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전서 제 2 장 6절
6절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며 , 이 세상에서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However, we speak the wisdom among those who are mature,yet
not the wisdom of this age, nor of the rulers of this age, who are coming to nothing.
참고) 이해를 돕기위해 짧은 실력의 영문으로 번역을 시도해본다면.
"어떠하던지간에 우리들의 성숙한 사이에서의 현명한
대화는 (지혜) 세상의 시대를 겪은 지혜라는것 은 아닐뿐만 아니라 다시 올 수도 없는 권력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이렇게 됩니다.
본문에서 "이 세상에서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 처럼 멸망해 버릴 통치자들의 지혜" 란 다시 올 수 도 없는
통치자들의 지혜"로 영문을 번역하였는데, 이러한 의미는 다시는 "부활할 수 없는 자" 들을 통칭하는 의미를
말 합니다. 아무나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할함을 명백하게 증거하거나 믿음을 온존하게지닌자들만
부화를 예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고린도 교회에서 형제들과 사도바울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통치권력을 내 세우는 자 들은 너무 죄가 많아서( 지혜의 어리석음을 의지한 우상숭배론자들) 다시는 인두겁을 쓰고(인간의 종류로서) 이 세상에 올 수 가 없다는 사실을 말함이거나, 성령으로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온전한 지혜인 성령의 은총으로 인하여 부활을 전제로 하는 생명운동을 잘 모르는 경험된 세월을 의존하여 생각을 내는 무지한 백성들의 지혜와는 다르다라는 것을 말 합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지혜란 의미의 영적대화가 그 내면의 함축된 의미는 세상에 소속된 지혜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재삼 강조하고 있읍니다.
성경말씀이 그러므로 이토록 일반 백성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어려운가? 그 배경을 잠시 들여다 보기로 합니다.
성경말씀의 본의는 삼위일체입니다,
성경말씀은 O 에서 나오며, O 을 논하지 않거나, O을 모르고, 흑백의 2 원론 사조인 근대사의 "모더니즘"으로 출현하게 한 "문예사조" 의 논법이 되어진 문명의 발전시작점으로 되어버린것을 말합니다.
또한 그와 동시에 출몰한 과학적 실험사조 의미가 함께 동반하면서, 세상의 지혜는 이성적인 이원화의 논리화 로 발전되기 시작하였고 경험론의 인간사고방식 사조가 고착화 되어 O의 당체를 이미 풀어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쉽게말하자면 공간학에서 시간적인 과정과 병행하는 물질적 법칙의 성과적 인 눈앞에 보이는 가시현상에
귀착되어 그러한 도래점이 파도처럼 문명을 삼켜버리게 된 것입니다.
고전시대에는 신본문학(神本文學) 적 의미가 깊어져 삼위일체론이 발전되는 듯 하였으나, 갑자기 근대사에
문예사조인 인간본위의 모더니즘을 발달전개로 인하여 모든 사유가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통찰에서만 가능한
분별논리, 분석논리로서 주어지는 통계적인 양태로 빠져버렸읍니다.
현 문화와 언어개념이 실험정신으로 입각된 이후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원론의 사고방식인 논리가 현저하게 발달하자. O 의 삼위일체론이 자연스럽게
퇴하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삼위일체론은 상당히 난해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이가 들수록(역사의진행성) 너무 고된 삶의 인식점에서 딱딱하고 발라먹어야 하는 구조가 복잡한 음식을 먹기에는 이미 잇몸으로
버티는 수준이라 몰랑 몰랑한 떡 같은것만 선호함과 같은 문화인식에 젖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음양 이원론, 이성적인 통찰론, 선악론, 비교우위론, 이분법의 모더니즘, 퍼스트모더니즘, 서양철학개념.
헬레니즘양식의 예술적 증진, 등은 모두 평면적인 사고방식으로서 2분적 흑백논리로서 세상을 판단하고자 하는
사조를 의미하는데 이를 문예사조라 이름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한 특징은 논리 입니다. 논리는 이성에서 나오지요.
창세기에 이브가 뱀에 유혹에 의하여 선악과인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서는
이성적인 이분법 사고에 인류가 젖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메세지가 선악을 분별하게되는
인간의 원죄를 제시함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사상은 비논리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논리를 논리적으로 파괴하는 작업으로 진정한
논리인 삼차원의 입체적 사고방식을 전개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냥 글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말씀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렵다 이 말이 됩니다.
성경말씀의 삼위일체, 불교의 삼승, 중도(O), 한반도민족의 삼신사상, 등은 전부 O 사상입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공(O) 사상, 無(무)사상, 비논리(比論理) 로서 논리를 깨뜨리는 논리로서
입체세계를 O 률로 운영함을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또한 동양학의 음양오행론법칙의 이분법 사상에서 그 근원이 되는 삼태극 현상, 삼족오 (까마귀다리가 세계: 김시습의 금오신화, 토정이지함의 월영도, 등) 처럼 이 세가지 논리로서 주역도 소개하며 이해를 도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화를 관철하는 두가지 요소만 전제한 이원론 논리는 자연하게
모순을 안고 돌아가는 형편을 목도하는 지혜를 성령이 머문다라고 하는 것과 같읍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이해가 몰록되는 삼위일체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면 성경말씀을 이해하는 것은 사실 어렵다 이 말씀과 같읍니다.
그러므로 계율을 논하고 신앙으로서 믿음을 충실히 하는 가운데 직관이 떠야만 사도바울처럼 성령의
지혜를 마음에 머물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빌어 지혜를 말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도불교의 용수존자의 중관학이나,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지혜를 논하는 사도바울의 대화론이나
모두 O 을 논하는 지혜를 지닌자가 된 것입니다.
이 세계는 공간이 아무리 넓고 멀고 깊고 측량하기 어려워도 공간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입니다.
공간의 관점을 비교우위학으로 논 한다는 자체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삶과 죽음을 이원적으로 접근해봅시다, 공간학으로서는 하나입니다, 단지 서로 이원적으로
서로를 의존하는 비교로서 언어개념이 탄생되고 이 사조에 의하여 본원적 공간과 시간의 초월된 개념인
허공을 잊어버린 결과와 같읍니다.
삶이 없으면 죽음도 없읍니다, 이 삶과 죽음을 꽉 잡고 양면적으로 놔주지 않는 것이 있는데 O 입니다.
삶도 O 에 의해서 죽음도 O 에 의해서 그 모탈에서 굴러갈 뿐입니다.
물질이 회전운동한다면 구심점이 있듯이 中 의 O 점은 항상 상존하여 양면을 잡고 굴러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늘 꾸준하게 참구하고 계율을 지키면서 공부하다보변 자연하게 눈에 띄는 것이
성령의 말씀으로 O 은 온전하게 들어오게 되어있읍니다. 이를 지혜라 사도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자 공부할 나름입니다. 공부하셔야 합니다. 오로지 성인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미 O 이 내재되어 알게 모르게 삼위일체 운동을 스스로 작용시키며 가돋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문명세계에서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논하는 자들의 각론이 갈라지고 도리어
성경말씀도 철학적으로 접근한다거나 많은 경험을 지닌자 들 조자조금 안다는
진리에 대한 개념이 바르지 못하여 분분하며 갈등을 초래하는 가 하나며는 하나를 몰라서 입니다.
하나를 모른다는 것은 분석적 요인의 개념적 접근은 온전함의 갈래일뿐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온전함음 빛입니다.
생명의 이야기이며 빛의 이야기입니다.
빛은 삼각운동을 하면서 O 으로 굴러가며 항상 공전하면서 자전합니다.
그런고로 온전한 빛을 모르면 절대 성경말씀의 이야기는 어렵게 전개되고 난해하고 각론으로 벌어지게
된다 이 말입니다.
오로지 계율을 지키고 참되게 매일 나날이 성경말씀을 참구하시기 바랍니다, 왕도가 없읍니다.
7절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하나님의 비밀가운데 있는 지혜입니다.
이것은 감춰졌던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해 창조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But we speak the wisdom of God in a mystery , the hidden wisdom which God ordained before the ages for our glory.
참고) 하나님의 비밀가운데 지혜를 7절에서 사도바울이 말 하고 있읍니다, 표상점인 數 에 대하여
항상 친근하도록 해야 합니다, 빛을 7 이라 말하고 일주일은 빛의이야기라는 사실을 이애해야 합니다.
여기에 빛은 7 로 굴러가는데 하나님이 운영하십니다, 이를 "하나님의 비밀 가운데 있는 지혜"
입니다. 이것은 감춰졌던것이라 세상의 지혜로서는 목도 할 수 없는 비밀 공간이며 십방이 아우러져
비추는 영광(glory) 입니다, 영광이라 O의 광명을 영광이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지혜로서
배겅들의 모든 온전한 작용을 티끝하나 없이 모두 온 누리를 각자의 행함과 같음으로 항상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이 하나님의 지혜의 뜻을 이야기 하고 있는것입니다
8절
이 시대의 통치자 중 어느 누구도 이 지혜를 깨닫지 못했읍니다.
그들이 깨달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참고) O 을 아는 지혜를 지닌자가 통치자 라면 O 을 운영하시는 주님을 십자가에 처형하지 못할 것입니다.
O 을 훼함에 따라 같음으로 반연하여 O 에 따라 스스로 멸망해 버리는 것을 이해하는자 만이 O 의 지혜를
아는 통치자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는 힘이나 권력의 삼윌일체 3 으로 O 을 행하였으므로 7 의 빛 을 받아야 합니다. 3+O+7 로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부자나 권력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바늘구멍에 낙타가 들어가는것 보다 더 어렵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반연하는 O 의 여호아선이기 때문입니다. <방편으로 이름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멘-
9절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읍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을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였다.
참고) 사람의 인체에 달려있는 눈 귀 코 혀 접촉 앎 의 여섯가지 감각운동으로 외부의 눈으로 보는 세계
귀로듣는세계 코로냄새맞는세계, 혀로 맛을 보는 세계, 접촉으로 느낌을 받는 세계, 이로서 앎을 (지각) 내는
여섯가지 경계세계가 또 있고, 이로서 눈으로 내는 생각, 귀로들어내는 생각, 코로냄새를 맡고 내는 생각.
혀로 냄새를 맡고 내는 생각< 감각>, 접촉으로 느끼는 생각, 알아차림으로 내는 지각, 등 6 가지 생각이 합쳐서
6,6,6 으로 합하면 18 인바 십방의 십진으로 180 도 반경만 봄이니 온전한 O 률인 12,12,12 의 36 의 십방을
보지 못하는 것을 " 눈으로 보지 못하였고, 귀로 듣지 못하였으며, 마음으로<감각,오온신경>으로 깨어나지 못하였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예수께서 6,6,6 짐승표를 물고 있는 백성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사도바울께서도 6,6,6 짐승표를
물고 잇는 통치자 들도 바르게 비판하는 것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치가 분명하게 성경말씀에 나옴에도 여러 목사나 성직자들은 6,6,6 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함은
빛의 온존함과 삼위일체를 자각하지 못하고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르게 보는자는 사도바울의 이 말씀을 굳건하게 믿을 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6,6,6 을 전부로 여기며 살아내는 백성들은 모두가 우상을 숭배할 수 밖에는없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를 항상 지니기 때문입니다, 이를 어리석다 하는 것입니다.
10절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 지혜를 우리에게 계시하셨읍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 심지어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속속들이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참고) 이를 영광이라 합니다, 6,6,6 의 반경만 보고 이와 같음을 행하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스스로 내재하여
있으면서 모든 생명성품들을 온존하게 다 비추시고 백성들의 각기 작용에 대하여 반연하여 돌이켜 비추어주므로서 O 을 운영하시는 것이므로 광명천지의 밝음으로 티끝하나 다 모자람이 없이 다 같음으로 비추시고 있기
때문에 "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속속들이 살피시고 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해서 2장 11 절 부터 소개하겠읍니다.
참고) 이치를 부연해서 방편의 이해도를 사용하여 이치로 소개하지만 실제로 영적인 감흥은
생각이나 논법으로 목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스스로 체험이며 일대일로
대면하는 비밀스러운 충만임을 소지 해야 "꿈에서 깨어남이라" 라고 할 수 있겠읍니다.
단지 이치는 믿음에 큰 도움을 줄 수 있읍니다. -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