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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천왕[桓雄天王]의 신시[神市] 유지[遺址]와 불함산[不咸山]의 백두[白頭]
하늘과 땅이 이루어지고,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한 이후[以後]로,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변화[變化]와 조화[造化]는, 천하[天下] 만물[萬物]의 성장[成長]과, 천하[天下]의 만물[萬物]을 화육[化育]하는 영원불멸[永遠不滅]의 법칙[法則]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천하[天下]의 대도[大道]와 천하[天下]의 대순[大順]도, 천도자연[天道自然]의 영원[永遠]한 진리[眞理]를 벗어나지 않으며, 그 본원[本源]과 시말[始末]은, 분명[分明]하게 들어난다.
천하[天下] 대소[大小] 사물[事物]의 상호[相互] 작용[作用]도 그 일어나는 근원[根源]과 말단[末端]이 있으며, 시종[始終]이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높은 태산준령[泰山峻嶺]의 낙락장송[落落長松]도 그 뿌리는 깊고도 심원[甚遠]하며, 천하[天下]의 대지[大地]를 도도히 흘러 대해[大海]를 이루는 저 드넓은 장강[長江]도 소리 없는 근원[根源]에서 발원[發源] 하나니, 근원[根源]이 없고 뿌리가 없는 만물[萬物]이, 어찌 천하[天下]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
하물며 천하[天下]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인 인간[人間]에게 있어서, 그 인류[人類]의 시원[始原]되는 시조[始祖] 본원[本源]의 역사[歷史]가 없을 수 있을 것인가 ?
오늘날,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학문[學文]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文明]이라는 것도, 아득한 태고[太古]의 시대[時代]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구[悠久]한 세월을 이어 내려오면서 학문[學文]과 문화[文化]를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통하여 나타나는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대략[大略] 일 만년[一萬年]의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세월을 오르내리고 있다.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으로 분명[分明]히 들어나고 있는 우리의 역사[歷史]는, 반[半] 만년[萬年], 즉 오천년[五千年]의 역사[歷史]를 천하[天下]의 만방[萬邦]에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면[裏面]에는, 단군[檀君]이 나라를 세운 역년[歷年]을 기준으로 하고, 고기[古記]를 인용[引用]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과, 소위 중국[中國]의 사서[史書]에서 말하고 있는 당요[唐堯]의 기록[記錄]을 근거[根據]로 하고 있다.
우리 역사[歷史]의 시원[始原]이 되는 고대[古代]의 역사[歷史]가 과연 신화[神話]와 전설[傳說] 이었을까 ?
우리 반만년[半萬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가 한반도[韓半島]에서 전개 되었다고 식민잔재[植民殘在]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한반도[韓半島]의 백두산[白頭山]에는, 이러한 민족[民族]의 시원[始原]에 대한 성[聖]스러운 역사[歷史]의 유지[遺址]와 그 모습이 흔적[痕迹]조차 없다.
반도[半島]의 강화도[江華島]에는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祭祀]를 올리던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그러나 이 참성단[塹星壇]도 단군[檀君]과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확실[確實]하지 않다.
비록 소략[疏略] 하기는 하나, 무려 오천년[五千年]의 유구[悠久]하고 장구[長久]한 역사[歷史]를 이어 내려오면서,
분명[分明]하게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성[聖]스럽고 기이[奇異]하며 신령[神靈]스러운 우리 역사[歷史]의 시원[始原]에 관계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삼위태백[三危太白] 본원[本源]의 땅에 없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의 알타이공화국이 있는 벨루하산으로부터, 반도[半島]의 한국[韓國]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벨루하산으로부터 오늘날의 흑해[黑海]에 이르기까지,
동[東]과 서[西]로 2만리[二萬里]에 이르는 이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에는 수[數] 천[千], 수[數] 만[萬]기에 이르는 고분[古墳]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고분[古墳]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대부분이 도굴[盜掘] 되고 약탈[掠奪]되어 역사[歷史]에 관계된 수 많은 고분[古墳]들이 흔적[痕迹]조차 없이 사라져 갔다.
그러나 이 도굴[盜掘]과 약탈[掠奪]의 화난[禍難]를 면한 고분[古墳]들이 우연히 발견되어, 고고학자[考古學者]들에 의하여 대거 발굴[發掘] 되었다.
이러한 고분[古墳]들은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의 발굴[發掘]에 의하여 수많은 고대[古代]의 유물[遺物]들이 다량 출토[出土]되어 현재 박물관[博物館]에 보관 되어 있다.
이 유물[遺物]들 속에는, 한반도[韓半島]에서 출토[出土]되어, 반도사관[半島史觀]이 고조선[古朝鮮]의 유물[遺物]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같은 형태[形態]의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화살촉, 금관장식[金冠裝飾], 환두대도[環頭大刀], 조각상[彫刻像], 그리고 고유[古有]의 벽화[壁畵]와 문양[紋樣] 등 수 없이 많은 유물[遺物]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러한 고분[古墳]과 유물[遺物]들의 분포[分布]는, 알타이를 기점[基点]으로 하여 동[東]과 서[西]로 2만여리[二萬餘里]에 이르고 있다.
그 중심[中心]에,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에서 말하고 있는 불함산[不咸山]인 벨루하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특히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벨루하산으로부터 오늘날 흑해[黑海]까지 이어지고, 흑해[黑海]의 남북[南北]과 동서[東西]를 아우르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하는 자들이 말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을 가지고 논증[論證]한다면,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흑해[黑海]까지 수 없이 많이 출토[出土]되고 이어지고 있으니, 그러한 자들의 말을 따른다면, 고조선[古朝鮮]의 영토[領土]는, 반도[半島]로부터 흑해[黑海]에 이르기까지,
동서[東西] 2만리[二萬里]에 이르는 지역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의 내지[內地]가 되는 것이다.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 한반도[韓半島]와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의, 고유[固有] 한 고조선[古朝鮮]의 유물[遺物]이라고 주장하는 자들,
그리하여 한반도[韓半島]의 이 지역이 고조선[古朝鮮]의 고토[古土]라고 주장하는 자들,
우물 안 개구리만도 못한 식민[植民]의 잔재[殘在]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기며, 단군[檀君]을 신화[神話]라고 말하고 있는 자들,
더 나아가 고조선[古朝鮮]의 한 참 후대[後代]인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三國]에 대하여,
원삼국[原三國]이라는 어디서 듯도 보도 못한 해괴[駭怪]한 망발[妄發]을 일삼는 소위, 이름 하여, 역사[歷史]의 석학[碩學]이라고 하는 자들,
이러한 자들이 말하는 실증사학[實證史學]과, 이자들이 말하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와 같은 거짓과 왜곡[歪曲]과 치욕[恥辱]의 사학[史學]은, 이미 흩날리는 한 줌의 티끌만도 못한 허망[虛妄]한 것임이, 모두 세상[世上]에 들어나고 있다.
알타이공화국의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유물[遺物]들은, 시대[時代]를 구분하기 위하여, 그 고분[古墳]을 발굴[發掘]한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방사성탄소연대측정[放射性炭素年代測定]에 의하여, 그 유물[遺物]의 연대[年代]를 측정[測定] 하였다.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알타이에서 출토[出土]된 유물[遺物]들에 대하여, 방사성탄소연대측정[放射性炭素年代測定]을 하고 있다.
측정[測定]결과 모두 BC, 기원전[紀元前] 전후[前後]부터, 기원전[紀元前] 3500년[三千五百年]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현지[現地]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이, 출토[出土]된 역사[歷史]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기원전[紀元前] BC, 3500년[三千五百年]전, 중앙아시아[中央亞細亞] 역사[歷史]의 시원지[始原地]를 찾아 밝힌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중심[中心]과, 그 이동 경로[經路]를 그린 지도[地圖]를 보면,
오늘날 알타이의 벨루하산[백두[白頭], 백산[白山]을 기준[基準]으로 하여, 동[東]과 서[西]로 퍼져 나가며 이동[移動]하고 있다.
알타이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발굴[發掘]한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은, 기원전[紀元前] 3000년[三千年] ~ 3500년[三千五百年]경, 불함산[不咸山]인 알타이 벨루하산을 중심[中心]으로 일어난 문명[文明]이, 동[東]과 서[西]로 퍼져 나가며 이동[移動]해 갔다고 말하고 있다.
현재[現在]까지 출토[出土]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이러한 이동[移動] 경로[經路]를 따라 어김없이 발견[發見]되고 출토[出土]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중국[中國]과 한반도[韓半島]는, 그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의 맥[脈]과 정수[精髓]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일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과, 중국[中國]이라고 지칭[指稱]된 이십오사[二十五史]의 역사[歷史] 기록[記錄]과도 일치[一致]하고 부합[符合]되고 있는 것이다.
근래[近來]에, 불함산[不咸山]인 벨루하산의 동북[東北]쪽에서, 금광[金鑛]을 찾던 한 광산개발회사[鑛山開發會社]가, 2500년[二千五百年]전의 고분[古墳]을 발견 하였다.
이 고분[古墳]은 땅 속으로 깊숙이 18m 아래에 매장[埋葬]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굴[盜掘]꾼들의 약탈[掠奪]을 피할 수 있었다.
현지[現地]의 고고학자[考古學者]들이 이 고분[古墳]을 발굴[發掘]하여, 이 고분[古墳]속에 수[數] 천년[千年]동안 부장[副葬]되어 있던 많은 유물[遺物]들이 세상[世上]에 그 모습을 들어내게 되었다.
그 출토[出土]된 유물[遺物]들 중에는, 33개[三三個]의 바퀴살로 만들어진 수레가 있었다.
세종[世宗]
지리지 [地理志]
평양부[平壤府]
天帝遣太子, 降遊扶餘古都, 號海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중략]
천제[天帝]가 태자[太子]를 보내어 부여[扶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海慕漱]이다.
해모수[海慕漱]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從者] 백 여인[百餘人]은 모두 백마[白馬]와 백곡[白鵠]을 탔는데, 채색[彩色] 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소리가 구름 가운데에서 울렸다.
웅심산[熊心山]에서 머물러 10여 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중략]
알타이의 고분[古墳]에서 출토[出土]된 2500년[二千五百年] 전의 수레
首戴烏羽之冠, 腰帶龍光劍。 朝則聽事, 暮則升天, 世謂之天王郞也。[중략]
머리에는 오우[烏羽]의 관[冠]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검[龍光劍]을 찼는데, 아침이면 일을 보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世上]에서 이르기를, 천왕랑[天王郞] 이라고 하였다. [중략]
城北靑河河伯有三女, 長曰柳花, 次曰萱花, 季曰葦花, 神姿艶麗。 三女往遊熊心淵上, [靑河, 卽今鴨綠江] 王謂左右, 得而爲妃, 可有後胤。 其女見王, 卽入水, [중략]
성[城] 북[北]쪽 청하[靑河]의 하백[河伯]에게 세 딸이 있으니, 큰딸이 유화[柳花], 둘째딸이 훤화[萱花], 막내딸이 위화[葦花]인데, 자태가 곱고 아름다웠다.
세 딸이 웅심연[熊心淵] 위에 가서 노는데, [청하[靑河]는 곧 지금의 압록강[鴨綠江]이다.] 왕[王]이 좌우[左右]에게 이르기를, 저 여자를 얻어서 비[妃]를 삼으면, 가히 자손[子孫]을 두리라. 하니, 그 딸들이 왕[王]을 보자 곧 물로 들어갔다. [중략]
수레의 바퀴살이 서른 세 개[三三個]라고 하는 것은, 2500년[二千五百年]전 당시[當時]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으로 보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2500년[二千五百年]전 당시[當時]에는, 수레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하여, 높고 낮음의 신분[身分]과 관작[官爵]의 등급[等級]이 있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서안[西安]에서 발굴[發掘]된 진시황릉[秦始皇陵]이라고 하는, [실제 이 릉[陵]은 진시황[秦始皇]의 릉[陵]이 아니다.] 이 릉[陵]에서 출토[出土]된 수레의 바퀴살은 30개[三十個]로 이루어져 있다.
알타이의 벨루하산 인근[隣近]에서 출토[出土]된 33개[三三個]의 바퀴살로 이루어진 수레는, 당시[當時]에, 천자[天子]의 지위[地位]를 지니고 있는 그 어느 제왕[帝王]이 타고 다닌 수레였을 것이다.
이를 참고삼아 조선사[朝鮮史]에 비추어 본다면, 세종[世宗] 지리지 [地理志]에서 이르기를,....... 천제[天帝]가 태자[太子]를 보내어 부여[扶餘]의 고도[古都]에 내리어 놀게 하니, 이름이 해모수[海慕漱]이다. 天帝遣太子, 降遊扶餘古都, 號海慕漱
해모수[海慕漱]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데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종자[從者] 백 여인[百餘人]은 모두 백마[白馬]와 백곡[白鵠]을 탔는데, 채색[彩色] 구름이 그 위에 뜨고, 음악소리가 구름 가운데에서 울렸다.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웅심산[熊心山]에서 머물러 10여 일을 지내고 비로소 내려왔다.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 라고 하였는데,
이 수레의 주인공[主人公]을, 조선사[朝鮮史]를 상고[相考]하여 그 기록[記錄]을 따라 비교 고찰[考察]해 보면,
어느 시대[時代]의 어느 제왕[帝王]의 누구였는가의 의문[疑問]은, 시원하게 밝혀질 것이다.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역사[歷史]의 기록[記錄]들은, 한 결 같이 불함산[不咸山]인 백두산[白頭山]주위의 사방[四方]은, 모두 고조선[古朝鮮]의 고토[古土]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주위에는 숙신[肅愼]과 부여[扶餘], 옥저[沃沮]와 읍루[挹婁], 예맥[濊(貊], 훗날의 여진[女眞] 등이 자리 잡고, 수[數] 천년[千年]을 이어 대대[代代]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근간[根幹]을 이루어 왔다.
그 들은, 지금 서안[西安]의 진시황릉[秦始皇陵]이라고 하는 곳에서 출토[出土]된 수레를 예로 들며, 이 수레가 지금의 중국[中國]과, 역사[歷史]의 필연성[必然性]을 말하고 있으나,
지금의 중국[中國]은, 그들이 말하고 있는 중국[中國]이 아니라,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 78국[七十八國]의 고토[古土]였으니, 이것은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의 역사[歷史]와 관계되는 것이지, 소위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重要]한 것은 이 수레뿐만이 아니다.
아마 반도사관[半島史觀]을 주장하고 반도사관[半島史觀]에 함몰[陷沒]되어 있는 자들이 이러한 사실[史實]을 보고 듣는다면, 뒤로 넘어지고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 있다.
이 고분[古墳]이 발견된 이 지역[地域]의 토민[土民]들은, 예로부터 이 지역[地域]이 홀라온[忽刺溫]의 나라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홀라온[忽刺溫], 그들이 누구인가 ?
홀라온[忽刺溫]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오백년[五百年]동안,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와 국경[國境]을 마주하고 있던 종족[種族]들이다.
알타이의 벨루하산, 즉 조선사[朝鮮史]에서는 백두산[白頭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중국[中國]이라는 나라들의 역사[歷史]에는 불함산[不咸山]과 장백산[長白山]으로 기록[記錄]된 곳,
이 불함[不咸山]의 동북[東北]쪽에 있는 그들은, 지금도 그 지역[地域]이, 홀라온[忽刺溫]의 나라였다고, 당당[堂堂]하게 말하고 있다.
일 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본[本] 모습은 이러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광해군[光海君] 4년[四年] 임자[壬子]
2월6일[二月六日] 신미[辛未]
王曰 儒先錄、退溪集, 在內時, 或觀覽, 若栗谷集, 時未見矣。[중략]
왕[王]이 이르기를,
유선록[儒先錄]과 퇴계집[退溪集]은 내전[內殿]에 있을 때 간혹 보았으나 율곡집[栗谷集]은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하였다. [중략]
鄭曄對曰 臣在政院, 得見栗谷集, 所言尤切於時弊, 故敢達矣。 臣曾守鍾城, 奉職無狀, 民情、賊勢, 雖不可詳知, 居官二年, 不無聞見。[중략]
정엽[鄭曄]이 대답하기를, 신[臣]이 정원[政院]에 있을 때 율곡집[栗谷集]을 보니, 말한 내용이 지금 폐단[弊端]에 절실했기 때문에 감히 아뢴 것입니다.
신[臣]이 일찍이 종성[鐘城] [함경도[咸鏡道 종성[鐘城] 을 맡았을 때에, 맡은 직무[職務]에는 보잘 것이 없어 민심[民心]이나 적[賊]의 정세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2년[二年] 동안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 [중략]
而臣之在彼之時, 忽賊入寇, 臣適得類中風, 强疾登城望見其來, 則兵甲精明之容、鐵馬馳驅之狀, 有壯於唐兵, 野戰難以抵當, 而守城則猶可爲矣。[중략]
신[臣]이 그 곳에 있을 때 홀적[忽賊] [홀적[忽賊]은 홀라온[忽剌溫]을 말한다.] 이 쳐들어 왔으므로 신[臣]이 마침 중풍[中風]에 걸렸으나 병[病]병 무릅쓰고 성[城]에 올라 그들이 오는 것을 보니,
정예[精銳]한 군사들의 위용[偉容]과 기병[騎兵]들이 내달리는 모습은 당병[唐兵]보다 더 씩씩하여, 들판에서 싸운다면 대적[對敵]하기 어렵고, 성[城]을 지키는 것이 상책[上策]이라고 생각 하였습니다. [중략]
曄所言, 忽部 胡狀也, 奴兒 奴胡 則有節制, 一步不得退, 非忽部之比, 豈聞砲聲而退乎 [중략]
정엽[鄭曄]이 한 말은 홀부[忽部][홀라온[忽剌溫]는 오랑캐의 호상[胡狀]이고 노호[奴胡]는 절제가 있어 한 발자국도 후퇴하지 않아 홀부[忽部]에 비할 바가 아닌데, 어찌 포성[砲聲] 소리를 듣고 물러 가겠는가 ? [중략]
後忽部竟倂於 奴兒 奴胡 , 西虜始大。 奴胡卽建州夷也, [중략]
뒤에 홀부[忽部][홀라온[忽剌溫]는 마침내 노아[奴兒]에 병합되고, 노호[奴胡] 서[西]쪽의 세력이 비로소 커졌다.
노호[奴胡]는 바로 건주[建州]의 이[夷]다. [중략]
我國常以其酋奴兒名老乙加赤, 稱爲老胡, 中朝號其酋爲奴兒哈赤, 故今稱奴胡。[중략]
우리 나라에서는 항상 그 추장[酋長] 노아[奴兒]의 이름을, 노을가적[老乙加赤]이라 했으므로, 노호[老胡]라고 불렀고,
중조[中朝]에서는 그 추장[酋長]을 노아합적[奴兒哈赤]이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연고[緣故]로 노호[奴胡]라고 부른 것이다. [중략]
홀라온[忽刺溫]은, 조선[朝鮮]의 북관[北關]이요, 영북[嶺北]인 함경도[咸鏡道]에서 늘 국경[國境]을 침입[侵入]하며 소란[騷亂]을 일으키고 말썽을 피우던 변경[邊境]의 종족[種族] 이었다.
다시 한 번 현지[現地]의 토민[土民]들에 의하여, 오늘날의 알타이공화국과 투바공화국이 있는 이 지역[地域]이, 조선[朝鮮]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 지역이었음을 분명[分明]히 들어내고, 명백[明白]하게 확인[確認]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삼성기[三聖紀]
吾桓建國最古
우리 환[桓]의 건국[建國]은, 세상[世上]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日降童女童男八百於黑水白山之地
어느 날, 동여[童女] 동남[童男] 800인[八百人]이 흑수[黑水] 백산[白山]의 땅에 내려왔다.
於是桓因亦以監群居于天界掊石發火始敎熱食
그 때에 환인[桓因]은 또한 감군[監郡]으로서 천계[天界]에 있으면서 돌을 쳐 불을 일으키고, 처음으로 음식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謂之桓國是謂天帝桓因氏亦稱安巴堅也傳七世年代不可考也
이를 일러 환국[桓國]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를 천제 환인씨[天帝桓因氏]라고 불렀다.
또한 칭[稱]하기를 안파견[安巴堅)이라고 했다. 환인[桓因]은 칠세[七世]를 전[傳]했는데 그 년대[年代]는 상고[相考]할 수 없다. [중략]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제일[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魏書云, 乃徃二千載有壇君王倹立都阿斯逹. [経云無葉山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髙同時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여년[二千餘年]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都邑]을 정하였다.
경[經][경[經]은 산해경[山海經]을 말한다.]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하니 백주[白州]의 땅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의 동[東]쪽에 있다고 하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
나라를 세우고 개국[開國]하여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때는, 고[高] [고高는 요堯임금] 요[堯]와 같은 시대[時代]였다. [중략]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제일[紀異第一 ]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古記云, 昔有桓國 [謂帝釋也] 庻子桓雄數意天下貪求人世. 父知子意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遣徃理之.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국[桓國] [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인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뜻을 두어, 인간[人間] 세상[世上]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雄率徒三千降於太伯山頂 [即太伯妙香山].神壇樹下謂之神市, 是謂桓雄 天王也.
환웅[桓雄]이 삼천[三千]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산정[山頂] [즉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아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고 하였다.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糓·主命·主病·主刑·主善惡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在世理化.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穀], 명[命], 병[病], 형[刑], 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人間]의 삼백육십여일[三百六十餘事]을 주관하며 세상[世上]을 다스리고 교화[敎化]하였다. [중략]
벨루하산 3개의 주봉[主峯] 중, 가장 높은 주봉[主峯], 이 백두[白頭] 백산[白山]의 천지[天池]가 있는 주봉[主峯]의 전경,
고기[古記]에서 이르는 삼위태백[三危太伯]은, 불함산[不咸山]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의 이 3개三個]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世宗]
지리지 [地理志]
평양부[平壤府]
靈異, 檀君古記云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중략]
신령[神靈]스럽고 기이[奇異]한 일[靈異].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이르기를, 상제[上帝] 환인[桓因]의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이었다.
세상[世上]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降臨]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중략]
삼위태백[三危太伯] 신시[神市]의 유적[遺跡]이 있는 불함산[不咸山] 기슭의 모습, 저 멀리 희게 보이는 산 기슭아래 신시[神市]의 유지[遺址]가 있다.
운양집[雲養集]
태백산[太白山] 천보본단[天報本壇]에 제사드린 도고문[太白山祭天報本壇禱告文]
악장[樂章]
아 무성한 저 신단수[神檀樹]여 猗猗檀樹
백두산[白頭山] 양지[陽地]에 있도다. 白山之陽
천제[天帝]께서 나오시니 천하[天下]가 진동[震動] 하고 帝出于震
만방[萬方]에 찬란[燦爛]히 빛나도다. 萬方之光
우리 억조[億兆]의 백성[百姓]들을 기르시나니 育我兆民
아 아, 잊지 못하리로다. 於戱弗忘 [중략]
돌로 쌓은 신시[神市] 유적[遺跡]의 성[城]안 중심[中心]에 있는 천부인[天三印] 3개[三個]의 표식[表式]이 새겨진 신성[神聖]한 돌,
이러한 천부인[天三印] 3개[三個]의 표식[表式]은, 불함산[不咸山]인 벨루하산의 성[聖]스러운 지역[地域]에는 예의 없이 새겨져 있다.
천부인[天三印] 3개[三個]의 표식[表式]은, 이렇게 태극[太極]의 문양[文樣]으로 바뀌어 발전하게 된다.
반도[半島]로부터 서북[西北]으로 만리[萬里]의 저편, 그들은 왜 그 깊은 산속에 살고 있으면서, 이 문양[文樣]을 새기며 숭배[崇拜]하고 있을까 ?
이 곳은 벨루하산의 북[北]쪽에 토민[土民]들이 살고 있는 깊숙한 산중[山中]의 마을이다.
천부인[天三印] 표식[表式]이 새겨진 신성[神聖]한 돌과, 신시[神市]의 유적[遺跡]의 모습
이 신성[神聖]한 유적[遺跡]의 성[城]에는, 천하[天下] 만물[萬物]의 변화[變化]와 조화[造化], 천지[天地]의 이치[理致]와 진리[眞理]를, 돌을 쌓아 그 신이[神異]하고 오묘[奧妙]한 형상[形象]을 나타내고 있다.
삼위태백[三危太伯] 신시[神市]의 유적[遺跡], 신성[神聖]한 성[城]의 정문[正門] 모습
세종[世宗]
지리지 [地理志]
평양부[平壤府]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立國號曰朝鮮。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婚姻]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중략]
朝鮮、尸羅、高禮、南北沃沮、東北扶餘、濊與貊, 皆檀君之理。[중략]
조선[朝鮮]은,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南] 옥저[沃沮]와 북[北] 옥저[沃沮], 동[東] 부여[扶餘]와 북[北] 부여[扶餘], 예[濊]와 맥[貊]이 모두 단군[檀君]의 다스림이 되었다. [중략]
이 신성[神聖]한 그림은, 벨루하산 즉, 백두[白頭] 백산[白山]에 강림[降臨]하는 하늘의 여신[女神]을 그린 그림이다.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婚姻]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나라를 세우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하늘에는 양쪽으로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삼태성[三台星]이 그려져 있으며, 여신[女神]의 뒤에는, 고조선[古朝鮮]의 유물[遺物]이라고 하는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이 있다.
칠성신앙[七星信仰]은, 우리 민족[民族] 특유의 신앙[信仰]이다.
현지[現地]의 고사[古史]는 이렇다.
아득히 오랜 옛날, 하늘에서 여신[女神]이 내려와 모든 세상[世上]의 어머니가 되었다.
또 하나의 일설[一說]은, 태초[太初]에 하늘에서 하느님이 세상[世上]에 내려 왔는데, 이 벨루하산[백산]의 정상[頂上]에 강림[降臨] 하였다.
벨루하산[백산]의 정상[頂上]에 내려온 하늘의 여신[女神]은, 세상[世上]의 모든 일과, 세상[世上] 사람들의 일을 주관[主管]하고, 신령[神靈]하며 신비[神秘]로운 이상적[理想的]인 국가[國家]를 건설[建設] 하였다.
이곳은 하늘에서 내려온 세계[世界]의 어머니인 여신[女神]의 나라가 있던 곳이며, 지금도 세계[世界]의 어머니인 여신[女神]이 머물고 있는 성[聖]스럽고 영험[靈驗]한 숭경[崇敬]스러운 땅이다.
이러한 현지[現地]의 고사[古史]는,...... 세종[世宗] 지리지 [地理志]에서 말하고 있는, 上帝桓因有庶子, 名雄, 상제[上帝] 환인[桓因]의 서자[庶子]가 있으니, 이름이 웅[雄]이다.
意欲下化人間, 受天三印, 降太白山神檀樹下, 是爲檀雄 天王, 세상[世上]에 내려가서 사람이 되고자 하여 천부인[天符印] 3개를 받아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강림[降臨]하였으니, 이가 곧 단웅천왕[檀雄天王]이 되었다.
令孫女飮藥成人身, 與檀樹神婚而生男, 名檀君,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藥]을 마시고 인신[人身]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神]과 더불어 혼인[婚姻]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단군[檀君]이다. 의 이러한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과 어떠한 차이가 있을 것인가 ?
이러한 역사[歷史]의 시원[始原]에 대하여, 고대[古代]의 역사[歷史]로 변함없이 전[傳]해 오는 고기[古記]의 본[本] 기록[記錄]은 인용[引用] 하지 않고, 괴이[怪異]한 설을 들먹이며, 곰[熊]과 마늘과 쑥을 등장시켜, 곰이 인간[人間]이 되었으니, 단군[檀君]의 고사[古史]는 신화[神話]와 전설[傳說]일 뿐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학자[學者]의 본분[本分]을 망각[忘却]한 파렴치[破廉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2개[十二個]의 원[圓]으로 만들어진 신성[神聖]한 유적[遺跡]의 기호[記號],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
신시[神市]의 고사[古史]에 그 근원[根源]을 두고 있을 것이다.
3개[三個]의 원[圓]으로 만들어진 신성[神聖]한 기호[記號], 신시[神市] 유적[遺跡]의 기호[記號]와 문양[文樣]들은,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청동거울[靑銅鏡]에 함축[含蓄]되어 나타난다.
백두산[白頭山] 기슭의 제단[祭壇], 중앙[中央]의 원단[圓壇]을 중심[中心]으로, 3개[三個]의 작은 원단[圓壇]을 사방[四方]으로 배치하고 있다.
백산[白山] 기슭의 신성[神聖]한 고대[古代]의 탑[塔], 무엇을 상징[象徵]하고 있는 것일까 ?
이러한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을 해설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조선사[朝鮮史]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운양집[雲養集]
태백산[太白山] 천보본단[天報本壇]에 제사드린 도고문[太白山祭天報本壇禱告文]
幸蒙神誘民衷。倧敎復興。瞻彼壇址。靈績猶存。喆等雖愚昧不肖。俱是神祖之血胤遺裔也。[중략]
다행스럽게도 신령[神靈]께서 백성[百姓]들 마음을 교화[敎化]해 주심에 힘입어 그 가르침이 다시 부흥[復興]하게 되었습니다.
저 신시[神市]의 단군[檀君] 유지[遺址]를 바라보니, 신령[神靈]스러운 사적[史蹟]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철(羅喆) 등은 비록 어리석고 변변치 못하지만 모두가 신조[神祖]의 혈통을 이은 후예[後裔]입니다. [중략]
백두[白頭] 백산[白山]의 신시[神市] 유적[遺跡]이 있는 산[山]빛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의 변화[變化]에 따라 신이[神異]한 모습으로 변한다.
이렇게 신시[神市]의 유적[遺跡]이 있는 산[山]빛은, 자연환경[自然環境]의 변화[變化]에 따라 검은 색의 신이[神異]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운양집[雲養集]
제대종교도사교 나군 철 문[祭大倧敎都司敎羅君 喆 文]
저 백산[白山]을 바라보니 瞻彼白山
신령[神靈]스러운 자취가 드러나는 곳 靈跡所發
북[北]으로 유람하여 근원[根源]을 탐색하고 北遊探源
가르침을 닦아서 덕[德]을 펼쳤도다. 修敎布德
화[華]의 후예[後裔]들이 함께 우러르며 華裔共仰
신명[神明]처럼 받들었고 奉若神明 [중략]
자연[自然]의 변화[變化]를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는 신시[神市]의 유적[遺跡]이 있는 산[山]과 계곡[溪谷]
알타이공화국의 민속[民俗] 축제[祝祭], 청[淸]나라 황제[皇帝]와 청군[淸軍]의 장수들, 그리고 관료[官僚]들이 쓰던 모자의 원형[原形]이 등장하고 있다.
그들이 쓰던 모자의 끝이 송곳과 같이 뽀족한 것은, 그 들 고유[固有]의 민속[民俗] 전통[傳統]이다.
장승[張丞]의 기원[起源]은 한반도[韓半島] 고유[固有]의 전통[傳統]과 전유물[專有物]이 아니다.
불함산[不咸山]인 벨루하산의 곳곳에는 고대[古代] 장승[張丞]의 기원[起源]이 되는 유물[遺物]들이 즐비하다.
운양집[雲養集]
送黃小雲稅官 炳郁 移居北間島
북간도[北間島]로 이주하는 황소운[黃小雲] 세관[稅官] 병욱[炳郁] 을 전송하다.
듣노니 백산[白山] 아래에는 聞道白山下
아직 개척되지 않은 토고[土膏]가 있는데 土膏田未闢
단조[檀祖]께서 남기신 교화[敎化]이어져 내려와 檀祖有遺化
교우[敎友]들이 친척[親戚]과 같다고 하도다. 敎友若親戚 [중략]
백두산[白頭山]인 벨루하산의 신목[神木] 유적[遺跡], 신단수[神檀樹]의 고사[古史]는 오천년[五千年]의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오늘도 생생[生生]히 전[傳]해지고 있다.
그 동안 우리의 역사[歷史] 교육[敎育]은, 한반도[韓半島]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일제[日帝]가 패망[敗亡]하여 이 땅위에서 물러 간지 어언 한 세기[一世紀]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한 왜[倭]놈들이 남겨놓은 식민[植民]역사[歷史]의 참화[慘禍]속에서, 한국[韓國]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은 한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치욕[恥辱]의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은, 오늘도 삼천리[三千里] 금수강산[錦繡江山]을 외치며, 나라의 국사[國史]를 피폐[疲弊]하게 만들고 선대[先代]들이 남긴 소중[所重]한 역사[歷史] 기록[記錄]들을 철저히 짓밟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라의 역사학자[歷史學者]들이 아니었다. 수[數] 천년[千年]동안 이어 내려온 선조[先祖]들이 남긴 역사서[歷史書]들을 팽개치고, 치욕[恥辱]과 오욕[汚辱]으로 점철된 거짓과 왜곡[歪曲]의 사악[邪惡]한 식민[植民]의 역사[歷史]를, 우리의 역사[歷史]라고 주장하는 자들,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이러한 자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 한국[韓國]의 모습은, 작금[昨今]의 현실[現實]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정세[政勢]와 무관[無關]하지 않을 것이다.
위서[魏書]의 동이전[東夷傳]에서는, 동이[東夷]의 나라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경[書經]에, 동[東]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西]쪽은 류사[流沙]에까지 이르렀다. 하였으니, 書稱 「東漸于海, 西被于流沙
구복[九服]의 제도[制度] 이내에 있는 것은 말할 수가 있으나, 황역[荒域]의 밖은 여러 번의 통역[通譯]을 거쳐야 이르게 되어, 발걸음이나 수레가 닿지 않기 때문에, 其九服之制, 可得而言也. 然荒域之外, 重譯而至, 非足跡車軌所及
그 나라의 풍속[風俗]이 다른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 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
우리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활동[活動] 영역[領域]이 이처럼 광대[廣大] 했다는 말이다.
동[東]쪽은 바다[海]에 닿고, 서[西]쪽은 유사[流沙]에까지 이르렀다.
유사[流沙]는 끝없는 사막[沙漠]을 말하고 있는데, 아시아[亞細亞]를 통 털어 옛 부터 유사[流沙]가 펼쳐지고 유사[流沙]가 흐르는 지역은 어디에 있었을까 ?
우[虞]나라로부터 주[周]대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백환[白環]을 바쳤고, 自虞曁周, 西戎有白環之獻,
동이[東夷]에서는 숙신[肅愼]의 공물[貢物]이 있었으나, 모두 여러 해가 지나서야 도달하였으니 그 머나먼 거리가 이와 같다. 東夷有肅愼之貢皆曠世而至, 其遐遠也如此. 라고 이렇게 기록[記錄]하고 설명하고 있다.
위서[魏書]의 동이전[東夷傳]에서 말하고 있는 이러한 우리의 역사[歷史]는, 근세[近世]의 조선[朝鮮]까지 이어지고 변함없이 내려왔다.
아득히 멀고 먼 상고시대[上古時代]의 역사[歷史]와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고스란히 보존[保存]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우리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은, 끝 없이 유구[悠久]하고도 장엄[莊嚴]하여, 조선사[朝鮮史] 일만년[一萬年]의 역사[歷史]는, 오늘 이 시간에도 그 모습이 생생[生生]하며 웅혼[雄渾]한 기상[氣像]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고인[故人]을 위하여 성명[姓名]은 쓰지 않는다. 이 사람은 청[淸]나라 사람이다. 청[淸]나라가 망[亡]하고나서, 후[後]에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아카데미학술원 회원이 되었으며, 고대[古代]의 역사[歷史]에 큰 족적[足跡]을 남겼다.
러시아의 탐험대[探險隊]를 조직하여 불함산[不咸山]인 벨루하산을 탐험[探險]하고 그 일대를 조사[調査] 하였다.
초상화[肖像畵]에, 신시[神市]의 바위에 새겨진 천부인[天三印] 3개[三個]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청[淸]나라의 발원지[發源地]가 불함산[不咸山]인 지금의 벨루하산 이라는 것을 상징적[象徵的]으로 보여주고 있다.
반도사관[半島史觀], 이 거짓된 왜곡[歪曲]과 간악[奸惡]한 음모[陰謀]가 드리워진 식민사학[植民史學]으로 역사[歷史]의 교육[敎育]을 받은 한국[韓國]사람들은, 나로부터 너와 나 할 것 없이, 우리 역사[歷史]의 근본[根本]인 대륙[大陸]의 역사[歷史]를 상상[想像]조차 하지 못한다.
중국[中國]이라는 말만 나오면,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거대한 대륙[大陸]을 떠 올리며, 민족[民族]의 기상[氣像]부터 무너져 버린다.
식민사학[植民史學]인 반도사관[半島史觀]의 폐해[弊害]는, 일일 이 다 열거[列擧] 할 수조차 없다.
러시아를 포함하여 유라시아의 역사[歷史] 학자[學者]들이, 기원전[紀元前] B, C, 을 전후[前後]하여 그들이 흉노[匈奴][그들은 알타이와 우랄산맥의 광대[廣大]한 지역에 걸쳐 있던 유목민족[遊牧民族]들을, 흉노[匈奴]와 스키타이라고 부른다.] 라고 부르는, 흉노[匈奴]의 고분[古墳]들을 발굴[發掘]하여, 그 유물[遺物]들을 조사[調査]하고, 역사[歷史]를 바탕으로 하여 중국[中國]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발표 한 것이 있다.
결론[結論]은, 고대[古代]의 중국[中國]은, 중앙[中央] 아시아[亞細亞]에 있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흉노[匈奴]는, 그 북방[北方]지대에서 중국[中國]과 이웃 하였다. 이렇게 정의[定義]를 내리고 있다.
알타이에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B C, 기원전[紀元前] 4천년[四千年] ~ 3만년[三萬年]을 오르 내리고 있다.
그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지역[地域]의 고분[古墳]에서 나온 미라[Mummy]들에 대하여 디엔에이[DNA] 검사[檢査]를 실시하여, 인종[人種]의 분포[分布]를 연구[硏究] 하였다.
그 결과[結果], 이 지역[地域]은 예로부터, 유럽[Europe] 인종[人種]과 유라시아[Eurasia]인[人], 동양인[東洋人]들이 혼합[混合]되어 역사[歷史]를 이루어 왔음을 증명[證明] 하였다.
근래[近來]에 이르러 과학적[科學的]으로 검증[檢證]된 이러한 연구[硏究] 결과[結果]는, 조선사[朝鮮史]와 중국사[中國史]의 역사[歷史]가 말하는 각 종족[種族]들에 대한 설명[說明]과 일치[一致]하고 있다.
조선[朝鮮]의 대신[大臣]들이 연경[燕京]을 다녀오면서, 그리고 조선[朝鮮] 함경도[咸鏡道]의 북관[北關]에서, 백산[白山]을 바라보며, 천연적[天然的]으로 화[華]와 이[夷]의 경계[境界]를 나누고, 산천[山川]이 한계[限界]를 지었다고 한말은, 바로 이러한 나라의 위치[位置]를, 분명[分明]하고도 간략[簡略]히 표현[表現] 한 말이다.
정유년[丁酉年]의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의 웅대[雄大]하고 장엄[莊嚴]한 역사[歷史]를 소중[所重]히 생각하고, 경외[敬畏]하시는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感謝]를 드립니다.
유구[悠久]한 우리 역사[歷史]의 본[本] 모습이 다시 돌아와, 위대[偉大]한 일 만년[一萬年] 조선사[朝鮮史]의 서릿발 같은 기상[氣像]이, 조선사[朝鮮史] 후예[後裔]들의 머리위에 충만[充滿] 하시기를,......... 삼가 기원[祈願] 드립니다.
첫댓글 그저 놀라운 일 뿐입니다.
백두산에서, 알타이에서, 역사서에서는 말하고 있으나, 세뇌되어 반도조선왕조로 각인된 머리는 이를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2017년! 새해 첫날, 놀라운 조선사 이야기를 풀어 내 주신 "환국고려"님께 감사와 함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일만년 조선사의 시작이 바로 백두산(벨루하산)으로부터 시작되고, 이곳으로부터 발전된 문명이 동서양으로 퍼졌다는 이야기와 그 유물유적들이 즐비하게, 생생하게 살아있다니 그저 놀랐습니다.
숙신=읍루=물길=말갈 종족에 대해서는 산해경이나 회남자전등의 오래된 고전에서는 서북방에 있다고 하였으며, 회남자전은 유도(幽都)의 문(門)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전의 말씀은,
우리가 중국의 왕조(대륙왕조)라고 하는 많은 왕조들의 주무대를 중앙아세아와 그 남쪽과 서남쪽에 배치해 놓고 보면, 역사서 기록과 한 치도의 차이도 없다는 것입니다.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은 망국의 역사관이라고 수없이 주장했습니다만, 지금도 이 논리를 전파하는 무리들은 모두가 대한민국의 엘리트들이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죠. 최고 권력자도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봐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고 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문무 선생님, 안녕 하십니까 ?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비하면 미미 할 뿐입니다.
말씀 하시는 바와 같이, 고전의 역사 기록들이 말하고 설명하는 내용들은 , 옛 고적과 유적과 유물, 그리고 현재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인종의 분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이라는 나라 들은 말씀 하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의 천산을 기준으로 하여 그 서 남쪽과 북과 서, 북동을 아우르던 나라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오래전에 중앙 아시아 일대를, 사서의 기록을 따라 조사한 일이 있었는데, 수 많은 고분들이 도굴되어 흔적만이 남아 있는 것을 많이 본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지역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발굴된 고분들의 유물들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역사의 기록들을 증거하고 증명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식민사관인 반도사관은, 사학이 아니라, 역사를 없애는 사학이라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학문이 아닌 학문은 그것이 존재할 어떠한 가치와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이자들은 천도와 천하 흥망성쇠의 변함없는 진리를 망각하고 있는 자들 입니다. 역사를 말하는 곳이기 때문에, 국제 정세라든가, 정치에 대해서는 삼가하고 있습니다만, 우리의 한국은, 나라의 암적 존재와 적폐를 척결하여 일신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라의 존재 자체가 크게 위협을 받을 것입니다.
국제 정세와 국제사회의 야욕은, 맹수 보다도 더 잔혹하고 냉정 합니다. 자아를 굳건히 지키고, 스스로 천하의 강국이 되는 길을 가지 않는다면, 강한 맹수에게 먹히는 수모를 면치 못할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역사는 그러한 길의 근본이며,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국민들 개개인이 모두 천하를 주름잡는 드높은 기상을 지니고, 천하를 한 눈에 바라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을 때, 그러한 나라는 스스로 천하의 강국으로 우뚝 서게 될 것 입니다.
불철주야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문무 선생님의 노고에, 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무 선생님의 댁내에, 두루 평안과 만복이 함께 하시며, 늘 강건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아래 댓글사진은 중국 신강성 우루무치에서 발견된 고분의 벽화사진입니다.
단군,해모수,천부인,삼족오,신단수 등을 나타내는 듯 합니다.
비천님, 감사 합니다.
위 사진은 아사타나 고분 벽화인데, 이러한 고분이 우르무치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동진 시대의 것이라고 하지만, 역사의 거짓이 훤희 들어나는 궤변일 뿐 입니다.
지금의 우르무치는, 겉으로는 알아 볼 수 없으나, 역사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옛 역사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습니다.
이곳 우르무치에는, 이 고분 벽화외에 단군 고사의 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특히, 우르무치시의 바로 남쪽에는, 지금 그들이 박고성[泊古城]이라 부르는 유명한 고성이 있는데, 이 고성 이름의 유래를 안다면,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역사의 거짓은 백일하에 그대로 들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