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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雞林歷史紀行 원문보기 글쓴이: 월성
2024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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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5시경에 눈을 떴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보니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심에 자리 잡은 호텔이지만, 호텔 앞에는 도로가 시원하게 나 있고 주차장에는 몇 대의 차가 있으며 가로수가 많아 숲을 이룬다. 새로 지은 빌딩이나 큰 건물이 곳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새로이 개발된 구역으로 보인다. 호텔의 오른쪽 앞에 인도 건축 양식의 첨탑이 있는 2~3층의 커다란 건물이 내 눈에 띄었는데,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호텔 로비의 문에는 크리스마스 트리와 눈 입자 장식이 아직도 있었다. 또 호텔 로비에는 나무에 붉은 열매와 상서로운 글자를 쓴 붉은 색 종이와 홍등을 달아놓고, 나무 아래에는 재물을 의미하는 조개(貝, 財, 寶)를 그린 붉은 색 종이를 세워 놓았다. 나무의 배경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상징하는 가운데 네모 구멍이 있고 테두리가 둥근 큰 동전 모양의 붉은 색 창을 붙이고, 나무 옆의 벽에는 ‘2024 TET(節)’이라고 쓴 붉은 색 글자를 붙여 놓았다. 법련 거사님을 비롯하여 몇 분이 ‘Happy New Year’, ‘Sam Quang Binh Hotel’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그 앞에 서서 기념 촬영하며 즐거워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붉은 색은 생명의 기운을 발산한다. 음기의 겨울이 다하고 양기의 봄이 시작하는 설날을 맞이하며 새해에는 돈을 많이 벌고 사업이 번창하라는 축원이 담긴 장식이다. 베트남 최대의 명절인 설날, ‘뗏’ 축제가 중국인이 경영하는 이 호텔에도 다가온 것이다.
다른 외국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 식당에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서 7시에 배낭을 메고 동허이의 재래시장 구경을 갔다. 쌀쌀한 기온에 비가 뿌리는 날씨이다. 열대지방이라 여기고 겨울옷을 가져오지 않은 데다 감기로 몸에 열이 나니 오한(惡寒)이 밀려왔다. 아내의 겨울 조끼를 입고 점퍼 차림에 겨울 목도리까지 하였지만 여전히 춥고, 골절당한 왼쪽 발목은 몸무게에 눌려 걷기에 불편하였다.
버스에서 내리니 싱싱하고 향기가 짙은 샛노란 색, 짙붉은 색의 국화와 튤립 다발을 길바닥에 놓고 팔고 있다. 동남아시아를 여행하면 꽃과 과일을 파는 가게가 어디나 있어서 여행자에게 삶의 싱싱한 생기를 전해주어 좋다. 넓은 원뿔 모양의 베트남 모자, 농(Non La, 농라)을 쓴 여인들이 아침 시장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고, 스쿠터 오토바이에 삼십여 마리의 살아있는 오리를 거꾸로 매달고 헬멧에 비닐 비옷을 입은 남자가 지나간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하여 이른 아침부터 시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나 영문도 모르고 거꾸로 매달려 도살장으로 잡혀가는 오리는 생로병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지옥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현장을 생생히 보여주었다. 중생의 고통 소리가 커질수록 관세음보살의 자비심은 한량없이 커지고, 지장보살의 눈물은 바다를 이룬다.
우산을 쓰고 도로를 건너서 하이 산 동허이 시장(Cho Hai San Dong Hoi)으로 들어갔다. 가게가 없는 노점은 천막으로 빗줄기를 피하고 두꺼운 옷을 입고 모자를 쓴 여인들이 가판대에 물건들을 올려놓고 팔고 있다. 용과, 망고, 야자, 대추, 귤, 수박, 바나나, 사과, 배, 포도, 용안 등의 화려한 색에 싱싱한 과일들이 먼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다음으로 내 눈에 들어온 가게는 야채 가게이었다. 여주, 양파, 마늘, 감자, 오이, 양배추, 가지, 청경채, 브로콜리, 토마토, 고수 등 녹색의 생기가 가득하였다. 흰 계란을 수북하게 쌓아 놓은 가게, 여러 종류의 쌀을 비롯한 곡물을 파는 가게, 연잎에 싼 밥, 기름에 튀긴 빵, 쌀국수, 반미 바께뜨 등 먹을거리도 지천으로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두리안이나 카사바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
버스가 섰던 곳으로 돌아오니 가이드 윤 실장과 베트남인 가이드 흥(Hung)이 카페 앞 인도에서 커피를 사 주었다. 커피를 먹지 못하는 나는 사양하고, 아내가 원두커피를 얻어 마셨다. 베트남은 최근에 세계적인 커피 생산국이 되었다. 바쁜 일정의 패키지여행에서 맛보는 노천 카페의 우연한 커피 대접은 망중한의 정취를 선물했다.
시장 구경을 하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야자나무 가로수 너머의 녓 레 강(Nhat Le River, 日麗江)의 강변에 큰 석상이 있는 것이 보였다. 비가 뿌리고 하늘과 강물이 온통 회색이고 석상 뒤로 멀리 다리가 있었다. 카메라로 촬영해 놓지 않으면 영영 동허이 지역의 역사에 있었던 한 인간을 놓칠 것 같았다. 불편한 다리를 하고 도로를 건너 석상을 촬영하러 가까이로 다가갔다. 노를 젓고 있는 슬픈 얼굴을 한 여인의 석상인데, 다섯 명의 남녀 얼굴이 석상의 발밑에 작게 새겨져 있고, 석상 앞에는 큰 향로가 놓여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의 추모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까맣고 윤기 나는 받침대에 베트남어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여행에서 돌아와 카톡으로 베트남인 가이드 흥에게 석상의 주인공이 누군인지 물었다. 그리고 석상에 새겨져 있는 베트남어 글자를 찾아보니 ‘영웅적인 어머니 수옽(ME SUOT ANH HUNG)’이다.
응우옌 티 수옽(Nguyen Thi Suot)이라는 실명을 지닌 ‘어머니 수옽(Mother Suot)’은 1908년 꽝빈성 동허이시 바오닝 시의 중빈 마을에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호치민이 2차 대전 이후 하노이에 입성하여 독립을 선언한 1945년 8월 혁명 이후, 그녀는 생계를 위해 녓 레 강에서 뱃사공 일을 하면서 막 결혼하였고, 4남 3녀를 낳았다.
1964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였다. 꽝빈(Quang Binh) 지역은 남베트남 해방군에 대한 지원을 차단하기 위하여 미국 공군과 해군이 집중적으로 폭격 한 지역이었다. 1966년까지 미국 비행기가 맹렬한 폭격을 할 때도 수백 차례 노를 저어 자신의 임무를 계속 수행했다. 당시 58세의 그녀는 폭격 중에도 공산당 간부, 부상병, 탄약을 나룻배로 실어 나르는 일을 하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수옽 어머니(Me Suot)’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해마다 대략 1,400번을 강 양쪽을 왕복하였고, 1967년 1월 1일, 명예의 전당에 ‘노력 영웅’으로 이름을 올렸다. 1968년 말, 폭격이 심해지자 상류로 이동했고, 그해 8월 21일, 옛 나루터에서 3km 떨어진 남쪽의 바오닝 나루터에서 강을 건너던 중에 미군의 폭격으로 희생됐다. 국가는 그녀를 베트남 민족 해방 혁명의 열사로 추서하였다.
1980년 동허이 마을 인민위원회는 어머니 수옽을 기리는 비석을 녓 르 강의 나룻터 가운데에 세웠다. 현재 녓 레 강의 다리 근처는 뫁 투오(Mot Tuo) 거리이고, 이 거리에 2003년에 조각가 판딘 띠엔이 조각한 석상을 세웠는데, 내가 시장에서 나와서 다가가 촬영한 바로 그 석상이다. 여행 뒤에 찾아본 흑백 사진의 노를 젓는 어머니 수옽의 실제 인상을 단순하고 큰 화강암 석상으로 거의 그대로 표현해 놓은 것을 알고, 조각가의 재능에 놀랐다.
석상을 촬영하고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데 하얀색의 고급스럽고 웅장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 ‘Lotte Cinema(롯데 시네마)’라는 붉은색 글자가 붙어있었다. 가이드가 어제 다낭에서 이곳 동허이로 오며 버스에서 우리나라 삼성 반도체 베트남 현지 공장이 설립되어 베트남인들의 한국 사랑은 유별나다고 하였다. 또 베트남인들이 제일 고급스럽게 여기는 외식은 롯데리아에서 먹는 햄버거와 프렌치 프라이드 포테이토라고 하였는데, 동허이에는 롯데 시네마 극장이 진출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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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돌아나온 버스는 동허이의 서북쪽에 있는 파라다이스 석회암 동굴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렸다. 도로의 양쪽에는 카르스트 지형의 산 아래에 너른 논이 있었다. 벼가 자라는 푸른 들판 가운데의 논에는 몇 사람의 농부가 원뿔 모양의 모자, 농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다. 멀리 산 중턱에는 상평통보 모양의 유네스코 지정 자연유산 마크와 퐁냐케방(PHONG NHA-KEBANG)이라는 흰색 큰 글자가 붙어있었다. 동굴로 접근하는 도로의 양쪽에는 석회암 산들이 이어지고, 계곡에는 청초록색의 맑은 물이 흘렀다. 석회암 성분이 청초록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물빛이 비취색이었다. 도로 가의 마을에는 우리나라의 교회처럼 생긴 고딕식 건축의 성당이 있고, 마을 주변의 공동묘지에는 성당 모양의 크고 작은 묘들이 특이하게 보였다. 그것은 불탑이나 승탑이 사찰의 법당을 모티프로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좁은 숲길을 지나 마침내 버스가 파라다이스 동굴(Paradise Cave)로 올라가는 입구의 광장에 멈추었다. 여기도 입구에는 홍등을 달고 뗏 명절의 분위기가 나도록 장식을 해놓았다. 입장권을 검사하고 전동차로 등산로 입구까지 갔다. 전동차를 운전하는 젊은 아가씨들의 표정이 어찌나 밝은지 가이드 윤 실장은 ‘며느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하였다.
산 중턱에 있는 동굴로 오르기 위하여 비탈진 숲길을 올랐지만 발목이 온전치 못하여 조심스럽게 걸었다. 바나나풀도 있고 강인한 기세의 아름드리 나무가 하늘 높이 자라고 있었다. 나무에 달린 명찰을 보니 나무 이름은 ‘다우 다 쏘안(Dau Da Xoan, Clausena excavata)’, ‘농 모(Nhoc Mo, Polialthia SP)’이다. 잠시 쉬면서 바라보니 건너편 산봉우리가 비안개에 휩싸여 신비롭게 보였다. 오르막길을 오르자니 몸에서 열이 나서 아침의 추위가 물러났다.
중턱에 있는 좁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자 내부는 웅장하였다. 나는 동굴 초입에서 아내와 함께 서서 연하샘이 촬영해주는 사진을 남기고 돌아 나왔다. 아래를 굽어보니 경사가 가파르고 높이가 아득했다. 작년에 부상 당한 발목에 이상이 생기면 큰일이라는 불안감에 동굴 바닥으로 내려가는 투어는 포기하였다. 명나라의 여행가 서하객(徐霞客)도 윈난성을 여행하며 카르스트 지형의 이러한 석회암 동굴을 탐험하고 여행기에 남겨 놓았다. 파라다이스 동굴보다 훨씬 웅장하고 아름다운 석회암 동굴을 몇 해 전에 윈난성을 여행하며 보았기 때문에 아쉬움은 아예 없었다.
동굴 이름이 한자로 천당(天堂)이라 하니 좀 우스웠다. 하늘에 천당이 있고, 땅 밑에 지옥이 있지 않던가! 천당은 본래 불교에서 쓰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기독교의 하늘나라, 천국과 같은 말이 되었다. 그래도 영어로 파라다이스라 하니 서양인들에겐 에덴동산이 떠오를 것이고 동양인들에겐 신선이 사는 선계(仙界)가 연상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다리가 아파서 높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고 돌아 나와야만 했던 나에겐 파라다이스 동굴은 ‘지옥’이었다.
동굴 입구에 있는 너른 데크의 벤치에 앉아 혼자서 일행이 되돌아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역시나 감기 든 몸에 파고드는 바깥의 추위에 오슬오슬 떨었다. 데크 아래에 있는 직원들 휴게실에라도 들어가고 싶어 문 앞에서 얼쩡거리니 안에서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였다. 다시 데크 위로 올라와서 겨울이라 장사를 하지 않는 가게를 두리번거리다가 우리나라 ‘빙그레’ 상표의 붕어빵 아이스크림, ‘싸만코’ 광고가 냉장고에 붙어있어서 괜히 반가웠다. 한 무리의 서양인 관광객들을 데리고 올라온 베트남인 가이드가 영어로 동굴 약도 앞에서 브리핑을 하기도 하였다.
이윽고, 가이드 윤 실장이 체코인 관광객이 뒤에서 밀어주어 쉽게 올라왔다고 하며 먼저 나왔다. 일행이 모두 올라오기 전에 아내와 함께 올라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왔다. 산 밑으로 내려오니 계단이 놓인 지름길로 내려온 일행은 전동차를 타고 벌써 입구로 되돌아 나가고, 윤 실장과 우리 부부만 뒤쳐졌다. 윤 실장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공부를 잘하여 성적이 줄곧 전교 일등을 하였다고 하였다. 아들딸 아이들이 아빠가 몇 년 더 돈을 벌어주기를 바란다며 가이드 일을 힘들어 하였다. 나는 그를 격려하기 위하여 아이들이 아빠를 젊게 살도록 한다며 긍정적으로 말하였고,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파라다이스 동굴에서 되돌아 나와 잠시 쉰 곳은 다크 케이브(Dark Cave) 유원지이었다. 서양인 젊은 관광객들이 머리에 랜턴을 달고 어두운 동굴 속을 탐험하고, 청초록색 물이 넘치는 계곡에서 보트와 짚 라인을 타며 물놀이를 즐기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꾸어 놓은 꽃들이 이방의 나그네를 즐겁게 하였다. 설날인 뗏 명절 무렵 사람들이 집안에 들여놓기 좋아하는 노랑색 꽃이 핀 황매화가 노랑나비가 떼지어 앉은 것 같았다. 붉고 노란 열매가 가득 달린 관상용 고추, 백일홍꽃, 자주색 호접란꽃, 짙붉은 국화가 여행객들을 살뜰하게 맞아 주었다. 무엇보다 오래전에 대구에 사는 작은 처형이 준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나서 작년에 처음으로 우리집 베란다에서 흰 줄기의 꽃을 피워 올린 문주란꽃을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가 있어서 반가웠다. 다크 케이브 유원지에서 돌아 나와 버스가 달리는데 염소 떼가 차도를 점령하고 지나가는 진풍경을 보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기 위하여 시골 마을의 도로가 식당에 들어갔다. 이층에서 한참을 기다리니 테이블 가득 음식을 차려주었다. 엷게 편 쌀 종이에 오이나 닭고기, 쌀국수, 향기나는 채소를 양념을 곁들여 싸서 먹는 베트남 음식, 분짜이었다. 감기로 오한이 들어 뜨거운 국물이 그리운 나는 차갑게 식어 있는 음식이 당기지 않았고, 튀김 닭고기가 딱딱하여 먹기에도 불편했다.
3
파라다이스 동굴의 서쪽에 있는 퐁냐케방 동굴로 갔다. 동굴로 가는 배를 타는 곳에 내리니 여행객들에게 트렉킹용 바지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다. 감기로 오한이 든 몸에 바깥의 추운 날씨는 고통스러웠다. 몸이 성한 사람들도 두꺼운 옷을 챙겨오지 못하여 버스에 타면 히트를 켜주기를 바랐고, 호텔방에서 전기장판이라도 이용하고 싶어 하였다. 하지만, 여름이면 수은주가 섭씨 40도 위로 치솟는 베트남에는 아예 난방의 개념조차 없었다. 여름이면 마루에서 낮잠을 즐기고, 겨울이면 구들목 이불 밑으로 두 발을 넣었던 고향집이 그리웠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비싸고 품질이 좋지 못한 줄을 알았지만, 등산용 엷은 바지를 가격 불문하고 무조건 사서 여름 청바지 위에 껴입었다.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엔진을 단 보트가 강물 위로 달렸다. 구명조끼가 추위를 조금이라도 막아주어 고맙기조차 하였다. 만고에 변함없이 푸른 석회암 산봉우리가 열을 지어 강을 따라 이어지고, 강변의 마을마다 첨탑이 솟은 성당과 강으로 내려가는 나루가 보였다. 강바람이 쌀쌀하지 않고 날이 맑고 공기가 훈훈하면 이방의 나그네들에게 더없이 평화로운 정경을 선사해 줄 강촌들이었다. 관광객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는 보트들 사이로 가끔 그물을 들고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도 보였다. 이삼십 분은 달리던 보트가 수십 미터 높이의 바위 절벽 앞에서 엔진을 꺼고서 멈추었다. 강물이 바위벼랑 밑에 뚫린 동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굴의 오른쪽에는 나무숲 속에 가게들이 보이고 그 앞에 나루에서 동굴을 탐험하고 나온 사람들이 돌아가는 배를 다시 타고 있었다.
보트의 뒷자리에서 배를 조정하던 뱃사공 아버지 곁에 앉아있던 열두어 살 먹은 딸아이가 보트의 테두리를 밟고서 천막 지붕을 걷어내었다. 그리고 뱃머리에서 맨발로 노를 저으며 배 뒤의 아버지와 호흡을 맞추어 가며 배를 동굴 속으로 저어갔다. 효녀 뱃사공을 보고 다른 배에 탄 일행이 아동 학대라며 농담을 건넸다. 일행이 이름과 나이를 묻고 학교는 다니지 않느냐며 물었지만, 영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수줍어하는 아이는 순수한 얼굴로 웃음을 지으며 답을 대신하였다. 안쓰럽게 소녀를 본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투영된 것뿐이었다. 가족애가 깊은 베트남 사람들의 건강하고 순수하고 행복한 생활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어둑한 동굴의 곳곳에 조명이 켜져 있고, 불상 위에 달린 닫집처럼 거대한 연꽃 모양의 종유석이 있는 천정에는 박쥐들이 날아다니고 떼를 지어 재잘재잘 소리를 내었다. 합장하고 서 있는 나한을 닮은 종유석, 히말라야의 빙하처럼 보이는 절벽이 보였다. 한참을 강물을 거슬러 들어가던 보트에서 동굴 속 모래가 쌓여 있는 물가에서 내렸다. 동굴의 다른 출구를 따라 나오며 본 종유석 기둥들은 신들이 사는 비밀의 방에 쳐져있는 커튼 같았다. 또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을 닮은 종유석이 천정과 바닥을 이어 놓기도 하였다. 석회암이 지하수에 녹아내리다 침전된 곳에는 계단식 논을 닮은 지형을 이루어 놓았다. 윈난성을 여행하며 김희선이 영화 ‘신화(神話)’를 촬영한 곳이기도 한 쿤밍의 쥬상(九鄕) 석회암 동굴에서 본 ‘신전(神田)’이나 튀르키에의 유명한 관광지 파묵칼레가 생각났다. 가파르고 높은 계단을 오를 때는 계림샘이 손을 내밀어 도와주었다.
동굴 속 강물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나오니 들어올 때 볼 수 없었던 풍경이 홀연히 눈앞에 펼쳐졌다. 배를 타고 들어왔던 입구의 바깥에서 빛이 어둑한 동굴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마치 동굴의 반대편 출구 같았다.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서 묘사한 그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들어가는 돌문이 눈앞에 나타난 것도 같았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에, 무릉(武陵) 지방 사람이 고기잡이를 하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루는 시내를 따라 가다가 길을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잊어버렸다. 홀연 복숭아나무 숲을 만났는데, 시내의 양쪽 언덕 수백 보 되는 땅 안에 다른 나무는 없고 향기로운 풀이 산뜻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펄펄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어부는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며 그 숲 끝까지 가보려고 하였다.
숲은 시냇물의 발원지에서 끝나고 거기에 산이 하나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 입구가 있었는데 빛이 새나오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리고 입구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매우 좁아서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하였다. 다시 수십 보를 가니 툭 트이며 밝아졌다. 토지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가옥이 가지런하게 늘어서 있고, 비옥한 밭과 아름다운 못과 뽕나무며 대나무 같은 것들도 있었다. 밭 사이의 길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과 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렸다. 그 가운데에서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밭을 갈고 있었는데, 남녀의 옷차림이 모두 바깥세상의 사람들과 같았다. 노인과 어린이 모두 기쁜 듯이 저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부를 보고는 크게 놀라워하면서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해주자 곧 그를 초대하여 집에 데리고 가서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고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모두 몰려와서 바깥세상의 소식을 물었다. 그들이 말하길 "선조가 진(秦) 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처자식과 마을 사람을 이끌고 세상과 떨어진 이곳에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아 마침내 외부 사람과 단절이 되었습니다."고 하면서, "지금이 어느 시대인가요?" 하고 물었다. 한(漢)나라가 있은 줄조차 모르니, 위진(魏晉)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이 어부가 자기가 들은 것을 하나하나 그들을 위해서 자세히 말해주니, 모두 탄식하고 놀랐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또 어부를 초청하여 자기들 집으로 데리고 가서 모두 술과 밥을 내놓고 대접했다. 며칠을 머물다가 작별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마을 사람이 "바깥세상 사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고 하였다. 어부가 나와서 배를 찾아, 지난번의 길을 따라가면서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고을에 이르러 태수를 만나서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아뢰었다. 태수가 곧 사람을 보내 그가 가는 곳을 따라가 전에 표시한 곳을 찾게 하였으나 끝내 길을 잃고 더 이상 가는 길을 찾지 못했다.
남양(南陽)의 유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였는데,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그곳을 찾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들어 죽었다. 그 뒤로는 마침내 그곳을 찾는 자가 없었다.”
-이치수 옮김, <도화원기(桃花源記)> <<도연명 전집>>
중국문학사에서 전원의 삶을 본격적으로 문학의 소재로 삼았던 도연명의 이 도화원기는 동아시아 사람들의 삶과 문학과 미술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세상살이의 온갖 근심 걱정과 전란의 고통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의 사람들은 복사꽃이 만발하고 아이들과 노인들이 웃으며 살며, 논밭을 갈고, 누에를 치며 평화로이 살아가는 이상향을 늘 그리워하며 살아왔다.
세종대왕의 아들로 태어나 형인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은 서화(書畵)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꿈에 도원에서 노닐고 와서 궁중의 화원, 안견(安堅)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사흘 뒤에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가 완성되었다. 몽유도원도에 붙인 안평대군의 송설체 발문이 베트남의 퐁냐케방 동굴을 돌아 나올 때 생각 날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아! 그것은 이방을 여행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정묘년(1447) 7월 20일 밤, 자리에 눕자마자 정신이 아른아른하여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인수(仁叟 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 아래에 당도하니, 층층 멧부리가 우뚝 솟아 있고, 깊은 골짜기가 그윽하고 조촐하며 복숭아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다. 희미한 오솔길이 숲 밖에 다다르자 갈라졌으므로 서성대며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한 사람을 만났는데, 산관(山冠)과 야복(野服) 차림으로 길게 읍례(揖禮)하며 나한테 이르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굽어들어 골짜기로 들어가면 도원(桃源)이외다"라고 했다.
내가 인수와 함께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찾아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계곡물은 돌고 돌아 거의 일백 굽이나 휘어져나가 사람을 홀리게 한다. 골짜기에 들어가자 동구가 드넓게 트여서 사방 2, 3리쯤 될 듯했다. 사방에는 산이 바람벽처럼 높이 솟아 있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곳의 복사꽃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아지랑이가 떠올랐다.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사립문은 반쯤 닫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었다. 앞 시내에는 조각배 하나가 물결 따라 오락가락했다. 그 정경이 소조(蕭條, 쓸쓸하여)하여 선부(仙府, 신선의 세계)와 같았다.
이에 서성이면서 오래도록 둘러보고는, 인수한테 이르기를 "한유(韓愈, 자 退之)가 바위에다 걸침목을 걸치고 골짜기를 뚫어 집을 지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여기가 도원동(桃源洞)이다."라고 했다.
곁에 두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최항, 신숙주 등으로, 함께 찬운(撰韻, 동국정운 편찬하는)하는 자들이다. 모두 짚신 감발을 하고 오르내리며 실컷 구경하다가 문득 잠에서 깨었다.
아! 사방으로 길이 통하는 큰 도회지는 참으로 화려하고 이름난 벼슬아치들이 노니는 곳이요, 깎아지른 절벽과 외진 골짜기는 조용히 숨어 사는 은자들의 거처이다. 몸에 화려한 관복을 걸친 자들은 발자취가 깊은 산림에 미치지 않고, 바위와 샘물 등 자연에 정을 둔 사람들은 꿈에도 대궐 조정을 바라지 않는다. 고요함과 시끄러움은 본디 길이 다르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라 하겠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晝之所爲 夜之所夢)'라고 했다. 나는 궁중에 몸을 담아 밤낮으로 하는 일이 많은데 어째서 꿈이 산림에까지 이르렀던가? 또 갔더라도 어떻게 도원에 이르렀더란 말인가? 또 좋아하는 사람이 많거늘 도원에 노닐면서 하필이면 이 몇 사람만 따르게 되었던가? 그것은 내 성품이 고요하고 외딴곳을 좋아하며 평소 자연을 그리는 마음을 품고 있던 데다가, 이 몇 사람과의 사귐이 한층 두터운 까닭에 그런 것이리라.
그리하여 가도(可道 안견)에게 명하여 내 꿈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다만 옛날부터 일러오는 도원이라는 곳이 진정 이것과 같았을지는 모르겠다. 뒷날 관람자가 옛 그림을 구해서 나의 꿈과 비교해본다면 반드시 무어라 할 말이 있을 것이리라.
꿈을 꾼 지 사흘째, 그림이 완성되었다. 비해당(匪懈堂)의 매죽헌(梅竹軒)에서 쓴다.
-안평대군 지음, 심경호 옮김, <몽유도원도발문> (심경호, <<안평, 몽유도원도와 영혼의 빛>>)
퐁냐케방 동굴 투어를 하고 배를 타고 돌아오는 내 머리 속에서 생각은 가지를 치고 마인드 맵을 그려나갔다. 오래 전에 읽고 번역한 병와 이형상과 청성 성대중의 여행기에도 이상향인 복사꽃 핀 마을이 등장한다.
경주부윤을 사직하고 내 고향 영천의 금호강 언덕 위에 호연정(浩然亭)을 짓고 머물렀던 대학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은 여헌집(旅軒集)에 실린 <입암기(立巖記)>를 읽고 꿈에도 가고 싶었던 영천 땅, 입암(立巖)으로 1700년 봄에 4박5일 간의 여행을 감행하였다. 신진 관료인 두 벗, 완귀정(玩龜亭)의 성재(省齋) 안후정(安后靜)과 청백리인 청풍당 박영손과 노계 박인로의 후손인 석연(石淵) 박성세(朴聖世)와 함께 한 길이었다.
“말을 달려 입암의 아래쪽 입구인 임리(林里, 오늘날 영천댐 입구에 있는 마을)에 닿았다. 그곳은 여울목 위로 수십 길의 절벽을 이고 있고, 여울목 아래로 백 그루 가까운 늙은 버드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돌길 잔도(棧道)가 벼랑을 따라 이어지고 모래 냇물이 길을 둘러싸고 흘렀다. 그곳 또한 그윽한 맛이 빼어난 곳이어서 말을 치달려 지나가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산에는 호환(虎患)이 많고 날은 또 저물어 조심하지 않아서 범에게 잡아먹힐 우려가 있어서 채찍을 쳐서 골 안으로 들어갔다. 문득 뽕나무와 삼밭이 있는 세계, 무릉도원이 펼쳐졌다(朱熹의 武夷棹歌, 九曲將窮眼豁然 桑麻雨露見平川 漁郞更覓桃源路 除是人間別有天). 골마다 논밭에서 농부가 소를 몰아 쟁기질을 하고, 계곡마다 시냇가에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초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났다. 병풍에 은은하게 그려진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눈이 즐거웠다. 내가 두 벗에게 말했다. “참으로 이른바 ‘골이 좁아서 길이 없을 것이라 의심하였는데, 산이 열리고 홀연히 촌이 있구나.(文谷 金壽恒의 시, 峽束疑無路 溪窮忽有村)’라고 한 시구 그대로이네.”라고 하였고, 이 말에 모두 공감하였다. (驟到於立巖下口之林里。灘上戴數十仞絶壁。下蔭近百株老柳。石棧緣崖。沙川擁路。是亦幽趣所勝。豈欲倏爾馳過。而山多虎患。日勢且暮。恐失謹愼之戒。强策而入洞。則便是桑麻世界也。耕牛犁夫。間間於原野。茅茨炊烟。谷谷於山澗。望若畫屛隱映而悅目。余謂兩友曰。眞所謂峽束疑無路。山開忽有村也。僉曰諾。)
-이형상 지음, 김희준 역주, <입암유산록(立巖遊山錄)>
내연산 계곡의 지형은 보경사에서 삼용추까지의 하단과 삼용추 위에서 내연산 수목원까지의 상단으로 나누어진다. 상단의 계곡 가에는 예로부터 민가들이 많이 분포하였다. 지금도 시명리(時明里), 심양리(潯陽里) 같은 마을 이름이 남아 있고, 꽃밭등(嶝), 삼거리, 산남의진의 제2대 총수 정환직 선생이 동대산 전투에서 패배하여 은신하다가 체포된 불밭(火田) 같은 지명이 남아 있다. 정조의 총애를 받은 문장가로 흥해 군수로 재직하던 청성(靑城) 성대중(成大中, 1732-1812)은 1783년 음력 8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병모(李秉模, 1742-1806)가 고을을 순시할 때 그를 모시고 내연산을 유람하였다. 그는 금강산에도 없는 장관을 펼쳐 놓은 삼용추(三龍湫) 폭포에 와서 그 상류에 있는 은폭 주변의 풍경이 도화원기에 나오는 것과 흡사하다며 훗날 꼭 한번 가고 싶어 하였다.
”계묘년(1783) 중추(음력 8월)에 안찰사(관찰사) 이공을 따라 청하 내연산으로 들어갔는데, 안찰사 공께서 그 때 행부(行部-고을을 순시) 하여 청하 고을을 지나가셨다.
내연산 입구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이 있어서 회재(晦齋) 이(李) 문원공(文元公, 이언적)을 제사 모시는 곳인지라 말에서 내려 숙연하게 지나갔다. 보경사(寶鏡寺)에 이르렀는데, 절은 한나라 명제 (明帝)때 창건하였고, 이르기를 예전에 53곳의 암자가 있었다 한다. 지금은 거의 모두가 폐허가 되었지만 영남 좌도의 거찰로 불려진다. 절에 고려 원진국사(圓眞國師)의 탑비가 있으니 비문은 이공로(李公老)가 지었다. 빗돌은 떨어져 나가고 이끼가 잠식하여 글자의 반은 읽을 수가 없었다.
가마를 타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용추(龍湫)라고 하는 것을 보았는데 절에서 겨우 10리 떨어져 있었다. 돌길을 예닐곱 차례 꺾어 오르니 험준하여 가마꾼이 반밖에 지날 수 없고, 길이 자주 끊겨 잔교(棧橋)로 이어 놓았다. 벼랑은 바투 솟았고 계곡은 내달렸다. 낭떠러지로 여울물이 격렬하게 쏟아지니 폭포라 할 만 것이 10곳이 넘었다. 용추에 걸음이 이르러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고, 옆걸음으로 경사진 벼랑을 지나 위험한 곳을 밟고 서서 보니 비로소 장관이었다. 거꾸로 걸린 폭포수가 열 몇 길이어서 날아 쏟아져 돌에 부딪히니 춤을 추는 듯, 우박이 튀는 듯, 눈이 날리는 듯하며 폭포수가 달려 떨어지는즉 못을 이루었다. 치솟은 석벽이 둘레를 감싸고 새어든 햇살이 그 가운데로 뚫고 들어오며 물빛이 그윽하고 검푸르니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대개 신이한 물건(용)이 못 속에 엎드려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학소대(鶴巢臺)가 있으니 오싹한 돌기둥이 하늘을 찌르고 사방이 깎아질렀으나 위는 평평하여 유산객이 혹 이르기도 한다. 벼랑 틈의 지름길로 산정으로 올라가면 대비암(大悲庵)이 있다. 명승 의민(毅旻) 스님이 그곳에 머무나 연세가 많고 병이 있어서 산을 내려오지 못하였다. 나 또한 위험한 것을 꺼려 그곳에 가보지 못하였다. 암자의 오른쪽에 계조암(繼祖庵)이 있고, 그 위쪽에는 내원암(內院庵)이 있다.
계곡물을 거슬러 오르면 제일가는 폭포를 만나니 기세는 아래의 용추 폭포보다 다소곳하지만 예쁘고 조용한 맛은 그보다 낫다. 폭포 곁에 돌문이 열려 있고 다니는 사람의 발자취가 드문데 민가 열 몇 집이 계곡 가에 있다. 촌락에 닭과 개가 있는데,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源記)>가 그리는 풍경과 꼭 닮았으니 내연산의 깊숙한 곳이 여기가 된다. 옛날의 이른바 신선이 산다는 ‘복지동천(福地洞天)’이란 것이라 거의 이를 만하다. 가을 기운이 고결하고 다리가 튼튼하면 꼭 한 번 그곳에 가보고 싶다.
또한 그 위로 삼동석(三動石; 내연산 수목원 아래에 있는 선바위와 그 위쪽의 두 바위. 세 바위는 솥발처럼 벌려있다. 선바위의 상부는 성덕대왕신종처럼 생겼고 하부와 갈라져 있다. ) 고개가 있는데, 볼 만하다고 한다. 귀석(龜石; 사자폭의 두 물줄기 사이의 바위),무풍계(舞風溪;삼용추에서 보경사까지의 계곡),낙하교(落霞橋, 太平橋; 문수대에서 사자폭으로 가는 벼랑 위의 길에 있다.),한산대(寒山臺, 보현암 앞의 암대),습득대(拾得臺, 古문수암 앞의 암대, 고문수암은 보현암 동쪽 곁에 터가 있다.),기화대(妓花臺; 이른바 상생폭이라 불리는 사자폭포의 바위벼랑)는 모두 사명당(四溟堂) 유정 대사(惟政大師)의 기록에 있으나 지금에 절의 스님들은 또한 아는 자가 적다.
내연산은 옛부터 물과 돌로 칭찬되고, 봉우리는 그리 기이하고 특이하지는 않지만, 밝고 빼어난 기운이 있다. 산 그림자는 허공을 띠고 족히 사람을 고무시키는 힘이 있으니 명산임이 분명하다.
밤에 암자의 선방(禪房; 아마도 적멸암일 것이다. 보현암 서쪽 가까이에 있었던 적멸암은 등산로 길목에 있었고, 1587년 해월 황여일 일행도 여기서 묵었다.)에서 묵었다. 별빛과 달빛이 산에 가득하였고 새벽에 비가 조금 뿌렸다. 다음날 안찰사 공은 영덕을 향하여 길을 나섰고, 나는 흥해 관아로 돌아왔다.”
-성대중 지음, 김희준 역주, <유내연산기(遊內延山記)>
동굴에서 돌아나와 다시 배를 타기 위하여 나루로 가는 중간에 관광상품을 파는 노점이 있었다. 호치민과 보 응우엔 지압 장군의 사진이 들어있는 기념품이 눈에 들어왔다. 주인 아주머니는 사진 속 인물의 이름을 묻는 나에게 정확한 발음으로 ‘보 응우옌 잡!’이라고 두 차례나 말해주었다.
호치민과 보 응우옌 지압으로 대표되는 베트남 민족은 백 년 동안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였던 제국주의 프랑스와 전쟁을 하였다. 또 냉전체제를 유지하고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으려는 미국을 상대로 얼마나 처절하게 피로 얼룩진 전쟁을 했던가? 박정희 정부는 자원하여 몇만 명의 한국군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베트남 전쟁에서 오천 명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희생되었고, 일만 명의 무고한 남녀노소의 베트남 민간인이 한국군에게 학살당하였다. 미군의 폭격은 물론이고, 네이팝탄으로 베트남 땅은 불바다가 되었고, 지독한 고엽제 살포로 밀림에는 나무가 말라 죽고 새 울음이 멈추었다. 숱한 사람이 죽고,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베트남 민중은 얼마나 전쟁과 병고와 굶주림이 없는 나라를 갈망하였을까? 퐁냐케방 동굴에서 나와 효녀 뱃사공 부녀가 모는 보트를 다시 타고 강바람을 가르며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나루로 돌아왔다. 배에 몸을 싣고 강촌의 정경을 바라보면서 베트남 민족이 외세의 침략 없이 오래도록 무릉도원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기원하였다.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한참 달려서 간 곳은 사구(沙丘)가 사막처럼 넓게 펼쳐진 해안이었다. 강바람을 맞으며 동굴 투어를 하고 온 터라 목에서 시작한 염증이 입천정까지 확대되었다. 그만큼 백혈구가 죽을 힘을 다하여 세균과 싸우고, 몸에는 열이 났으며, 열이 오르는 만큼 오한(惡寒)이 덮쳐왔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날은 흐리고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세찼다. 사륜차를 타고 모래 언덕 위로 달리는 코스에 나서는 것은 나에게 고문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버스에서 내리지도 않고 사륜차를 타고 모래 언덕 위로 질주해 올라가는 사람들의 뒷모습만 창밖으로 지켜보았다. 계림샘도 목감기로 폐렴이 염려되어 버스에서 내렸다가 사구에 오르지 않고 바로 승차하였다.
저녁밥을 먹으려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해안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불편한 다리로 계단을 올라 이층 홀에 마련되어 있는 3개의 둥근 식탁에 나누어 앉았다. 한참 만에 나온 음식은 내가 좋아하는 새우와 조개탕 그리고 초벌구이한 작은 질그릇에 쌀을 담아 지은 밥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돌솥밥처럼 따끈하면 좋으련만, 식은 밥이라 별다른 맛이 없었다. 감기로 인한 오한 때문에 점원에게 뜨거운 물을 달라고 하였지만, 미지근한 물을 가져다 주었다. 다시 바디랭귀지로 뜨거운 물을 요청하였다. 아내는 힘들어하는 나를 위하여 옆자리에 앉아 새우 껍질을 까주고, 국물이 식어서 맛이라곤 없는 조개탕 그릇을 내 앞으로 당겨주었다.
힘들어하는 내 표정을 읽은 미리샘이 나를 보고 발칙하게도 “응정을 부린다!”라고 하였다. ‘응정(응석)을 부린다’고 하는 그 말은 어린 날에 어머니가 막내인 나에게 늘 하던 말이었다. 환갑의 나이가 지나고 백발이 성성한 내가 사람들 앞에서 아내에게 응석을 부린다고 하는 그 말은 지독히도 모욕적이고 충격적이었다. 평소에 계림샘이 서연샘에게 대꾸하는 방식을 무의식 중에 배운 것인지, 나도 모르게 생각할 여지도 없이 찰나의 순간에 손으로 식탁을 치면서 대답을 외쳤다. “아프면 아프다고 해야지, 내색하지 않는 것이 미덕은 아니지 않습니까!” 동석했던 사람들은 난데없는 나의 돌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며 어색한 분위기를 녹였고, 서연샘은 아내가 남편을 지성으로 섬기는 사람이라고 변명해 주었다. 아내와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였고 또 이런저런 연수에서 만나 나와도 구면인 미리샘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샘의 말을 듣고 당황하는 내 마음의 작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찰나에 반박하는 대답을 하고 만 내 부덕이 지금도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의 마음챙김(Mindfulness, 正念) 수행이 부족함을 한탄했다. 폐대간소(肺大肝小)의 태양인 체질인 나는 선천적으로 수용력이 약한 사람이다.
사실, 작년 봄에 발목 골절상을 당해 수술을 하고, 보름 동안 입원을 하였으며, 퇴원하여 한 달 동안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었고, 화장실 출입도 힘들었다. 다친 지 두 달 만에 의사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으로 출근하여 겨울방학이 올 때까지 줄곧 앉아서 수업을 하였다. 체력이 소모되어 목소리는 저절로 연약해지고, 걸으면 발목을 죄는 압박감과 통증, 붓기로 여행하는 그 순간까지 정말이지 힘들었다. 더구나 생각지 못한 바깥의 비바람과 추위, 감기로 목이 붓고 열이 오르고 오한이 나서 입맛은 떨어져 어제 저녁부터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남 보기에 응석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고기잡이배들이 정박해 있는 바닷가 마을을 지나 다시 동허이의 호텔로 돌아오니 저녁 8시가 넘었다. 꽝빈성(廣平省)의 호텔방으로 돌아온 나는 아내가 먹으려고 가져온 '광동탕(廣東湯)'을 마셨다. 아내가 옆방에 있는 서연샘에게 해열제와 꿀과 계림샘이 입는 옷을 빌려왔다. 커피포트로 팔팔 끓인 꿀물과 해열제를 먹고 옷을 여러 겹 껴입은 채 엷고 서늘한 린넨 이불 속으로 몸을 밀어넣고서 땀을 흥건하게 흘렸다. 그리고 다짐하였다. “아! 다시는 베트남에 오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