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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석 목사님은 우리 성결교회 초창기에 통영, 철원, 함흥, 안성, 밀양 등지에서 교회를 개척하시고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철저히 반대하시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시고 1939년 10월 6일 대구 보인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우리 군산교회는 목사님의 후손들과 함께 목사님의 순교신앙을 본받으려는 마음을 모아 순교기념비를 건립하였습니다.”
주후 2008년 10월 9일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군산교회 권성만 목사와 성도일동
김하석 목사의 부인 조영복 사모와 그의 딸, 김성애 권사가 말년에 섬긴 군산성결교회의 마당 정면에 있는 김하석 목사의 순교 기념비 내용이다.
김하석 목사는 1890년 경상남도 청송에서 김기수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김기수는 한성사범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3·1운동에 가담하여 순국한 애국열사이다. 김하석 목사도 대구중학교 1회 졸업생으로 부친이 봉직했던 학교의 교사로 봉직하였고 그의 부인 조영복 권사는 대구 동산기독병원의 제1호 간호사로, 당시 선망되는 지식인 부부였다.
김하석 목사는 부친의 뒤를 이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신사참배 불응으로 붙잡혀 1939년 10월 6일 대구 인근 산에서 순교했다. 당시 함께 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들은, “목사님은 일본 경찰에게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흉기를 든 일본 경찰들이 마구잡이로 때리다가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내리칠 때 쓰러졌고, 끝까지 하나님과 민족을 배신하지 아니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순교하셨다.” 고 증언한다.
1928년에 시무했던 안성성결교회
그의 생존한 딸 김성애 권사(군산성결교회)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일제강점기 때 부친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했고, 일본 경찰에게 수배를 당해 평생을 쫓기는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복음사역에 헌신하였다. 1920년 경성신학교를 졸업하고 통영교회를 시작으로 복음 사역에 헌신할 때에도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구금되기 일쑤였다 한다.
그의 설교문도 압수 대상이었다. 설교 원고를 장독 항아리에 감춰두거나 벽 틈에 숨겨놓아도 일본 경찰은 독을 뒤지고 벽을 헐어서 찾아냈다. 설교문 내용을 트집 잡아 구금하고 심문하고 고문했다. 김 목사는 평생을 쫓겨 다니며 목회했다. 차분하게 목회를 할 수 없어 임지 이동이 잦았다.
1920년개척, 1924년 헌당식한 통영교회
1920년에 통영교회(현재 통영시 태평교회)를 개척한 지 1년도 채 안 되어 일본 경찰에게 시달리다, 강원도 철원교회 주임 교역자로 부임했다. 2년 만에 함경남도로 피하여 함흥교회로 부임했다. 1926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1928년에는 안성교회로, 1929년에는 경남 밀양교회 주임 목사로 부임했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경남의 함양교회에서도 시무했다고 한다.
성결교회의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 성서적 창조론과 신론은 일본 국체와 상극이었다. 이 중 재림 교리는 일본이 세계의 심판자로 자처한 데 대한 명예 손상으로 간주한 눈엣가시였다. 일본 천황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것이며 일본의 국체를 위반하는 사상이라고 하여 무차별 정죄했다.
일본 당국은 집요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굽히지 않은 독립운동가 김하석 목사를 학살한 것이다. 김 목사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서 피를 쏟은 순국열사다. 김하석 목사의 순교의 삶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발자취이다.
1929년에 시무했던 밀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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