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위지) 동이전 고구려조 해석
<삼국지(三國志)> 권(卷) 제30 - 위서(魏書) 제30 - 동이전(東夷傳) - 고구려조(高句麗條)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000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들이 없어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면서 산골의 물을 식수로 한다. 좋은 전지가 없으므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충분하지 못하다. 그들의 습속은 음식을 아껴 먹으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큰 집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귀신에게 제사 지낸다. 또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벼슬로는 상가, 대로, 패자, 고추가, 주부, 우대, 승, 사자, 조의, 선인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 동이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말이나 풍속 따위는 부여와 같은 점이 많으나, 그들의 기질이나 의복은 다름이 있다. (고구려에는) 본디 다섯 (부)족이 있으니,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그것이다. 본래는 연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점차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에서 왕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나라 때에는 북과 피리와 악공을 하사하였으며, 항상 현도군에 나아가 (한나라의) 조복과 의책을 받아 갔는데, (현도군의) 고구려령이 그에 따른 문서를 관장하였다. 그 뒤에 차츰 교만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에 오지 않았다. 이에 (현도군의) 동쪽 경계상에 작은 성을 쌓고서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두어, 해마다 (고구려)인이 그 성에 와서 그것을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도 오랑캐들은 이 성을 책구루라고 부른다. 구루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을 부르는 말이다.
(고구려에서는) 관직을 설치할 적에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자는 모두 고추가로 불린다. 연노부는 본래의 국주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을 이은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게 따로 제사 지낸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그 대인은) 고추(가)의 칭호를 더하였다. 모든 대가들도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대가의 사자, 조의, 선인은) 마치 중국의 경이나 대부의 가신과 같은 것으로, 회합을 할 때의 좌석 차례에선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과 같은 열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앉아서 먹는 인구가 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먼 곳에서 양식, 고기, 소금을 운반해서 그들에게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며,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 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가 있으니, 그 이름을 부경이라 한다. 그 나라 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에는 한 쪽 다리를 펴니 부여와 같지 않으며, 길을 걸을 적에는 모두 달음박질하듯 빨리 간다. 10월에 지내는 제천행사는 국중대회로 이름하여 동맹이라 한다. 그들의 공식 모임에서는 모두 비단에 수놓은 의복을 입고 금과 은으로 장식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흡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다.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혈이라 부른다. 10월에 온 나라가 크게 모여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 위에 모시고 가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감옥이 없고 범죄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모여서 평의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 그 풍속은 혼인할 때 구두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몸채 뒤편에 작은 별채를 짓는데, 그 집을 서옥이라고 부른다. 해가 저물 무렵에 신랑이 신부의 집 문 밖에 도착하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청한다.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하면 신부의 부모는 그때야 작은 집(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은 (서옥) 곁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서 장성하면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그 풍속은 음란하며, 남녀가 결혼하면 곧 죽어서 입고 갈 수의를 미리 조금씩 만들어 둔다.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니, 금, 은의 재물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 그 나라의 말은 모두 체구가 작아서 산을 오르기에 편리하다. 사람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익숙하며, 옥저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또 소수맥이 있다. (고)구려는 대수 유역에 나라를 세워 거주하였는데, 서안평현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흘러드는 작은 강이 있어서, 고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 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소수맥이라 하였다. 그곳에서는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맥궁이 그것이다.
왕망의 초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고구려가 호를 정벌하러) 가지 않으려 하여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은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군)의 대윤 전담은 그들을 추격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살해되었다. (이에 중국의) 주, 군, 현이 그 책임을 (고)구려후 도에게 전가시키었다. 엄우는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로해야 함이 마땅합니다.
지금 잘못하여 큰 죄를 씌우게 되면 그들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왕망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우에게 (고구려를) 치도록 명하였다. 우는 (고)구려후 도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에 보내었다. 왕망은 크게 기뻐하면서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국호를 바꾸어 하구려라 부르게 하였다. 이때에 (고구려는) 후국이 되었는데, (후)한 광무제 8년(32, 고구려 대무신왕 15)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면서 비로소 왕의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상제와 안제 연간에 (고)구려왕 궁(태조왕)이 자주 요동을 침입하였으므로, 다시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은 궁이 두 군의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궁이 항복하고 거짓으로 화친을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다. (그 틈을 이용하여) 궁은 몰래 군대를 파견하여 현도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그 뒤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가벼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추적하였다가 군대가 패몰했다. 궁이 죽고 그 아들 백고(차대왕)가 왕이 되었다. 순제와 환제 연간에 다시 요동군을 침공하여 신안과 거향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포로로 사로잡았다.
영제의 건녕 2년(169, 고구려 신대왕 5)에 현도태수 경임이 그들을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희평 연간(172~177, 고구려 신대왕 8~13)에 백고는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였다. 공손탁의 세력이 요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파견하여 (공손)탁을 도와 부산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발기, 작은 아들은 이이모였다. 발기는 어질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옹립하여 왕(고국천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노략질하였고, 또 유망한 호(족) 500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 연간(196~219, 고구려 고국천왕 18~산상왕 23)에 공손강이 군대를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부의 (대)가와 함께 각기 하호 3만 명을 이끌고 (공손)강에게 투항하였다 돌아와서 비류수 유역에 옮겨 살았다. (지난날) 항복했던 호(족)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새로 나라를 세웠는데 오늘날 (고구려가) 있는 곳이 이곳이다.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건너가고, 그 아들은 (고)구려에 계속 머물렀는데, 지금 고추가 박위거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 뒤에 다시 현도를 공격하므로 현도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고구려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지금의 (고)구려왕 궁(동천왕)이 바로 그 사람이다. (위궁)의 증조가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사물을 보았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미워하였다. (궁이) 장성해지자, 과연 흉악하여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나라가 스스로 잔파되는 지경에 이르렀었다. 지금의 왕(위궁)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고 사람을 보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라고 부르는데,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이란 이름을 지었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었으며, 말을 잘 타고 사냥에서 활을 잘 쏘았다.
경초 2년(238, 고구려 동천왕 12)에 태위 사마선왕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사마부왕의) 군대를 도왔다.
정시 3년(242, 고구려 동천왕 16)에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정시) 5년에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되었는데, 그때의 사실은 (관구)검의 열전에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