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仇台)와 위구태(尉仇台)의 중국측 기록들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살펴보아야 할 정황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121년, 태조대왕 재위 69년을 즈음한 일련의 사건들입니다. 먼저 관련 기록부터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①태조대왕 69년(121년)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예맥 1만 여기를 거느리고 가서 현도성을 에워싸니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이끌고 한병과 힘을 아울러 거전하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태조대왕 70년(122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구원하고 깨뜨렸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②建光元年 秋,宮遂率馬韓、濊貊數千騎圍玄菟.夫餘王遣子尉仇台將二萬餘人,與州郡幷力討破之,斬首五百餘級.(후한서 열전 고구려전/자치통감 권제50 孝安皇帝)
건광(建光) 원년(121년) 가을, 궁이 드디어 마한·예맥 수천 기병으로 현도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와 장병 2만여 명을 보내어, 주군과 힘을 합하여 이를 깨뜨렸다. 5백여 명을 참수하였다.
③建光元年 冬十二月,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夫餘王遣子與州郡幷力討破之. 延光元年春二月,夫餘王遣子將兵救玄菟,擊高句驪、馬韓、穢貊,破之,遂遣使貢獻.(後漢書/本紀/卷五孝安帝紀第五)
건광 원년 겨울 12월, 고구려·마한·예맥이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을 보내어 주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이를 깨뜨렸다(깨뜨리도록 했다). 연광(延光) 원년(122년) 봄 2월, 부여왕이 아들과 장병을 보내어 현도를 구하고, 고구려·마한·예맥을 쳐서 이를 깨뜨렸다.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공헌하였다.
비슷한 내용의 인용문들을 3개나 언급한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삼국사기]나 [후한서 본기 안제기] 등에서는 121년 12월과 익년, 2차례에 걸쳐 고구려가 현도와 요동(또는 현도와 현도)을 공격하였고, 그때마다 부여가 구원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위 인용문 전체를 살펴보면 121년 12월, 고구려의 현도성 포위와 공격이 있을 때, 부여에서 아들과 장병 2만여 명을 보내어 이를 구원한 것이 익년 2월의 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공성전(攻城戰)의 경우, 단기간에 끝날 수도 있지만 보통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12월에 시작된 공격이 해를 넘겨 익년 2월까지 계속되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삼국사기]에서는 같은 사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것을 마치 각각 서로 다른 일로 기술한 것이 되므로, 실제 하나의 전쟁 기록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뒤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삼국사기의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이 삼국의 고기(古記)를 바탕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사서들을 참조로 하여 기술된 내용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삼국사기]에서 하나의 기록으로 보아야 할 것을 마치 다른 두개의 사건으로 기술한 것이 맞다면, 이것은 후한서를 잘못 읽은 데서 나온 오해로 보여집니다. 인용문③ [후한서 본기 안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고구려의 공격은 한번만 기술되어 있음에 반해, 현도를 구원하기 위한 부여의 파병은 두 차례나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보면 같은 사건이 해를 넘겨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제 부여의 현도 구원 파병은 익년 2월에 한 번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용문②는 그런 면에서 보면 단일한 하나의 사건을 서술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결국 인용문①의 삼국사기 기록은 고기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인용문③을 잘못 해석하여 생겨난 오해로 보여집니다.
두 번째는 이때 아들(실제는 태자)과 무려 2만여 명이나 되는 장병을 동원하여 현도성을 구원하는 부여의 정체에 관한 의문입니다. 인용문①에 의하면 고구려왕은 10월에서 11월에 걸쳐 부여에 직접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하고 부여의 백성들을 위문하며, 지위와 공적(?)에 따라 차등하여 물품을 지급하는 등 다양한 행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또한 이 소식을 듣고 숙신의 사신들이 부여에 있는 고구려왕을 예방하여 조공을 바치고 태조대왕은 이들을 위하여 연회까지 베풀어줍니다. 게다가 태조대왕의 어머니는 부여인으로 왕이 성장하기까지는 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는 등 친연관계에 있었으며, 재위25년과 53년에는 부여의 사신이 각각 예방하여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보아,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조공에 의한 속국관계라는 것에 더하여 태조대왕 재위 69년 11월까지는 사이가 아주 좋았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왕의 부여 행차가 있고 바로 다음 달인 121년 12월에 고구려가 예하의 마한·예맥 세력을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하는데, 부여가 무려 2만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동원하여 후한의 현도성을 구원하는 등 고구려를 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부여의 돌변한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엔 물론 하나의 큰 단서가 있습니다. 즉 중국 사서들이 전하는 것처럼 태조대왕 재위 69년에 있었을 왕의 유고(有故) 상황입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해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온 다음에 동모제(同母弟) 수성(遂成)에게 군국의 일을 관장케 하였다고 했습니다. 현 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즈음하여 왕권이 동모제 수성에게 넘어간 것을 거의 기정사실화하고 있으므로,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개인적인 의견을 자세히 언급하도록 하며, 지금은 이러한 선에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고구려에 적대하는 부여의 행동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데, 첫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부여가 태조대왕의 유고(有故) 상황을 인지하고 수성(遂成)의 반역행위에 대한 응징의 기치를 든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에는 만만찮은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선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부여는 고구려와 수성(遂成)에 대한 판단과 행동이 각각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태조대왕과 부여의 관계가 어머니로부터 이어진 혈연적인 관계에 더하여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관계설정이 되어 있다면, 재위 69년의 부여 행차는 그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부여가 고구려 내부의 비정상적인 정권 교체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면 고구려라는 국가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수성과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에 대한 반기라고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가 주변 세력들을 동원하여 현도를 칠 때에 후한에 붙어서 현도를 구원하다는 것은 고구려 자체를 적대시하는 것으로 수성(遂成) 정권 자체에 대한 반기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한 관점은 부여가 고구려 내부변란의 기회를 틈타, 이 기회에 그 동안의 속국 위치를 벗어나서 독립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하나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앞서 태조대왕 69년 10월의 부여행차 의미를 언급하였습니다만, 이때의 고구려, 즉 태조대왕 재위 기간(53~121년) 동안의 고구려는 중국의 후한왕조와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고 있었을 시기입니다. 예컨대 태조대왕 3년(55년) 2월에 요서에 10성을 쌓아 한병을 방비한 것을 필두로 하여, ①至其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憎之。及長勇壯,和帝時(89~105년),頻掠遼東玄菟等郡.(두우 통전 변방전) ②元興元年(105년) 春 高句麗王宮入遼東塞 寇略六縣.(자치통감 권제48), ③至殤、安之間(105~125년),莫來裔孫宮,數寇遼東.玄菟太守蔡風討之,不能禁.(北史/列傳/卷九十四列傳第八十二/高麗) 등으로 이외에도 태조대왕 시기에 후한왕조와의 대소규모 전투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볼 정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의 속국으로 있었을 부여가 독자적으로 후한왕조에 사신을 보내거나 조공을 할 수 있는 정황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태조대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한 달여간 머무르기 1년 전인 120년에,
永寧元年(120년),乃遣嗣子尉仇台詣闕貢獻,天子賜尉仇台印綬金綵.(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夫餘)
영녕(永寧) 원년, (부여왕은) 아들 위구태를 보내 조공하였다. 천자는 위구태에게 인수와 금과 비단을 주었다.(후한서 부여전)
라고 하여, 위구태가 이 시기 처음으로 등장하여 후한 조정에 나아가 조공을 바치고 있는 사실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부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여와는 역사적 상식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만일 120년에 후한 조정에 조공하는 부여를 121년의 10~11월 사이에 등장하는 부여와 동일시한다면, 이때 태조대왕은 태후묘 제사를 빌미로 부여에 가서 이들의 후한 조정에 대한 조공행위를 책망하는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맥을 보면, 책망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격려하고 위문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120년에 부여왕의 아들로 나오는 위구태와 이때를 전후하여 나오는 같은 성격의 부여를 좀 더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구태는 이미 앞선 글에서 백제의 시조로 중국 사서들에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양자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선학들의 지적이 있듯이, 구태를 계승한 그리고 구태와 비슷한 성격을 지닌 또 하나의 인물이 후대에 등장하여 선조(?)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구려 태조대왕의 이름인 궁(宮)을 후손인 동천왕(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산상왕으로 보고 있지만, 저는 이를 동천왕으로 파악합니다)이 이어받아 위궁(位宮)으로 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그런데 위구태(尉仇台)라는 이름의 인물은 120년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면 구태(仇台)의 어떤 면모를 이어받았다는 것인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추론이 가능합니다. 구태는 다시 정리를 해야 할 사항이지만, 일단 주서(周書)·북사(北史)·수서(隋書)에 의하면 백제의 건국 시조로 등장하며, 그 외의 인간적인 면모 등에 관한 세세한 정보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위구태가 구태를 닮았다는 것은 그가 백제의 인물이든 아니면 부여의 인물이든 현재 주어진 정보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구태처럼 건국과 관련한 일을 하였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재건국’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120년과 122년에 부여왕의 아들로 등장하는 위구태의 경우, 다음 왕위를 이어받았을 것이므로, 이후 기록을 살펴보면,
順帝永和元年,其王來朝京師,帝作黃門鼓吹、角抵戲以遣之.(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夫餘)
순제 영화(永和) 원년(136년), 부여왕이 내조하였다. 천자는 대궐에서 북치고 피리 불며 씨름을 하게 하는 등 이를 즐기고 쉬다가 돌아가게 하였다.
라고 하여 136년에 왕 자신이 직접 후한 왕조에 입궐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나라의 기틀을 공고히 하고 아울러 국가간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며, 그렇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안정적인 후원세력을 얻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의 일환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위구태라는 이름에서 그가 새로운 창업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그가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창업을 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120년과 122년의 기록에서 보듯이 선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에게 창업주와 같은 의미의 위구태라는 이름이 부여될 수 있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111년에 나오는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①孝殇皇帝永初五年 3월, 夫馀王寇乐浪。高句骊王宫与濊貊寇玄菟.(자치통감 孝殇皇帝永初五年)
영초(永初) 5년(111년) 3월, 부여왕이 낙랑을 쳤다.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더불어 현도를 쳤다.
②至安帝永初五年,夫餘王始將步騎七八千人寇鈔樂浪,殺傷吏民,後復歸附.(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夫餘)
안제 영초 5년(111년) (3월) 부여왕이 보병 7~8천을 거느리고 와서 낙랑을 침략하여 관리들과 백성들을 살상시켰다. 후에 다시 와서 귀속하였다.(후한서 부여전)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부여와 고구려가 각각 침입한 것이 아니라, 같은 해, 같은 시기에 연합하여 함께 낙랑과 현도를 공격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부여는 후한서 부여전에 의하면, 120년 위구태 관련 기록들과 이후의 기록들에 계속적으로 이어져 있는 그 부여로, 말하자면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다른 부여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부여(이를 이제부터는 부여②로 부르기로 하겠습니다)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후한서에 언급되어 있지만, 실제는 고구려와 연계하여 합동 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태로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당시 거느렸던 예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러나 세력은 조금 더 큰 별도의 실체로써 고구려와 예맥이 현도를 칠 때에 이 부여②는 낙랑을 공격하였던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부여②는 태조대왕 당시 고구려 지배질서 내에 있으면서 고구려왕의 명령을 받는 처지에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여②도 120년에 이르면 고구려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생존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러, 이때에 고구려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후한 왕조에 사신을 보내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121년 11월을 즈음하여 태조대왕의 유고(有故) 상황이 발생하면서, 본격적으로 고구려에 반기를 들고 이탈하여 후한 왕조에 친부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인해 이제 서로 다른 실체로 볼 수도 있을 2개의 부여를 상정하고자 합니다. 예컨대 111년과 120년, 121년 12월~2월의 부여를 편의상 부여②로 한다면, 121년 10~11월의 부여를 부여①로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부여①은 원래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부여가 될 것이며, 부여②에 대해서는 이제 서론의 성격을 벗어나 좀 더 본격적으로 그 실체를 탐구해 갈 것입니다. 특히 부여②의 경우, 삼국사기가 토대로 한 고기(古記)를 통해서는 고구려본기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여②의 실체가 어떠한 것이든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미 속국화된, 그리고 자신들의 시조가 그로부터 나온 하나의 부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하나의 실체가 대외적으로 자신을 부여 또는 부여와 관련한 어떠한 것으로 표방하든, 그것은 고구려에게 인정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만일 부여②라는 별개의 실체가 부여①과는 다른 지역에 역사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고구려는 이를 달리 불렀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개의 글이 진행된 다음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미리 말해 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하여 있을 수 있는 포괄적인 반론입니다. 역사적 사실이란 오늘의 우리가 보기에 이해되지 않고 모순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즉, 부여①과 부여②가 일부의 모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의 우리의 관점에서 그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를 너무 부각시켜 하나의 실체를 둘로 나누는 잘못을 범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논의 과정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되어 나올 과제이므로 지금 단계에서 미리 예단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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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의 실체 4
대륙백제가 부여였던 증거
이제 대륙백제가 한때 부여로 불리웠을 가능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들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잠시 연대기적인 서술을 뛰어넘어 4세기대의 정세를 전하는 한 인용문으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대륙백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합니다. 한 가지 미리 언급하고 싶은 것은 ‘대륙백제=부여’설은 대륙백제 전 시기를 일관한 정의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대륙백제는 지금까지 파악하는 것으로는 대체로 3~4번의 커다란 흥망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중 대륙백제가 부여로 불리웠고 또한 스스로 그렇게 표방하던 시기는 대무신왕 5년(AD 22년) 동부여의 멸망 이후 이제 언급할 인용문에 등장하는 4세기 중엽·말까지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①句麗、百濟及宇文、段部之人,皆兵勢所徙,非如中國慕義而至,咸有思歸之心.今戶垂十萬,狹湊都城,恐方將為國家深害,宜分其兄弟宗屬,徙于西境諸城,撫之以恩,檢之以法.(晉書/載記/卷一百九載記第九/慕容皝)
고구려·백제 및 우문(宇文)·단부(段部)의 사람들은 모두 병세(兵勢)를 옮겼는데, 의를 사모하여 중국에 오고자 한 것이 아님에도 왔으니(끌려 왔으니),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 마땅히 그 형제종족을 나누어서 서쪽 경계의 여러 성으로 옮겨 이들을 은총으로 위무하는 한편 법으로 단속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이 문장의 배경부터 설명한다면, 전연 모용황(慕容皝)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 있던 봉유(封裕)가 345년 1월, 모용황에게 표문을 올려 간언을 하는 대목 중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 무렵에 대한 내용이 [자치통감]에도 나오는데, 그 일부를 인용하면,
②...南摧强赵,东兼高句丽,北取宇文,拓地三千里,增民十万户(자치통감 券第97 孝宗穆皇帝上之上显宗成皇帝下永和元年)
...남쪽으로 강한 조나라를 꺾고, 동쪽으로 고구려를 겸하고(멸하고-晉書/慕容皝), 북쪽으로 우문을 취하여, 개척한 땅이 삼천리, 불어난 백성이 10만 호입니다.
인용문 ①과 ②를 종합하면, 모용황의 전연이 사방으로 정복전쟁을 수행해서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새로이 취득한 땅이 삼천리에, 호수가 10만이 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용문①에 의하면 이때의 정벌전의 대상이 나오는데, 각각 고구려·백제·우문·단부로 확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345년 1월 이전에 이 네 나라가 각각 모용황에 의해 격파당해 인질이 용성(龍城)으로 끌려왔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고구려의 경우는 고국원왕 12년(342년), 모용황의 군대에 의해 고구려 서울 환도성이 공략당해서 왕모와 왕비가 납치되고 선왕인 미천왕의 능을 파헤쳐 시신을 싣고 갔는데, 그때 5만여 구의 포로들도 같이 끌려갔다고 하였습니다. 단부(段部)는 338년에 전연의 모용황(慕容皝)과 후조의 공벌에 의해 멸망하고, 그 전과는 고스란히 전연에게 넘어간 바 있으며, 우문부(宇文部) 또한 344년에 모용황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 우문부(宇文部) 멸망시의 정황을 전하는 문장을 보면,
③歸遠遁漠北.皝開地千餘里,徙其部人五萬餘落於昌黎,改涉奕于城為威德城.行飲至之禮,論功行賞各有差.(晉書/載記/卷一百九載記第九/慕容皝)
우문귀(宇文歸)는 멀리 막북(漠北)으로 달아났다. 모용황은 천여 리의 땅을 개척하고 그 부중 사람들 5만여 락(落)을 창려(昌黎)로 옮겼다. 섭혁우성(涉奕于城)을 고쳐 위덕성(威德城)이라 하고, (조상에 승리를 고하는) 음복의 예를 행하고 논공행상에 있어 각기 차등이 있었다.
즉, 우문귀(宇文歸) 세력 또한 멸망당해서 그 5만여 락(落)을 창려(昌黎)로 사민하였다고 했습니다. 물론 지배계층 일부는 창려(昌黎)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당시 모용황의 도성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구려·우문·단부의 인질들이 용성(龍城)으로 운집하게 되고 그 숫자가 합하여 10만에 이른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문제는 백제의 경우입니다. 한반도의 한강 유역에 도읍하고 있는 백제를 생각한다면 전연의 군대와 백제가 전투를 벌인 경우도, 백제가 패배하여 인질들이 용성으로 끌려갈 정황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용문①의 진서(晉書)에는 백제가 들어 있습니다. 한편으로 대륙백제를 주장하는 학자들처럼, 이 기록속의 백제를 토대로 하여 막연히 대륙에 백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른 증거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한,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말하자면 대륙백제가 전연과 언제 어떻게 싸웠으며, 그 전쟁의 결과 모용황의 도성에까지 백제 구민들이 끌려오게 된 정황을 고구려나 우문부, 단부의 예처럼 규명해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만으로 본다면 백제가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단순한 오기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다음의 문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④显宗成皇帝下永和二年(346년)春,正月,... 初,夫馀居于鹿山,为百济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设备。燕王皝遣世子俊帅慕容军、慕容恪、慕舆根三将军、万七千骑袭夫馀。俊居中指授,军事皆以任恪。遂拔夫馀,虏其王玄及部落五万馀口而还。皝以玄为镇军将军,妻以女.(자치통감 권제97 显宗成皇帝下永和二年)
처음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 등 세 장군과 만 칠천 기병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토록 하였다. 모용준은 중앙 지휘소에 거하며 보고를 받고, 군사의 임무는 모두 모용각에게 맡겨졌다. 드디어 부여를 함락하여 부여왕 현(玄)과 그 부락 5만여 구를 사로잡아 돌아왔으며, 부여왕 현(玄)을 진군장군(또는 진동장군)으로 하고 자신의 딸로 그의 아내를 삼았다.
위 문장은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항들이 제법 있습니다. 먼저 초기 부여의 거주지로 언급된 녹산(鹿山)의 위치라든가, 이 부여를 백제가 공격하여 쇠퇴하였다는 것 등은 별도의 입장 표명이 필요한 부분이며,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는 문제들입니다. 여기서는 당장 언급을 하지는 않으며 이 시론이 끝날 즈음에 전체를 돌아보는 맥락에서 한번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위 인용문④가 말하는 시기입니다. 전연의 부여침공으로 부여왕 현(玄)과 부여인 5만여 구를 포로로 한 것은 346년 1월의 일이며, 전연의 기실참군(記室參軍) 봉유(封裕)가 인용문①을 말한 것은 345년 1월의 일이므로, 말하자면 봉유의 언급 속에 들어있는 백제(대륙백제) 인질들과 필자가 보고자하는 부여②의 패망시기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모용황의 전연만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부여, 즉 부여②의 경우, 346년 1월의 기록 이전에 또 하나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용외(慕容廆)가 유성(현 조양)을 중심으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는 그 첫 해에 해당하는 285년에 이미 한 번 침입을 받아 멸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 기록이 있습니다.
⑤冬,十二月,是岁,慕容删为其下所杀,部众复迎涉归子廆而立之。涉归与宇文部素有隙,廆请讨之,朝廷弗许。廆怒,入寇辽西,杀略甚众。帝遣幽州军讨廆,战于肥如,廆众大败。自是每岁犯边,又东击扶馀,扶馀王依虑自杀;子弟走保沃沮。廆夷其国城,驱万馀人而归.(자치통감 券第81 世祖武皇帝中太康六年)
겨울 12월, 이 때에 모용산(慕容删)이 그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부중은 모용섭귀의 아들 모용외(慕容廆)을 다시 맞아 우두머리로 하였다. 섭귀는 우문부의 소(素)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모용외는 이를 토벌토록 청하였다. (서진) 조정에서 이를 허락하지 않자, 모용외가 노하여 요서에 들어와 침략하여 살략함이 심하였다. 황제는 유주군을 보내어 모용외를 토벌토록 하여, 비여(肥如)에서 일전을 벌여, 외의 무리가 대패하였다. 이로부터 매해 변경을 침범하였다. 또한 동쪽으로 부여를 쳐서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하고 그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몸을 보전하였다. 모용외는 그 국성에 들어가 만여 인을 빼앗아 돌아왔다.
비록 봉유(封裕)가 간언하는 345년 1월의 시점에서 본다면 인용문⑤의 경우는 285년 12월의 일로 시간적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때 부여는 그 왕이 자살하고 자제들이 달아났다가 서진 무제(武帝)의 도움으로 다음해 겨우 환복구국(還復舊國)하게 됩니다. 그러나 “爾後每爲廆掠其種人,賣於中國․ 帝愍之,又發詔以官物贖還,下司、冀二州,禁市夫餘之口(晉書/列傳/卷九十七列傳第六十七/四夷/東夷/夫餘國)”라고 하여, 이후 매번 모용외는 부여인들을 노략하여 중국에다 팔게 되고, 이를 불쌍히 여긴 서진의 무제는 다시 조서를 내어 관물로 이들을 사들여 환속시켜주는 한편으로 사주·익주에 명령을 내려 부여사람들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부여는 말하자면 국가가 거의 소멸될 운명에 처했다가 기사회생하지만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모용 일족들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결국 346년 전연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리해 놓고 본다면, 인용문①에 등장하는 백제를 백제로 보지 않고 부여②로 대체시키면 당시의 정세와 잘 부합되게 됩니다. 즉, 봉유의 말 중에 “고구려·부여 및 우문(宇文)·단부(段部)의 사람들이 끌려와 지금 호가 10만이나 도성에 몰려 좁을 지경이니 장차 국가에 깊은 해가 될까 두렵습니다.”로 하여, 백제를 부여로 대체시켜 놓고 보면 역사적 사실에 어긋남이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모용황의 기실참군(記室參軍) 봉유(封裕)는 자신의 말 중에서 부여로 표현해야 할 곳을 백제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록된 문장으로만 본다면 봉유(封裕)는 부여를 백제로 파악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대륙백제=부여②’로 단정하기에는 여전히 의문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또한 이때에는 어째서 사서상에 대륙백제를 지칭하여 백제라고 정확히 표기할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 대륙백제에 회의를 표하는 학자들이 기본적으로 던지는 의문의 하나입니다. 게다가 3~4세기 중국측 문헌에 등장하는 부여를 원래의 부여 즉, 부여①로 볼 것이 아니라 새로운 부여 즉, 부여②로 판단해야 할 구체적인 정황도 아직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때의 부여 왕성의 위치 등 지명비정과 커다란 연관성이 있으므로 나중에 한꺼번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346년 1월, 전연의 침공에 의해 부여왕 현(玄)과 부여인 5만여 구가 포로로 끌려간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알아볼 것은 이 직후의 상황입니다. 모용황은 “皝以玄为镇军将军,妻以女.(자치통감 권제97 显宗成皇帝下永和二年)”라고 하여 부여왕 현(玄)을 진군장군(또는 진동장군)으로 하고 자신의 딸로 그의 아내를 삼았다고 했습니다. 만일 부여왕 현(玄)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 역시 적당한 관작을 수여받았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은 가정이기는 하지만, 만일 이 부여②가 대륙백제였다면, 그래서 모용황의 침입에 의해 국가가 없어지고 왕과 구민이 대거 사지로 끌려갈 상황이 되었을 때, 남은 무리들의 선택입니다. 정작 갈 곳이 없다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 고향에 눌러 앉을 수도 있겠지만, 여건이 허락되고 자신들을 받아들여 줄 형제국이 어딘가에 있다면 당연히 그리로 갔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대륙백제의 경우, 항상 긴장관계에 놓여 있었을 고구려보다는 한반도 한강 유역의 온조왕의 백제가 그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현 학계에는, 부여족의 일파가 4세기 중엽 경에 남하하여 근초고왕대에 백제가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는 정복왕조설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4세기 전반 또는 중엽에 부여족의 이동에 따른 한반도 백제국의 성립’과 같은 견해는 사실 몇몇 일인학자들에 의해 일제시대 이래 계속 제기되어 온 가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반 견해는 필자의 견해와는 몇 가지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무도 이를 부여②, 즉 대륙백제와는 연결짓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 이동의 시기도 346년의 전연의 부여 침공을 그 계기로 파악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보다 조금 이른 시기인 343년 정도로 추정하는데, 거기에 대한 입론의 근거라는 것도 4세기대 동아시아의 급격한 정치질서의 개편, 그리고 급기야는 부여족의 남하 정도로 설명을 하고 있어 아직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동해 온 대륙의 백제가 한반도의 백제를 정복하였다는 정복국가론을 내세우고 있다는 점 등에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346년 전연의 부여침공을 계기로 본다면, 결코 이동해 온 대륙백제(부여②)가 한반도의 백제를 정복하였다는 정복국가론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전연에 의해 패배를 겪은 부여②의 잔여인들이 한반도의 백제로 건너와 이에 흡수되어 한반도의 백제를 중심으로 재편된 백제가 질적으로 한단계 도약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지금 상론을 할 단계가 아니므로 추후 다시금 재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좌충우돌하던 모용씨 정권도 내부 분열을 거쳐, 370년에 이르면 전진(前秦)의 부견(苻堅) 군대에 의해 수도 업성(鄴城)이 함락되고 모용위(慕容暐)가 포로가 됨으로써 멸망에 이릅니다. 그런데 부견(苻堅)의 군대가 업성(鄴城)에 이르렀을 때, 전연의 내부에서 부견 군대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⑥十一月,戊寅,燕散骑侍郎馀蔚帅扶馀、高句丽及上党质子五百馀人,夜,开鄴北门,纳秦兵,燕主暐與上庸王评、乐安王臧、定襄王淵、左卫将军孟高、殿中将军艾朗等奔龙城. (胡三省 : 馀蔚, 扶馀王子, 故陰率諸質子開門以納秦兵)(자치통감 권제102, 海西公下 太和五年)
11월 무인일, 전연의 산기시랑(散骑侍郎) 여울(馀蔚)이 부여·고구려·상당(上黨)의 질자 5백여 인을 거느리고 밤에 업성의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 군대를 맞아들였다. 연왕 모용위(慕容暐)는 상용왕(上庸王) 평(评), 낙안왕(乐安王) 장(臧), 정양왕(定襄王) 연(淵), 좌위장군(左卫将军) 맹고(孟高), 전중장군(殿中将军) 애랑(艾朗) 등과 함께 용성(龍城)으로 달아났다.
(胡三省 주석 : 여울(馀蔚)은 부여(扶馀)의 왕자다. 그런 까닭에 은밀히 여러 인질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어 전진 병사들을 맞아들인 것이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여울(馀蔚)은 호삼성(胡三省)의 주석을 참고하면, 부여의 왕자이면서 동시에 전연의 산기시랑(散骑侍郎)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가능성보다도 346년에 멸망한 부여왕 현(玄)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부여왕 현(玄)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그 역시 적당한 관작을 수여받았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가 여울(馀蔚)이며 전연으로부터 산기시랑(散骑侍郎)이라는 직책으로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연에 의해 부여가 멸망한 상황에서 여러 회유책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전연이 부여(필자의 관점에 의하면 부여②)의 멸망을 이끈 원수에 해당하므로 그런 상황에서 전진(前秦)의 군대가 업성을 공격해 왔을 때, 같은 처지에 있었을 고구려와 상당(上黨)의 질자(質子)들을 모아 전연에 반기를 드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로 보여집니다. 그는 이후 384년에 이르면, 후연의 등장에 힘입어 모용수를 도우면서 형양태수를 거쳐 정동장군 통부좌사마(统府左司马), 부여왕(扶馀王)으로 봉해집니다. 이렇게 하여 346년, 전연에 의해 멸망당했던 부여②는 멸망 후 끌려간 부여왕 현(玄)의 아들 여울(馀蔚)에 의해 일시 부활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간헐적으로 드러난 여울(馀蔚)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정리해보면, 여울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일단은 전진의 부견에게 부회하였다가 383년 비수의 전투로 부견(苻堅)이 실패한 후, 원래 부견에게 멸망당했던 각국 및 각 종족의 우두머리들이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다시 세울 때에 그 또한 후연의 모용수의 건국에 일조하면서 그로부터 부여왕에 봉해지면서 재건국의 희망을 갖게 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후 여울은 392년에 우광록대부(右光禄大夫)에서 좌부사(左仆射)로 전전한 내용을 끝으로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부여왕 현(玄)의 아들로 추정되는 여울(馀蔚)의 성(姓)에 대해서입니다.
부여①과 부여②의 분리, 즉 이 둘을 별개의 실체로 전제를 한다면, 원래의 부여 즉 부여①의 왕의 성은 기록에는 해씨(解氏)로 나오며, 고구려에 의해 멸망한 후에 부여왕의 종제가 사여받은 낙씨(絡氏) 이외에 더 이상의 기록은 없습니다. 한편 백제의 경우 왕의 성이 여(餘) 또는 부여(夫餘)라는 것은 더 이상의 언급이 필요없는 사항입니다. 여기서 모용수에 의해 부여왕에 봉해지는 여울(馀蔚)의 성(姓)에 대해서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삼국사기나 중국사서들을 통해 한반도 백제의 왕성으로 여(馀)가 등장하는 경우는 바로 이 무렵에 해당하는 372년의 백제왕(근초고왕) 여구(餘句) 기록이 처음입니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346~375년간 재위에 있었던 왕입니다. 근초고왕이 즉위하였던 346년은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부여② 즉 필자의 관점에 의하면 대륙백제가 전연의 부여침공으로 왕 현(玄)과 부여인 5만여 구가 포로로 된 346년의 시점과 일치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근초고왕의 전왕인 계왕(契王)은 타고난 자질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기사(騎射)를 잘 하였다고 했는데, 겨우 재위 3년만인 346년 9월에 아무런 부가적인 설명도 없이 서거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후 즉위한 근초고왕은 백제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대륙에서 부여②의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285년)하고, 그 아들 의라(依羅)가 왕권을 계승(286년)하는 시기에, 백제의 책계왕(責稽王)(286~298년)이 즉위하는 시기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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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백제의 실체 5
대륙에서 부여②의 부여왕 의려(依慮)가 자살(285년)하고, 그 아들 의라(依羅)가 왕권을 계승(286년)하는 시기에, 백제의 책계왕(責稽王)(286~298년)이 즉위하고 있습니다만, 이 무렵 삼국사기에 주목할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①책계왕 원년(286년)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대방의 왕녀 보과를 취하여 부인을 삼았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르기를. “대방은 우리의 구생(舅甥)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삼국사기 백제본기)
위 인용문을 통하여 몇 가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우선 한반도 한강유역의 백제가 대방과 결혼동맹을 맺고 있었으며, 그로인해 고구려가 대방을 공격하자, 백제가 이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상황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백제는 대방에 자리한 세력과 긴밀한 협조 이상의 관계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위 기록이 나오는 3세기말의 경우는 낙랑과 대방을 각각 한반도의 평양과 그 남쪽으로 상정하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고구려가 적대적인 낙랑을 넘어 그 남쪽의 대방을 쳤다는 기록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까지의 통설에 의하면 위 인용문의 기록은 후대의 사실을 부회하였거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낙랑, 대방의 위치와 관련하여 이해하기 곤란한 기록이 몇 군데 더 나오고 있는데, 그 하나가 304년 2월에 백제 분서왕이 낙랑의 서쪽 현을 공취하였다는 내용입니다.
②분서왕 7년(304년) 봄 2월, 낙랑의 서현(西縣)을 기습하여 빼앗았다. 겨울 10월, 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현 평양의 낙랑을 전제로 하는 한, 위 기록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낙랑의 서쪽현을 백제가 빼앗았다는데, 대방을 넘어 백제가 낙랑의 서쪽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차지하였다는 것이 그렇게 자연스러워 보이지는 않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앞장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 다음의 문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③처음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주하였으나, 백제가 침범하여 부락이 쇠산하여져,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방책을 설치하지는 못하였다.(자치통감 권제97 显宗成皇帝下 永和二年)
여기서 부여의 초기 거주지로 등장하는 녹산(鹿山)의 경우는, 위 인용문의 기록 외에는 달리 언급되는 기록이 없어 오직 추정에 의할 뿐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부여(부여①)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으므로 현재는 농안 지역의 동쪽 길림시 일원에 비정하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그런데 이 부여를 백제가 침범하였다는 것에 대한 현 학계의 견해를 일별하면, 첫째는 대다수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으로, 여기에 등장하는 백제를 고구려의 오기로 보는 것이고, 다른 일각의 입장은 이 백제를 대륙백제로 보아 고구려를 우회하여 부여를 공격하였다는 것으로 보는 소수 의견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관건은 부여의 초기 거주지로 나오는 녹산(鹿山)의 위치에 대한 것입니다. 인용문 외에는 달리 기록이 나오는 곳이 없어 추정에 의할 뿐이라고 했는데, 이를 과연 길림 또는 그 인근 어디로 비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다음으로는 이 부여를 공격한 주체가 하필 백제로 나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의 통설에 입각한다면 즉, 이때의 부여를 부여②로 보지 않고 부여①로만 판단하는 것이 옳다면, 이를 대륙백제로 보기보다는 고구려의 오기로 보는 다수 견해가 더 옳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위 기록이 등장하는 시점은 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앞서 언급한대로 346년에 모용황의 군대가 부여②를 공격하는 시점에서 과거를 거슬러 부여②의 정황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백제에 쫓긴 부여②는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였지만(西徙近燕), 모용황의 군대를 맞는 시점에서는 아직 방책도 설치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또한 이 부여②가 모용일족에게 그렇게 쉽게 무너진 이유로는 백제로 기록된 ‘실체’로부터 그 전에 이미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옮겨가지 않을 수밖에 없는 정황이 가장 큰 요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의 부여가 어떠한 까닭이 있었던, ‘백제’로 표현되는 세력으로부터 실제적인 공격을 받아 세력이 현저히 약화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백제가 부여②를 공격한 시점은 이 346년을 거슬러 그렇게 먼 과거의 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한편 현 통설에 입각한다면 4세기 초에 고구려가 부여①을 공격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가 하는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세기 초는 고구려에서는 미천왕(300~331년)과 고국원왕(331~371년)이 재위에 있을 시기인데, 고국원왕 재위 중에는 346년(고국원왕 16년)까지 전연의 모용황 군대와 싸워 국성이 함락당하는 등 국난의 위기에 처하여 부여①을 공격할 여력은 없었다고 하겠습니다. 한편 미천왕 재위 중에는 현도군(미천왕 3년, 16년), 요동 서안평(미천왕 12년), 낙랑군(미천왕 14년), 대방군(미천왕 15년) 등을 고구려가 공격하고 있으며, 한편으론 역으로 모용외의 공격을 받기도 하여 해를 거듭하여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이와같은 정황을 부분적으로 전해주는 중요한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④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郡事.(자치통감 권88 晋紀10 建興원년 4월조)
(313년) 요동의 장통(張統)이 낙랑·대방 2군에 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여 해를 넘기면서도 해결되지 못하였다. 낙랑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복하여,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으로 하여금 (낙랑) 태수를 삼고 왕준은 참군사(參郡事)로 삼았다.
위 기록에 나오는 장통(張統)이란 인물은 이 시기, 자치통감의 기록 외에는 그의 출신이나 배경 등에 대해서는 달리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張統이란 이름이 비슷한 시기에 중국사서들에 산견되기는 하지만, 같은 인물로 볼 정황은 없습니다) 만약 그가 서진(西晉) 조정으로부터 임명된 장군이나 관리였다면 그 장군호나 관작이 기록되었을 것이지만, 위 인용문에는 그러한 정황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遼東張統’이란 문구로 미루어보아 그가 요동인이었거나 아니면 요동지역에 오래 거주하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다스리던 호족세력 정도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이 장통이란 인물이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서로 공방전을 벌여, 해를 넘기면서도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낙랑 왕준의 요청으로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귀부하였다는 내용입니다. 모용외는 이들을 위해 새로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는 한편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는 것인데, 이 기사가 313년 4월의 상황이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미천왕의 낙랑군 침입 기사가 같은 해 10월의 상황임을 고려한다면, 4월에 장통이 백성 천여 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로 갔다는 것은 이때 미천왕이 장통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고구려의 10월 낙랑 침입 기사는 통설에서 말하는 평양 땅 낙랑군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가능한 해석은 새로이 설치된 요서지역의 낙랑군과의 전투로 보거나, 아니면 장통 일행이 옮겨간 다음에 구 낙랑군 지역을 차지한 일단의 새로운 세력들과의 전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얼핏보면 전자의 경우만 가능해보이지만, 실제 국면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위 인용문의 정황으로 되돌아가서, 미천왕과 장통의 싸움이 해를 이어 계속되었다는 것은 이 싸움이 그 전해인 31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는 것이고, 또한 이 전후시기에 미천왕은 삼국사기, 북사, 양서 기록 등을 통해 볼 때, 요동지역에서 주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고구려가 힘의 우위에 있었던 것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⑤晉永嘉之亂, 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 位宮玄孫乙弗利頻寇遼東, 廆不能制.(北史 卷九十四 列傳 第八十二 高麗/梁書 列傳 卷五十四 高句驪)
서진 영가의 난이 있었을 때, 선비 모용외는 창려 대극성에 거하였다. 원제가 평주자사를 제수하였지만 (받지 않았다) 위궁 현손 을불리가 자주 요동을 공격하였으나 모용외는 이를 능히 제어하지 못하였다.
결국 미천왕은 한반도가 아니라, 고구려 경계 서쪽의 요동지역(낙랑군과 대방군)에서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그 지역의 장통으로 대별되는 호족세력과 전투를 벌여 힘의 우위를 확보하고, 결과적으로 장통 일행은 쫓겨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장통 일행을 받아들인 모용외는 새로이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음으로써 이들 세력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게 됩니다. 이 시기 미천왕의 우세로 인해 그 이후로도 요동지역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확립했다고 속단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이 무렵을 전후로 하여 고구려가 요동을 세력권 범위내에 두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때 모용외의 거주지가 극성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모용외가 새로 설치한 낙랑군은 그의 영향력이 미치는 요서지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미천왕 시기의 고구려 또한 해를 거듭하여 요동의 지배권 확립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부여①이 당시 고구려의 지배권을 벗어나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새로운 전쟁을 벌일 여력은 없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관련 사서에 이 시기 고구려가 부여①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점도 위 인용문③의 부여를 부여①로 보거나 또는 백제를 고구려로 대체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맥락에서 위 인용문③에 나오는 부여를 필자의 관점에서 부여② 즉 대륙백제로 본다면, 이 부여②를 공격한 주체를 백제 즉, 표현 그대로 한반도의 백제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음 장에 나올 예정이지만 논리 전개의 편의상 위치비정과 관련한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대륙백제의 초기 거주지는 영역의 대소에 있어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었겠지만, 현 요동만의 대방지역과 그 인근(북쪽)의 낙랑지역을 일부 포괄한 곳으로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4세기 초의 동북아 정세는 고구려 미천왕이 당시 요동으로 통칭되는 낙랑과 대방지역을 공격하고 있으므로, 당시 정세에 따른다면 인용문③에서의 부여는 부여②로 보아서, 이 부여② 즉, 대륙백제를 쫓아내는 주체를 백제가 아니라 기존의 통설과는 다른 입장에서 고구려로 대체시킬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지를 잠시 유보하고 앞서의 인용문②에 나오는 304년 2월의 분서왕에 의한 낙랑 침공 기록을 다시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인용한 문장을 다시 보면, 분서왕 7년(304년) 2월, (한반도의) 백제는 낙랑의 서현(西縣)을 기습하여 빼앗고, 10월에는 왕이 오히려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고 있습니다. 낙랑태수와 백제왕이 공방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삼 주목할 것이 분서왕에게 자객을 보내는 낙랑태수의 존재입니다. 304년을 전후로 하여 서진 조정이나 기타 지방 할거정권에서 임명한 낙랑태수의 존재는 중국사서상으로는 달리 알려진 인물이 없습니다. 인용문④에 나오는 313년의 ‘낙랑왕준(樂浪王遵)’의 존재도 의문이 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번역하기로는 ‘낙랑(인) 왕준’으로 하여 문맥상 지역 할거세력으로 장통이 그 중심에 선 것으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그 지위가 반대일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즉, ‘낙랑왕준’을 그 수장으로, 전쟁의 일선에 선 장수를 장통으로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 인용문④를 다시 살펴보면, 실제 고구려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은 장통으로 나타나지만, 백성 천여 가를 인솔하여 모용외에게 투항하고 있는 주체는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라고 하여 ‘낙랑왕준’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즉, 낙랑지역 백성 천여 가의 인솔 주체는 ‘장통’이 아니라 ‘낙랑왕준’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용문상으로는 마치 장통이 낙랑지역의 중심인물인 것 같은 서술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차 정리를 해보면, 304년의 낙랑태수는 백제의 분서왕에게 공격을 당하여 서현을 빼앗긴 다음에는 자객을 보내어 왕을 시해하고 있습니다. 313년의 낙랑왕준은 고구려의 공격을 이기지 못하고 (직책을 알 수 없는) 장통을 설득하여 모용외에게로 함께 귀부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용문③의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西徙近燕)’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용문③에서는 부여②가 백제에 의해 ‘西徙近燕’하였는데, 인용문④에서는 장통(張統)과 낙랑왕준(樂浪王遵)이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인해 ‘西徙近燕’하고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인용문③이 346년에서 멀지 않은 과거의 어느 시점이며, 인용문④에서는 313년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304년에는 백제의 낙랑 공격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만으로는 인용문③의 백제를 한반도의 백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으며, 인용문④를 근거로 한다면 부여②를 이동시킨 주체를 고구려로 대체시킬 근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비슷한 시기에 ‘西徙近燕’한 이 둘을 같은 실체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관건은 여기서 주장하는 부여②의 존재가 과연 요동지역 즉, 낙랑과 대방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로 일단 귀착됩니다. 만일 그렇다면 인용문③에 나오는 부여②와 인용문④의 낙랑왕준 일행은 그 시기나 ‘西徙近燕’한 정황으로 보아 같은 실체로 판단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으로 주목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구려의 낙랑 공격이 있었던 313년 다음해의 일입니다.
⑥미천왕 15년(314년) 9월에 남쪽의 대방군을 침공하였다.(삼국사기 고구려본기)
313년 4월에 낙랑군이 견디지 못하고 서천하여 모용외에 의해 다시 설치된 다음에 구 낙랑군 지역은 고구려의 수중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 낙랑군의 남쪽지역에 있었다는 대방군 지역 또한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 들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익년인 314년 9월에 고구려는 ‘남쪽의 대방군’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쪽’이라고 한 것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단, 낙랑군 지역 세력이 옮겨가고 그 지역이 고구려 수중에 들어갔다면, 그 남쪽의 대방군 또한 고구려 세력권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다는 것을 위 인용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 기록의 대방군에는 과연 어떤 세력이 있었길래 고구려가 다시 이 지역을 공격하고 있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새삼 의문을 다시 제기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앞서 313년 10월에 있었던 고구려의 낙랑 침공 기록입니다. 이때 고구려가 공격한 지역이 313년 4월에 모용외 근거 지역으로 이치된 낙랑군인지 아니면 이전의 낙랑군지역인지를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단은 옮겨간 낙랑군지역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였습니다만, 이 314년 9월의 기록과 비교한다면 그리 상황이 간단하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와 주된 전쟁을 벌였던 장통 일행이 옮겨간 다음에 도대체 어떠한 세력이 있었길래 고구려가 다시 구 낙랑군 남쪽의 대방군지역을 공격하지 않으면 안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는 당장에는 추론을 진행할 별다른 단서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왕을 거쳐 근초고왕이 즉위한 다음에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기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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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백제의 실체 6
앞장에서 후연의 모용수 건국에 일조하면서 그로부터 부여왕에 봉해진 여울(馀蔚)의 흔적을 쫓아보았지만, 392년에 좌부사(左仆射) 기록을 끝으로 더 이상 기록을 찾지 못하는 것으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20년을 거슬러 372년에는 백제왕 여구(餘句)가 동진에 의해 진동장군 겸 낙랑태수로 책봉되고 있습니다.
백제왕 여구(餘句)는 근초고왕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중국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여씨성의 백제왕입니다. 그런 그가 백제왕이면서 동시에 낙랑태수를 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진 정권에 의해 백제왕이 낙랑지역에 대한 지배권 또는 연고권을 인정받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백제왕이 어떻게 하여 낙랑지역에 대한 일정한 권리를 동진 조정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결론을 내리기엔 조심스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314년, 고구려에 의한 대방 공격에서 알려지지 않은 대방세력의 실체는 비록 기록에 의한 시간적인 격차가 있기는 하지만 372년에 백제왕이 낙랑태수로 제수되고 있는 것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만일 당시의 실체적 진실에 다가선 것이라면, 분서왕의 낙랑 침공은 한성백제가 대륙백제와의 통합을 시도한 뚜렷한 흔적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그 흔적을 달리 찾을 길 없는 녹산(鹿山)지역도 인용된 문장 전체가 부여②에 대한 기록임을 감안한다면 그에 따른 새로운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지금까지의 논거에 의하여 다시 정리를 해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책계왕 원년(286년)에 한반도 백제와 대방(낙랑과 함께, 필자에 의한 해석으로는 대륙백제지역)과의 결혼동맹으로부터 드러나는 연합세력이 분서왕 7년(304년), 한반도 백제의 낙랑 서현 공격으로 인하여 분열되면서 대륙백제지역을 지배하려는 한반도 백제의 의욕이 드러나고, 분서왕이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후 대륙백제지역은 인접한 고구려에 의해 공격을 받기도 하지만, 실제적인 ‘西徙近燕’의 원인은 자치통감 永和二年(346년)의 기록에 의하면 한반도 백제의 침공에 의한 것으로 결국 모용외 세력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이후 구 낙랑과 대방지역을 차지한 한반도 백제 세력에 대하여 고구려가 다시 전쟁을 벌이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권 범위에 들지 못하였는데, 이를 말해주는 것으로 근초고왕 27년(372년)에 백제가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이면서 동시에 낙랑태수로 책봉되는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이후 대륙백제에 대한 기존의 문헌자료들은 추후 설명합니다)
한편 한반도 백제에 의해 ‘西徙近燕’한 주체인 ‘낙랑왕준’의 대륙백제 세력은 이후 모용일족으로부터 적절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지내다가 모종의 원인에 의해 오히려 ‘반기’를 드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한 정황을 짐작케 해주는 것이, 장통은 이후 모용외에 충실한 장군으로 등장하여 고구려 미천왕 20년조에는 고구려의 하성(河城)을 공격하는 등 충성을 보이고 있는 반면에, 왕준(王遵)은 위 인용문④의 기록상의 표현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중심인물로 부각되지도 않으며, 앞장에서 설명한 것처럼 33년이 지난 346년에는 왕준을 이은 부여왕‘현(玄)’이 모용황 군대의 습격을 받아 멸망하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일단 이러한 ‘반기’에 대하여 ‘모종의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하였습니다만, 313년에 일천여 가로 대별되는 형편없는 세력으로 쫓기듯이 모용외에게 귀부한 낙랑왕준의 세력은 346년, 멸망할 무렵에는 무려 5만여 구의 포로가 잡혀가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짧은 기간 동안에 상당한 세력으로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력의 확장을 가능케 해주는 일련의 정황들이 있는데, 우선 첫 번째로 들 것은 익히 알려진 다음의 문장입니다.
위 인용문으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백제가 요서군과 진평군을 점령하여 백제군을 둔 시점이 동진 통치시기인데, 이 기록이 晉太元(376~396년)의 앞에 나열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梁職貢圖 百濟國使條]에서는 ‘晉末駒驪略有遼東 樂浪赤有遼西晉平縣’에서 ‘晉末’이라고 하여 4세기 중반 이후가 다 이에 해당되는 애매한 표현을 쓰고 있지만, 어쨌든 4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점에서는 백제가 대륙백제를 경영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로써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짧은 기간동안에 ‘낙랑왕준’의 형편없던 세력이 일어서서 귀부해 간 모용씨에게 반기를 들게 되고 결국 모용황 군대의 침공을 받게 된 사정을 짐작하게 해 줍니다. 즉, 낙랑과 대방을 점거하여 고구려와 대적하던 한반도의 백제가 이 옮겨간 낙랑왕준의 세력까지 통합하여 경영하였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한창 세력을 뻗치던 전연의 군대를 당하지 못하고 대륙백제의 전부 또는 일부가 쓰라린 패배를 겪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계왕(契王)의 2년 남짓한 재위기간과 근초고왕(近肖古王)의 346년 즉위로 일부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는 판단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이야기를 돌려, 하나 더 언급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313년의 왕준(王遵)이란 인물과 동명의 인물이 그 이전 시기에 두 명이 더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AD 30년에 후한 광무제가 자칭 태수인 토착민 왕조(王調)를 진압하기 위해 보냈다는 낙랑태수의 이름이 왕준(王遵)이었으며, 백제 고이왕 13년(246년) 8월에 위의 유주자사 관구검과 낙랑태수 유무와 삭방태수(대방태수) 왕준(王遵)이 합동하여 고구려를 칠 때에 등장하는 왕준(王遵)(삼국사기 백제본기, 삼국지 예전에는 대방태수 궁준(弓遵)으로 나옴)이 그 인물들입니다. 한 사람은 낙랑태수로 나오며, 또 한 사람은 대방태수로 나오고 있습니다. 역시 대륙백제와 관련하여 대단히 중요한 사항으로 우연히 이름이 같다는 것 이상으로 그 정황을 둘러싸고 짚어볼 내용이 많다고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몇 개의 글이 진행된 다음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근초고왕의 이후 정세를 다시 살펴보면, 근초고왕이 서거하고 수(須)라는 이름을 가진 근구수왕이 재위한 다음,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는 384년에 공교롭게도 부여왕에 봉해지는 여울(馀蔚)은 이후 부여왕이라는 지위 대신에 후연에서 우광록대부를 거쳐 392년에 좌부사(左仆射)로 지위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구(餘句) 즉, 근초고왕이 낙랑태수를 겸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의 백제왕이 대륙백제 지역(낙랑 또는 대방)에까지 영유권 또는 연고권을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인데, 같은 시기에 등장하는 여울과 여구라는 이름의 상관관계와 지금까지의 추론에 의해 볼 때, 여울은 부여② 즉, 대륙백제(낙랑과 대방지역)의 부여왕이었고, 여구는 낙랑태수로 각각 그 시기를 달리하면서 등장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같은 시기에 생존하였고 같은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가진 두 사람이지만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은 시기를 달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기는 하지만, 여구는 여울이 그러하듯이 대륙백제 출신의 왕족, 가능하게는 왕자의 신분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추론의 근거는 여울이 왕자로 있다가 후연에 의해 부여왕에 봉해지는 기간, 그 사이에 여구라는 또 하나의 인물이 부여②가 멸망하는 그 시기에 백제왕으로 재위에 오르면서 동진에 의해 낙랑태수로 봉해지는 것을 과연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즉 여구(餘句)는 여울이 부여의 왕자이듯이, 그 또한 부여② 지역에 있었던 지배세력, 또는 왕자 신분으로 있다가 모종의 과정을 거쳐 한반도의 백제와 세력을 합하여 통합된 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설령 그렇지가 않고 여구가 한반도의 백제왕으로 재위에 올랐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상황에 있어서는 크게 달라질 것은 없어 보입니다. 즉, 근초고왕은 한반도와 대륙을 통괄하는 백제왕으로 있었을 가능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면, 그의 사후에 이 통합된 세력은 다시 분열하여 별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이유로는 근초고왕의 다음 왕인 근구수왕의 이름이 여수(餘須)가 아니라, 수(須)로만 드러나며(한반도계), 다시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는 같은 해에 대륙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울이 별도로 모용수에 의해 부여왕에 임명되고 있으며, 같은 여씨계 부여세력인 건절장군 여암(餘巖)이 이때에(385년), 모용수에 반란을 일으켜 독립정권을 수립했다가 진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③(385년) 建節將軍徐巖叛于武邑,驅掠四千餘人,北走幽州.垂馳敕其將平規曰:「但固守勿戰,比破丁零,吾當自討之.」規違命距戰,為巖所敗.巖乘勝入薊,掠千餘戶而去,所過寇暴,遂據令支...慕容農攻克令支,斬徐巖兄弟。進伐高句驪,復遼東、玄菟二郡,還屯龍城。(晉書/載記/卷一百二十三載記第二十三/慕容垂)
建節將軍徐巖叛于武邑 通鑑一0六「徐」作「餘」․按:燕有餘姓,爲扶餘人․ 慕容暐載記有「徐蔚」,通鑑作「餘蔚」․參卷一一一校記.(晉書/載記/卷一百二十三載記第二十三 주석8)
(주석에서는 진서에 등장하는 徐蔚이 餘蔚의 오기이듯이 徐巖 또한 餘巖의 오기로 본다는 내용임)
이와같은 정황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와 관련한 기록입니다.
④太元十一年(386년) 夏四月,以百濟王世子餘暉為使持節、都督、鎮東將軍、百濟王。代王拓拔珪始改稱魏.(晉書/紀/卷九 帝紀第九/孝武帝曜)
여름 4월,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를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으로 하였다. 대왕 탁발규(拓拔珪)가 국호를 위(魏)로 개칭하였다.
백제 왕세자 여휘(餘暉)가 동진에 의해 사지절 도독 진동장군 백제왕에 봉해지는 386년은 한반도 백제의 경우, 진사왕이 그 전해인 385년에 즉위하여 재위 2년째 되는 해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진사왕이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 외에는 진사왕의 이름 등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근구수왕의 둘째아들이며, 선왕인 침류왕의 아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은 태자로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침류왕이 돌아가자 태자가 나이가 어리므로 숙부 진사가 즉위하였다고 했습니다. 진사왕은 세자(태자) 신분에서 즉위한 것이 아니라, 전왕의 동생으로 있다가 위 인용문보다 한 해 전인 385년에, 일본서기 전거에 의하면 왕위를 찬탈하여 즉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서(晉書)의 백제왕세자 여휘(餘暉)에 대한 설명은 삼국사기에 보이는 진사왕에 대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습니다. 진서(晉書)에서는 백제왕이 아니라 백제왕세자 여휘를 백제왕으로 책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백제는 근초고왕 사후 정세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일시 통합이 된 한반도와 대륙의 백제가 다시 분열하여 각각 따로 왕이 서는 형세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 당시의 국제정세는 후연의 모용수가 이해(386년)에 황제위에 오르고, 대왕(代王) 탁발규(拓拔珪)가 국호를 위(魏)로 고치면서 다시 새로운 긴장상태가 지속되던 시기였습니다. 다만 하나 달라진 것은 그동안 부여를 표방하며, 한반도와는 별도의 세력으로 있었던 대륙백제가 이제는 한반도에 자리한 백제와 그 이름을 하나로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대륙백제의 계속된 위기와 그로부터 책계왕(실제로는 그 이전부터임. 추후 분석함.) 이후 전개된 양자간의 교섭과 반목, 견제 그리고 국지전 및 통합의 결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름은 ‘백제’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독자적인 건국 이래 완전히 다른 지역에서 각각 오랜기간 동안 별도로 지내온 양 세력간의 통합은 그렇게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384년에 한반도에서는 침류왕이 재위에 오르고, 대륙에서는 여울이 간난신고 끝에 모용수에 협력하여 부여왕에 봉해지면서 다시 갈라진 양 세력은, 한반도에서는 1년 후 진사왕이 재위에 오르고, 다시 1년 후, 대륙에서는 여울이 자신의 지위를 여휘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계속 모용수 정권에서 관직에 있는 것으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분리된 양 세력은 다시 합쳐졌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시기는 언제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살펴볼 것은 백제의 전지왕(405~420)의 이름인 여영(餘映)입니다. 중국 사서상으로는 여영(餘映)이라는 이름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한 전지왕의 재위기간뿐만 아니라, 다음 왕인 구이신왕(420~427)에까지 계속 백제왕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永初元年 七月(420년 7월), 景平二年(424년), 元嘉二年(425년)에도 백제왕의 이름으로 여영(餘映)이 산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위 인용문에 의하면 景平二年(424년)의 경우, 백제왕 여영(餘映)이 사신 장위(張威)를 보내어 공헌하고 있음으로, 이 사신의 입을 통해 송 조정에서는 백제 왕실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백제에서 구이신왕(420~427)이 재위 중임에도 불구하고 여영(餘映, 전지왕)이 사신을 보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뚜렷한 해석을 할 길이 없으므로 후일의 과제로 돌립니다. 4세기말 이후의 대륙백제에 대해서는 중국의 [梁書 百濟傳] 등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대륙백제설을 주창하는 학자들의 주된 논거로 되고 있으므로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며, 통시적인 관점에서 다시 이 시기로 넘어올 때에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했지만, 지나쳐온 대륙백제의 초기사 즉, 언제 대륙백제가 성립되었으며, 그 주체는 과연 누구이며, 그 위치는 과연 어디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앞서 잠깐 언급한대로 우리의 고대사 최대의 관심사항으로 있는 낙랑군 등 한사군의 위치문제를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 왕성의 위치, 패수의 위치 등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결코 한 번의 언급으로 끝나거나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므로 일단은 대륙백제와 관련된 사항들만 중점적으로 언급하는 선에서 그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대륙백제 초기사 서술에 들어감에 있어서 먼저 따져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한반도백제를 포함하여 백제의 출신 종족을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입니다. 우리의 고대사에 있어서 드러난 제종족들은 고구려로 대별되는 맥족, 부여 계통의 예족, 삼한의 한족 등이 있었습니다. (한반도) 백제가 스스로 그 근원을 부여에 두고 있는 것은 개로왕의 국서나 사비도읍기 시절에 국호를 남부여로 한 것 등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렇다고 하여 백제를 부여 계통의 예족으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의 주몽왕을 비롯한 초기 지배세력이 부여출신이며, 또한 도읍한 지역이 홀본 또는 졸본부여라고 하여 부여의 영역에 속하기는 하였지만, 그 종족을 맥족으로 보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의 비류왕과 온조왕은 주몽왕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주해온 건국의 주체세력들은 졸본(홀본)지역의 고구려 이탈세력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제의 지배세력 또한 고구려와 한가지로 맥족임을 분명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서들의 표현방식을 따른다면,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별종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종족적인 친연성은 예족의 부여①(원부여)보다는 맥족인 고구려에 훨씬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삼국사기에 분명히 기술되어 있는 백제 건국 관련 사실을 중국사서들에서는 과연 발견할 수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아울러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3세기 중엽경으로 보고 있는 필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백제의 건국 또한 그 무렵 직후가 될 것이므로 이러한 사실들까지 관련 문헌들에서 확인할 수는 없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요구사항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잘 알려진 다음의 문장을 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句驪一名貊.有別種,依小水為居,因名曰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高句驪)
고구려는 일명 맥(족)이다. 별종이 있는데 소수(小水)가에 의지하여 거주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좋은 활이 산출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②魏氏春秋曰:「遼東郡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驪別種因名之小水貊.」(後漢書/列傳/卷八十五東夷列傳第七十五/高句驪 주석1)
위씨춘추에 이르길, 요동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어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 별종은 이로 인하여 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였다.
③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為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三國志/魏書/卷三十魏書三十/東夷/高句麗)
또한 소수맥(小水貊)이 있다. 고구려가 나라를 일으켜 대수(大水)가에 거주하였다.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어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 별종들이 소수가에 의지하여 나라를 일으켰으니, 이로 인하여 이름을 소수맥이라 하였다. 호궁(好弓)이 산출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
위 인용문①, ②, ③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추론해낼 수가 있습니다. 우선 고구려가 대수(大水)가에서 건국할 때, 고구려의 별종이 있어 소수(小水)가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소수맥(小水貊)이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즉, 건국한 나라 이름이 소수맥(小水貊)인 것입니다. 그리고 문맥상 고구려의 건국과 소수맥의 건국이 시간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고구려의 건국과 동일선상에서 기술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 소수맥의 위치가 문맥상으로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이 소수맥이 거주하는 소수(小水)의 위치를 살펴보면, 서안평현 북쪽에 있으면서 남쪽으로 흐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수는 서안평현을 관류하거나 아니면 그 인근을 남쪽으로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안평현의 위치를 안다면 소수와 소수맥의 위치를 확정해낼 수가 있게 됩니다. 또 한 가지 의미를 둘만한 것은 고구려와 소수맥의 위치를 각각 대수(大水)와 소수(小水)라고 하여 특정한 강의 고유명으로는 볼 수가 없는 일반명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고구려는 큰 강가에, 소수맥은 그와 구분되는 작은 강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에서 고구려가 초기 건국하였다는 대수(大水)의 고유명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비류수(沸流水)이며 또한 졸본천은 그 지류이거나 같은 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소수맥이 자리 잡았다는 서안평현이나 소수(小水)는 결코 한반도 지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부분입니다.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은 한반도가 아니라 서안평이라는, 소수가 인근에 흐르는 요동지역 어딘가에서 건국한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부터 중요한 추론을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소수맥을 잠시 잊고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사 기억을 통째로 더듬어 보았을 때, 고구려의 별종이면서 즉, 맥족이면서 동시에 고구려의 건국과 비슷한 시기에 나라를 세운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백제입니다. 우리의 고대사 지식으로는 백제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중국 사서들을 통해 우리는 백제라는 이름 이외에 또 하나의 이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소수맥입니다. 소수맥의 건국처는 결코 한반도 땅이 될 수 없음을 이미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온조왕의 백제는 한반도 한강 유역에 건국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백제의 건국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으로 되돌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백제는 건국 시기에 주체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하나는 비류계이며, 다른 하나는 온조계 세력입니다. 온조왕의 백제는 이미 정설로 자리잡은 것처럼 한반도 한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비류왕은 미추홀(彌鄒忽)에 건국하였다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학계의 공론은 이 미추홀 위치를 인천으로 비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설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한반도 서해안 지역을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미추홀의 지명비정에 대한 이와 같은 현 통설에 입각한다면 위의 소수맥(小水貊)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추론에도 불구하고 그 실체가 여전히 미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미추홀을 현 인천 등 지역에 비정하는 것에 대한 현 학계의 구체적인 근거가 있는가를 살펴보면 실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미추홀의 지역 비정의 근거는 오직 삼국사기에 나오는 한 대목뿐입니다.
④...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와 보고는,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 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가 도읍한 지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은 오직 위 인용문 중에 나오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는 대목뿐입니다. 미추홀이 습기에다 소금기가 많은 땅이므로 학자들마다 바닷가를 ‘상상’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필자도 동의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온조왕이 터를 잡은 곳이 이견들이 많기는 하지만 현 하남 춘궁리를 비롯한 몇 곳에 비정되므로 미추홀 또한 온조왕의 왕성에서 그리 멀지 않았을 바닷가로 추정한 것이고, 그에 따라 나름대로는 ‘자연스러워보이는’ 인천에 비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통해서 본다고 하더라도 미추홀이 온조왕의 하남 위례성과 거리상 가깝다거나 멀다고 추론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관점에서 중국사서의 문장들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 인용문들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⑤-1,2,3을 통하여 백가(百家)로 대별되는 세력이 ‘바다’를 건너가서 이때부터 국호가 백제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온조왕 시대에 국호는 알려진 대로 ‘십제(十濟)’였습니다. 국호가 백제로 불리워지게 된 것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계 세력이 온조계로 와서 통합된 다음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들을 보면, ‘百家濟海’ 후에 백제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백제라는 국호가 등장하는 시기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비류세력이 온조세력으로 통합한 다음의 일이고, 중국사서들에 의한다면 ‘百家濟海’한 다음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중국사서들에 등장하는 ‘百家濟海’한 세력은 다름 아닌 비류계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류계 세력이 위 인용문에 뚜렷이 드러나는 것처럼 바다를 건넜다고 하였습니다. 통설에 의한다면 현 인천 지역에 자리잡았다는 비류계가 하남 위례성 지역에 오는 데 바다를 건널 이유는 하등 없습니다. 인천 이외의 타처에 비정을 하더라도 미추홀(彌鄒忽)을 한반도 서해안 어디로 보는 시각을 벗어나지 않는 한 강을 건널 수는 있을지언정 바다를 건너올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추론을 근거로 한다면, 미추홀을 막연히 한반도 서해안 어디로 생각하는 시각에서는 벗어나, 바다를 건너올 수 있었던 다른 지역, 중국사서들에 의한다면 중국쪽 요동땅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즉, 비류계 세력의 근거지였던 미추홀은 한반도 땅이 아니라 바다건너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황해 바다 건너 요동 땅 어딘가의 미추홀인 것입니다.
대륙백제의 실체 8
이렇게 해서 이제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서안평 소수가의 소수맥(小水貊)과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비류계 맥족의 연결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수맥을 설명하는 중국 사서들을 통하여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지식으로는 초기 백제 세력 외에는 달리 없었다는 점을 언급하였습니다만, 초기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인 비류계가 도읍한 곳인 미추홀이 한반도가 아니라 바다 건너 요동 땅에 있었다면, 그리고 그 시기가 고구려가 건국한 시기와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비류 세력이, 위 인용한 중국사서들에서 소수맥으로 불렀던 맥족과 같은 실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비류계=소수맥’인 것입니다. 중국사서들에서 단순히 소수맥으로 언급한 소수가의 맥족은 요동 땅 미추홀에 도읍한 비류계를 지칭하는 것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현 학계에서는 이 기록들을 고구려에서 벗어난 비류와 온조 세력의 한반도로의 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즉, 백제 건국 당시의 일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바다를 건넌 다음에야 비로소 비류와 온조 세력이 나라를 건국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커다란 잘못으로 위 기록에서 드러난 사실들로부터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삼국사기와 중국의 사서들은 백제라는 국명이 있기 이전에 요동 땅과 한반도에 각각의 국가 실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반도에는 온조왕의 십제가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중국 사서들에 의하면 소수가의 소수맥(그 이후 필자의 주장으로는 부여②),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홀의 비류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동 지역의 대륙백제가 한반도로 건너온 다음에 양 세력이 합해져서 비로소 백제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고구려로부터 벗어날 때에, 비류와 온조는 고구려로부터 공격을 받은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위 인용문 ⑤-2에서 보여지듯이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넌 이유가 고구려의 공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황해바다를 건너오기 이전에 이미 대륙에 백제의 전신인 모종의 건국 실체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百家濟海’한 시기는 대체로 ‘初’라고 하여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대체적인 윤곽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구태(仇台)란 (부여)왕이 있었고 시간이 흐른 다음에, 이 실체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바다를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제 건국 직전 또는 직후의 사실로 볼 수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미 황해 바다 건너 요동 지역 어딘가에 구태(仇台)로 대별되는 세력이 자리하고 있다가 한반도로 옮겨온 것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구태와 비류의 관계입니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글(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에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는 위 ⑤번항의 각 기록들이 인용문④와 문맥상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삼국사기의 인용문④에서는 비류왕이 미추홀에 도읍했다가 안거치 못하고 그의 사후 어느 시점엔가 신하와 백성들 즉, 미추홀 세력들이 옮겨서(바다를 건너서) 온조왕의 백제로 왔음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인용문④에서 비록 바다를 건넜다는 구체적인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이를 계기로 국호가 백제로 되었다는 사실은 인용문⑤의 각 항과 완전히 동일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현 통설은 그 근본적인 해석에서 잘못된 것으로, 인용문④와 ⑤의 기록들은 비류와 온조의 건국 초년의 일로는 볼 수가 없으며 비류왕 사후 어느 시점에서 대륙쪽에 있었던 미추홀 세력들이 고구려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져(또는 모종의 다른 이유로)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형제국을 찾아와 합류하여 새로운 국호를 백제로 정하여 이후 통합된 세력이 발전해간 저간의 사정을 전해주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여기서 지금까지 인천 등으로 비정되어 온 미추홀(彌鄒忽)을 요동지역으로 간략히 언급하였습니다만, 이제 가장 중요한 사항 중의 하나인 위치 비정을 비롯하여 또 다른 증거를 찾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한반도에는 온조왕의 십제가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중국 사서들에 의하면 소수가의 소수맥(그 이후 필자의 주장으로는 부여②),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홀의 비류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동 지역의 대륙백제가 한반도로 건너온 다음에 양 세력이 합해져서 비로소 백제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제는 망한 나라의 사람이죠. 백제는 도망와서 마한의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땅은 공손씨의 영역과 겹쳐 있었을 것입니다. 주서열전을 보면 '백제'의 그 선조는 대개 '마한'의 속국이고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자가 있어 나라를 '대방'에서 시작하였다는 구절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부여전의 내용과 같지요. 부여와 백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으면, 역사 공부의 5부 능선은 넘었다고 보아야죠. 저는 아직 넘지 못한 듯 하구요.
첫댓글 346년 부여(당시 백제)에서 잡혀간 부여왕 여현(餘玄)과 370년 부여왕자라는 여울(餘蔚), 그리고 또 385년 여암(餘巖), 399년 여초(餘超) 등이 활약하였던 것이 [자치통감]에 나와 있다.
남의 글 지우지 말고 가짜는 가짜라고 인정을 해요. 괜히 백제왕기때문에 백제역사를 흐리지 마세요. 라디오님이 그렇게 주장해오던 중립은 어디갔습니까? 님이 그렇게 언급하던 유정님조차도 위구태는 온조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위구태가 온조계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죠. 왜냐하면 다루왕에서 기루왕으로 이어지는 계보와 기사가 통째로 사라지고 없으니 누가 확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위구태를 일단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백제, 즉 온조백제로 두고 대입을 해 보는 것이죠.
어디 구절에 온조계라고 나와 잇어요? 인용해 봐요. 혹시 지나칠 수도 잇으니..그리고 트집 잡지 맙시다.
요즘 더위에 약 잘못 먹엇나 보군요. 왜 내 홈피에 와서 화풀이하고 잇습니까?? 미국은 너무 덥나 보군여?
내가 언제 온조계라고 했습니까? 흐미... 온조계가 아니라고 했죠.
라디오님이 인용한 글도 이해가 안됩니까? 라디오님의 주장과 정반대로 주장하는 글을 올려놓고선 위구태가 온조계라고 하는군요. 이 글을 제대로 읽어보기나 했는지요. 다시한번 읽어보시죠.
"한반도에는 온조왕의 십제가 있었고, 요동지역에는 중국 사서들에 의하면 소수가의 소수맥(그 이후 필자의 주장으로는 부여②), 삼국사기에 의하면 미추홀의 비류왕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동 지역의 대륙백제가 한반도로 건너온 다음에 양 세력이 합해져서 비로소 백제라는 국호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위구태=구태=소수맥=부여2=대륙백제... 유정님의 주장은 이겁니다.
왜 삼국지에 위구태를 부여條에 써 넣었을까요? 온조계라면 韓條에 넣었을겁니다.
백제는 망한 나라의 사람이죠. 백제는 도망와서 마한의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땅은 공손씨의 영역과 겹쳐 있었을 것입니다. 주서열전을 보면 '백제'의 그 선조는 대개 '마한'의 속국이고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자가 있어 나라를 '대방'에서 시작하였다는 구절은 삼국지위지동이전의 부여전의 내용과 같지요. 부여와 백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으면, 역사 공부의 5부 능선은 넘었다고 보아야죠. 저는 아직 넘지 못한 듯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