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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튜헨리 주석성서 히브리서 그리스도의 제반 의무(히 13:1-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은 "선택된 사람들을 그의 것으로 삼으시고 그들로 열심히 선을 행하게 하시기 위해서 였다." 이제 바울은 믿는 히브리인들에게 여러 가지 선한 의무를 행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선행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훌륭해질 수 있음을 말하였다.
Ⅰ. 형제 사랑의 의무를 행하려고 권고하였다(1절). 바울의 이 말은 모든 사람을 같이 태어난 형제처럼 또 같은 동족들처럼 사랑하고 그들의 사랑을 친형제들에게만 베풀지 말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말에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마땅히 있어야 하는 특별하고 영적인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뜻이 들어 잇는 것이다.
1. 이 말씀은 이 편지를 받는 히브리인들이 이미 이러한 형제 사랑을 지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비록 히브리인들은 당시 종교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혼란되고 분열된 상태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진정한 형제 사랑이 살아 있었다. 이러한 사랑은 성령의 임하신 후 즉시 그들 가운데서 역사하게 되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모든 제물을 유구상통하였고 또 사유 재산을 팔아 형제들의 생계 유지를 위한 기금으로 내놓았다. 기독교의 정신은 사랑의 정신이다. 또한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 한다. 만일 믿음이 사랑에 의해 역사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유명무실한 것이다.
2. 이러한 형제 사랑은 늘 상실된 위험 가운데 존재한다. 특히 그 사랑이 가장 필요한 박해 시대에 유실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는 모세의 율법이 정해 준 제의를 아직도 지킬 것이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논쟁은 사랑을 없애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것이었다. 신앙의 관한 지나친 논쟁은 그리스도인 사이의 사랑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이 사랑을 수호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형제 사랑은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형제처럼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헌신적인 애정이 자라날수록 동시에 형제간의 사랑도 더욱 증대되어야 할 것이다.
Ⅱ. 나그네 접대의 의무를 행하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2절)고 하였다. 우리들은 접대하기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여기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요구된 의무. 그것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이방인들과 우리와는 낯선 그런 사람들을 접대하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말은 이 세상에서는 스스로 나그네로 여기고 저 세상을 바라보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접대하라는 말씀이다. 특별히 당시의 믿는 유대인들은 절망적이고 곤고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즉 본문은 이런 자들을 대접하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도 쉴 곳을 얻지 못하여 애쓰는 사람들을 보면 비록 우리가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을 진심으로 우리 가정에 영접해 들여야 할 것이다.
2. 손님을 대접해야 하는 동기.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창 18장)과 롯(창 19장)이 그랬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대접한 손님 중의 한 분은 아들이기까지 하였다. 우리가 이러한 입장에 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하여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을 그리스도는 자신이 대접받으신 것으로 여기시고 보상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마 25:35).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복음서에서 "너희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덕한 종들에게 그들이 "부지 중"에 행한 선까지 기억하시고 은혜와 존귀를 그들에게 부어 주셨다.
Ⅲ. 서로 동정한 것을 권한다. 그러므로 본문에 "갇힌 자를 생각하라"(3절)고 하였다. 여기에서 다음을 살펴 보자.
1. 요구된 의무. 그것은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은 흔히 어떤 교인과 교회는 고난받는 한편 다른 교회를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다. 그는 모든 교인이 동시에 피로써 투쟁하도록 부르시지는 않는다.
(2) 자유로운 사람들을 역경과 어려움과 처한 사람들을 마치 자신이 같은 쇠사슬에 얽매인 심정으로 동정해 주어야 한다. 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이 고통을 겪을 때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2. 의무를 행해야 하는 이유. 이에 대하여 본문에 "너희 자신도 가졌은즉"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도 고난받는 자들과 동일한 육신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동일한 신비한 몸인 교회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에 그리하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육체도 언제 고난에 처하게 될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의 육체가 시련을 겪을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동정하듯이 우리들도 고난 당하지 않을 때는 다른 고난 당하는 사람을 동정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동일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 속한 지체들임으로 "만일 한 지체가 고통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받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전 12:26).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짐을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독교 본래의 정신에서 이탈된 태도인 것이다.
Ⅳ. 순결함과 정숙함의 의무를 권하였다(4절). 다음을 살펴 보자.
1. 혼인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혼인을 귀한 것으로 여기고" 신중하게 취급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인정하신 혼인을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혼인은 신성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아시고 낙원에 거하는 아담을 위해 혼인을 관습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조상이 되는 처음 두사람을 혼인시키고 축복하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으로 혼인에 관심을 가지고 주 안에서 결혼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께서도 혼인 잔치에 참석하셔서 첫 기적을 행하심으로 결혼을 존귀스럽게 여기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또한 혼인은 순결치 못한 것과 침소를 더럽히는 행위를 저지한다는 점에서도 귀한 것이다. 결혼은 그 배우자들이 서로 순수하며, 정결함을 지키고, 침소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즉 불법적이고 부정한 사랑에 의해 침소를 더럽히지 아니할 때에 귀하고도 복된 것이 된다.
2. 부정함과 음행에 대한 두려웁고도 공정한 질책. 본문에 보면 "음행 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하였다.
(1) 하나님께서 누가 음행한 죄를 지은 자인지 알고 계신다. 어떠한 어둠으로써도 음행한 자를 하나님께로부터 숨길 수는 없다.
(2)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죄를 사랑이나 연모로 보시지 않고 음행과 간음으로 간주하시고 책벌하실 것이다. 즉 음행이라는 함은 독신 때에 행한 음란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요, 간음은 결혼한 후 행한 음란한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음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먼저 그는 그들을 이 세상에서 그들 양심에 의해서 심판 받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양심으로 그러한 죄를 깨닫게 하심으로 깊은 수치를 느끼게 하실 것이다(양심이 일깨움을 받을 때 죄인들은 무서운 가책에 시달림을 받게 된다). 또한 그는 그들을 그들이 죽은 후 마지막 심판 때에 심판대 위에 세우시고 그들의 죄를 깨우치시고 저주하사 영벌을 내리실 것이다.
Ⅴ. 자족의 의무를 권고하였다(5,6절). 여기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하나님은 은혜와 우리의 의무에 반대되는 죄가 바로 "탐욕"이다. 탐욕이란 우리보다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여 세상의 부를 모으려 하는 지나친 욕망을 말한다. 우리는 이 탐욕의 죄를 우리의 생활 속에 허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록 이러한 탐욕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만일 그것이 제압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 속에 그것이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말과 행위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탐욕의 죄를 제압해야 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완전히 뿌리를 뽑아 버려야 한다.
2. 우리의 행할 의무. 그것은 탐욕과 상반되는 것으로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번 없어진 과거의 것은 다시 오지 않고 또 미래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장중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비록 우리가 현재 누리고자 하는 것보다 작은 것이고, 장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우리는 현재의 환경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현재의 형편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만족할 수 있는 길이다. 현재에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환경을 좀 더 좋게 해 주셔도 역시 만족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경이 향상되면 그들의 욕망도 역시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만은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위치에 있었으나 만족해하지 않았고, 아합은 왕좌에 있었으나 만족해 하지 않았고, 아담 역시 낙원에 있었지만 만족해 하지 않았다. 또한 하늘에 있던 천사들까지도 만족해 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비록 낮은 지위에 있었고 가진 것이 없었지만, "어떠한 상태에 처하더라도 자족하는 것을 배웠노라"고 하였던 것이다.
3.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가진 것에 만족해야 하는 이유.
(1)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않으리라"(5,6절)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이었다(수 1:5). 그렇지만 이 말은 하나님의 모든 신실한 종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구약의 약속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본문의 약속, 즉 "내가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너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다"(5,6절)는 것은 모든 약속의 본체요 중심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말씀을 강조어법을 사용하여 말씀하였다. 진심으로 믿는 자들은 그들이 살아 있을 때나, 죽을 때나 또는 영원히 하나님이 은혜로 그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2)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믿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는가?"(6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그의 백성들을 해하려고 행한 모든 행위를 오히려 그의 백성에게 유익되게 하실 수 있다.
Ⅵ. 그들이 그들의 사역자들을 보고 행해야 하는 의무에 대해서 바울은 권고한다.
1. 죽은 사역자들에 대한 의무. 이에 대하여 본문은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기억하라"(7절)고 하였다. 여기에서 다음을 생각해 보자.
(1) 죽은 사역자들은 어떤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치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회중에게 가르쳤던 자들을 말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인도자이며 치리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백성들의 치리자와 지도자가 된 것은 그들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의해서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 사역자들은 그들의 직분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 그들을 멀리 있으면서 교인들을 치리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을 세워 치리를 시켜도 안 되며 그들이 직접 교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교훈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2) 사역자들이 죽었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해야 하는 의무.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되고 있다.
① "그들을 기억하자. 즉 그들의 설교와 기도와 사적으로 나눈 대화. 그들이 보인 본을 기억하라."
② "저희의 믿음을 본받으라. 그들이 너희에게 전해 준 신앙에 든든히 서있고 그들이 그것에 의해 살다가 죽어간 그 신앙의 은혜를 본받도록 노력하라. 또한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자. 즉 그들이 얼마나 빨리, 안락하게, 즐겁게, 그들의 생애를 마쳤는가를 기억하라." 교인들이 가르침을 받은 그 진실한 믿음의 본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말하면서 바울은 이 의무를 확대하여 진지하게 강조하였다. 바울은 히브리인들에게 그들이 먼저 간 신실한 사역자들을 기억하고 의무를 지켜야 할 뿐 아니라 다음의 여러 동기에서도 그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첫째, 그들이 사역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불멸하시고 또한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역자들은 어떤 이는 죽었고 또 어떤 이들은 죽어가고 있지만, 교회의 대제사장이 되시고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시는 "그들의 영혼의 감독"은 늘 살아계시며 늘 불변하신다. 교인들은 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굳게 서 있어야 하고 또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늘 살아계셔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고수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을 지켜 보시며 또 보상해 주시고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교인들을 벌 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나 복음시대에나 불변하시는 분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히 한결 같으신 분이다. 둘째, 그들이 사역자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을 늘 위협하는 잘못된 교훈이 교묘하여 자칫 잘못하면 거기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a. 잘못된 교훈은 여러 가지이며 다양하다(9절). 이러한 교훈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실한 선생님께로부터 받은 것과 아주 다르며 그 자체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b. 이러한 교훈은 이상한 교리이다. 그것은 복음 교회가 들어보지 못한 것으로 복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c. 이러한 교훈들은 산만하고 늘 유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교훈은 배를 요동하게 하고 또 배를 닻에서 떨어지게 하여 멀리 이동시켜서 바위에 산산조각이 나도록 하는 바람과 같다. 이 교훈들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정착시키게 하는 아주 탁월한 하나님의 은혜와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러한 이상한 교훈은 인간의 마음을 항상 흔들리게 하며 불안정하게 만든다.
d. 잘못된 교훈들은 그 내용이 조잡스럽고 속되다. 그 교훈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외적이며 사소하고 없어질 것들에 관하여 다룬다.
e. 잘못된 교훈들은 이익이 되지 못한다. 잘못된 교훈을 생각하고 그대로 행하는 자들은 그 교훈을 통해 자신의 영혼에 어떠한 이익도 얻지 못한다. 잘못된 교훈들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신성하게도 할 수 없으며, 겸손하게 하거나, 감사하게 만들 수도 없고 하늘나라에 이르지도 못하게 한다.
f. 이러한 잘못된 교훈을 지닌 자들은 그리스도인의 예배(제단)에 참석할 특권을 잃게 된다.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도 제단이 있다"고 하였다. 이 사실은 매우 중대한 것이므로 사도는 이 문제를 좀 더 길게 취급하였다. 이제 다음을 관찰해 보자.
(a) 기독교회에도 제단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초대 교회의 집회 때에는 제단이 없었다는 주장을 내세워 제단 무용성을 말한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제단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본문에 보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하였다. 물론 이 제단은 외형적인 제단이 아니라 인격적인 제단 곧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 되시며 제물도 되신다. 그는 제물을 거룩케 하신다. 율법 시대의 제단은 그리스도의 유형이다. 구약 시대에 구리로 희생 제단은 금으로 된 그리스도의 중제의 제단의 유형일 뿐이다.
(b) 이 제단은 진정으로 믿는 자들을 위해서 만찬을 제공해 준 이 음식은 드려진 희생 제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아주 풍요한 만찬이다. 즉 만찬은 우리에게 영적인 힘과 성장, 거룩한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 주의 식탁은 우리의 제단은 아니지만, 제단에서 나온 음식물이 주의 식탁에 놓여진다. "우리의 유월절 양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이 되셨다."(고전 5:7).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만찬을 즐겨야 한다." 주의 성만찬은 복음 시대에 유월절 잔이다.
(c) 장막과 레위의 율법을 고집하고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자들은 이 제단의 특권에서 제외되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유익함을 받지 못한다. 장막을 고집하는 자들을 종속시키는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제단에 대한 권리를 배격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고 그 다음 그것을 활용하였다.
[a] 바울은 유대의 의식을 집요하게 고집하는 것이 복음의 제단에서 받을 특권에 대한 장애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논법으로 주장하였다. 유대의 율법 아래서는 속죄 제물로 드려진 것은 먹을 수 없고 유대인들이 장막 생활을 할 때는 야영지 밖에서 또 그들이 성에 거할때는 성문 밖에서 속죄물을 다 태워야만 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들어 그들이 여전히 율법의 지배 아래 있고자 한다면 복음의 제단에서도 먹을 수 없음을 말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제물은 큰 속죄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제공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역주: 율법에 의해서는 속죄 제물을 먹을 수 없으므로 따라서 그것을 따르는 자들은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도 먹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복음 잔치는 그리스도의 희생의 결실로써 이 희생물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이 잔치에 참여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속죄물의 원형이 되시며 그 자신의 피로써 그의 백성들을 신성하게 하시며 순결하게 해 주시기 위하여 그는 자신을 유형과 일치하게 나타내 보이시려고 영문 밖에서 죽음을 당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손하심을 나타내는 충격적인 표본이다. 그는 인간의 속죄를 위해 하나님께 대하여 또 인간 사회에 대하여 불결한 존재나 되는 것처럼 영문 밖에서 처형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죄(이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귀중한 대가를 치루셨다)는 모든 하늘의 시민권과 이 세상의 시민권까지 박탈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또 이 사실은 죄인의 모든 사회에 문제거리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바울은 지금까지 레위 율법을 따르는 것이(율법자체의 규례에 의해) 인간들로 기독교의 제단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을 논한 후 다음과 같이 이 논리를 활용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논하였다.
[b] 바울은 위의 논증을 활용하여 히브리인들에게 적절한 충고를 하였다(13-15). 첫째, 바울은 "그런즉 우리는……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하였다. 즉 그가 부르실 때 율법의 의식과 죄와 세속, 우리 자신의 육체를 떠나서 그에게 나아가자는 말이다. 둘째, 바울은 기꺼이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도록"하자고 하였다. 즉 우리 자신을 만물의 찌꺼기로써 곧 살 가치도 없고 평범한 죽음을 죽을 가치도 없는 존재로 기꺼이 생각하자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러한 능욕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능욕께서 바로 이러한 능욕을 당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러한 능욕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같이 능욕을 감수해야 하는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든지 또는 죽음을 당하므로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끌려 나오게 되든지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며 또 이 세상은 "우리가 거할 영구한 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와 죄인들과 죽음이 우리를 이 세상에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믿음으로써 주께 나아가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안식과 안정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셋째, 바울은 이 복음의 제단을 바르게 사용하자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제단을 섬기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이에 부끄러웁지 않게 이 제단의 특권에 참여할 뿐 아니라 이 제단의 의무도 바르게 이행하자는 말이다. 우리는 이 제단에 희생 제물을 가져와야 한다. 또한 우리의 대제사장 앞에 가져와 그를 통하여 제물을 하나님께 봉헌해야 한다(15,16절). 우리가 이 제단에 가져와 드려야 하는 제물은 무엇인가? 물론 이제 다른 속죄 제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큰 속죄의 제물로 드려지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물을 승인하는 승인의 제사만 드리면 된다. 승인의 제사란 어떤 것인가?
a.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제사이다. 우리는 이 제사를 하나님께 끊임없이 드려야 한다. 찬미의 제사 속에는 감사와 찬미와 기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제사는 "우리 입술의 열매"이다. 우리는 거짓 없는 입술로 하나님께 찬미를 드려야 한다. 찬미는 오직 하나님께로 만들어져야 하며 천사나 성도나 그 밖의 피조물에게 행하여 져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이 찬미 받으실 수가 있으시다. 찬미의 제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희생과 중제의 공로를 의지하여 드려져야 한다.
b. 그것은 그리스도인다운 사랑과 자선을 베푸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본문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16절)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 능력대로 사람들의 영혼과 육체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과 말로써 제사 드리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선행의 제사를 드리도록 해야 한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제사를 제단 위에 드릴 때에, 우리 자신의 선한 행위의 공로에 의지하지 말고 우리 대제사장 예수의 공로에 의지하여 드려야 한다. 우리가 이와 같은 제사를 드릴 때에 즉 찬미와 자선의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신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제사를 받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사 드리는 자들을 열납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이다.
2. 이같이 세상을 하직한 사역자들에 대해 그리스도인이 행해야 할 의무를 말한 후(그 의무는 그들의 믿음을 따르고 그 믿음에서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우리에게 생존해 있는 사역자들에게 행해야 하는 의무를 말해 준다. 그리고 그러한 의무를 행하여 하는 이유를 말하였다(17절).
(1) 요구된 의무. 그것은 우리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구된 것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복종이나 순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직 그들의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일치하는 한 복종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만 아니라 성자들의 직분의 권위에도 순종해야 됨을 말한다. 마치 양친이나 정부의 통치자들의 권위가 그렇듯이 분명히 성직자들의 권위도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직자들의 가르침에 순종해야 하며, 스스로가 매우 현명하며, 훌륭하고 위대하므로 성직자들에게 배울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목회자들의 가르침이 기록된 말씀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
(2) 이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이유들.
①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다스릴 권한이 있기 때문이다. 성적이란 정부의 권력과 같은 것은 아니라도 역시 권위가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권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풀이해 주고 여러 가지 실질적인 문제에 부딪칠 때 필요한 말씀을 적용해 줌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법도 안으로 인도할 권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성직자들은 자신의 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만 하나님의 계율을 해석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성직자들의 성경 해석은 어떠한 검토도 없이 즉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성경을 찾아보고 그리고 성직자들의 성경 해석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 받아들이되 "사람의 말로서가 아니라 믿는 자에게 능력 있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받아들여야 한다."
② 성직자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역자들은 교우들이 함정에 빠지지 말고 구원받도록 한다. 또한 성직자들은 이러한 일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익을 위해서 한다. 성직자들은 인간의 영혼에 해가 되는 것들에 항상 주의하며, 그들이 위험스러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고해 주며, 사탄의 유혹을 경계하도록 해 주고, 다가오는 심판에 대해 그들에게 경고해 준다. 또한 성직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들어가는데 도움이 되는 모든 기회를 포착하여 선용한다.
③ 성직자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의무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또 자기들에게 맡겨진 영혼들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관심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의 태만으로 한 영혼이나 잃어버리지 않을까하여 또 그들의 사역 밑에 있는 사람들이 올바로 세워졌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④ 성직자들은 교인들의 잘됨을 자기의 기쁨으로 삼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교우들의 충성과 믿음의 성취를 얘기할 수 있을 때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들의 사역 아래서 회개하고 믿음을 지니게 한 영혼들은 "주 예수의 날에 그들의 기쁨과 면류관이 될 것이다."
⑤ 성직자들이 사역이 실패로 끝나면 그것은 그들의 실패일 뿐 아니라 교우들 모두의 실패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교인들에 대한 평가가 슬픔어린 것이 아니라 기쁨에 가득 찬 것일 때 그것은 교인들에게도 유익이 된다. 그러나 만약 충실한 성직자가 성공하지 못하면, 고통을 겪는 것은 성직자 자신이겠지만 손실은 교인들에게 들어갈 것이다. 충실한 성직자는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것이나 결실이 없고 믿음이 부족한 교인들은 자신의 파멸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