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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컨센서스
“앞으로 15~20년간 전세계에서 중국보다 강령한 영향력을 행사할 국가는 없을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된다면 중국은 2025년경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자 주요 군사강국으로 부상할 것이다.”
미국 국가정보국 산하 국가정보위원회(NIC)가 ‘글로벌 트렌드 2025 – 변화하는 세계’라는 제목의 120페이지 보고서(
중국이 NIC 보고서의 예측처럼 미국에 도전할 강대국으로 도약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NIC 보고서의 내용 중에서 한 대목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미국은 2025년에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남겠지만 그 영향력은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며, 이에 따라 많은 국가가 서방의 정치∙경제모델보다는 국가가 경제를 주도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을 따를 것”이라고 지적한 대목입니다.
보고서가 강조한 부분은 중국식 모델이 앞으로 국제사회에서 ‘새로운 트렌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바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식 발전모델이란 최근 학계에서 화두로 떠오른 ‘베이징 컨센서스(Beijing Consensus, 北京共識)’를 가리킵니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위기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용어는, 미국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의 자문역과 중국 칭화대 강사를 지낸 조슈아 쿠퍼 라모 前 ‘타임’ 부편집장이 2004년 5월 영국 총리 산하 연구소인 외교정책센터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처음 사용했습니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권위주의 체제와 정부가 시장경제를 주도하는 국가모델을 뜻합니다.
미국의 최고정보자문기관인 NIC가 베이징 컨센서스를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워싱턴 컨센서스가 위기에 빠졌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워싱턴 컨센서스란 민주주의 정부에 시장경제가 결합된 국가모델을 말합니다. 존 윌리엄슨 미국 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이 1989년 경제난국에 빠진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무역 및 투자 자유화, 脫 규제 등 10가지 정책을 제시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이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의 입장을 대변하는 ‘신자유주의’의 대명사로 흔히 쓰여왔습니다.
미국이나 IMF가 제시한 경제위기해법은 국가권력의 시장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기능과 민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노선 위에 서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과 IMF의 해법은 자본시장 자유화, 민영화, 정부규제축소 등으로, 1990년대 후반 동구권 국가들과 아시아 각국의 주요 개혁정책에 그대로 적용됐습니다.
미국은 또 경제위기에 빠진 국가들을 지원하면서 이를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확산시키는 전략과 연계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신자유주의 비판론자들은 그동안 미국의 이러한 태도가 신자유주의를 강요하면서 타국의 경제를 종속시키려는 의도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미국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자유무역, 시장개방은 국제사회의 세계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반박해왔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신자유주의를 자신하던 미국은 스스로 제 발등에 도끼를 찍었습니다.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의 월스트리트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한 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이에 따라 미국이 주도해 온 탈규제와 민영화, 개방화로 상징되던 신자유주의도 쇠퇴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게 됐습니다. 특히 세계경제위기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쇠퇴론이 부각되고 있는 상황에서 워싱턴 컨센서스도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NIC가 베이징 컨센서스의 부상을 지적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베이징 컨센서스는 前 부시 행정부의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대’라는 독트린이 일방주의 때문에 훼손된 상황에서 더욱 세를 얻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반미주의가 베이징 컨센서스에 날개를 달아주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줄리아 스웨이그 미국 외교관계협의회(CFR) 선임연구원이 제시한 반미주의의 4가지 원인을 보면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스웨이그 연구원은 반미 확산의 원인으로 우선 냉전의 유산을 꼽았습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은 물론 쿠바 등 세계 도처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다는 대의명분으로 정권 전복을 도모하는 등 각국의 내정에 간섭해왔습니다. 이런 냉전의 유산을 탈냉전시재에도 그대로 적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라크 전쟁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둘째, 미국은 힘이 없는 국가의 관점에서 힘을 구사하지 못해왔다는 것이 스웨이그의 지적입니다. 중남미의 경우, 미국은 중남미 사람들이 미국의 이익을 자국의 이익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자국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원인은 세계화입니다. 미국은 세계화를 통해 모든 나라가 번영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넷째는 이중 기준입니다.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 인권존중 등을 중요한 인류의 가치로 강조했지만, 이를 국익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적용하곤 했습니다. 자신들의 국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부 독재국가의 인권유린을 외면해왔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반미주의는 이처럼 워싱턴 컨센서스에 대한 반감을 증폭시켰고, 반대로 베이징 컨센서스가 국제사회에서 확산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베이징 컨센서스는 단순히 중국의 경제발전모델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와 사회를 포함하는 중국식 발전모델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식 사회주의’의 대명사인 셈입니다.
단계적∙점진적 국가발전모델
중국은 그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에서 ‘非 민주국가’, ‘인권탄압국가’라는 비판을 받아왔지만, 국제사회에 베이징 컨센서스라는 발전모델을 제시함으로써 ‘선도국가’로 행세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중국의 베이징 컨센서스가 21세기 국제질서 변화의 새로운 중심역할까지 맡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갈수록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베이징 컨센서스는 그간 어떤 내용으로 추진되어 왔을까. 라모의 논문에 따르면 베이징 컨센서스는 크게 세 가지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째, 국가주도로 추진되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경제개혁정책입니다. 이는 舊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이 추진했던 사유제, 가격자유화, 국가통제의 해체 등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라는 급진적 경제개혁조치와는 다릅니다.
둘째, 지속가능성과 평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 시대에 추진한 경제성장우선정책인 선부론(先富論)을 수정한 것입니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도시와 농촌, 연해지역과 내륙지역, 경제와 사회, 인간과 자연을 조화롭게 발전시킨다는 균형발전전략을 제시했습니다. 분배와 성장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후 주석은 이를 위해 ‘허셰(조화) 사회’를 통치이념으로 제시했습니다. (2006년 10월 중국 공산당 16기 중앙위원회 6차 전체회의에서 당 공식이념으로 채택) 조화사회는 개혁∙개방 이후 심각해진 지역∙계층∙도농의 격차를 해소하고 모든 계층∙계급의 이익이 화합할 수 있도록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공동부유론(共富論)’을 말합니다.
셋째, ‘평화롭게 국제사회의 강대국으로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 노선입니다. ‘화평굴기’는 정비젠(鄭必堅) 前 중앙당교 부교장이 개발한 이론으로, 주변국을 비롯해 각국과 평화적인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제기하는 ‘중국 위협론’에 대한 반대논리이기도 합니다.
베이징 컨센서스는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과 국제적 지위상승에 따라 보다 강력한 노선으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의 대두입니다.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특정기업을 직접 관리함으로써 자본주의 경제제도 속에서 발전하는 경제제도를 말합니다. 과거 국가자본주의의 원조는 소련이었습니다. 소련은 1921년부터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을 추진했습니다. 당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시기에 국민경제를 사회주의의 방향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를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21세기 국가자본주의는 이와는 다릅니다. 중국 공산당은 시장경제체제를 적극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야말로 낡은 이데올로기가 됐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온 중국 공산당이 선택한 것이 바로 국가자본주의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를 구별하는 가장 큰 차이는 국가의 역할입니다. 미국식 자본주의가 국가개입을 최소화하고 있는 반면 중국의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개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식 자본주의가 세계경제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는 상황에서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향후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은 어떤 형태의 자본주의보다도 클 수 있습니다.
중국의 국가자본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은 앞으로 중국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중국에는 ‘양치(央企)’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무원 산하 국유기업을 뜻하는 ‘중양치예(中央企業)’의 약자로 모두 146개에 달하는데, 이들 기업이 중국경제의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들은 국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은 국가자본주의에 교묘하게 민족주의를 혼합시켰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1997년 영국 식민지였던 홍콩의 귀속을 계기로 ‘중화(中華, Middle Kingdom) 민족주의’ 혹은 ‘중화주의’가 인민에게 어필하자 이를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경쟁력 향상을 통해 ‘중화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국유기업들은 자국 內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수익을 올린 뒤 해외에서 인수합병(M&A)를 통해 글로벌 기업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중국 거대 국유기업의 출현으로 민간부문이 주도하던 국제경제에서 게임의 룰까지 바뀌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와 함께 세계 1위인 외환보유액을 활용하기 위해 2007년 9월 2,000억 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도 만들어 적극적으로 해외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국부펀드는 앞으로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 갈수록 강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수단, 짐바브웨, 앙골라, 나이지리아
중국은 이와 함께 베이징 컨센서스를 대외정책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중국이 베이징 컨센서스를 강조할 때 항상 내세우는 말이 타국에 정치적 민주화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이를 좀 더 확대해 ‘타국의 주권존중과 내정 불간섭’이라는 외교노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베이징 컨센서스가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개발도상국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것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국의 對 아프리카 진출 전략을 보면 철저하게 베이징 컨센서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인권탄압이나 독재로 낙인 찍힌 아프리카 국가들과 ‘정치적 조건’을 달지 않고 실리차원에서 교류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 같은 행보에 깔린 중국의 의도는 경제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하고 동시에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도 확대하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거부권을 통해 다르푸르 학살과 관련한 수단에 대한 제재를 저지한 바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수단의 수도 하르툼에 정유공장을 건설해 석유개발과 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수단은 중국 석유수입분 가운데 7%를 공급하는 국가입니다.
이와 함께 중국은 아프리카에서 독재자로 악명 높은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에게 900만 달러 짜리 저택을 지어주었습니다. 짐바브웨에 대한 유엔 제재를 막아준 것도 중국입니다. 짐바브웨는 산유국은 아니지만 세계 2위의 백금생산국입니다. 백금은 자동차부품의 핵심 원자재로 자동차산업의 육성을 위해 안정적인 확보가 중요합니다. 무가베는 “우리는 더 이상 해가 지는 서쪽(서방)을 보지 않고 해가 뜨는 동쪽(중국)을 바라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집권층의 만성적인 부정부패로 악명 높은 앙골라에도 중국은 엄청난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 노동자들은 수도 리완다를 비롯해 앙골라 곳곳에서 주택, 공항, 철도, 도로, 병원 등을 건설하고 있습니다. 중국 최대기업이자 국영석유회사인 시노펙(Sinopec, 중국석유화공집단공사)은 앙골라에 30억 달러 규모의 정유공장을 세우고 있습니다. 앙골라는 중국이 전세계 국가 중 가장 많은 원유를 도입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인권문제와 부정부패로 악명 높은 나이지리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은 세계 8위 산유국인 나이지리아 정부가 무장 반군의 은신처은 니제르 델타 지역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함정을 제공했습니다. 중국과 아프리카는 지난 2006년 11월 수교 50주년을 맞아 제1회 중국-아프리카 정상회의를 베이징에서 성대하게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강요하지 않는다”
이 같은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에는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중국의 ‘신식민지’ 전략입니다. 과거 서구열강들이 중국, 인도, 남미, 동남아 등을 식민지로 삼아 강대국으로 부상했듯, 중국도 아프리카를 자국의 도약을 위한 발판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중국이 아프리카의 자원을 ‘싹쓸이’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서구열강의 식민지배를 겪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최근 서방국가보다 중국과의 교류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이 소프트파워(Soft Power, 연성권력)를 교묘하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아프리카 백서’에 따르면 중국은 아프리카 각국과 협력을 모색할 때 정치적 동등, 경제적 상호협력, 신뢰구축 등 3대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백서는 아프리카의 군사인재 육성, 유학생 교환, 중국어 교육지원, 중국기업의 투자장려, 채무경감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매년 3,000여 명의 아프리카 학생과 전문직, 공무원을 국비유학생으로 초청했고, 앞으로 이 숫자를 10배로 늘릴 계획입니다. 유학생들은 대부분 아프리카 각국 정치인과 고위관리의 자녀들입니다. 중국은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 국제 라디오방송국을 개국하기도 했습니다. 이 방송국은 영어와 중국어로 세계 뉴스뿐 아니라 중국의 발전상과 문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탄자니아에도 같은 방송국을 열 계획입니다. 소프트파워를 통한 신뢰구축전략의 일환입니다.
이렇듯 중국정부는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철저하게 개발과 투자가 공존하는 새로운 협력모델에 따라 아프리카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이 모델이 아프리카의 발전을 지원해 자립기반을 마련해 주면서 자국이 필요로 하는 에너지도 개발하는 이른바 윈-윈(Win-Win)전략이라고 홍보하고 있습니다.
공자학원과 소프트파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소프트파워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물리적으로 표현되는 하드파워(Hard Power, 강성권력)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위협이 아니라 설득과 호소로 타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의 힘을 뜻합니다. 소프트파워의 개념을 처음 주창한 조지프 나이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한 지 30년 만에 경제대국이 되면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 개발도상국에 베이징 컨센서스 모델을 제시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중국이 최근 들어 소프트파워를 통해 얻고 있는 성과는 더 이상 무시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최근 추진하고 있는 소프트파워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중국어학원이자 문화센터인 ‘공자학원’입니다. 중국정부는 2004년 서울에 세계 최초로 공자학원을 세운 이래 지금까지 69개국에 238개를 설립했습니다. 이를 위해 매년 약 2억 위안(한화 300억원)을 투입하고 있으며, 2010년까지 500개를 설립한다는 목표를 세워두기도 했습니다. 프랑스가 알리앙스 프랑세즈(Alliance Fransaise)를 120년간 1,100개, 영국이 영국문화위원회(British Council for Relations with Other Country)를 70년간 230개, 독일이 괴테 인스티튜트(Goethe-Institut)를 50년간 128개 설립한 것과 비교해 볼 때 단기간에 엄청난 규모를 이뤄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국어를 사용하는 전세계 인구는 13억여 명으로 수치상으로만 보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지만 아직 그 영향력은 낮습니다. 중국이 공자학원을 세워 전세계에 중국어 붐을 일으키려는 것도 소프트파워를 강화하려는 의도라도 볼 수 있습니다. 언어는 문화를 전파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2008년 중국 외교백서는 “소프트파워 없이는 상대국을 설득하거나 중국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어려운 만큼 소프트파워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백서는 이를 위해 해외에 공자문화원을 계속 지어야 하고, 중국어 교사를 더 많이 파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정부의 소프트파워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습니다. 당시 개막식의 입장순서는 중국 한자(漢字)의 간체자(簡體字) 획수에 따라 정해졌습니다. 과거 올림픽 개최국이 참가국 선수단의 입장순서를 현지발음의 영어 알파벳 순으로 정했던 관행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한자와 한어를 알파벳이나 영어에 버금가는 세계의 표준언어로 내세우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중국이 개막식에서 화약, 종이, 나침반, 인쇄술 등 세계 4대 발명품을 화려하게 형상화하면서 5,000년 ‘중화문화’를 전세계에 자랑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소프트파워를 통한 베이징 컨센서스의 강화.’ 후 주석이 “문화는 국가성장동력이며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은 문화번영과 함께 와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은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계기로 자국의 표준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만들려는 의도까지 내비칩니다. 차세대 이동통신분야에서 자국이 주도해 만든 제3세대(3G) 이동통신기술 표준인 TD-SCDMA 서비스를 확산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그간 세계 3G 이동통신의 주류는 미국식 CDMA2000과 유럽식 W-CDMA로 양분돼 왔습니다. 중국은 이 두 기술의 수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3G 방식인 TD-SCDMA를 도입한 것입니다. 이 기술은 이미 세계 공인을 얻었으며 중국은 설비구축에만 150억 위안(약 2조2,250억원)을 투입했습니다. 중국이 미국과 서방이 주도하던 글로벌 스탠더드에 도전장을 내민 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은 베이징 컨센서스에 이어 ‘차이나 스탠더드(China Standard)’를 세계의 표준으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분석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예기(禮記)에 나오는 ‘세계 모든 곳에 들어맞는 표준(放之四海皆準)’을 세우라는 대목과 일맥상통합니다.
2049년 세계 일등국가
베이징 컨센서스가 다른 국가들의 발전모델이 되고 있는 것에 중국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음도 엿볼 수 있습니다. 민주화와 인권신장을 내세우는 미국의 외교적 압박에 시달려온 국가들이 베이징 컨센서스에 일종의 매력을 느끼고 있는 현실이 역으로 중국의 자신감을 강화시켜주는 모양새입니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해 이란,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수단 등이 베이징 컨센서스에 적극 동조하고 있고, 쿠바와 미얀마 등 독재국가들도 중국식 발전모델을 추진할 것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호응을 바탕으로 중국은 중남미와 아프리카에서도 반미주의를 틈타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는 수준까지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심지어 동아시아정상회의에서 미국을 배제했으며 상하이협력기구(SCO)를 일종의 반미동맹체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의 대외정책도 개입을 통해 국익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후 주석은 내치(內治) 분야의 국정이념으로 내세웠던 ‘허셰사회’ 개념을 대외전략으로 확장해 ‘허셰세계’ 건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노선은 서로 다른 문명과 다양한 발전경고를 상호 인정하면서 경쟁과 공존이 함께 하는 국제사회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면서도 미국이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것에 제동을 걸고 국제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선궈팡(瀋國放) 외교부 직속 세계지식출판사 총편집인은 후 주석의 노선을 가리켜 ‘적극적인 다변화(다자) 외교전략’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선 총편집인은 “중국이 대국의 일원으로 조화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세계정치경제의 게임법칙 제정에 주동(主動)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중국은 공산당 창당 100주년인 2021년에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건국 100주년이 되는 2049년에는 세계일등국가가 된다는 청사진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영국 왕립국제관계연구소(RIIA)의 빅터 불머토머스 소장은 “지난 1842년(아편전쟁 패배 後 불평등조약 체결)부터 1949년(중화인민공화국 수립)까지의 ‘굴욕의 한 세기’를 바꿔보겠다는 중국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분석했습니다.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까닭
하지만 베이징 컨센서스가 앞으로 국제사회를 주도하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일당독재체제입니다. 중국이 강대국이 되고 영향력이 확대된다고 하더라도 국제사회에서 진정한 리더가 되려면 이런 독재체제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국가들이 그동안 베이징 컨센서스를 폄하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런 점을 인식하고 있는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항상 민주주의를 강조해왔습니다. 지난 2007년 10월 열린 제17기 공산당대회에서 후 주석은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무려 63차례나 언급했습니다. 중국정부가 사상 최초로 발표한 백서)
그렇지만 중국정부가 백서에서 밝힌 내용은 사실상 공산당 일당독재를 인정한 것입니다. 실제로 중국이 개혁∙개방을 추진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덩샤오핑이 주창한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毛澤東) 사상, 사회주의 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공산당 영도 등 4개 항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후 주석도 “중국은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정치발전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해왔습니다.
물론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경제가 발전하면 할수록 정치민주화는 정비례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1인당 GDP가 3,000~5,000달러가 됐을 때 국민이 정치민주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중국의 1인당 GDP는 2007년 현재 2,360달러를 기록해 30년 전인 1978년 190달러에서 무려 12배 이상 증가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중국은 조만간 1인당 GDP 3,000달러 시대를 맞게 됩니다.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이를 사전에 막기 위해 나름대로 민주화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시장경제의 첫 실험장이었던 경제특구 선전시가 시장과 구청장 경선제를 도입키로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공산당이 지정한 단일후보를 형식적인 선거로 뽑던 과거방식을 바꾼 것입니다. 중국이 선전과 같은 대도시에서 경선제를 도입한 것은 사상 처음입니다. 선전시의 이 같은 실험은 일본 자민당의 파벌정치를 원용해, 공산당 내부에서 성향이 다른 세력들이 제한적 경쟁을 통해 계파정치체제를 구축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나름의 ‘중국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것은 베이징 컨센서스의 약점을 보완하려는 전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개의 태양은 없다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시각은 비판적입니다. ‘중국식 민주주의’는 단지 공산당의 내부개혁이나 제도개혁 밖에 되지 않는다는 논지입니다. 중국 공산당과 후 주석이 추진하는 정치개혁은 서방이 주장하고 있는 다당제∙직접선거∙삼권분립 등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서방국가들은 또 중국식 모델을 지지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국내정치의 불안정, 내전, 인권탄압, 경제적 실패, 극심한 빈곤 등의 ‘문제’가 있는 국가들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이 주장하는 민주와 미국이 주장하는 민주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세계를 주도하는 세력과 이에 도전하는 신흥세력 간에는 이와 같은 갈등과 대립이 항상 벌어졌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양국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양국관계의 미래에서 확실한 점은 불확실하다는 것뿐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중국이 나름대로 자국의 길을 계속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중국의 목표는 21세기를 팍스 시니카(Pax Sinica, 중국에 의한 세계평화)의 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없듯 땅에도 두 명의 황제는 없다고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공자입니다. 물론 한동안 위세를 구가하던 워싱턴 컨센서스가 엄청난 비판에 맞닥뜨렸듯, 베이징 컨센서스 역시 명실상부한 새로운 국가발전모델의 대안으로 자리매김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어쩌면 중국이 역사적 교훈을 얼마나 他山之石으로 삼고 있느냐가 그 중요한 관건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