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푸트니크 1호(Спутник-1) Спутник 1호는 소련이 국제지구물리 관측년인 1957년 10월 4일 19시 28분 34초(국제 표준시 기준)에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타원형의 지구 저궤도로 발사한 최초의 인공위성이다. Спутник 1호의 역사는 1954년 12월 17일에 세르게이 코롤료프(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유스티노프(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Устинов)국방산업장관에게 지구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의 개발을 제안하는 연설에서 시작됐다. 코롤료프는 또한 유스티노프에게 해외 유사 Project의 개요에 대한 Mikhail Tikhonravov의 보고서를 전달했다. 보고서는 1951년에 Rocket 개발에서 인공위성 발사는 피할 수 없는 단계임을 강조하며, 그 이후 행성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리라고 했다. 1955년 7월 29일에 미국의 34대 대통령 Dwight David Eisenhower가 미국이 국제 지구물리 관측년 동안 인공위성을 발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후 8월 8일에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정치국은 인공위성을 만드는 Project를 승인했다. 8월 30일 R-7 Rocket 시험 발사의 책임자인 Vasily Ryabikov와의 회의에서 코롤료프는 달 궤도로의 우주비행에 대한 계산 Data를 제시했다. 그들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R-7 Rocket의 3단계 버전을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Спутник 1호는 직경 58cm의 알루미늄제 구이며 거기에 4개의 안테나가 한 방향으로 붙어 있으며 중량은 83.6kg이다. 20MHz와 40MHz짜리 2개의 송신기(출력 1W)를 탑재하고 있어 위성의 온도 정보를 0.3초마다 발신했다. 위성의 궤도는 원지점 약 950km, 근지점 약 230km, 궤도 경사각 65˚의 타원궤도이며, 궤도주기는 96.2분이었다. Rocket은 R-7(탄도 미사일 발사용으로 개발된 것이다.)로 29,000km/h의 속도로 비행했으며, 궤도를 한 번 도는데 96.2분 소요되었다. 위성은 전 세계의 아마추어 무선 통신가에 의해 20.005와 40.002MHz 대역에서 관측되었다. 1957년 10월 26일에 송신기의 배터리가 다 떨어질 때까지 신호는 22일 동안 계속되었다. Спутник 1호는 3개월 동안 약 6천만km를 비행한 뒤, 1958년 1월 4일에 대기권에 재진입하여 불타버렸다. Спутник 1호의 성공은 미국의 Спутник 쇼크를 촉발시켰고 우주시대와 우주경쟁의 방아쇠를 당겼으며 냉전기의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주었다. Спутник 1호의 발사는 새로운 정치, 군사, 기술 및 과학발전을 이끌었다. Спутник 1호는 과학적으로 중요한데 위성의 궤도에 영향을 미치는 공기 저항으로 지구 대기권의 밀도를 추측할 수 있었고 무선 신호의 전파는 전리층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Спутник란 러시아어로 여행의 동반자란 뜻으로 러시아 우주 Project의 선구자인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Konstantin Eduardovich Tsiolkovsky)의 탄생 100주년과 국제 지구 관측년(1957년 7월 1일∼1958년 12월 31일까지의 18개월간의 기간)의 기간에 맞추어 발사되었다. Спутник 1호를 발사한 1개월 후인 1957년 11월 3일에 Спутник 2호가 발사되었다. Спутник 2호는 생물을 우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밀폐된 탑승실이 제공되었다. 따라서 본체의 무게는 1호와 비교하여 약 6배, 미국의 익스플로러 1호에 비해 36배나 무거운 508kg이나 되었다. 라이카라는 이름의 암컷 강아지가 탑승되어, 인류에 앞서 우주를 여행한 최초의 생물이 되었으나 라이카는 우주여행 중 사망했다. 소련 위성의 발사 성공은 당시 장거리 미사일과 같은 무기체계와 과학기술 전반에 걸쳐서 당연히 자신들이 앞서 있다고 평가하고 있던 미국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미국에서는 Спутник 쇼크라고 불렀고, 미국은 그 영향으로 교육, 군사, 과학 기술 부문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1958년 NASA가 설립되었고 자존심 만회를 위해 1958년 1월 31일 주노 1호 Rocket을 이용하여 무게 14kg(소련의 1/6 수준)의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였다. 또한 1961년 Apollo Project를 시작하여 체계적인 우주계발에 나섰으며, 1969년 인터넷의 모태가 된 아르파넷 구축으로 이어졌다.
2. 스푸트니크 2호(Спутник-2) Спутник 2호는 1957년 11월 3일에 발사된 소비에트 연방의 우주선 및 인공위성이다. 개를 태우고 발사되어 세계 최초로 생물이 실렸던 우주선이 되었으며 이 성공은 유인 우주선의 가능성을 열게 되었다. 1957년 10월 4일 발사에 발사된 Спутник 1호에 이어 11월 3일 바이코누르 우주 기지에서 R-7 Rocket에 의해 발사되었다. Спутник 2호는 2개의 광도계 외에 원격 계측기와 개를 탑승시키기 위해 선실을 탑재하였다. 무게는 508kg으로 Спутник 1호보다 훨씬 무거워졌다. 위성의 궤도는 근지점 212km, 원지점 1,660km이며, 궤도주기는 103.7분이다. Спутник 2호 발사 Project 책임자는 Спутник 1호 때와 마찬가지로 세르게이 코롤료프였다. Спутник 2호는 Спутник 1호를 발사하는데 사용된 것과 유사하게 개조된 R-7 Rocket에 의해 발사되었으며 이 Rocket은 8k71PS로 지정되었다. Спутник 2호는 삼각형을 하고 있으며 라이카(모스크바에서 떠돌던 개로 우주비행 전에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개의 생리작용을 조사할 전극과 전선을 몸에 부착하고 협소한 장소에서 자고 일정한 시간에 식사를 하도록 훈련 받았다. 발사 후 장비 이상으로 인한 산소 공급 중단과 온도 상승으로 발사 몇 시간 만에 질식사(死)했다.)라는 개가 실려 있었다. 따라서 우주선 내부를 밀폐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내부에 생명 유지 장치가 붙어 있었다. 이 밖에도 가이거 계수기 등의 장비도 탑재하고 있었다. 궤도에 도달한 뒤에는 노즈콘(미사일, Rocket, 비행기 등의 맨 앞부분을 말하며 공기역학적 저항이 적게끔 유선형에 뾰족하게 디자인된다.)을 성공적으로 투하시켰어야 했으나 계획대로 분리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온도 제어 시스템의 작동을 저해하였다. 또한 절연체 일부가 찢어져 실내 온도가 40℃에 도달하게 되었다. 라이카는 이로 인한 더위와 스트레스 때문에 계획된 열흘이 아니라 단 몇 시간 밖에 살아남지 못했다. Спутник 2호로부터의 통신은 11월 10일에 끊어졌고 발사 162일 후인 1958년 4월 14일 대기권에 재돌입하여 소멸했다. Спутник 2호는 북쪽 고위도에서 지구 외부의 방사선 벨트를 감지하였지만 높은 방사선 수치의 중요성을 깨닫지는 못했다. 호주에서 헤리 메셀 교수가 신호를 감청하였으나 소련은 암호를 제공하지 않았고 호주는 Data를 보내지 않았다. 1958년 Спутник 3호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협조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인공위성인 Explorer 1, 3, 4호로 결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Спутник Se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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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폭넓게 살자! 원문보기 글쓴이: 거북이
첫댓글 이런 기록도 있군요^^
제가 전혀 몰랐던 실패가 엄청 많군요^^
한 번에 성공하면 좋은데...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