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다보는 즐거움
조 경 진
나는 어린 시절 높은 곳에 올라앉아 멀리 내려다보기를 즐겼다. 높은 곳에서 산모퉁이 돌아 읍내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길과 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꿈을 꾸었다. 길을 따라 눈길을 달리다보면 읍내의 상점에 진열된 장난감과 먹거리가 눈에 선하고 아직 내가 보지 못한 신기한 것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한 상상은 내려다보는 버릇이 주는 즐거움이고 나만의 자유며 소망이기도 했다.
딸만 내리 다섯을 낳고 어렵게 얻은 아들, 덕물산 신령님께 빌고 빌어 낳은 아들이라 동구 밖 개울가에도 혼자 내보내지 않던 터였다. 요샛말로 마마보이로 치마폭에 싸서 키우신 것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나무나 기어오르고 손닿는 곳이면 올라가는 것을 보고 부모님이 걱정 안하실 턱이 없었다. 어른들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곳이면 아무데나 오르려는 나의 기행은 커가며 점점 더해갔다. 큰 나무나 헛간 지붕위에 올라앉아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모든 것이 내 발아래서 움직이고, 나를 귀찮게 하던 강아지가 내가 올라앉은 나무 주변을 뱅뱅 돌면서 낑낑대는 소리를 들으며 쾌재를 불렀다.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나만의 공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희열이었다.
어찌 보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버릇은 사회생활을 하며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아마 나 자신의 주제를 일찍부터 알았음일께다. 높은 자리를 탐해 본 적도 없거니와 평범 속에서 삶의 길을 찾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고상한? 삶의 철학을 신조로 삼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혼자 고고한 척, 현실에 초연한 척, 척 문화에 맛을 들이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가슴속 깊숙이 자리 잡은 외로움, 고독을 털어내고, 유유자적하며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충족시킬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제고 내려다볼 수 있는 생활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고 자주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었다.
고층 아파트 생활은 생각했던 것 보다 많은 심심풀이 볼거리가 있고 가슴이 트이는 시원함을 준다. 마음이 여유로운 시간이면 베란다 흔들의자에 앉아 밖을 둘러보는 맛도 쏠쏠하다. 먼 산위에 걸린 구름의 요사한 변신과 저녁노을이 질 때면 장미꽃 보다 붉은, 뜨겁던 하루가 식어 감을 바라보며 알 수 없이 가슴에 스며드는 고독과 시름에 젖기도 한다. 노을이 슬어지며 땅거미가 눈 깜박이는 순간순간 다가와 깊은 상념의 바다로 빠져들 때는 전율 같은 짜릿함도 맛본다. 발아래 엎드린 학교 지붕위로 눈길을 달려도 보고,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지난날을 회상하기도 한다. ‘걸리버’가 소인국에서 내려다보는 듯 장난감 같이 보이는 자동차 행렬과 출렁이는 불빛, 자 벌레가 기어가듯 길을 누비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망연히 나를 잊는 시간도 내겐 큰 의미가 있다.
엊그제는 소백산을 올랐다. 밋밋한 능선 따라 걷는 긴 시간의 여정은 지루했으나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즐거움의 기대는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연화봉 정상에 서니 수많은 봉우리들이 내 발아래에 엎드렸다. 땀방울을 걷어가는 소슬바람은 내 몸속에 차있는 욕망의 열기를 식히는가 상쾌함이 그지없다. 산안개에 덮인 봉우리와 구름과 하늘이 어우러진 장관에 한참을 황홀경에 빠졌다.
갈기 세우고/ 광야를 달리는 준마가 되어/ 노도와 같이 달려가는 기백/ 하얀 입김 뿜으며 내쉬는 숨소리/ 파도처럼 출렁이는 가슴을 보라// 발아래에는/ 여름내 몸을 키우던 / 하얀 등뼈 드러낸 고래가/ 포효하는 소백의 울림/ 흰 수염고래들이 떼 지어/ 바다를 가르고 있다
준령 소백 정맥의 맥박을 느끼며 졸시 한편을 웅얼거렸다. 거세게 치솟아 오른 봉우리들도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하다. 돛대 하나만 꽂으면 망망대해 어디든지 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흰 돛을 달고 세상을 순주하는 몽상에 잠시 젖는다. 세상 살며 쥐고 있는 것 없어도 누구 눈치 보거나 비위 맞출 일 없으니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내가 어려서부터 꿈꾸던 내려다보는 즐거움과 자유가 이런 것이려니.
오르길 좋아하고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즐거움을 맛보려 땀 흘려 오른 산, 모두가 내 눈 아래 머리를 조아리는듯하여 호기를 부려 보는데 위를 쳐다보니 낮달이 내려다보고 있다.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졌으나 별것 아닌 인생이라도 내 뜻을 세워 세상을 살려 노력했으니 후회 없지 않은가. 나름대로 삶의 가치와 방식을 통해 나를 지탱해온 삶이었다고 자위해 본다. 모두 제멋에 사는 세상이니 이후에도 영원한 자유인으로 내려다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내 멋에 살아갈 것이다.
첫댓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갑니다.
딸 다섯 아들 하나. 키우는 과정은 저마다 틀린것같이요 딸들은 한번도 때리지않고 키웠지만 아들은 귀한 아들 이라고 버릇나뿔까봐 오히려 때리기도 했습니다. 마마보이는 그래서 면 했을까. 남은 여운이 걱정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