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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4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창세 46,1-7.28-30
복 음 : 마태 10,16-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17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19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20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21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옆집 남편과 자기 남편을, 옆집 아내와 자기 아내를, 옆집 아이와 자기 아이를….
이런 식으로 비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느 자매는 이 비교가 더 심한 것 같습니다.
남편이 밖에서는 능력 있고 인정받는 사람이지만,
아내의 비교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편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옆집 남편은 퇴근하면 아이들과 놀아주는데,
우리 남편은 항상 늦게 들어와서 아이가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입니다.
휴일에는 쉬어야 한다면서 하루 종일 잠만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이러니 옆집 남편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남편을 믿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함께할 것을 생각하니 끔찍합니다.”
만약 사이코패스 흉악범이 옆집 남편이라면 이때도 비교할까요?
즉, 내 남편이 저런 흉악범이 아니라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식의 비교는 하지 않습니다.
비교 대상을 넘어설 수 없는 존재처럼 만들면서,
가까운 나의 사람이 볼품없어지고 결국 자기 마음도 우울해집니다.
비교 대상과 나의 행복은 연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해줄 뿐입니다.
행복의 주체는 ‘나’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합니다. 남편, 아내, 자녀, 부모, 상황….
그러다 보니 행복은 신기루처럼 집힐 듯 잡힐 듯하면서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내 마음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항상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들은 제자들을 박해할 사람이지요.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여전히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바로 조심해야 할 사람입니다.
조심한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요?
그보다는 나의 마음을 똑바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걱정한다고 나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을 굳게 믿고
함께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군대 갈 때가 생각납니다.
낯선 곳, 낯선 장소에 가는 것 자체가 얼마나 겁이 나고 두려웠는지 모릅니다.
커다란 장벽이 느껴졌고, 정말로 죽으러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군대에서의 시간이 저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장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들, 내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 대해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와 함께하는 주님을 만나야 할 때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어려움 속에 있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야외미사를 다녀왔습니다.
야외미사가 잘 진행되기 위해서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날씨’도 큰 몫을 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일기예보를 보았는데 ‘비’ 소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일기예보의 예측 대신에 화창한 날씨를 주셨습니다.
야외미사에 온 교우들도 모두 환한 모습으로 미사가 있는 공원으로 모였습니다.
작년에도 화창한 날씨를 주셨는데 올해에도 하느님께서는 좋은 날씨를 주셨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50%는 이미 성공한 셈입니다.
미사를 마친 후 각 구역 별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우리는 LA갈비와 삼겹살로 모두가 풍족히 먹고도 남았습니다.
각 구역마다 전을 부치고, 맛있는 밑반찬을 준비해 왔습니다.
저는 구역마다 돌아다니면서 준비한 음식을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청을 받아들여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혼인잔치는 더욱 풍요로워졌습니다. 저는 소주에 맥주를 섞어서 ‘소맥’을 만들어 드렸습니다.
각 구역별로 신나는 노래잔치를 하였고, 야외미사의 꽃인 보물찾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교우들은 공원에 숨겨진 보물을 찾으면서 무척이나 기뻐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마련한 기념품인 ‘수건과 우산’을 나눠드리고
야외미사는 내년을 기약하며 마무리되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번 야외미사에는 1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마침 그날이 생일인 친구가 있었고, 지난번 종신부제서품 축하식에 함께 했던 청년들이
이번에는 생일축하를 한다며 모였습니다.
이제 막 결혼한 청년도 왔고, 결혼을 앞둔 청년도 왔습니다.
고백성사를 청한 청년들에게 고백성사를 주었습니다.
먼 바다로 갔던 연어들이 다시 태어난 강으로 오듯이
대학과 직장생활로 바빠서 성당에 오지 못했던 청년들이
이제 다시 복사를 하고, 한국학교에 다녔던 성당으로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청년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 하였던 종신부제님이 있으니,
청년들을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면 성당은 더욱 활기를 찾을 것 같습니다.
넓은 공원에 분명 보물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보물이 없다고 불평이 있었지만, 열심히 찾는 사람들에게 보물은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곱은 가족과 가축을 데리고 요셉이 있는 이집트로 출발하였습니다.
야곱과 그 가족들은 마치 이집트로 ‘야외미사’를 가는 것 같습니다.
사목위원들이 선발대로 가서 야외미사를 할 수 있도록
제대를 마련하고, 의자를 준비했던 것처럼
요셉은 선발대가 되어서 이집트에서 가족들이 머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였고,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복약 안내서’를 써주는 한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의사는 색다른 복약 안내서를 작성했다고 합니다.
처방된 약이 어떻게 몸을 바꾸어 나갈 것인지, 앞으로 치료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몸이 달라지는 과정에서 어떤 증상이 나타날 것이며,
스스로 몸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을지 알려주었다고 합니다.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기도 했지만, 복약 안내서를 읽고 기뻐하는 환자들이 있어서,
변화된 몸을 스스로 느끼는 환자들이 있어서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좋은 치료는 그저 약을 주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 끊임없이 소통하는 것이라는 한의사의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욕망을 다 채우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채워진 것들은
그것이 사라지게 되면 더욱 공허하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화려한 언변과 지식으로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입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해 주려는 태도입니다.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신앙은 고통 중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아갈 수 있는 이정표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견디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항상 참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때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용수철을 누르듯이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뿌리를 깊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이 혼란할수록 신앙의 가치관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부드러운 것은 휘어집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드러내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주님께서 친히, 모욕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셨는데 어찌 십자가를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 앞에 성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넘어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 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상황이 변화되길 바란다면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하고
마음속으로 묻기를 바랍니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모함이나 수군거리는 소리에 속상해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상처받지도 말고
오직 십자가로 승리를 거두신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미움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박해를 면치 못했고(요한 3,17; 15,18), 수난에서 절정을 이룬다(마태 23,31-32).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당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도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라 하신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는 것이다.
지금도 항상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 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이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 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 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마태 5,12)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오늘의 말·샘 기도>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이렇게 말하면 사람이 무섭지 않게 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라고 하시며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신앙인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길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는 방법으로
무엇을 말할까,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겨내려면 나의 것을 말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야 합니다.
누구나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기를 하거나 연설하거나 글을 쓸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몰라서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복음을 전할 때 거부당하는 두려움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사제가 강론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는 강론의 준비가 너무 힘들어서 미사 울렁증까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을까 봐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불안과 걱정, 두려움은 ‘나’ 때문에 생깁니다.
내가 한 말 때문에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이미 내가 죽을 위험에 놓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심리학자가 이유 없는 불안증을 조사한 결과
그 사람들이 ‘나’라는 말을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쓴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불안하지 않으려면 나를 없애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로켓맨’(2019)은 팝 록 뮤지션 엘튼 존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그는 단호한 어머니와 자신에게 전혀 관심 없는 아버지 사이에서 사랑을 목말라하며 성장합니다.
그의 유일한 탈출구는 음악이었지만,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해서인지 동성애자가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마음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이 드러나게 될까 봐 무대공포증을 일으킵니다.
그가 어떻게 무대공포증을 극복하게 되었을까요?
그는 우선 사랑 받지 못해 사랑을 갈망하는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무대 위의 과장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듭니다.
무대 위에서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화려한 의상과 안경을 착용하고 예명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연약한 자신과 대중이 보는 자기 페르소나와 거리를 두고
수줍은 레지 드와이트에서 화려한 엘튼 존으로 변신하면서 자신감을 얻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려다가는 거부당하는 두려움 때문에 복음 전파를 오래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한다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제가 신학생 때 어리석은 생각으로 동료 신학생과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동해를 보고 있었는데 파도가 매우 높게 일고 있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파도가 저렇게 치는 이유는 바람의 영향이라고 했고 저는 달의 인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분명히 어디에선가 본 것 같았습니다.
사실 달의 인력 때문에는 밀물과 썰물이 생기는 것이고 파도는 바람의 영향이 더 큽니다.
그러나 저는 그 생각을 계속 주장하였습니다. 어차피 틀려도 내가 틀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런 잘못된 정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저의 실수입니다.
이런 경우 좌절에 빠지지 않고 쉽게 자신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받아 전하면 그 말씀이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말씀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에 대해서도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생각일 때에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질 것입니다.
강론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해서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는 것을 하면 부담이 없습니다.
“주님, 이번에는 신자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싶으세요?”라고 묻고 묵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묵상에서 나온 것을 강의할 때는 부담이 사라집니다.
나의 생각을 말하면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평가당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응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나중에는 미사가 무서워집니다.
기도로 받은 말만 전합시다. 그러면 강론의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고 미사가 편하고 즐거워집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이것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의 공연입니다. 나를 보여주지 말고 내 안의 그리스도를 들려주고 보여줍시다.
그러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균형이 잡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순박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험하고 악한 세상,
이리 떼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세상 안에서 뱀처럼 슬기로워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어린양 한 마리가 잔뜩 굶주린 이리들 사이에 둘러 쌓이면 생존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농장 주인이든, 누군가의 개입이 없으면, 어린양의 죽음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 제자들이 딱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강한 적개심과 미움으로 무장한 적대자들 앞에
제자들은 한 마디로 파리 목숨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 제자들은 단 하루도 홀로 설 수 없는 가련한 처지였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마치 농장 주인의 신속한 도움을 기다리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매일 매 순간 그저 하느님만 바라봤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께만 신뢰를 두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아이들처럼 처신하지 않았습니다.
수시로 다가오는 적대자들로부터의 공격 앞에서도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제한된 조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신 슬기와 지혜를 발휘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해 매진했습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 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박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