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돌아오시면 염소 한 마리 잡아서 잔치하기로 했었는데. 신부님 대신 취재진이 찾아오고 신부님을 기리는 영화 한편이 돌아왔습니다. 신부님은 여전히 아강그리알에서 ‘웃고’ 계시더군요.
아직도 신부님이 계시지 않는 톤즈에 가면 어디선가 신부님이 불쑥 나타나실 것 같은 그리움에 잠기곤 합니다. 그렇게 메울 수 없는 신부님의 빈자리는 생각보다 크고 깊습니다.
수단에 사는 것이 힘겨울 때마다 신부님을 떠올리며 용기를 냅니다. 당신께서 그 많은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더 깊이 가난한 이들을 사랑했음을, 여전한 씨족간의 갈등과 보복과 폭력들 속에서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지휘봉을 잡았음을, 아파하는 이들이 찾아오길 기다리기보다 찾아가셨음을,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해 주님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셨음을 말이죠.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 신부님은 무엇을 드시고, 어떻게 일을 추진하셨을 지를 헤아리며 다시금 마음을 다져봅니다.
아무것도 없었던 수단. 그리고 지금도 아무것도 없는 수단.
거칠기로 헤아린다면 둘째가라면 서러운 딩카족들 안에서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여전히 사막에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은 도전입니다. 하지만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실천’의 모범을 따라 나섭니다. 웅크리고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으니 일어서야 함을 말이죠.
‘믿음’과 ‘사랑’과 ‘희망’만이 유일한 힘의 원천인 이곳에서, ‘선교사 한 명이 얼마나 많은 성소를 가져다주는지를 생각하고 용기를 내라’며 기뻐하셨던 신부님. 어쩌면 ‘제비’ 한 마리가 이 세상에 봄을 가져다주듯, 신부님께서 이기심으로 얼어붙은 세상을 ‘인류애’로 녹이는 열정을 불러오셨음이 틀림없겠지요. 그렇게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조금만 더 착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 지금 남수단은 오랜 내전의 마침표를 찍는 국민투표 중입니다. 알고 계시죠? 신부님의 기도와 꿈과 희망대로, 수단에 평화가 뿌리내리고 아이들이 기쁘게 학교에 다니며 더 이상 굶주림에 고통 받지 않는 나라로 성장하기를 고대하고 기도합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그 날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있는지도 모릅니다.
신부님께서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삶을 통해, 가난한 이들 속에 ‘함께’ 살아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들에게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음을 배웠기에,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함께 지는 아픔마저도 ‘봉헌’하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봉헌이 이들을 통한 저희들의 몫인 거지요.
신부님, 수단의 밤하늘은 당신이 떠나신 그날처럼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봉헌하신 수많은 사랑의 땀방울도, 기도도, 노래도, 그 하늘 속에서 함께 빛나고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수단 아강그리알 미션에서 한만삼(하느님의 요한) 신부 올림
이태석 신부 선종 1년, 지난 한 해 그를 추모하는 열기는 교회 밖에서부터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이 신부가 직접 쓴 책이나, 다큐멘터리 영화 등은 그의 삶과 신앙을 세상과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하지만 단순히 책이나 다큐멘터리 때문에‘쫄리 신부 붐’이 일어난 것만은 아니다.
이 신부의 삶과 신앙은 바쁜 일상, 이기심, 물질주의 등에 치여 밀쳐두었던 비움과 나눔과 사랑의 문을 여는 큰 도구가 됐다. 이 신부의 삶을 통해 알게 된 낮은 자리의 모범을 따르고자 하는 뜻과 행동이 마음과 마음을 타고 흘렀다.
이태석 신부 선종 1주기를 맞아 이번 커버스토리에서는 왜 이 신부에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선교사로서 그의 삶과 신앙은 어떠했는지,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것과 그 모범을 바탕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짚어본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왜 이태석인가?
선종 1주기 맞아 사회 각계에 추모 움직임 확산
영화 ‘울지마 톤즈’ 30만 관객 돌파 ‘흥행 돌풍’
숭고한 나눔 영성 따르려는 수단 후원자 급증
영화 주인공인 고(故) 이태석 신부(살레시오회, 1962~2010)는 2001년부터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에서 의사이자 교사, 사제로서 봉사의 삶을 살다가 지난해 1월 14일 대장암으로 선종했다. 그의 선종 1주기를 맞아 사회 각계각층에서 그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촛불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아 톤즈를 환하게 밝힌 이태석 신부. 이제 그를 볼 수 없지만 그가 남긴 나눔과 사랑의 불씨는 여전히 사람들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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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 선종 1주기를 앞두고 언론들은 일제히 그를 기억하는 기사를 실었다. 하나같이 이 신부를 기리고, 그가 남긴 나눔 정신을 이어가자는 내용이었다. KBS도 다큐멘터리 ‘이태석 신부, 세상을 울리다’를 선종 1주기인 14일에 특별편성하면서 깊은 관심을 보였다.
지난 8일 경기도 과천시민문화회관에서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이사장 이재현)가 주최하는 이태석 신부 추모 음악회가 열렸다. 이 신부의 고귀한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눔의 참된 가치를 되새기기 위한 의미 있는 음악회였다. 이 자리에는 1500여 명의 관람객이 참석했다. 좌석이 부족해 통로 계단에 앉아 관람하면서도 사람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 신부를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그의 희생적인 사랑을 담은 영화 ‘울지마 톤즈’다. 영화는 개봉 이후 지금까지 조용히 흥행몰이를 하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개봉 당시 13개 상영관으로 시작해 개봉 4주차 만에 54개관으로 확대 상영된 것은 물론 LA 한인회의 요청으로 미국 CGV에서도 상영됐다. 또한 제20회 한국가톨릭매스컴상 대상, 2010년 올해의 좋은 영상물, 제1회 KBS감동대상을 수상하면서 흥행과 작품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관람객들도 각양각색이다. 가톨릭 신자들을 비롯해 개신교, 불교 등 타 종교인들도 영화관을 찾아왔다. 종교뿐 아니라 연령과 직업도 다양한 관람객들이 스크린을 통해서라도 이 신부를 만나고자 했다. 특히 정부기관 및 지자체, 학교, 기업체도 단체관람을 하면서 열기는 점점 확산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전국 본당에서도 ‘울지마 톤즈’를 상영하면서 이 신부의 정신을 배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관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신부의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도 증보판으로 발행,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서점가 외에 본당 성물방에서도 이 책은 인기 만점이다. 서울 역촌동본당의 경우 무려 400여 권이 판매돼 이태석 신부에 대한 교회 안팎의 관심을 여실히 보여줬다.
김민수 신부(주교회의 매스컴위원회 총무)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모습은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감동을 준다”며 추모열기의 확산을 설명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내려놓은 이태석 신부는 사회 전반에 영향을 줬다. 영화와 책을 통해 많은 이들이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전한다. 그의 숭고한 삶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희생정신은 사라지고,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대학생 박치윤(에르메르·26)씨는 “‘울지마 톤즈’를 보고 눈물을 많이 흘리면서 반성도 많이 했다”며 “그분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교회 안팎으로 퍼져나간 감동은 멈추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태석 신부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노력으로 연결되고 있다.
2006년 개설된 이후 매월 5000원 돕기 운동을 펼쳐온 수단어린이장학회의 활동도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4000명으로 시작한 인터넷 카페 회원은 현재 1만4000여 명에 달하며, 후원회원은 1500명에서 4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하루 방문수 기록이 1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재현(가브리엘)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사장은 “최근 수단어린이장학회와 함께하며 사랑과 나눔 실천을 하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톤즈가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임을 잊지 말고 낮은 이들과 함께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울지마 톤즈’를 제작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구수환 프로듀서는 지난 15일 KBS 1TV ‘사랑의 리퀘스트’에 출연해, 제20회 가톨릭매스컴상 대상 상금 전액을 아프리카 톤즈 병원에 기부했다.
기록적인 한파 속에서도 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는 이 신부를 추모하기 위한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중에는 비신자들의 비율도 많이 차지한다.
비신자인 한정희씨는 “이태석 신부님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존경한다”며 “이재현 이사장을 비롯한 수단어린이장학회가 신부님의 뜻을 계속 이뤄가며,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실천하게 돕는다”고 말했다.
살레시오회 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이러한 교회 안팎의 추모열기에 대해 “불안과 메마름이 더 짙어질 때, 삶 안에서 따스한 마음을 적극 실현하며 살아온 이태석 신부의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전했다.
남 신부는 이어 “이는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 소통, 이웃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이 신부의 모습을 보고 자극 받아 수단 돕기 등 동참하는 기회로 확산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추모 열기 속에서도 잊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순간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숭고한 삶을 산 그의 영성에 집중해야 한다. “나눔은 사랑이며 관심”이라는 이 신부의 말처럼 소외된 이웃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한다.
■ 미디어로 만나는 이태석 신부
- 영화 ‘울지마 톤즈’
-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작곡집 「쫄리신부님의 노래」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이태석 1막 1장 - 삶과 신앙
공부 음악 신앙생활 모두 ‘1등’
군 제대하며 성직자의 길 결심
너무 척박해 아무도 가지 않는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에서 8년간 살며 한센병 환자 돌봐
▲대학 시절 첼로 연주를 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못 하는 것이 없던 자랑스러운 내 아들’.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신명남(안토니아·85)씨는 어린 시절의 이 신부를 이렇게 표현했다. 1962년 9월 19일 부산 출생 이태석 신부. 그는 공부, 음악, 신앙생활 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착하고 똑똑한 아들이었다. 다달이 상을 타와 상장으로 도배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하며 10남매를 키운 홀어머니에겐 온 세상에 자랑해도 모자랄 아들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다. 피아노 소리를 듣고 몹시 배우고 싶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을 잘 알고 있던 이 신부는 성당에 있는 오르간으로 피아노를 독학했다. 이뿐만 아니라 첼로, 색소폰, 클라리넷 등 듣도 보도 못한 악기도 독학으로 연주했다.
작곡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만든 ‘성탄’ ‘둥근 해’ ‘작은 별’ 등과, 중학교 3학년 시절 작곡한 ‘묵상’, 의대 재학시절 작곡한 ‘아리랑’ 등의 곡에서는 음악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엿 볼 수 있다. 중학교 시절 부산시 교육청에서 주최하는 작곡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악보로 남아있지 않다. 무엇인가 남겨 자랑하는 것을 싫어했던 이 신부의 성격 때문이었다.
1981년 부산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이 신부는 어머니의 반대로 신학교를 포기하고 인제대 의대로 진학한다. 그러나 아이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그는 이미 돈보스코 성인과 닮아 있었다고 가족들은 회고한다. 어린 시절, 길을 걷다가도 고아원만 보면 그 앞을 기웃거렸던 그는 입버릇처럼 ‘나중에 커서 돈 벌면 고아원 차릴거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패션쇼, 마술쇼, 마이클 잭슨 춤 등을 선보이며 아이들과 함께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던 이 신부는 조카들에게도 인기 만점 삼촌이었다. 1987년 인제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0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평생을 투신할 곳을 찾아 전국을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영성의 수도회를 찾았다. 바로 청소년 교육을 카리스마로 삼고 있는 살레시오회였다.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한 그는 1992년부터 광주 가톨릭대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1997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품을 받을 당시, 그는 이미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사제로서 살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2001년 6월 24일 서울에서 사제품을 받고 같은 해 11월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왜 꼭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느냐”는 가족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라는 답을 남긴 채 그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전화를 하려면 헬리콥터로 4시간을 날아가야만 하는 오지 중의 오지 아프리카 남부 수단 톤즈. 전기도 없고, 내전의 총성이 그치지 않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곳에서 이 신부는 8년을 살았다.
그가 이처럼 톤즈에 자신을 투신한 것은 그의 ‘성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는 말씀과 중학교 1학년 무렵 성당에서 본 ‘다미안 신부’ 영화를 통해 성소를 느꼈기 때문이다. 다미안 신부는 19세기 말 하와이 칼라와오에서 한센병 환우들을 돌보다 결국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죽은 픽푸스수도회의 사제다.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이태석 신부의 삶과 한센병 환자들의 목수이자 벽돌공, 농부이자 제빵사, 의사이자 간호사였던 다미안 신부의 삶은 닮아있다.
‘예수님이라면 이곳에 학교를 먼저 지었을까? 성당을 먼저 지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학교를 먼저 지으셨을 것 같다’며 모든 기준을 예수님께 두고 하루하루를 살아갔던 이 신부. 중학교 3학년 시절 십자가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며 만들었던 노래 ‘묵상’의 가사처럼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이웃들을 사랑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톤즈 사람들과의 이승에서의 사랑은 길지 않았다. 2008년 11월 휴가차 잠시 한국에 돌아온 이 신부는 생각지도 못한 말기암 판정을 받게 된다. 당시 검사결과를 전한 순천향대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유병욱 교수는 “당시 암 판정을 받은 신부님은 자신이 암에 걸린 것보다 그 때문에 아프리카에 남겨두고 온 일을 못하게 된 것을 속상해 했다”고 말했다. “우물을 파다 말고 왔는데, 열흘있다 수단가야 되는데…. 아이들이 기다리는데…”하며 망연자실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여 년 간 이어진 투병생활, 16차례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투병생활 내내 그는 웃는 얼굴이었다. 아프지 않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말한 것이 그가 한 유일한 거짓말이었다.
“임종을 하루 앞둔 저녁, 이태석 신부는 돈보스코 성인을 만났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 신부는 두 손을 모아 ‘돈보스코!’를 외치더니 크게 십자가를 그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축복했다. 이 신부는 발치에 서 있던 윤석렬 수사에게 ‘에브리싱 이즈 굿(Everything is good!)’이라고 말한 후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두 손을 덮는 제스처를 취했다.
다음 날인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이태석 신부는 가족들과 동료 수도자들이 보는 가운데 웃는 얼굴로 떠났다. 천국 문을 연 그의 나이 48세였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인터뷰] 이태석 신부 어머니 신명남씨
▲이태석 신부 어머니 신명남씨
“신학교에 간다고 할 때에도, 아프리카로 떠난다고 했을 때도 참 많이 울었습니다. 말썽 한 번 부리지 않던 아들이었는데 그 뜻만은 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아무리 울어봤자 하느님을 이길 수가 있나요? 그렇게 아들을 보냈고, 가슴에 묻었습니다.”
이 신부가 아프리카로 떠난 후, 아들의 전화와 방문을 기다리는 것이 어머니 신씨의 일상이었다.
“전화하기 힘든 상황인줄 알면서도 기다렸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아프리카에서 더위와 사투를 벌이고 있을 아들을 생각하며, 여름엔 선풍기도 틀지 않았다고 한다. 아들의 고통과 희생을 조금이나마 함께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을 잃었을 때 신씨는 “하느님이 너무 원망스러워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야 아들을 불러간 뜻을 알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선 우리 아들을 밀알로 쓰신 것 같아요. 성령의 힘으로 하루하루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산 이태석 신부를 위해 기도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눈물을 닦으며 이태석 신부의 사진을 바라보는 어머니 신씨가 웃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웃으며 떠난 아들 이태석 신부와 꼭 닮은 미소였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이태석 1막 1장 - 수단에서
내전으로 망가진 수단에 정착
80여 개 마을 다니며 이동진료
환경 개선·청소년 교육에 힘써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이 성경말씀을 늘 마음속 깊이 품고 실천해왔던 고 이태석 신부. 그는 가장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이 시대의 참 ‘사제이자 선교사’였다.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2001년 11월, 이태석 신부는 남과 북으로 갈라져 내전이 한창이었던 수단 남부의 톤즈로 향한다. 전쟁의 상처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이 처한 열악한 환경이었다. 아이들은 오염된 강물을 마셨고 피부병과 전염병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이들은 말라리아와 장티푸스 등의 질병에 자주 걸렸다.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이 신부는 급한 대로 움막진료소를 만들었다. 의사가 있다는 소식에 환자들은 빠르게 몰려들었다. 100km 이상을 걸어와 치료를 받는 이도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밤낮으로 환자를 돌봤다. 그가 하루 평균 돌본 환자는 300여 명이 넘었다.
그는 환자들을 밤낮으로 돌봐가며 그들 안에 머무르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누구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곁에서 마음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그가 체험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특히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에게 더 큰 사랑과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아홉을 가진 부자에게는 하나만 주면 열이 되지만 하나를 가진 이들에게는 아홉을 주어야 열이 될 수 있음을 아셨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환자들과 함께하며 체험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에게 가난한 이들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소외된 이들 중 가장 소외된 이들 곁에서
톤즈에서 유일한 의사였던 이태석 신부는 평소 80여 개 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을 배려해서였다. 그중 가장 애정을 쏟은 곳은 60여 명의 한센병 환우들이 모여살고 있는 ‘쵸나’라는 마을이었다. 톤즈는 모두가 가난한 곳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정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이들을 만나러 갔다. 처참하기 이를 데 없고 가장 버림받은 삶이 분명했지만 그 안에서 그들을 위로하며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한 손과 발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살고 싶은 강한 소명을 느꼈다.
한센병 환우들에 대한 이 신부의 정성은 지극했다. 고름을 직접 짜고 붕대를 감아 줬으며, 치료제와 함께 복용법에 대한 세세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제대로 된 거주지조차 없던 이들에게 벽돌집도 만들어 줬다. 제각각의 발을 가진 환우들을 위해 그들의 발을 직접 그려 신발까지 제작해 준 것도 그였다.
이 신부는 평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성경말씀인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를 그의 삶 안에서 실천에 옮겼다. 그리고 그는 오히려 한센병 환우들과의 만남을 감사해했다.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게 해주었고,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들어준 이들이 바로 한센병 환우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태석 신부와 한센병 환우 마을의 아이들.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도 가장 가난하다고 손꼽히는 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 이태석 신부는 청소년들이 가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브라스 밴드’를 조직했다.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다
환자들을 돌보는 것도 시급한 일이었지만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 또한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교육만이 가난한 이곳 톤즈 사람들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 신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학교를 다시 짓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톤즈 강에서 모래를 퍼왔고 시멘트는 케냐에서 공수해 왔다. 집이 먼 학생들을 위해서 기숙사도 만들었다.
이러한 열정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학구열은 갈수록 높아졌다. 제한된 전기를 이용해 늦은 밤까지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며 이 신부를 조를 정도였다.
이 신부가 아이들을 위해 각별히 신경 쓴 것이 하나 더 있다. 이 신부는 이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음악을 가르쳤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아이들의 마음은 상처받고 부숴져 있었다. 음악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의 마음에 기쁨과 희망의 씨앗이 심어질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남부 수단 최초의 ‘브라스 밴드’였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은 변해갔다. 아이들은 특유의 아프리카 리듬감으로 음악을 즐겼고 소통하는 법도 배워나갔다. 얼었던 마음도 서서히 녹아갔다. 아이들은 언제부터인지 총과 칼을 녹여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선종하기 몇 개월 전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던 추억에 대해 이렇게 소회했다.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내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참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더 고마웠습니다. 처음에는 워낙 가난한 아이들이어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에게는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습니다.”
영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이 신부는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등 종교로 사람을 구분 짓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랑을 잃은 이들에게 사랑을 주는데 종교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는 진정한 선교는 결과나 수치 등에 매몰 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의 깊고 넓은 사랑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가 활동한 톤즈는 토속신앙이 강한 곳이었다. 무당과 주술사를 합쳐 놓은 사람인 ‘꾸쥬르’에 대한 믿음은 거의 맹목적인 수준이었다. 꾸쥬르의 말만 믿고 단순한 병을 키워 죽는 경우도 흔히 발생했다. 이러한 문화는 분명 선교하는데 있어 장애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톤즈의 전통 문화를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전통 문화를 존중했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나아가 그는 이 토속신앙을 가톨릭 신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장점으로 활용했다. 그들의 토속신앙은 정신적인 것들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고 이는 그리스도교를 심어주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선교하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 이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호흡하는 것이었다. 그가 행한 희생과 봉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다 더 쉽게 느끼게 했던 복음화의 밑거름이었다. 이태석 신부는 선교사로서 이후 이렇게 말했다.
“멋진 말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순 있어도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키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영혼을 감동시키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영혼의 진실한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합니다. 우리의 진실한 눈빛과 작은 희생, 봉사를 통해 이들은 예수님을 느끼거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영혼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전문가가 돼야 합니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이 시대를 밝히는 영성’
살레시오회 135개국서 다양한 지원 펼치며 선교
어디든 누구든 관계없이 젊은이 돌보고 교육활동
덕분에 지난 1년간 사회 각계에서는 이 신부가 못 다한 나눔과 사랑의 불씨를 지피는 움직임이 활발히 이어졌다. 한국사회가 이 신부 선종을 계기로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닌 ‘선한 마음’을 더욱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선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이 처음의 마음과 같은 뜻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 신부의 삶과 신앙의 근간에 대해 올바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물질만능주의에 휩쓸려 ‘의사로서 살았으면 더 편안했을 텐데, 한국에서 활동했으면 암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수단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봉헌하고 희생해 본받을만하다’ 식으로만 단순히 생각해선 안 된다. 그의 삶과 신앙의 근간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그가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선교사로서 한결같은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지 알고 또한 개개인이 본받아 실현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살레시오 영성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는 이태석 신부에 대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돈보스코 성인이 지닌 모습을 충실히 보여준 회원으로 평가한다. 실제 이 신부의 삶은 어렵사리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다방면에서 재능을 선보이며, 어린 시절부터 젊은이들을 돌보는데 관심을 보였던 면모 등에서 돈보스코 성인과 많이 닮아있었다. 또 어릴 때부터 고아원을 짓고 싶다는 꿈을 피력하며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40)는 성경말씀을 실현하는데 한 생을 다했다.
살레시오 영성은 ‘나에게 영혼을 달라. 나머지는 다 가져가라’라는 돈보스코의 모토 안에 축약돼 있다. 이태석 신부 또한 수단에서 활동하면서 ‘영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매순간 노력하며, 무엇보다 청소년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예방교육에 매진했다. 예방교육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존엄성과 능력을 알고, 그것을 스스로 키워나가도록 돕는 시스템이다.
살레시오 회원들의 현존은 젊은이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이어진다. 세계 어디서든 젊은이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적이며, 이에 따라 그 주변 환경도 사목 대상이 된다. 바로 교육을 통한 사목이 선교사명의 구현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태석 신부도 톤즈 마을에서 학교를 세우는데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다. 더불어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이 처한 환경을 돌보는데 자신의 다양한 재능을 모두 쏟아 부었다.
이태석 신부(가운데)가 2001년 사제서품식에서 동료 새 사제, 부제들과 기념촬영한 모습.
해외 선교
이태석 신부는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직접 실천하는 선교사의 한 사람이었다.
이 신부는 수단에서 활동하는 동안 특히 “비그리스도교 국가에서 살레시오 회원은 그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종교적 가치를 존중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교육적이며 사목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신앙에로 회심하는 자유로운 여정에 알맞은 여건을 조성할 것이다.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배경 때문에 외적인 형태의 복음전파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는 수도회가 증거와 봉사활동을 통하여 선교적 현존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이다“라는 수도회 회칙(20조)을 실현하는데 매진했다.
현재 살레시오회 회원들은 전 세계 135개국에서 활동한다. 수도회 총본부는 지난 30여 년간 이른바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추진, 아프리카에 최대한의 인적, 물적 자원을 지원하며 해외 선교에 박차를 가한 바 있다. 이 신부도 아프리카 프로젝트가 한창 추진되는 중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총본부는 그를 수단으로 파견했다.
해외 선교는 단순히 넉넉한 교회에서 가난한 교회에 인적·물적 지원을 하는 활동이 아니다. 민족 간 나라간 친교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하느님 안에서 한가족으로 기쁜 소식을 나누는 활동이 바로 해외 선교다. 또 해외 선교는 본토인들을 단순히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개인과 집단, 활동, 가치관, 생활양식과 환경, 문화 등을 복음의 가치에 맞게 바로잡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신부가 수단에서 활동할 때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 이상으로 지역 주민들을 돌보는데 전력을 다한 것도 선교사로서의 소명을 올바로 실현하는 노력의 하나였다.
이 신부는 신앙의 은총은 이웃과 복음을 나눌 때 더욱 충만해지며, 선교하지 않는 신앙은 실천 없는 믿음으로 그 활력을 잃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실현한 선교사였다. 선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신부가 남긴 모범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해외선교에 대해 특정인만이 실천하는 활동으로 인식하거나 단순히 구호 개념으로 축소하는 등의 사고는 재고돼야 함을 더욱 절감하는 기회를 가졌다. 무엇보다 이 신부의 삶은 어디에서든, 어느 누구에게든 용감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지니는데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더욱 관심을 모은다.
“우리 살레시안들의 제2성소인 선교성소는 ‘하느님의 소리’를 자기 내면에서 찾아나서는 여정과도 같은 것입니다. 제 생각으론 선교성소의 첫 번째 식별은 하느님의 말씀의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마음속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불쌍한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에서 복음 전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빠진다면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 세상의 많은 NGO 단체들의 활동과 우리 살레시안들의 활동에 큰 차이점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 계속 기도하십시오. 반복이 되더라도 꾸준하게 선교성소에 대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내면에서 들려오는 뚜렷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 이태석 신부가 후배 수도회원에게 보낸 편지글 중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인터뷰] 살레시오 수도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
살레시오회 한국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이 신부님의 선종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보다 적극적인 선교사명 수행”이라고 강조했다.
살레시오회의 사목활동은 선교와 복음화 부분에서도 적극 실현된다. 특히 해외선교 역량은 여느 수도회나 사도생활단 못지않게 활발히 펼쳐, 총본부는 현재까지 41번째 선교단을 파견하고 복음화에 힘을 싣고 있다.
한국관구 회원들도 수도회 내 양성지원과 한국교회 성장 등에 힘입어 해외선교에 더욱 활발히 투신, 현재 한국관구 회원들은 수단을 비롯해 몽골과 캄보디아, 말라위, 파푸아뉴기니 등에서 선교 중이다.
남 신부는 “한국관구도 20여 년 전부터 해외 선교에 특별히 관심을 가져왔다”며 “앞으로 해외 선교 역량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기존 선교후원회를 이른바 선교국 등으로 승격해 지원 시스템을 더욱 탄탄히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국관구는 이에 따라 지난 최근 회의를 통해 선교국(가칭) 승격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올해 안에 체계를 마련키로 했다. 아울러 앞으로 선교국을 중심으로 선교사 활동에 대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화하고, 한국관구 자체적인 프로젝트 실천, 선교성소 발굴 및 양성을 비롯해 수도회의 선교역량을 폭넓게 나누는데 박차를 가할 방침이다.
현재 수도회는 이태석 신부와 관련해서도 그간의 삶과 신앙생활, 활동 등에 대한 자료를 수합, 정리 중이다. 그동안 일반 사회에서 펼쳐지는 개별 후원활동 등은 살레시오회와는 관계없이 이뤄져 주체적으로 수합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하지만 한국관구는 수단어린이장학회의 활동 등 이태석 신부의 뜻과 살레시오회 카리스마에 부합하는 긍정적인 움직임들에 대해서는 필요한 경우 적극 지원한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우리 모두는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삶이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 것인가도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살레시안들은 무엇보다 교육을 통한 복음화, 복음화를 통한 교육 실현에 더욱 힘쓰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과 같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활동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기억하고 ‘돈보스코 성인의 미소’ ‘하느님의 미소’를 널리 알리는데 더욱 많은 이들이 동참하길 바랍니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추모열기 한가운데서
1주기 맞아 전국 각지서 추모 발길 이어져
고인이 보여준 사랑 새기며 실천할 것 다짐
14일, 이태석 신부의 1주기를 맞아 가족들을 비롯한 수많은 추모객들이 고인이 잠들어 있는 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을 찾았다.
이태석 신부 형제 중의 막내인 이태선(베네딕토)씨가 무덤 앞에 KBS 감동대상 트로피를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여섯 째 누나 이영남(요안나)씨와 일곱 째 누나 이영애(수산나)씨는 무덤에 쌓인 눈을 치우다 그동안의 그리움을 토해내듯 울음을 터트렸다. 이른 아침부터 와있던 추모객들은 이태석 신부의 무덤 앞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다.
“당신이 가신 길을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이 베푸신 그 사랑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전달하겠습니다.”
이태석 신부를 위해 오카리나 연주를 준비한 신자도 있었다. 기도하는 추모객들 틈으로 신수희(율리아·부산교구 남산동본당)씨의 오카리나 연주가 흘러나오자 너나 할 것 없이 눈시울이 붉어졌다. 연주하는 신씨의 눈에도 이슬이 맺혔다.
신씨는 “이태석 신부님께서 음악을 좋아하셨으니 나도 신부님께 음악으로 선물을 드리고 싶었다”며 “연습시간이 너무 짧아 기뻐하실까 걱정도 되지만 신부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후 1시,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미사를 주례한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꼬회·이태석 신부의 형)는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과 기쁨을 더욱 많은 이들이 나누고 맛보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에 앞선 13일 오후 8시, 살레시오회 서울 대림동공동체 성당에서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수도회원들만의 소박한 미사를 봉헌하려 했지만, 신자들의 원의에 따라 성당 문을 더욱 활짝 열었다. 미리 알림을 돌리지도 않았는데 성당 내 300여 개의 좌석이 모두 차고도 자리가 모자라 여분의 의자를 가져다 놓아야했다.
특별한 추모예식은 없었지만 이태석 신부를 기억하고, 그의 사랑을 되새기는 마음만은 뜨거웠다.
미사를 주례한 살레시오회 관구장 남상헌 신부는 “우리는 이태석 신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됐다”며 “주변 이웃 중 가장 가난하고 소외 받는 이들을 위해 얼마만큼 마음을 쓰고, 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일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이태석 신부의 뜻을 기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사에 참례한 이정자(데레사·신림동본당)씨도 “이태석 신부님은 병으로 심각한 고통을 겪으셨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한 행복한 분”이라며 “이태석 신부님의 모습에서 우리도 어떻게 살아야할지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이날 미사에는 수단 유학생 존, 토마스, 산티노가 함께해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보여줬던 지극한 사랑의 의미를 실감케 했다.
■ 이태석 신부님을 기억하며
이태석 신부님의 삶 안에서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은 돈보스코의 마음과 미소’를, ‘예수님의 마음과 미소’를, ‘하느님의 마음과 미소’를 찾는 것, 그것이 이태석 신부님의 뜻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하신 관구장 신부님의 강론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와 감동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위의 어려운 이웃들, 특히 젊은이, 그것도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마음과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수많은 말과 감동보다 더욱더 이태석 신부님과 돈보스코 성인의 마음을 따르는 것임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었네요.
우리 형제들은 ‘수단의 돈보스코’라고 이태석 신부님을 부릅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이 정말 아름다웠지만,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아프리카 땅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살레시안으로서, 아프리카의 돈보스코로서, 가난한 젊은이들과 수십 년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는 살레시오 선교사 수사님들과 신부님들을 기억합니다. 수많은 살레시오 선교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그 모든 살레시안들을 대신해 드러나는 대중의 사랑을 받고 계십니다. 모든 오지의 선교사들과 돈보스코의 아들들과 가난한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오늘 밤을 보내렵니다.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 살레시오회 강훈 수사가 이태석 신부 추모미사 후 수도회 홈페이지 게시판에 남긴 글의 일부.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인터뷰] 톤즈에서 온 유학생 존·토마스·산티노
수단에서 온 세 청년 존(25), 토마스(27), 산티노(27)는 이태석 신부가 보여준 ‘사랑 그대로의 삶’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겠다고 밝혔다.
이태석 신부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수단 남부 톤즈에서 온 세 청년은 사단법인 수단어린이장학회 초청으로 현재 연세대학교 한국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어가 익숙해지면 이태석 신부의 모교인 인제대 의대나 농업계열 학교 등에서 수업을 받게 될 예정이다.
“이태석 신부님은 자신감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어요. 신부님의 가르침대로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공부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거예요. 의사가 돼 어렵거나 슬픈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세 청년에게 이태석 신부는 살아갈 희망을 만들어준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전쟁, 빈곤, 질병으로 고통 받는 현실을 벗어나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유일한 버팀목이기도 했다.
“신부님과 있을 땐 항상 즐거웠어요. 음악도 가르쳐 주시고, 항상 청년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죠. 신부님과 있을 때는 슬픈 일이 있어도 함께이기에 행복했는데 이젠 그런 신부님이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당장 이태석 신부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고향 톤즈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들에게 남은 과제는 이태석 신부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신부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친하게 지내셨어요. 항상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애쓰셨죠. 우리도 신부님처럼 우리 이웃들을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그 시간 이후
■ 이어지는 삶의 변화
척박한 땅에 뿌려진 ‘이태석’이라는 씨앗은 먼 타향, 한국에서도 다양한 변화의 열매를 맺고있다. 열매는 단순히 4000명에서 1만4000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수단어린이장학회의 카페회원 숫자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의 한 선교사가 보여준 업적과 열정에 열광하고자함도 아니다.
그가 아프리카 톤즈에 남긴 진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회 속에 퍼져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 ‘울지마 톤즈’가 개봉된 후,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변화를 느꼈다고 전한다. 그 변화는 때로는 충격과 감동으로, 때로는 성찰과 반성으로 다가온다.
“‘아름다운 나눔 정신을 가진 이들이 많다는 것’, 그것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수확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나눔의 방법’을 제시해 주었어요. 보통 사람이었던 신부님처럼 우리도 남을 위해 사랑과 희생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지요.”
수단어린이장학회 이재현(가브리엘) 이사장은 자기가 가진 재능과 능력을 남을 위해 내어놓는 모습이 현대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나눔 정신을 깨웠고, 구체적 방법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태석’이라는 세 글자를 통해 얻어진 수확이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이사장은 “불우한 이웃과 ‘친구’가 된다는 것이 나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신부님으로 인해 한 차원 높은 나눔의 정신이 확산된 듯하다”고 말했다.
■ 우리 손에 남겨진 숙제
영화 ‘울지마 톤즈’를 제작한 구수환 프로듀서 또한 지난 15일 제20회 가톨릭매스컴상 대상 상금 전액을 아프리카 톤즈 병원에 기부했다. 비신자인 그는 ‘울지마 톤즈’를 촬영하면서 함께 눈물 흘리고, 시사회에서도 이태석 신부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사회 고발 프로그램을 주로 해왔던 내가 이 작품을 만들며 많은 부분 변화했다”며 “이 신부님은 군림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으며, 눈높이로 소통하는 헌신적 사랑을 가르쳐줬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 서울 명동 평화화랑에서 열린 이태석 신부 추모 전시회 또한 남겨진 그리스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한 작은 노력이었다. 판매금 전액은 다시 아프리카 후원금으로 돌아가 사랑을 실천하는 매개가 됐다. 전시회의 주제는 ‘또 하나의 기적을 바라며’였다.
중요한 것은 사회에 퍼져가는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사랑과 공동체 정신, 나눔 등은 모두 ‘그리스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색깔로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얼마만큼 퍼져갈 수 있는가는 이제 우리 손에 남겨진 숙제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그 시간 이후 톤즈에서는 …
수단 현지 시각으로 14일 이태석 신부의 손때가 묻은 학교에서 선종 1주기 추모미사가 봉헌됐다. 이날 미사는 라디오 방송으로 생중계돼 인근 50~60km 반경 내에 있는 주민 모두가 참례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이 라디오방송국은 이 신부가 선종한 지난해 1월 시작, 남수단쪽 가톨릭교회 소식은 물론 음악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요한 매체로 자리 잡았다.
이 신부 선종 이후 살레시오회는 우경민 신부를 새 선교사로 파견했다. 벌써 5개월이 넘어섰다.
우 신부는 현재 고등학교 건축에 분주하다. 작지만 기숙사도 딸린 학교다. 오는 3월이면 이 건물은 고등학생들로 북적일 예정이다. 고등학교 건물은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가장 세우고 싶었던 건물 중 하나였다. 이 신부는 생전에 초등학교 건물 창고를 꾸며 고등학교 문을 열었었다.
톤즈마을 초·중·고등학생 1200여 명은 이 신부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학업에 더욱 열심이다. 이 신부가 결성한 밴드의 활동도 여전하다. 병원은 봉사자가 없어 케냐에서 파견된 수녀들의 도움으로 운영 중이다.
이 신부 선종 이후 그 뜻을 함께하고자 의료·건축 자원봉사자 몇몇도 톤즈 마을을 찾았었다. 하지만 그 중 건축봉사자는 톤즈마을에서 봉사를 마친 후 귀국 직전 말라리아로 선종해 톤즈 주민들에게 또 다른 아픔으로 남았다. 사랑과 봉사의 실현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을 만큼 귀한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하는 시간이었다.
톤즈뿐 아니라 수단 전역에서는 여전히 많은 봉사자들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
우경민 신부는 “평화는 외적인 안정만이 아니라 서로가 만나고 대화하고 이해할 때 이뤄진다”며 “보다 많은 이들이 어떠한 재능이든 나눈다면 큰 선물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우 신부는“하느님께 받은 탈렌트를 다 내어놓았던 그 삶 자체가 바로 이태석 신부님께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며 “이곳에서는 사제와 수도자만이 아니라 각자 가진 다양한 재능을 나누어줄 많은 평신도, 일반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아쉽게도 현재 톤즈마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수주일 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나마 연결되던 톤즈마을 이메일은 더욱 느려져, 파일 첨부는 요원하다.
[커버스토리]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인터뷰] 이태석 신부 추모
전 ‘또 하나의 기적을 바라며’ 연 화가 강현주씨
고인의 모습이 자신의 삶 변화시켜
신부님의 사랑 화폭에 담아 전하며
예술로 소외된 이웃 위해 봉사할 것
전시회를 연 화가 강현주(미카엘라·서울 풍납동본당)씨는 당시 “가난과 고통에 찌든 톤즈 주민들에게 사랑으로 다가간 이 신부님의 모습에 감명을 받아 전시회를 준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태석 신부의 선종 1주기, 그가 말하는 이태석 신부로 인한 ‘변화’는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제가 느낀 감동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이 신부님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펜과 붓을 들어 이태석 신부의 모습을 화폭에 담는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지요.”
영화가 제작되기 전, 이 신부의 선종에 대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은 더해갔다. 관심 없고 조용한 세상에 이 신부의 정신을 그림으로라도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족과 친인척을 만나 인터뷰하며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던 모습과 투병 중의 모습 등 30여 점을 마련, 전시했다.
전시회를 준비하며 어려운 가운데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그는 오히려 이태석 신부의 그리스도적 사랑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말했다.
“신부님의 사랑을 보면서 저부터 많은 것이 변화됐음을 알았어요. 이기적이고 교만했던 모습도 많이 희석돼가는 것 같아요. 저희 아이들도 변화했어요. 오래 전에는 관심이 없던 아들도 친구들을 직접 수단어린이장학회 회원으로 가입시키기도 했으니까요.”
그는 이 신부가 전하고 간 ‘사랑의 불씨’는 꺼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문하생과 제자 등 시간이 흐를수록 이 신부의 사랑을 알고 관심을 갖는 이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부가 자신이 가진 탈렌트를 나눴듯, 자신도 예술로 많은 이들을 돕고 싶다고 했다.
“뜻이 같은 작가들이 동참해주어 전시회가 지속됐으면 좋겠습니다. 제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소외된 이들을 위해 예술로써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얻는 행복이 저에게는 더 크거든요.”
[현장에서] 일 년 전 이맘때/이지연 기자
일 년이 흘렀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전과는 의미가 다르다.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이태석 신부의 숭고한 삶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는 참회의 눈물이다. 이 신부 선종 후 변화도 많았다. 그가 아프리카 수단 톤즈에서 살았던 8년과 투병생활을 담은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개봉돼,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전해줬다.
내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희생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살았던 이 신부의 삶은 ‘충격’이었다. 이 신부는 의사로서 평탄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돌연 사제가 됐다. 또 사제로서 얼마든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지만 전쟁과 가난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가는 톤즈로 들어갔다.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음악인으로서, 사제로서 하느님이 그에게 주신 재능을 온전히 톤즈에 쏟아 부었다. 대장암 선고를 받고도 자신의 몸보다는 톤즈를 먼저 걱정했다.
그의 삶이 특별하게 보일 수 있다.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이태석 신부가 재능과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롯이 톤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내놓았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지난해, 장례미사 취재 후 ‘마지막 미소의 의미’라는 글을 썼었다. 영정 속 이태석 신부의 미소가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미소의 의미를 선종 1주기를 맞아 다시 되짚어 봤다. 이태석 신부는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통해 변화되고 사랑으로 충만하리라는 것을.
첫댓글 재주가 없어서 밤을 새우면서 글을 복사하고, 사진도 옮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가톨릭신문 기사를 못보신 님들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감사 합니다^^수고하셨습니다^^
좋은글과 사진 잘보고 갑니다 수고 엄청 하셨네요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어도 듣고 또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이태석 신부님의 삶.
그리스도적인 사랑, 사랑... 아,세상을 변화시키는것 결국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웃 사랑임을 톤즈의 슈바이쳐 이태석 신부님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면이신 그리스도님, 찬미 영광 길이 받으소서.
밤을 새워 전 세계에 글을 통지하여 주신 길손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참으로 큰 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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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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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를 더욱 더 보살펴 주심을 믿습니다...할랠루야
짧은 생애 큰 사랑 실천의 이태석 신부님을 이제사 뵈오니,지나간 허송 67년 세월에
이제 신부님은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니,이 땅에 오셔 베푸신 그사랑과 깨우쳐 주신 진혜는 '톤즈 슈바이쳐-이태석신부'로
영원히 진리와 함께할 것이며,더 높고 곳에서 빛이 되시어 아프리카와
(一 燈 能 除 千 年 暗, 一 智 能 滅 萬 年 愚 )
밤 12시 시간 가는줄 모르고~~~~ 참 고귀한 삶 을 우리들에게 몸소 실천하신 신부님 ! 길손님 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2011년7월15일 서울 신길동에 있는 수도회 한국본부에서는 故 이태석 신부님이 봉사하셨던 아프리카 신생,수단국가로 의료와 기술지원봉사자의
파견식이 거행됐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선종후 처음인 이번 봉사자로 활동하는 사람은, 피부과 병원장,유병국.김혜경씨 부부와 건축전문기술인,
송기섭.이재야씨 부부이며,봉사에 동행하는 이들 부인들도 이번 봉사활동을 위해 간호조무사학원까지 수료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참으로 감동적 입니다.
장마철 먹구름속에서도 그리운 이태석 신부님은 높은 곳에서 화사한 미소로 세상을 환하게 빛추고 있습니다... 길손님,큰 일 하셨습니다.
아프리카 수단 '톤즈의 슈바이쳐' , 이 태 석 신부님에게 대 한 민 국 최고 훈장인 국 민 훈 장 무 궁 화 장이 수훈됐습니다.
미디어 다음등 전자정보통신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인터넷과 우편등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된 국민추천 정부포상제에 따라서
지난 7월 15일 청와대에서 이 명 박 대통령으로 부터 국가 최고의 국 민 훈 장 무 궁 화 장이 수훈됐습니다.........영광 영광 길이길이 받으소서~~~~
( 고귀하신 이태석 신부님의삶이 영원하시므로 故를 쓰지 않습니다.)
故 대신에 前으로 쓰시면 어떨런지요? ㅎㅎㅎ 농담입니다. 이 태석 신부님을 기리는 선생님의 마음에 존경을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