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듯
오후로 접어들며 가랑가랑 보슬비가 내린다. 가을을 재촉하는 단비이다. 가뭄으로 목이 타는 우리 고장에서는 무척이나 반가운 비 소식이다. 모처럼 산과 들을 촉촉하게 적혀주고 있다. 성큼 계절의 변화에 감미로운 팝송이 생각나는 설렘이 가득한 하루다. 멀리 팔공산이 사라졌다. 운무에 가려져서 하늘이 낮게 내려앉았다. 묽은 구름으로 가려진 하늘에서 빗물이 보슬보슬 내린다. 창문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낭랑하게 들린다. 밤새 내려도 귀에 거슬리지 않으며 바람이 없으니 나팔꽃도 달맞이꽃도 새색시처럼 새초롬하게 앉아서 가을 마중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여름내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온갖 소음이 창문으로 들어왔지만, 신경에 거슬리지 않았다. 무더위에 자친 지겨울 수도 있고 짜증스러울 수도 있는데 초인종도 누르지 않고 내 방으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마음이 평온해짐을 느꼈다. 전화로 안부를 전하는 따스한 목소리. 가족을 태우고 나들이를 가기 위해 자동차 시동 거는 소리, 어린이집 선생님의 해맑은 인사 소리. 단수한다고 미리 안내 방송하는 마이크 소리. 아랫마을 대추나무밭에서 약 뿌리는 풍뎅이 차 노랫소리. 고장 난 냉장고 텔레비전 세탁기 산다고 골목길을 기웃거리며 목이 쉬도록 방송하는 고물 장수 아저씨의 녹음기 소리.‘우리 동네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우리가 어릴 적에 부르며 놀던 노래를 지금도 부르며 친구들과 해지는 줄 모르고 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농구장에서 삼복더위에도 땀을 바가지로 흘려가며 농구를 하는 남학생들의 거친 숨소리까지 여름을 함께 보내는 소중한 이웃들의 살아있는 소리다.
늦은 아침이건만 바람이 선선하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여름에는 새벽이나 늦은 오후에 산책하러 나간다. 아무리 더워도 운동은 거르지 않고 한다. 안 하면 무언가 허전하고 몸이 자꾸 말을 한다. 오늘은 왜 나가지 않느냐고 칭얼거린다. 더워서 하루만 쉬자고 하면 그래 하면서도 순간순간 나를 쿡쿡 찌른다. 나가자고 내 눈치를 보거나 나를 자꾸 창가로 끌고 간다. 이 정도면 그렇게 덥지 않을 것 같은데 하면서 해시시 웃거나 연꽃 보러 가자고 조를 때는 나도 모르게 옷을 갈아입고 운동화를 신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다. 이런 나를 두고 운동중독이라고 핀잔을 주는 친구도 있고 ‘병이야 병’ 하면서 놀리는 친구도 있다.
걷기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팔공산 갓바위 올라가는 데도 힘이 들어서 구역질까지 했다. 현기증이 나서 가다 쉬다가를 반복하면서 겨우 갓바위에 올랐다. 매주 산행하면서 점점 체력도 좋아지고 현기증도 사라지면서 단번에 갓바위까지 올라갔다. 팔공산 갓바위는 1,365계단으로 이어져서 조금은 힘든 길이다. 꾸준히 오르다 보니 이제는 산책하듯이 갓바위 계단을 오른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걷고 수행하는 마음으로 걷는다. ‘내 안의 나’하고 꼭 손잡고 오르는 명상의 길이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라는 속담이 있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 일단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거르지 않고 같은 시간에 산책하러 나가는 나를 두고 칸트라고 부르는 경비아저씨가 계셨다. 꾸준한 성격 탓에 좋은 습관 하나를 갖게 된 것뿐이다.
나의 체력을 알기에 나에게 맞는 운동으로 관리한다. 걷기는 나에게는 생명의 원천이다. 마음도 몸도 단련하는 수행이다. 글을 쓰다 보면 앉아서 있는 시간도 많고 눈도 피로하고 오래 글을 쓰고 나면 가슴도 답답하고 머리도 무겁다. 그때 바깥으로 나가서 자연을 친구삼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면 눈도 맑아지고 머릿속이 박하사탕을 먹은 듯이 환해진다. 답답했던 가슴도 어느새 시원해지고 몸과 마음이 새처럼 날아다닌다. 체력도 단련하고 체중조절도 자연스럽게 유지가 된다. 명상하거나 산책하거나 식사를 거르지 않고 하는 일이나 일정한 시간에 글을 쓰거나 책을 보는 것도 나의 건강 비결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한결같은 그 목소리며 그 길을 걷고 있고 언제나처럼 글을 쓰고 있다고 변함없어서 좋다고 한다. 나는 날마다 새롭게 사는데 주변에서는 변화가 없어 보이나 보다.
지난 한 해는 아프게 보내면서 아무하고도 연락을 안 했다. 다행스럽게 코로나로 인해서 서로 왕래가 없이 지낸 탓에 그런가보다 하면서 넘어갔다. 아픈 시간을 보내면서 소중한 것에 대해서 많이 생각했다. 바쁘게 보낸 시간 때문에 놓치고 산 것은 없는지 생각했고 잠시 쉼표를 찍고 멈춤을 생각했다. 이렇게 달리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았다. 놓쳤었던 시간과 추억과 기억을 채워놓으며 시간을 보냈다. 이제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처음처럼 새롭게 다시 걸어간다. 서른 무렵에 나의 모습을 생각하며 두 번째 서른에도 사랑과 열정이 가득한 아름다운 삶을 꾸리면서 살고 싶다. 2022년 8월 3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