베트남 승려들의 소신공양이 생각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 경우와 아주 다르다. 베트남 승려들의 소신공양은 붓다에게 자신을 바치겠다는 직접적 의미보다는 정치적 항거의 하나로 행해진 것이었다. 그렇지만 보살(혹은 보살을 지향하는 사람)의 경우에 종교적 헌신을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정치적 행위와 분리하기는 어렵다. 자신의 몸을 태우는 이러한 행위가 『법화경』의 오랜 전례를 따랐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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