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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1:1-7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 인생! 24.9.22 주일 낮
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산 소망을 가진 나그네 인생”입니다.
추석 명절이라고 함께 모여도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저출산이 아니라 무출산이 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나라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 전국의 군 중에서 인구가 증가한 곳이 유일하게 한 곳 있습니다. 전남 신안군입니다. 지난 한 해 191명이 증가했습니다. 참고로 우리 지역 사천은 올해 7월까지 통계를 보니까 출생 38명인데 사망은 98명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한 해 60명 정도 태어나고 170명 정도 사망합니다. 해마다 거의 세 배 정도로 사망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안군은 왜 늘었을까요. 여러 다른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신안군은 기독교가 90%입니다. 무당이 없고 점집이 없는 지역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를 비롯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지역입니다. 저는 이것이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성경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감사할 줄 알고 인사할 줄 아는 민족입니다. 다만 감사하는 대상이 좀 잘못되어서 마음이 아프지만 감사할 줄 아는 그 자체의 국민성은 참 좋은 것입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보답하려는 마음, 어려운 가운데서도 선물을 드리며 인사할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나도 주었으니 돌려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어른을 섬기고 어려운 사람을 먼저 돌아보고, 있으면 나눠주고 먼저 섬기는 마음을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도다”(행20:35)
지금 우리는 정말 복 받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쓰여 질 때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박해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시의 성도들은 그렇게 빼앗기면서도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런 환란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잘 인내하며 견디라고 권면의 글을 쓴 것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본문 1절에서 베드로는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소아시아 지역, 지금의 그리스와 터키지역을 가리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들을 가리켜서, '성도'라든지 '형제'라든지 '교회'라든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고, '나그네'로 부르고 있는 점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나그네’들입니다. 이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도 나그네요, 나그네 길을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물다 가는 펜션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름에 펜션에 휴가 간 사람들이 펜션을 꾸미고 가꾸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 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새둥지에 불과합니다. 나그네는 잠깐 집을 떠나온 사람들이므로 언젠가는 본향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우리들도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은 영원한 본향이 아니며, 잠깐 후면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늘나라에 가게 됨을 깨닫고, 이 땅에 살아도 항상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잘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그네인 우리는 항상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흩어진 나그네가 되었느냐하면 2절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라고 합니다. 단순히 핍박을 피하기 위해서 흩어진 것이 아니라 그 배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흩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을 합니다. 만일 내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될 때, 내가 갈려고 준비 다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가게 될 때, 반대로 내가 갈 준비를 전혀 안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게 될 때 우리는 그때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이럴 때 운이 없다거나 재수가 나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행18장 1절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로마에서 글라우디오 황제 때 추방령을 받고 정처 없이 떠돌다가 고린도로 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장막 만드는 업을 하고 있는 사도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게 되고 초대교회사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바울에게 꼭 필요한 동역자로 기록됩니다. 이들이 로마를 떠날 때는 쫓겨 오듯 왔는데 돌이켜 보니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런 고백을 합니다. 렘10:23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라." 이처럼 우리에게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8:17에도 말씀합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사람이 다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 때문에 핍박을 당하여 흩어져서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기원 64년경에 로마에 큰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불은 괴팍스럽기로 소문난 네로 황제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여 자신이 방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뒤집어씌우고 성도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편지를 써서 위로한 것입니다.
3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고 합니다. 이런 고통 중에 있는 성도에게 왜 찬송하라고 했는가하면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요 참 생명인 종교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종교가 다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같지 않습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부모님 친구들이 다 어른이고 다 비슷해보여도 자기를 낳아준 아버지, 어머니는 한 분 뿐이듯, 종교가 비슷해 보여도 참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종교는 결코 통합되거나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은 이슬람이 말하는 알라 신이 아니고 무슨 염라대왕 같은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인 것 같아도 같은 게 아닙니다. 죽어서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신을 왜 DNA조사를 합니까? 시신이라도 자기 부모가 맞나, 자기 자녀가 맞나를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누가 옆에 가서 지문도, 형체도 없는데 그게 그거라고, 아무거나 하나 가져가라고 해 보세요.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그거라 하면 안 되듯이 종교가 결코 같지 않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판하실 유일하신 신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우리의 구주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우리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뒤에 찬란한 승리의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활 때문에 우리는 어떤 고난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큰 환란 가운데서도 “찬송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찬송할 이유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이 변호사 시절에 주 의회 의원에 출마했다가 낙방하고, 하원의원에도 출마했다가 낙방했습니다. 이러기를 몇 차례 거듭하자, 그는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변 친구들은 그를 염려했습니다. '저러다 링컨이 자살하는 건 아니야?' 친구들은 링컨이 목숨이라도 끊을까봐 자기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링컨은 친구들의 염려대로 '나는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다. 어떠한 개선이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있다.'라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이러니 얼마나 걱정되겠습니까.
이렇게 실의에 빠졌던 링컨이 어떻게 재기하여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실의에 빠지고 좌절해 있을 때 성경을 읽고 그 속에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그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그와 함께 함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였고, 후보 지명을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야말로 모든 실의와 낙망을 이기고 소망으로 이끄는 힘입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두 번째 찬양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거듭났다는 말은 중생, 곧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옛사람이 죽어 장사되었고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요3:3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고백합니다. 갈2:20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주인 되어 살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 것입니다. 우리 모두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지금 환란 중에 고난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듭나고 새롭게 중생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하고 찬송할 조건이 된다고 말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예수로 다시 사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살리신 그 은혜로 인하여, 그 은혜 때문에 영원히 찬송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신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산 소망이 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기업을 주시기에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산 소망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약속한 영원히 썩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는 소망입니다. 할렐루야!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그 소망이 여전히 효력이 살아있는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에 산 소망이 되십니다. 그 약속 또한 효력이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유효한 약속입니다. 그래서 산 소망입니다. 그날에 우리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수고에 따라 상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심은 대로 보상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5절 하반절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 찬양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까? 그 앞부분에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보호해 주십니다. 그 믿음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환란이나 핍박에도 굴복하지 않고 주를 떠나지 않고 소망을 버리지 않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 있는 자를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능력의 보호를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도 이 믿음을 가진 자가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견디고 승리한 믿음에 대하여 본문 7절 말씀처럼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반드시 얻게 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본문과 같은 환란과 핍박을 당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우리도 나그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삶이 영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우리의 본향 천국을 사모하며 소망 중에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할 분명한 이유를 생각하며 날마다 찬송과 감사로 복된 날들로 채워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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