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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가을
폭염과 열대야 일수가 1994년과 2018년 기록을 추월했다는 그날, 전라북도 덕유산에 다녀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폭염지수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가장 뜨거운 여름은 1994년이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사실 에어컨이 드믈던 시절과 웬만하면 집집마다 갖추고 사는 2018년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참고로 폭염일수는 최고기온이 33℃ 이상인 날수를 말한다.
해마다 무더위가 심하다 싶으면 그때마다 1994년은 비교의 기준점이 된다. 그해 7월 찜통더위는 서울이 38.4도, 대구는 39.4도를 정점으로 찍었다. 학계는 1994년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몬순이 변했다고 볼 정도다. 언론은 ‘아스팔트 바닥에서 계란후라이가 가능했다’고 호들갑을 피웠다. 번번이 그런 무더위를 겪고 나서야 우리 사회는 폭염의 근본 원인으로 점점 뜨거워지는 지구라는 인식전환을 하게 되었다.
한여름에 덕유산을 찾은 것은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서였다. 한반도 남쪽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은 해발 1,520미터 설천봉까지 곤도라로 연결되어 있다. 후끈거리는 주차장과 달리 산정을 향해 곤도라가 상승하면서 서서히 변화하는 체감온도가 반가웠다. 그리고 30분 남짓 덕유산 정상 향적봉까지 산책하듯 오르는 동안에도 땀 흘릴 새가 없었다. 유난히 늙은 부모를 모신 가족나들이객이 많은 배경이다. 아마 덕유산 계곡 구천동은 다른 멋의 시원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루 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이 지속되면 여름이다. 기후변화로 여름은 점점 늘어 나는 중이다. 1940년대 98일이었던 여름 일수가 2016년 132일로 증가하면서, 이제 여름 기간은 5월 말에서 9월로 확장되고 있다. 여름과 함께 폭염과 열대야 일수가 늘어난 것은 자연스럽다. 여름철 이상기온은 더 이상 ‘이변’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간다.
뜨거운 여름에 몸살을 앓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가뭄 때문에 향적봉으로 이어지는 길가에 야생화들은 생기를 잃고 있었다. 물기가 부족한 공기와 바짝 마른 풀은 바스락거렸다. 한여름에 제철인 꽃도 드믈지만, 그나마 핀 산오이풀은 분홍색의 화사한 색감이 누렇게 변하고 있었다. 찐노랑의 원추리와 보라색 초롱 모양의 모싯대도 형편은 마찬가지다.
이것은 진범, 저건 수리취, 여긴 동자꽃, 어머! 어수리를 따라 하면서 길을 걷는 즐거움이 있었다. 아내의 짧은 탄성과 긴 탄식 소리를 들으면서 이런저런 공감을 했다. 꽃마다 한때 절정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댈 만한 들꽃이 없는 덕유산의 여름 풍경은 그렇게 시들어 가고 있었다.
조그만 노란 꽃들이 무리를 지은 짚신나물이 굳이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가에만 피는 까닭이 있다고 한다. 종족 보존을 위해 사람 몸에 붙어 멀리 씨앗을 나르기 위해서이다. 마치 도깨비바늘이 사람 옷에 귀찮게 달라붙듯이, 짚신나물은 나그네의 신을 신고 멀리 길을 나선다. 한낱 식물도 생명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듯 애쓰는데, 인간은 눈앞의 무더위를 피할 궁리만 할 뿐, 과연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사계는 금수강산과 함께 천혜의 선물이다. 사계는 새로 보는 봄, 열매가 열리는 여름, 갈아입는 가을 그리고 겨우 사는 겨울이다. 실은 4계가 아닌 5계절이란 말도 가능하다. 봄, 장마, 여름, 가을, 겨울이다. 다만 요즘은 일정하게 제 자리를 지키던 장마철마저 제 기간을 지키지 못한 채 하루에도 몇 번씩 억센 소나기를 뿌린다. 앞으로 봄과 가을은 어떻게 변할지, 계절보다 빠르게 달라지는 시절이 불안불안하다.
장담하건대 폭염과 열대야는 열흘 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고, 여름 내내 곡소리 하듯 울던 매미소리도 자취를 감출 것이 분명하다. 곧 모기 입이 비뚤어지고, 왕성하게 자라는 풀도 기운을 잃는 처서가 다가오기 때문이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했다. 작가 이광이가 “어느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저 포악한 여름도 끝날 것이다”라고 했듯이, 가을은 어느새 우리 마음에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