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철 琴基哲 (1881 ~ 미상)】 "경북, 영동지역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한 의병장. "
1880년경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임지면(林只面) 두월리(斗月里, 현재 봉화군 상운면 문촌리)에서 출생하였다.
1907년 초 경북 울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 뒤 한상열(韓相說) 부대 및 김현국(金顯國) 부대와 연합하고, 4월 20일 강원도 횡성에 주둔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한 뒤 횡성군 동평(銅坪)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한상열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隅川面) 출신으로 당시 횡성군에서 일어나 홍천(洪川)에서 일본군의 대부대를 격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횡성 수비대를 파견하여 4월 2일 홍천군 월운면(月雲面) 서북후동(西北後洞)에 거주하는 한상열의 처자를 납치하고 귀순할 것을 유인·협박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투쟁하였다.
김현국은 김치영(金致永)이라고도 하며, 강원도 원주군 소초면(所草面) 출신으로 한때 민긍호(閔肯鎬) 의병부대의 소모장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이끌고 원주·횡성·홍천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융희 원년) 8월 22일 부하 400명을 이끌고 강원도 삼척 읍내를 공격하였으나 일본군 수비대가 반격하자 임계(林溪) 부근으로 물러났다. 또 강릉경찰서 관내 고성(高城) 지역에서는 김백룡(金佰龍)·김해석(金海石)·어득수(魚得水)·민긍호(閔肯鎬)·박화남(朴華南)·윤기영(尹起英)·성인호(成仁浩) 등과 함께 간성군(杆城郡) 현내면(縣內面), 고성군(高城郡) 금강산 부근, 양양군(襄陽郡) 신흥사(神興寺) 부근, 강릉군 연곡면(連谷面)과 옥계면(玉溪面) 등을 근거지로 하여 일본인 또는 일본인에게 아첨하는 관리들을 처단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태백산맥의 산악지대는 유격전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황해도와 경기도, 그리고 충북 및 경북 지역의 의병부대들이 강원도로 이동하여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까지 5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삼척·강릉·양양·고성 등지에서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울진군 봉전(鳳田)의 주민으로서 나이 31세, 울진군에서 폭발하여 부하 50명을 거느리고 삼척·갈전(葛田)·강릉의 각 군을 횡행하였다”라고 보고하고 있다.
금기철 감옥 탈출 보도(『권업신문』 1913.11.30) [판형2] |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에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가운데 1912년 함께 활동하던 김상수(金相守)와 함께 붙잡혀 1912년 6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1912년 7월 15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기각됨에 따라 형이 확정되었으며, 1914년 1월 경성감옥에서 복역 중 탈옥을 시도한 일로 2년 형이 더해져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