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증 근무력증 고교생, 파룬궁 수련으로 건강 회복
글/ 산둥성 청년 제자
[밍후이왕] 나는 고3 여학생이며 아버지는 파룬궁을 수련하신다. 내가 어렸을 적에 아버지는 늘 나에게 파룬궁의 아름다움을 말해주셨고, 간단한 법리를 알게 됐으며 수련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올해 5월 경 내 몸에 이상 현상이 나타났다. 고2 때 침실과 교실이 모두 4층이었는데 층계를 오를 때 힘이 들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못했다. 나는 이는 운동이나 영양이 부족한 정도로 이해했고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달리기를 할 때 내 상태가 이전과 같지 않음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우리 학교는 월요일 아침 국기게양식을 하는 외에 기타 요일은 달리기를 한다. 4백미터가 한 바퀴이며 두 바퀴를 달려야 했다. 나는 원래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었는데 이상한 것은 달리기가 끝나면 다리가 너무 풀려 통제가 안 됐고 몇 발자국 걸으면 당장 쓰러질 것 같았으며 몇 번은 정말로 하마터면 길에서 쓰러질 뻔 했다.
나중에 날씨가 더워 학교 측에서는 한 바퀴로 줄였다. 그러나 내 체력은 갈수록 떨어졌고 4백 미터도 달릴 수 없었다. 매번 뒤에 섰던 친구들이 격려해줬고 옆 친구가 붙잡고 달려서야 겨우 앞 친구를 따라갈 수 있었다. 두 다리는 마치 제자리에서 달리는 것 같았고 발을 내딛기 어려웠다. 나는 조금 걱정됐으나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여름방학에 부모님은 나를 학원에 보내셨고 난 매일 버스를 타야 했다. 그러나 길을 걸을 수 없었다. 무릎 관절이 굳어져 굽힐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다리가 매우 힘들고 매우 무거워 다리를 옮길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좀 빨리 걸으려면 다른 한쪽 다리는 통제가 되지 않아 꿇어앉아야 했다.
짧은 50미터 길을 나는 매우 긴 시간 걸어야 했다. 마지막에는 버스가 7,8미터 앞에 있어도 그냥 놓치곤 했다. 두 다리를 완전히 사용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나는 그때 완전히 무너졌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연속 며칠 모두 이러했다.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으나 크게 관심이 없으셨다. 그냥 날씨가 더워져 사람이 무기력해진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여름 방학이 1개월 지나갔다. 이 한 달간 이런 증상이 계속됐고 두려움도 날마다 깊어졌다. 아버지는 날 데리고 병원에 가셨다. 신경내과에서 뇌파 검사를 하고 혈액검사를 했으나 모두 정상이었다. 검사결과를 보고 나는 내심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아마 심리적 문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고 다리 상황도 확실히 좀 호전이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두 달 가까운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있을 때 이번에 나는 정상적으로 음식을 씹을 수 없었다. 밥 먹는 시간이 길어졌고 음식이 조금만 딱딱해도, 정말로 조금만 딱딱해도 두 볼이 굳어져 씹기 매우 어려웠으며 이로 천천히 갈아야 했다. 조금 휴식하면 좀 나아졌다. 어떤 때는 숟가락을 들 수 없거나 귤껍질을 깔 수 없었으며 손에 갑자기 힘이 빠졌다.
8월 말 여름 방학이 끝나고 나는 학교로 돌아왔다.
그날 부모님이 함께 가방을 들고 기숙사에 가셨다. 아버지가 가장 무거운 짐 몇 개를 들고 어머니도 손에 드셨다. 나는 좀 무거운 책가방을 멨다. 아버지는 큰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셨고 어머니도 빠르게 올라가셨으나 나는 한걸음씩 계단 손잡이를 힘껏 붙잡고 천천히 올라갔다.
그날 날씨가 무더웠고 짐을 옮기는데 바빴으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일부 짐을 5층으로 옮긴 후 내가 아직도 계단을 오르는 것을 보고 좀 화를 내면서 내 가방을 빼앗아 메고 계단을 올라가셨는데 순식간에 사라지셨다.
나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때 정말로 힘이 다 빠져 한걸음을 걸을 때마다 매우 큰 힘을 써야 했으며 5층까지 오르는 일은 정말로 쉽지 않았다.(고3 숙소는 5층이며 교실은 4층이었다.)
짐을 다 옮긴 후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가셨다.
그날 나는 평지에서 정상적으로 걸을 때 갑자기 두 번이나 넘어졌다. 층계를 오르기 힘들었고 내려갈 때는 더욱 힘들었으며 몇 번이나 넘어졌다. 마음속으로 매우 두려웠고 어찌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들도 매우 놀라워했고 어찌하여 길을 걷다가 갑자기 꿇어앉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튿날(8월 25일) 아침 식당으로 식사하러 갔다. 층계를 내려가는데 다리가 후들거리고 힘이 없었으며 관절이 매우 심하게 굳어있었다. 이 5층을 정말로 큰 힘을 써서야 내려갈 수 있었고 중간에 몇 번이나 넘어져 오가는 친구들이 매우 놀랐다.
점심 식사 때 좀 높은 계단이 있었는데 오를 수 없었고 땅에 주저앉았다. 그때는 학생들이 대량으로 식당으로 가는 때여서 주변에 모두 학생들이고 모두들 날 보고 놀랐다.
27일 오후 집에 돌아갈 때 층계에서 나는 두 친구 사이로 걸었다. 결국 걷다가 두 다리가 통제를 잃었고 그대로 꿇어앉았다. 처음에는 일어났으나 두 번째는 층계를 다 내려간 후 또 넘어졌다. 이번에 나는 어찌해도 일어날 수 없었다. 그들이 힘껏 당겨서야 나는 겨우 겨우 지탱하며 일어났다.
28일 시 산자병원에 갔다. 그날은 금요일이고 마침 경험이 많은 교수급 의사가 진찰했다. 결국 기초적인 진단으로 중증 근무력증이었다!
17년간 아무런 질병이 없었던 나에게 있어서 이는 정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나는 이렇게 심한 증세인지 몰랐다.
29일 오후 나는 신경내과에 입원했다. 그날 심전도를 했으나 정상이었다. 이튿날 아침 5시 반 전에 간호사가 피를 뽑았다. 그리고 대소변 검사도 했다. 오전 9시에 근전도검사도 했다. 그건 정말로 고통스런 과정이었다. 의사는 반복적으로 했고 몸에 충격이 매우 컸는데 한줄 또 한줄의 바늘이 반복적으로 근육을 뚫고 들어왔다. 의사가 주의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말을 했으나 나는 여전히 참기 어려운 고통을 느꼈다.
나는 여전히 요행심리를 바랐다. 설마 중증 근무력증은 아니겠지. 의사는 확진할 수 없어 또 다른 한 의사를 불러서 함께 분석했다.
겨우 끝났나 싶었는데 또 CT를 찍었다. 결과가 매우 빠르게 나왔는데 중증 근무력증로 확진됐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부터 주사를 맞았다. 한번에 3병을 맞았는데 위장에 매우 큰 부담을 줬다. 약물은 주로 호르몬제였다. 하루에 3번 약을 먹어야 했고 비타민 B1도 매번 먹어야 했으며 메코발라민 한 알과 순베프라 절반을 먹어야 했다. 또 매일 두 알의 칼슘제를 먹어야 했다.
내 체력은 날마다 하강했고 몇 발작 걷지 못했다. 식사량은 크게 늘어나 배로 됐다. 밥 먹고 활동하지 않고 병실에 있었으나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늘 잠만 잤으며 이런 환경에서는 없는 병도 도질 것 같았다.
6일째 되는 날 매일 잠만 자다보니 나는 아침 4시경에 깨어나 화장실로 가려 했다. 5,6미터 떨어진 거리였는데 입구에 이르러서 머리가 어지러워 하늘땅이 흔들렸다. 나는 문틀을 꼭 잡고 있어서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조금 지나서 어지럼증은 없어졌으나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결과 화장실에서 변기에 앉은 후 또다시 하늘땅이 돌아갔다. 조금 전보다 더 심했고 전신이 떨렸다. 나는 변기를 힘껏 붙잡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으나 매우 길게 느껴졌다. 변기에서 일어난 후 또 다시 어지러워 세면대를 붙잡고 겨우 진정했다.
7일째 되는 날 9월 5일 아침 역시 조금의 어지럼증이 있었다. 이는 입원하기 전에 없던 현상이었다.
아버지는 입원한 이튿날 나에게 파룬궁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며 핸드폰에 사부님 설법 녹음을 복사해 넣었고 ‘전법륜’을 가져오셨다. 나는 배우고 싶었으나 그때의 심정과 병원이라는 환경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법공부할 수 없었고 연공도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아버지는 수련생들과 교류하니 그들은 어서 집으로 돌아와 법공부를 해야 하며 더는 지체하지 말라고 말했다. 나 역시 병원에 7일간 있으면서 21병의 주사를 맞았으나 조금의 호전도 없었고 여전히 씹을 수 없었으며 층계도 오를 수 없었다.
사실 의사도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주사는 사람에 대한 손상이 매우 크며 가장 많게는 7일까지 맞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단 약 한보따리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아버지는 나에게 사부님의 다롄(大連) 설법 동영상을 보여주셨다. 9월 5일 밤 나는 1, 2강을 보았다. 볼 때 잠이 쏟아졌으나 가까스로 다 보았다.
약을 먹지 않았고 약봉투를 열지도 않았으며 2,3알의 칼슘제만 먹었다. 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셨다. 아버지가 파룬궁 공부를 시켜 내가 약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아버지는 나에게 한 번도 약을 먹지 말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는 나에게 여러 번 위장을 상하지 않게 하는 순베프라를 먹으라고 하셨으나 내가 거절했다. 내가 그때 생각한 것은 예전에 아버지는 한 번도 약을 드시지 않았는데 신체가 불편한 것은 단지 수련인의 소업(消業)이라고 하셨던 말씀이었다. 나 역시 수련인으로서 무슨 약을 먹겠는가?
하지만 체력이 확실히 갈수록 안됐다. 소파에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두 손으로 소파를 붙잡고서야 일어났다. 그리고 입이 갑자기 굳어져 웃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주의하지 못했는데 웃을 때 힘이 들었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하고 웃을 때 왜 그렇게 굳어지냐고 물으셨다. 거울을 보니 웃는 모습이 매우 보기 싫었으며 우는 것보다 더 보기 싫었다. 얼굴 표정이 너무 가짜 같았다.
나는 매일 두 강의씩 비디오를 시청했다. 9월 9일에는 9강 비디오를 다 보았다.
아버지는 기대에 찬 눈길로 어떤 반응이 있는지 물으셨다. 아버지는 만약 법공부의 기점이 바르면 4강 쯤 보았을 때 몸에 각종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어떤 느낌이 없으며 여전히 힘이 없다고 말했다. 사실 이 결과에 대해 나는 조금도 뜻밖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설법을 볼 때 진심으로 보지 않았고 마음이 법에 있지 않았는데 사부님이 어찌 인정하시겠는가?
그런 후 아버지는 ‘전법륜’을 보라고 하셨다. 처음에 교란이 매우 커 아버지의 도움으로 나는 겨우 두 강을 보았다. 내가 이어 3강을 보려 할 때 많이 순리로웠고 사상의 방해가 매우 적어졌다.
11일 아침에 나는 스스로 책을 들고 가부좌 자세로 4강을 읽었다. 법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 아버지를 따라 45분 정도 가부좌하면 그때부터 아팠는데 이번은 매우 빨리 아프기 시작했다. 그 아픔은 일반적인 아픔이 아니었고 한곳이 매우 뜨거웠고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픔이 갈수록 강렬해 바늘로 찌르는 것 같았으며 한 번 또 한 번 반복됐다.
나중에 아픔으로 울면서도 책을 들고 큰소리로 읽었다. 비록 아픔으로 매우 괴로웠으나 마음속은 즐거웠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이는 좋은 일이며 사부님께서 신체를 정화시켜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날부터 밤에 연공하면 땀이 비오듯 흘렀다. 제2장 공법과 제3장 공법을 할 때 매우 힘들었고 제1장 공법과 제4장 공법은 조금 괜찮았으나 여전히 어려웠다. 이렇게 하루하루 법을 공부하고 연공했다.
14일 나는 정상적으로 제1장, 제3장, 제4장 공법을 연마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고 매우 감동하셨다. 정말로 기적이었다!
15일은 추석 휴가였다. 그때 병가는 9월 15일까지였다. 곧 9월 15일이 됐으며 나는 정상으로 회복됐고 건강해졌다. 이는 사부님께서 일찍이 배치하신 것으로 생각됐다.
과연 학교에 돌아온 후 층계를 오르내리는데 모두 정상이었다. 여전히 물병 2개를 들고 5층에 오를 수 있었는데 정말로 기적이었다! 만약 파룬궁이 아니었다면 아마 병원에 허약한 몸으로 누워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매우 정상적인 여학생이며 또 정말로 대법제자의 일원이 됐다. 大法을 얻을 수 있음은 얼마나 행운인가!
나는 방금 시작한 신 수련생이며 파룬궁의 이해에 있어서 표면적이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자신이 너무나 행운이라고 느껴진다. 위대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만났고 자비로우신 사부님의 제도를 받았다. 어떤 언어로도 내 심정을 표현할 수 없으며 더욱 많은 인연 있는 사람이 나처럼 이렇게 위대한 파룬따파를 수련하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16년 12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