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 13장 전체의 비유는 사실 제자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말씀하시지만 비유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볼 눈과 들을 귀를 지닌,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다시 그 비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다시 설명하시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요?
사실 마태 13,10에 의하면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물은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물은 것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에 대해 다시 설명하는 것은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비유를 통해 제자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통한 새로운 삶에로의 변화로 나아가기보다,
예수님께 기적을 더 보여달라며 내적 변화보다는 현실적 만족에서 나아가지 못합니다.
제자들 역시 복음을 통한 변화를 체험하면서도 마음이 완고해지는(마르 8,17 참조)
이중성 안에서 혼란을 겪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3가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첫째는 씨라는 복음 말씀의 유효성에 관해 알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씨앗은 자동적으로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길에 뿌려지면, 돌밭에 뿌려지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면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은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효과적으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올바로 자라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씨앗 자체가 가져야 할 책임감입니다.
사실 씨앗이 뿌려진 그곳이 길이던, 돌밭이던, 가시덤불 속이던 상관없이 씨앗은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외부 조건에 의해서 자랄 수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미 씨앗 자체를 지닌 제자들은 성장할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앗을 지닌 이는 씨앗이 올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는 씨앗을 지닌 이들의 용기에 관한 것입니다.
씨앗이 길위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떨어져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제자들이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수많은 씨앗이 좋은 밭에 떨어지지 않는다해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들이 백배, 육십배, 삼심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수가 적어진다고 낙담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작은 어떤 것으로부터도 시작할 수 있고,
그 작은 시작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의 씨앗을 품은 이는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우리에게
씨앗이 지닌 유효성과 씨앗을 품은 이의 책임감,
그리고 씨앗의 힘을 믿고 살아갈 용기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믿음을 흔들고 있고,
우리도 세속적인 것에 더 많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흔들리는 믿음의 세계에 놓인 우리 신자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상기하게 합니다.
주님께 앞으로 나아갈 용기의 은총을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