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내 손이 떨리고 있다.
우리가 목격한 인간의 비극과 비참함은 언제까지고 내 뇌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도 생생하다. 그것은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환상으로 내 상상을 언제고 지배할 것이다.
우리는 한 오두막에 들어섰다.
들어서는 순간에는 연기와 아이들이 덮고 있는 누더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이내 한쪽 구석에 아이들 세 명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너무 허약해져 일어날 기력조차 없기 때문에' 그대로 앉아 있는 것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송장 같은 몰골이었다. 더러운 누더기를 걷자 병적으로 여윈 팔다리가 보였다. 눈은 푹 꺼지고,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아사 직전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알몸으로 깜부기를 태우다 남은 것 위에 웅크리고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고,우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짚을 조금 깔았지만 맨바닥이나 다름없는 곳에 한 노파가 신음소리를 내며 누워 있었다. 그녀는 뭐든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사지는 살가죽과 뼈만 남아 있었다.
선반 비슷한 것 위에는 볼이 푹 들어간 젊은 여성이 있었다.
아이들의 어머니 같았다. 그녀는 우리가 무언가를 묻는데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다만 이마를 짚으면 서 고뇌와 절망의 표정을 지어 보였을 뿐다.
대체로 과부들이 많았다. 남편들은 최근 열병으로 죽었고, 이리하여 빈민구제용 공공 사업 에서 얻을 수 있는 그들의 유일한 수입원조차 완전히 끊겨버렸다.
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들들이 장기간 계속된 기근과 형편없는 생활로 무서운 병에 걸린 상태였다. 이 병은 먼저 사지가, 이어 몸뚱아리가 잔뜩 부풀어올라 결국 터져버리는 병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열 다섯 집을 둘러보았다.
한결같았다.
집안 구석구석에 쪼그리고 있는 고통받는 사람 또는 무리들의 수만 다를 뿐.... 어린이들이 가장 불쌍하고 가슴 찢어지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너무 쇠약해져 일어서지도 못했고, 여린 사지는 너무도 앙상했다.
전에는 여위었을 배가 놀랄 정도로 부풀어올라 있었다.
이 어린이들이 움직인다는 것은 '의지를 넘어선'차원이었다.
어린이다운 표정이 없었고, 이성과 지적 능력 또한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들은 거의 불평을 하지 않았다.
어떠냐고 물어보니 대답은 한결같았다.
"배가 고파요"
우리는 '굶주림' 이라는 슬픈 단어의 진짜 의미를 배운 것이다.
/ 윌리엄 버넷 (최근 6주간 아일랜드를 여행한 이야기, 1847년 )
2.
아이들이 내 앞에 두 명씩 섰다.
그들의 비참한 몰골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 손발과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많은 아이들이 안구건조증에 고통받았으며,
최악이 상태에서 몹시 괴로워하는 아이도 있었다.
또 아이들은 기생충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해골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나는 기근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어떠한 모습인가를 너무나도 잘 안다.
물론 집에 시체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방치' 라는 말에 그대로 들어맞을 완벽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 S. 고돌핀 오스본(서부 아일랜드에 관한 단편들, 1850년)
3.
나는 숲 속에 사는 인디언도 보았고, 쇠사슬을 몸에 감은 흑인도 보았다.
나는 그들의 가 련한 상황을 자세히 조사했고, 인간의 비참함 그 자체를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는 불운에 빠진 아일랜드의 상황을 몰랐다.
가난하고 헐벗은 것은 인디언이나 아일랜드인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사치와 부를 추구하고 숭상하는 사회 한가운데에 살고 있다. 아일랜드인은 마치 인디언처럼 인간의 산업과 국가의 부가 제공하는 물질적 안락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은 꿈조차 꿀 수 없는 안락함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인디언은 그 엄청난 궁핍 속에서도 자주성만큼은 지키고 있다.
그 나름대로 인간으로서의 위엄과 매력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부족하고 굶주렸을지라도 인디언은 사막에서나마 자유를 누리고 있다.
바로 이 자유가 많은 고통을 덜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일랜드인은 같은 궁핍을 겪되 이 자유만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온갖 규칙과 제한에 얽매여 있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면서도 법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슬픈 일이다.
문명의 모든 악습이 저 야만스런 생활과 얽혀있는 것이다.
자신의 사슬을 깨고자 하며, 미래를 믿는 아일랜드인은 분명 인디언이나 노예처럼 비탄에 빠져 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야만의 자유도, 노예의 빵도 없다.
..
아일랜드의 가난은 특별하고도 예외적이어서 비교할 만한 대상이 없다.
아일랜드의 참상은 그 스스로 하나의 유형을 만들고 있으며
그 비슷한 것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에나 극빈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국민이 다 거지인 나라는 아일랜드 외에는 보지 못했다.
그런 나라의 사회상태를 설명하는 데는 그 참상과 고통을 열거하기만 하면 된다.
빈곤의 역사가 바로 아일랜드의 역사이다.
/ 귀스타브 드 보몽 ( 아일랜드의 사회, 정치, 그리고 종교, 1839년 )
4.
어린 아이들의 모습은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 깔려 있는 이 지역의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창백한 얼굴은 여느 병자의 것과 달랐다. 병자에게 있는 황달기조차 없었다.
지금 당장 묘지에서 시체를 꺼내 새로이 피를 혈관에 돌게 만들어
되살려낸다 해도 저렇게 창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피가 물이 될 때까지 얼음 속에 가두었다가 꺼내면 저렇게 될까 싶다.
/ 엘리후 버릿(시키버린과 인근 지역을 사흘 동안 돌아본 소감 1874년)
5.
1846년 8월6일 날짜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평소처럼 말을 타고 산자락에 일궈놓은 밭 으로 나갔다.
그 순간 감자를 살펴보면서 그 공포의 냄새를 맡았을 때의 기분이란,
이제는 모두 알려진 감자의 죽음의 신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그 냄새...
그 무성한 줄기들이 이내 시들었고, 잎은 썩어 들어갔다. 병은 구근으로 퍼졌고, 영양이 풍부한 식물이 썩는 냄새는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
갑자기 먹을 것이 떨어져 사람들이 거리나 밭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지는 않는다는 뜻 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결하고 영양이 부족한 음식밖에 얻을 수 없었기에 서서히 침몰해 갔다.
그리고 열병, 이질, 구빈원의 혼잡, 그리고 난관에 부딪쳐 구제사업이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은 수천 명을 무덤으로 끌고 갔다. 먹거리가 갑자가 사라졌고, 이 재난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끔찍해서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견한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 들이 손쓸 새도 없이 사라져갔다.
/ W. 스튜어트 트렌치(아일랜드인의 삶의 실체,1868)
6.
우리가 거리로 나서자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리 뒤를 따라온다.
두세 사람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아, 그들은 우리를 재난구제를 위해 파견된 정부관리로 알았던 것이다.
..
신부;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200명의 버림받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다들 굶어죽기 직전 에 놓여 있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슬리고 후작은 이 일대의 풀밭에서 1000마리나 되는 양을 키우고 있습니다. 창고도 가득 차 있고요. 그렇지만 주민들은 그것들을 강탈할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냥 죽겠다는 겁니다.
우리:
정말 대단한 미덕입니다.
신부:
신사분들, 환상을 가지면 안 됩니다. 물론 종교가 이 인내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실은 두려움 때문입니다.
저 불쌍한 주민들은 너무나 오랜 세월 폭정을 받아왔습니다. 열 명 중 한 명은 교수대에 오르거나 추방당한 겁니다. 이제 주민들은 어찌해볼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저항하느니 그냥 죽는 편이 낫다고 단념한 것입니다.
대륙에서라면 이런 상황에서 '영광의 사흘(프랑스의 1830년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고백컨대, 만약 내가 그들이라면, 그리고 열렬한 신앙심만 아니라면 이 폭정과 귀족을 쳐부수기 위해 거리낌없이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 프랑스 작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
7.
이 세상 어느 나라에서든 농부들은 마지못해 십일조를 낸다.
아일랜드에서는 십일조가 더욱 성가신 존재로 보였다.
왜냐하면 주민의 절대다수가 카톨릭인데 교구 성직자는 신교도인 경우가 종종 있고, 또 그 성직자가 자신의 권리에 관한 한 아주 엄격하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십일조 외에도 성직자는 아일랜드의 거의 전역에서
우유의 10분의 1, 달걀의 10 분의 1, 텃밭에서 나는 채소의 10분의 1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성직자가 자신의 직분을 다한다 해도 이런 조건들이 얼마나 가혹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 불쌍하고 비참한 사람들이 성직자들의 생계까지 그대로 떠맡아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주민들은 부지런히 불평도 하고 탄원도 해보고 있다. 그러나 국교법을 고치지 않는 한 그들의 탄원이 먹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들의 종교는 국가에서 법으로 정한 국교이기 때문이다.
/ 한 프랑스인의 아일랜드 주유기), 1796~1797년
8.
11월17일 :
오늘 저녁 의사가 침실용 변기들을 위로 올려와서는
앞으로 여자들에게 절대 아래서 일을 보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여자들도 갑판으로 올라와 불결한 일 을 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화장실에서 퍼진 전염병 때문)
11월 25일:
열두 살 먹은 또 다른 아이 하나가 이질로 죽었습니다.
영양결핍이 죽음의 원인이었습니다. 아이는 커다란 돌을 매단 옷에 싸여 잔잔한 바다로 던졌습니다.
지금까지 장례식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의사 말이, 항해중 배 위에서 죽은 사람에게는 장례를 치러주지 않는다는데,
카톨릭교도들인지라 평신도가 식을 올리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 베어 포스터가 호바트 경에게 보낸 편지, 1850년 12월 1일(이민 항해중)
---------------------------------------------------------------------
대재앙의 원인 :
전반적인 빈곤, 인구과잉, 그리고 감자에 대한 지나친 의존 때문이라 말할수 있다. 이미 1741년의 기근 에서 약 240만 인구 가운데 25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2세기에 부분적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아일랜드에서는 전쟁, 반란, 재산몰수가 잇따랐다. 영국의 무자비한 식민정책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1820년대에는 아일랜드 가내수공업자들을 보호하던 관세제도가 폐지되었는데 이는
국제시장에 경제를 개방한 것은 취약한 취약한 아일랜드 경제에 재앙 에 노출시킨 셈이었다.
1840년대 들어 아일랜드의 인구는 정점에 달해 경작지 내 평균인구는 1평방 마일당 약 700명으로 유럽에서 가장 조밀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극빈자 또한 늘어났다. 그러나 이미 과잉고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농업부분 말고는 일자리를 찾을 곳이 없었다.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감자소비량이 너무나 높았다. 하루에 성인남자 날품팔이 인부 한 사람이 14파운드를 먹었고, 여자와 10세 이상의 아들은 11파운드를, 어린이들은 약 5파운드를 먹었다.
그런데 감자 마름병 이 닥쳤다. 이것은 감자 전염병이었다. 어떻게 마름병이 그토록 빨리 전파되었을까?국제무역의 발전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1847년까지 감자마름병은 벨기에와 네덜란드에서만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1845년만 해도 앞으로 5년간 닥칠 대재앙을 예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굶주림
굶주림이 직접 원인이 되어 목숨을 잃은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굶주림에 따른 영양실조 는 치명적인 질병을 동반했다.
먼저 '사회성 전염병'이 등장했다. 발진이 동반되는 '검은 열병'인 발진티푸스와 황달이 동반되는 '노란 열병'인 재귀열이었다. 영양실조로 면역력이 떨러지면서 설사, 홍역, 결핵 이 만연했고 사망원인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괴혈병, 안구건조증, 니코틴산 결핍 증후군 등 비타민 결핍증 역시 흔했다.
1849년 초에는 전국에서 매주 2500명이 죽어 나갔다.
이를 대비한 구빈원에는 상인들이 공급물자에서 남겨 먹을 수 있는 이윤을 노리고 갖은 수단을 다 써서 구제위원이 되었고 물자를 제대로 조달하지 않았다.
1851년에 실시된 조사 결과는 900만명에 가까웠던 인구가 6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행방불명자수는 약 24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했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의 결과는 대기근으로 희생된 사망자가 약 110만 명 에 이른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일랜드 북서부 메이오주의 에리스 같은 오지는 가장 가까운 구빈원이 발리나에 있었는데 그 거리는 무려 64Km가 넘었다. 이곳에서는 1만 명의 빈민들이 "양조차 충분하지 않은 무순, 까나리, 그리고 해초를 먹으며 아사해 갔다."
이웃 영국인들은 이런 대재앙이 신의 섭리에서 발생 한 것이라는 믿었고, 도덕주의적 정치가들과 영국의 여론은 아일랜드는 자원이 풍부하므로 기업가 정신과 산업을 일으키기만 하면 된다고 믿었다.구빈법의 목적도 바로 이런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었다.그런 경직된 사고방식이 초래한 무서운 결과는 무시되거나 아일랜드인 탓으로 돌려졌다.
대기근으로 당연히 빈민들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이 죽었고, 5살 이하의 어린아이들과 장노년층(40세 이상)이 가장 많이 희생되었다.
이민
1845년 전까지 약 100만 명이 아일랜드를 떠나 주로 캐나다와 미국으로 향했다.
영국의 공업도시, 호주 등에도 많이 이민을 갔다.
미국 이민자들은 '착실한' 농민과 그 가족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자립을 기대했다.
그러나 이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미국행운임은 비싼데다 농장을 세울 만한 돈을 가진 농부도 별로 없었다. 대서양 횡단 자체도 위험했고, 도착한 뒤에는 강도, 사기꾼, 곱지 않은 시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이 시작된 후 출발한 첫 배인 시리아호는 1847년 5월 14일에 검역소에 들렀는데, 승객 총 241명 중 84명이 발진티푸스 환자였고, 9명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1947년 항해가 일단락 되고 그로스아일 검역소가 폐쇄될 무렵까지 5300명 이상이 섬에서 죽었고, 최소한 1만 5천 명이 영국령 북미주에서 이내 죽음을 맞았다.
항해 중에 얼마나 수장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지만, 대기근 기간에 대서양 횡단에 나선 사람 중 최소한 5% 는 항해중 죽었을 것이다.
정착
아일랜드 이민들은 돈이 별로 없어도 살 수 있는
도시 빈민가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대기근 이민 대다수가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로 위험도가 높은 일에 몰렸다.
감옥, 보호시설, 구빈원에 수감된 아일랜드인의 수는 다음 수십년 동안 언제나 평균 이상을 차지했다.
아일랜드인은 자주 이동했지만, 어디를 가든 자기들끼리 모여 살았다.
실망과 후회가 지배적인 감정이었고, 조기사망은 그들의 유일한 운명이었다.
결과
우선 시골의 분위기가 엄청나게 바뀌었다.
대기근 이전 사회의 문화적 활기는 수그러들었고,
민속문화가 쇠퇴했으며 전에는 떠들썩하던 시장이 차분해졌다.
그리고 친절의 미덕이 좀더 계산적인 행동으로 대체되었다.
대기근 최대 피해자중 하나는 바로 아일랜드어 였다.
18세기에도 영어 사용층이 꾸준히 늘어났지만
1845년까지 400만 명이 아일랜드어를 썼다.
그런데 죽거나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주로 아일랜드어 사용층이기에,
1851년에는 아일랜드어 사용자수가 반으로 줄어든다.
대기근은 아일랜드어와 가난 또는 후진성을 더욱 강하게 연관시켰고,
아일랜드어를 버릴 것을 더욱 종용했다.
기념 박물관
대기근의 기억은 아일랜드인의 정신 깊은 곳에 흐르고 있으며,
그 예가 바로 1994년 로스코면주의 스트록스타운에 세워진 대기근 박물관 이다.
오늘날 아일랜드는 국제 구호기관들에게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제3세계' 국가에 대한 지원 비율이 어느 유럽 국가보다도 높다.
/ 간추린 정리 : 아일랜드 대기근 (피터 그레이 -시공 디스커버리총서)
P.S
아일랜드의 음악이 구슬픈 이유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