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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과 옛 골목의 흔적이 살아 있는 서울의 명소
서촌(西村)을 걷다
서촌(西村)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지역을 지칭하는데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는 ‘북부준수방’, ‘순화방’, ‘의통방’에 속하였고 ‘웃대’라고도 불렀다. 웃대란 예부터 광통교를 기준으로 청계천 하류지역을 ‘아랫대(下村)’, 청계천 상류지역인 인왕산 기슭을 ‘웃대(上村)’라고 불렀다. 경복궁, 창덕궁, 경희궁 등 궁궐이나 육조거리의 관아에 가까이 위치했던 웃대에는 서리나 별감 혹은 겸인들이 많이 살았다. 또, 조선시대에는 중인들의 문학예술활동도 활발했다. 수많은 명필을 남긴 추사 김정희와 수성동 계곡을 그림으로 남긴 겸재 정선이 이곳에 거주하였다. 송강 정철이 여기서 태어나 불후의 명작을 남겼고, 이상범, 이상, 구본웅, 이중섭, 윤동주, 박노수, 노천명, 이광수, 천경자 등이 거주하면서 문화예술의 혼을 이어갔다. 현재 600여 채의 한옥과 옛 골목들이 현대와 공존하고 있는 서울의 명소이다.
1397년 5월 15일, 이곳 ‘준수방 장의동 본궁’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나셨기에 이 마을 주민들이 2010년부터 ‘세종마을’이라고도 부르기 시작했다. 영조대왕의 잠저인 ‘창의궁’이 이곳에 있었고 자수궁, 수성궁, 인경궁 등 왕족의 터전이 산재해 있다.
서촌 골목길을 거닐다 보면 1960-70년대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재래시장, 오래된 가옥들을 볼 수 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한옥밀집지역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고, 경치좋은 계곡을 도심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건물이 갤러리 또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되었고 통의동 주변에는 다양한 갤러리 및 공방이 자리잡고 있다. 또한 옥인동 일대를 중심으로 각종 이색 상점과 음식점 그리고 독특한 카페까지 아기자기하게 들어서 있다.
서촌 가는 길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 지하철역 출구에서 통의동시장 쪽으로 나오면 제일 먼저 만나는 곳이 ‘세종음식문화거리’이다. 이 시장의 원래 이름은 금천교시장인데 2012년 ‘세종음식문화거리’로 지정됐다. 서민들의 먹을거리를 대표하는 음식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우리은행 건물이 있는 좌측 삼거리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부터 수성동 계곡에 이르는 거리가 서촌의 메인 도로이다.
서촌 주도로에서 첫 번째로 눈에 띄는 집은 천재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상의 집’이다. 통인동 154-10에 위치한 이집은 이상(1910-1937)이 스물두해를 살았던 곳이다. 아버지가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직동에서 태어난 이상이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던 세 살때부터(1912) 1933년까지 초중고교를 여기서 다니고 총독부의 건축기사로 근무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문화유산 국민신탁’에서 이 집을 매입하여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다. 이곳에서 1930년 첫 장편소설 ‘12월 12일’을 발표하고,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화상’을 출품해 입선했으며, 1932년 시 ‘건축무한육면각체’를 발표했다. 이때 처음으로 필명 ‘이상’을 사용했다.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을 개업하고 1934년에 이르러 김기림,이태준,정지용 등이 중심이었던 구인회(九人會) 소속으로 활동했다. 구인회의 동인지였던 <시와 소설>의 편집을 맡기도 했다. ‘거울(1933)’, ‘오감도(1934)’, 같은 형이상학적인 시를 통해 한국문학을 격상시켰다. 이상의 작품은 당시 한국문학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더니즘 사조로 항의와 비판을 받았지만 당시 유럽을 풍미했던 모더니즘 사조를 이해했던 그는 그만한 재능과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날개(1936)’, ‘종생기(1937)’, ‘동해(童骸)(1937)’ 등 소설도 발표했다. 다방의 작은 살림방이 그의 대표적인 소설 ‘날개’의 무대이다.
이상의 집 안으로 들어서면 카페 분위기의 탁자 몇 개와 함께 이상의 대표작들이 꽂혀 있는 서가가 눈에 띈다. 정면으로 육중한 철문이 있는데 이 철문을 열고 들어가면 베란다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이 있다. 계단 아래 벽에는 이상의 일생을 소개하는 영상이 흐른다.
이상의 집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대오서점’도 만난다. 1943년에 지은 한옥건물로 70년 넘게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서촌에서 나고 자란 조대식이라는 청년은 주변의 소개로 원당에 살던 권오남이라는 아가씨를 만나 1951년에 결혼을 했다. 그 전까지 이름없던 그 책방은 부부의 이름을 따서 ‘대오서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드라마 <상어>의 촬영지였고 현재는 카페로 운영 중이다. 음료수값을 내고 안으로 들어가면 아기자기한 옛 내실로 이어지고 조그만 마당과 장독대도 볼 수 있다. 옛날식 풍금과 학생복도 눈에 띈다. 내실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분위기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이곳 내부 전경은 스마트폰 촬영은 괜찮지만 DSLR카메라 촬영은 안된다. 큰 카메라에 의한 촬영이나 그림 등에 의한 상업적 이용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필운대로와 만나는 큰 길 가운데에는 ‘세종마루’라는 정자가 서 있고 도로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우측은 바로 통인시장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 수성동 계곡, 박노수미술관, 윤동주하숙집터 등으로 가는 길이다. 이곳에서 박노수미술관은 180m, 수성동 계곡은 450m 거리이다.
서촌길에는 다양한 가게, 음식점, 카페 등이 줄지어 있다. ‘서촌산책’이라는 이름의 카페도 보인다. 유리창에 옥류동천산책길 지도가 그려져 있고, 가게 앞 칠판에는 ‘산책-익숙한 것들 낮설게 보기’, ‘걷기의 철학-인간은 발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루소가 말하길 <우리의 첫 철학스승은 우리의 발이다>’ 등의 문구가 쓰여져 있다. 재미있고 의미도 있는 글귀이다. 서촌골목에는 이와같은 재치있는 간판들이 꽤 많다.
서촌 초입에는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서글플 따름’이라는 식당도 보이고, 중간 쯤에는 ‘앵두꽃-낮술’이라는 카페도 만난다. 낮술 한잔 하고싶은 집이다.
다음은 박노수 가옥. 1930년대 건축된 문화주택으로 서양의 입식생활을 지향하면서도 전통적인 온돌을 채택하였으며 서울시 문화재자료 제 1호이다. 조선 후기 관료이자 친일파로 알려진 윤덕영이 딸을 위해 지었지만, 한국화단의 거장인 박노수(1927-2013) 화백의 40년 삶과 작품세계가 정원과 함께 주택 곳곳에 담겨 있다. 1층의 벽돌조 구조와 2층의 목조구조가 어우러지고, 현관 옆 벽난로가 있는 응접실과 대청이 함께 하며, 입식부엌을 갖추었다. 현관의 바닥과 징두리벽의 타일은 옛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관 중문 안쪽의 하얀 플라스터 벽체와 쪽마루널 역시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2011년 종로구에서 인수하여 현재는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박노수 화백은 충남 연기 출생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청전 이상범, 근원 김용준, 월전 장우성을 사사하였으며, 1953녅 국무총리상, 1955년 대통령상을 수상, 대한민국 예술원상, 5.16민족상, 3.1문화상, 은관문화훈장 등을 수훈하였다. 이화여대, 서울대 교수로 재직, 국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박노수 화백은 전통적인 화제를 취하면서도 간결한 운필과 강렬한 색감, 대담한 터치 등의 독자적인 신화풍을 구축하여 전통 속에서 현대적 미감을 구현해 낸 작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박노수미술관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조그맣게 윤동주 하숙집터라고 쓰여진 안내판을 볼 수 있다. 종로구 누상동 9번지인 이곳에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자취가 남아 있다. 1941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는 소설가 김송이 살던 이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다. ‘별 헤는 밤’, ‘자화상’, 그리고 ‘또 다른 고향’ 등 그의 대표작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였다. 아쉽게도 현재 집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다. 현대식 빌라로 바뀐 이 집 벽에는 윤동주의 ‘서시’만 붙여져 있다. 현재 살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는 대문 앞 우물을 가르키면서 아직도 마르지않는 자연수로서 윤동주 시인이 인왕산 산책 후 땀을 씻고 세수하던 곳이라고 이야기해준다.
종로구는 윤동주 시인의 종로구에서의 삶을 기리기 위해 창의문 옆 청운수도가압장을 개조해 ‘윤동주문학관’을 열었다. 세상사에 지쳐 타협하면서 비겁해지는 우리 영혼에 윤동주의 시는 아름다운 자극을 준다. 그리하여 영혼의 물길을 정비해 새롭게 흐르도록 만든다. 윤동주문학관은 우리 영혼의 가압장이기도 하다. 문학관은 사진자료들과 함께 친필원고 영인본이 전시되어 있는 제1전시실, 제2전시실인 열린 우물, 제3전시실인 닫힌 우물 등이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시인의 일생과 시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문학관 밖에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어 산책하면서 윤동주 시인의 순결하고 꼿꼿한 시 정신을 반추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 바로 위에는 ‘푸른 양귀비’라는 카페가 있고 2층엔 ‘박물관 실크로드’라는 갤러리도 있다. 밖에서 보면 평범한 벽돌집 구조인데 안에 들어가 보면 자연 담벽 옆에 꾸며진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아기자기하다. 오래된 난로도 보이고 다양한 모양의 소품들도 즐비하다. 빈 와인병들도 가득 쌓여있어 운치를 더한다. 수성동 계곡도 눈앞이고 한참 걷다보니 목도 출출하다.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잠시 숨을 돌린다.
이제 서촌마을길의 1차 종점인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은 조선시대 도성 안에서 백악산 삼청동과 함께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아름답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던 명승지다.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집터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수성동 계곡은 조선시대 ‘물소리가 유명한 계곡’이라 하여 ‘水聲洞’으로 불렸으며, 여기에서 ‘洞’은 ‘골짜기’, ‘계곡’이라는 의미이다. 본래 인왕산의 물줄기는 크게 수성동과 옥류동으로 나뉘어 흐르다가 기린교에서 합수되어 청계천으로 흘렀으나 현재 옥류동 계곡은 복개되어 주택가로 변했고 수성동 계곡 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진경산수화라는 우리나라 고유의 화풍을 개척한 조선시대 유명화가 겸재 정선은 수성동 계곡을 장동팔경첩 가운데 하나의 화폭으로 담아 놓았다. 그림을 보면 오늘날 인왕산 수성동 풍경의 원형이 18세기 겸재 정선의 회화 속에 그대로 묘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성동 계곡을 돌아본 후 마을버스 09번을 타고 다시 통인시장 쪽으로 내려온다. 09번 버스는 경복궁역과 수성동계곡을 오가는 마을버스이다. 통인시장 앞 정자각에서 내려 통인시장으로 들어선다. 통인시장은 1941년 공설시장으로 출발하여 세월의 흐름에 따라 현재의 작은 골목형 시장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약 200m 길이의 도로 양옆으로 50여 개의 점포가 형성되어 있으며, 업종은 반찬가게와 식당이 가장 많고 채소, 생선, 속옷가게, 공방 등 다양한 품목을 판매하고 있어 지역민의 생활 속 시장이다. 2010년에는 서울형 문화시장으로 선정, 문화와 예술이 함께 하는 전통시장으로 조성되어 지역민과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통인시장은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설이 낙후돼 젊은 층의 발길이 뚝 끊어졌던 곳이다. 통인시장이 다시 북적거리기 시작한 건 2011년무렵부터라 한다. 종로구청이 통인시장을 마을기업으로 선정하면서 시작한 ‘도시락 카페’가 그 주역중 하나이다. 관광객들은 현금으로 ‘엽전’ 모양의 쿠폰을 산 뒤 시장 곳곳에서 파는 다양한 반찬을 골라 담아 먹을 수 있다. 말하자면 ‘재래시장 뷔페’인 셈이다. 5천원 안팍이면 시장에서 파는 부침개, 튀김, 김치 등을 배부르게 맛볼 수 있다. 상인들의 작은 아이디어가 재래시장을 되살린 셈이다.
통인시장에서 자하문로로 나와 경복궁역 쪽으로 조금만 내려오면 자하문로 11길 만나기 직전 독일안경마트 앞에 ‘세종대왕 나신 곳’이라는 조그만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이 표지석에는 ‘서울 북부 준수방(이 근처)에서 겨레의 성군이신 세종대왕이 태조 6년(1397) 태종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고 쓰여져 있다.
독일안경마트 건너 효자로길 우측 코너를 돌면 ‘보안여관’이라고 쓰여진 옛 여관도 만날 수 있다. 이 여관은 근대시대에 시인 서정주, 김동리 등 예술가들이 장기투숙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작업한 장소로 유명하다. 당시 서정주 시인은 이 여관에 머물면서 김동리, 김달진 등과 문예지 ‘시인부락’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갤러리로 운영 중이다.
이 이외에도 청운초등학교 앞에는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생가 표지석이 세워져 있으며,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옛 안가를 헐어내고 조성한 ‘무궁화동산’ 안에는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로 유명한 병자호란 당시 예문관 대제학 김상헌 선생(1570-1652, 사후 영의정 추증)의 생가터 표지석과 시비도 세워져 있다.
보안여관 뒤쪽 통의동 일대는 서촌의 대표적 한옥마을이다. 서촌의 한옥마을은 보안여관 뒤쪽과 이상집터에서 세종마루정자에 이르는 길 서쪽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현재 서촌에는 한옥 600여동 이상이 남아 있다. 그중 통의동 지역의 한옥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특히, 아름다움이 묻어 나오는 통의동 뒷골목은 종로 600년 미로미로(美路迷路)의 가치와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이곳에는 아트 팩토리, 진 갤러리,갤러리 시몬, 아트 사이드 등 다양한 갤러리들이 산재해 있으며, 대림미술관도 있어 문화예술인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글,사진/임윤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