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불과 1세기만에 한국기독교는 5만여 교회, 10만여 목회자, 1천2백만 성도를 가진 최대의 종교로 성장했다.
90년대 들어와 성장이 주춤하면서 성장지상주의, 물질주의를 반성하고 섬김과 나눔 봉사의 성숙한 교회, 말씀중심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이 일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가 다른 체질의 문화, 외세로 오인되는 풍토속에서도 민중속에 뿌리를 내린 것은 기독교가 사랑과 평화의 종교요, 절대진리를 가진 영혼구원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지 20여년이 지난 1903년 8월 24일 함경남도 원산의 미 남감리교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에는 미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 노울즈 하운셀, 캐나다 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하디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나는 3년 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하디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와 일하다가 1898년에 남감리회에 가담, 강원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개척선교를 했으나 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디선교사의 죄책고백이 있자 당시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함께 죄를 고백하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다.
하디선교사는 이 기도회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죄를 고백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기독인들은 거짓과 불신, 구박과 폭행, 술과 담배, 노름 등의 행동을 회개하면서 사회적으로 윤리적 갱신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당시 원산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도 남감리회 선교사들을 교회로 불러 사경회를 개최하게 됐으며 영적 회개운동은 교파를 초월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산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은 1905년 개성의 남감리회 부흥운동으로 이어지고 1906년 서울과 평양에서 불붙는다. 1905년 8월 장로교와 감리교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외국인 연합교회'를 중심으로 연합사경회를 열었고 9월에는 초교파적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추진키로 결의한다.
1906년 구정을 기해 서울에서는 정동감리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고 평양에서는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남문교회에서 집회를 했다.
이어 평양의 장로교선교사들은 1906년 여름 하디를 초청, 일주일동안 기도회를 개최하고 다시 외국의 부흥사들을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뉴욕의 존스목사가 한국을 방문, 인도와 웨일즈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소식을 전했다. 그는 “조선에서는 누가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느냐, 원하는 자는 거수하고 기립하라”고 외쳤으며 이때 장로였던 길선주(후에 목사가 됨)가 일어났다.
평양기도회는 1906년 12월까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1907년 구정기도회에서 대변화가 일어났다. 1월6일(주일)부터 10일간 장대현교회와 숭덕초등학교 등에서 예정되어 있던 사경회는 첫날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됐다.
그러나 둘째날 낮 집회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김찬성이 인도하던 숭덕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대성통곡하며 죄를 고백했다. 통회자복하는 현상은 길선주장로가 인도하던 반으로 옮겨가 저녁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마루를 치면서 괴로워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통성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이때 처음 나타나 이후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굳어진다. 평양부흥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통성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죄의 자백으로 이어지고 집회때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숭실전문의 한 학생은 간음과 미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고 숭의여학교 숭덕여자소학교에서도 친구를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했던 일,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던 일, 거짓된 행동을 한 것 등을 자복하는 회개의 물결이 계속됐다.
당시 낮기도회와 밤부흥집회를 인도했던 리와 블레어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죄를 자백하는 중간 중간 회중 전체가 통성기도를 하였는데 남자 수백명이 소리내어 하는 통성기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자백하면서 주체할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우리도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양 기도집회는 1월 22일 끝이 났으나 부흥운동은 오히려 이때부터 더욱 불이 붙었다. 길선주장로가 계속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평양부흥운동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계기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선천 곡산 서울 청주 대구의 부흥운동을 가져왔고 1909년 1백만 구령운동으로 이어졌다.
대부흥운동은 당시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첫째 한국인들이 비로소 기독교를 체험했으며 둘째 사회에 윤리적 갱신운동을 가져왔다.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정착시켜 한국적 상황에서 죄로 인식되지 않았던 축첩 노비 술 담배 아편 노름 등이 죄로 인식되면서 사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셋째 부흥운동을 통해 최초로 에큐메니컬운동(연합운동)이 일어났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초월해 연합사업들이 전개됐다.
넷째 한국의 토착적 신앙양태가 교회속에서 뿌리를 내린다. 전통신앙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 새로운 형식의 신앙양태들이 등장한다. 새벽기도회, 성미, 통성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대부흥운동은 사회각성운동, 윤리의 재정립으로 이어지면서 기독교를 가장 신뢰할수 있는 종교로 확인시켰으며 민족의 에너지를 축적해 이후 3·1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주게된다.
[믿음의 유산] 절제운동
기사입력 : 1999.08.19, 00:00
절제란 사전적 의미로는 알맞게 조절하고,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써 제어하는 일을 뜻한다. 성경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는 절제란 자제에 의해 얻어지는 개인적인 적합한 자질이며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훈련이 하나님의 선물들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것을 보존해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 절제운동과 기독교와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한국에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은 한국인의 경제적 궁핍과 건강저해 요인으로 술과 담배 도박 등을 지목했고 입교하는 기독인들에게 금주 금연규율을 권면하기 시작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 죄의 품목에 들어가지 않았던 술 담배 도박 축첩 등이 죄가 된다면서 스스로 이를 자제하고 멀리했다. 회개와 도덕적 각성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한국인을 가장 피폐시키는 것으로 술 담배 도박을 꼽았다. 장로교회가 조직되기 이전, 선교사공의회는 금주와 금연의 지침표까지 만들어 교육시켰다.
초기선교사들은 기독교의 사회구원적 측면에서 절제운동을 함께 펼쳤다. 초기 한국교인들의 생활강령 7개조는 예배,안식일,효도,순결,인가귀도,근면 정직,술 도박 아편의 금지로 되어 있었다. 절제운동이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실천되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기독교인들의 삶이 어느 정도 변화되었는가는 1897년 스피어선교사의 선교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보고서에서 “절제운동으로 간음 주정의 흉악한 죄에서 전환,순결 성서탐독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이후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 사이에 국채보상운동의 일환으로 전국적인 절제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금주 금연함으로써 생기는 경제적 재화를 모아 외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체면을 회복하자는 애국운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 운동은 지속되지 못하고 짧게 끝나고 말았다.
절제운동이 다시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은 대부흥운동 직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다가 3·1운동 이후에는 일본의 한국문화와 정신말살정책에 대항해 애국운동으로 전개됐다.
일본은 3·1운동이 끝난뒤 한반도의 지배정책을 문화정책으로 바꿔 일제의 갖가지 퇴폐문화를 한국에 들여왔다. 일본은 문화통치란 명목으로 민족언론지 등의 창간을 허용하고 청년 사회단체조직을 묵인했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가면극이었을 뿐 치밀하게 한국의 정신과문화를 말살하려는 음모가 깔려 있었다. 일본은 술 아편 공창제도 등을 가져와 젊은 청년들을 해이하게 만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외치며 전국민적 저항운동으로 3·1운동이 일어났으나 조국은 여전히 탄압속에 놓여 있는 것을 보고 허탈해 하던 청년들은 일제가 가져다준 퇴폐문화속으로 빠져 들었다.
당시 일본은 술 담배를 총독부 사업으로 전개해 재정의 상당부분을 주세와 연초세에서 충당했다. 한일합방이후에는 주세등이 급속히 늘어 총독부 예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였다.
한국의 청년들의 건강을 담보로 한 총독부의 이익챙기기,민족정신말살 정책으로 타락해 가는 청년들을 지켜보던 기독교 지식인들은 의식개혁운동으로 절제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한다. 절제운동은 남성들 보다는 여성들이 앞장서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집회를 시작했다. 1923년 5월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에서 틴링을 한국에 파송했으며 그녀는 6개월 동안 서울 평양 개성 해주 원산 광주 대구 재령 등지를 돌며 절제강연회를 열었다. 그해 8월 열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2회 하계 수련회는 금주 금연 공창폐지를 주요 사업으로 채택했으며 9월에는 장로교와 감리교의 여선교사들이 ‘기독교여자금주회’란 이름으로 여자절제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다음해 한국여자절제회가 결성됐다.
한국여자절제회를 조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손메레였다. 이정규 손정규 등의 이름을 갖고 있던 그녀는 상동교회 출신으로 진명여학교와 감리교부인성경학원을 졸업했으며 상동교회 전도부인 이화학당교사로 봉직했던 인물이다.
손메레는 틴링의 순회강연에 동행하고 지방교회와 학교단위로 조직을 결성해 나갔다. 그 결과 150명의 회원이 모였고 15개지방절제회가 조직됐다. 1924년 8월28일 ‘조선여자기독교절제연합회’가 이화학당에서 창설됐다. 초대회장에는 YWCA 창설의 주역이었던 장로교의 유각경이 피선됐고 손메레는 총무를 맡았다.
각 교단들도 절제운동에 동참,감리교는 1930년 각 연회에 절제부를 두어 이 운동을 총괄했다. 또 1933년에 제정한 감리교 사회신경 중 7조에 “심신을 패망케 하는 술 담배와 아편의 제조 판매 사용을 금한다”고 못박았다. 교회는 이화여전 출신 임배세가 작사한 절제계몽가인 ‘금주가’를 1931년 간행된 신정찬송가 230장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장로교는 노회별로 누룩장사를 하는 교인에 대해 그만둘 것을 권하기도 했다. 새문안교회의 당회록에는 “한 교인이 세례를 받기를 원하나 그가 교회를 열심히 섬기지만 직업이 술장사이기 때문에 세례를 줄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여자절제회는 1926년 12월3일 서울기독교청년관에서 열린 창립3주년기념식에서 회장에 유각경 최활란을 선출하고,총무에는 손메레,서기에 문인순 김폴린,회계에 밀러부인 홉스부인을 뽑았다. 새로 회장이 된 최활란은 이화학당 대학과 2회졸업생으로 한국 최초의 신학자이자 정동교회 담임이었던 최병헌목사의 며느리였다.
여자절제회는 1928년 회원수가 3217명,지방수가 52개에 이르는 등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며 전국민적 정신운동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1929년 손메레로 부터 총무직을 물려받은 이효덕은 계속 여자절제회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이에 자극을 받은 남성들이 1932년 ‘조선기독교절제회’를 결성했다. 남성들의 절제회는 해방이후 해체되었으나 지금의 각 교단 남선교회조직,남전도회,면려회 조직을 통해 절제운동이 이어지고 있다.
여자절제회는 현재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회장 여귀옥권사)로 남아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며 한국사회가 방종과 정신적 타락에 빠지지 않도록 등불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한 shlee@kukminilbo. co. kr
[믿음의유산] 대부흥운동
기사입력 : 1999.07.11, 00:00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온지 불과 1세기만에 한국기독교는 5만여 교회, 10만여 목회자, 1천2백만 성도를 가진 최대의 종교로 성장했다.
90년대 들어와 성장이 주춤하면서 성장지상주의, 물질주의를 반성하고 섬김과 나눔 봉사의 성숙한 교회, 말씀중심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이 일고 있다.
초기 한국교회가 다른 체질의 문화, 외세로 오인되는 풍토속에서도 민중속에 뿌리를 내린 것은 기독교가 사랑과 평화의 종교요, 절대진리를 가진 영혼구원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인지 20여년이 지난 1903년 8월 24일 함경남도 원산의 미 남감리교선교지부가 있던 원산교회. 중국에서 선교하던 하이트선교사가 한국에 온 것을 기념해 기도회가 열렸다. 기도회에는 미 남감리회 여선교사 캐롤 노울즈 하운셀, 캐나다 장로회 여선교사 매컬리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하디선교사가 갑자기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나는 3년동안 남감리회가 강원도에 세운 교회에서 애써 일해왔으나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원인이 한국인에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원인이 나한테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정성을 다해 일을 한다고 해도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의 교만과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을 회개합니다”
하디는 캐나다 토론토대학 YMCA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와 일하다가 1898년에 남감리회에 가담, 강원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당시 개척선교를 했으나 별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디선교사의 죄책고백이 있자 당시 함께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함께 죄를 고백하고 성령의 은사를 체험했다.
하디선교사는 이 기도회의 성령체험을 원산교회 주일예배때 설명하며 한국인 교인들 앞에서 다시 죄를 고백했다. 이후 기도회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죄를 고백하고 자복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기독인들은 거짓과 불신, 구박과 폭행, 술과 담배, 노름 등의 행동을 회개하면서 사회적으로 윤리적 갱신운동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당시 원산에 있던 캐나다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도 남감리회 선교사들을 교회로 불러 사경회를 개최하게 됐으며 영적 회개운동은 교파를 초월해 일어나기 시작했다.
원산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은 1905년 개성의 남감리회 부흥운동으로 이어지고 1906년 서울과 평양에서 불붙는다. 1905년 8월 장로교와 감리교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외국인 연합교회'를 중심으로 연합사경회를 열었고 9월에는 초교파적으로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추진키로 결의한다.
1906년 구정을 기해 서울에서는 정동감리교회와 승동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고 평양에서는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남문교회에서 집회를 했다.
이어 평양의 장로교선교사들은 1906년 여름 하디를 초청, 일주일동안 기도회를 개최하고 다시 외국의 부흥사들을 초청해 부흥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뉴욕의 존스목사가 한국을 방문, 인도와 웨일즈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흥소식을 전했다. 그는 “조선에서는 누가 성령충만을 받고자 하느냐, 원하는 자는 거수하고 기립하라”고 외쳤으며 이때 장로였던 길선주(후에 목사가 됨)가 일어났다.
평양기도회는 1906년 12월까지 계속되었으며 드디어 1907년 구정기도회에서 대변화가 일어났다. 1월6일(주일)부터 10일간 장대현교회와 숭덕초등학교 등에서 예정되어 있던 사경회는 첫날 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작됐다.
그러나 둘째날 낮 집회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김찬성이 인도하던 숭덕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대성통곡하며 죄를 고백했다. 통회자복하는 현상은 길선주장로가 인도하던 반으로 옮겨가 저녁집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마루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마루를 치면서 괴로워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함께 통성기도를 드렸다.
통성기도는 이때 처음 나타나 이후 한국교회의 특징으로 굳어진다. 평양부흥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통성기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죄의 자백으로 이어지고 집회때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숭실전문의 한 학생은 간음과 미움, 아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고 숭의여학교 숭덕여자소학교에서도 친구를 서로 사랑하지 않고 미워했던 일,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던 일, 거짓된 행동을 한 것 등을 자복하는 회개의 물결이 계속됐다.
당시 낮기도회와 밤부흥집회를 인도했던 리와 블레어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죄를 자백하는 중간 중간 회중 전체가 통성기도를 하였는데 남자 수백명이 소리내어 하는 통성기도는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자백하면서 주체할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는데 우리도 달리 어찌할 바를 몰랐다”
평양 기도집회는 1월 22일 끝이 났으나 부흥운동은 오히려 이때부터 더욱 불이 붙었다. 길선주장로가 계속 부흥집회를 인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평양부흥운동은 숭실중학교와 숭실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 부흥회를 계기로 일단락됐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선천 곡산 서울 청주 대구의 부흥운동을 가져왔고 1909년 1백만 구령운동으로 이어졌다.
대부흥운동은 당시 한국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첫째 한국인들이 비로소 기독교를 체험했으며 둘째 사회에 윤리적 갱신운동을 가져왔다. 기독교적 윤리의식을 정착시켜 한국적 상황에서 죄로 인식되지 않았던 축첩 노비 술 담배 아편 노름 등이 죄로 인식되면서 사회가 건전한 방향으로 성숙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셋째 부흥운동을 통해 최초로 에큐메니컬운동(연합운동)이 일어났다. 장로교와 감리교를 초월해 연합사업들이 전개됐다. 넷째 한국의 토착적 신앙양태가 교회속에서 뿌리를 내린다. 전통신앙을 기독교적으로 재해석, 새로운 형식의 신앙양태들이 등장한다. 새벽기도회, 성미, 통성기도가 바로 그것이다.
초기 한국기독교의 대부흥운동은 사회각성운동, 윤리의 재정립으로 이어지면서 기독교를 가장 신뢰할수 있는 종교로 확인시켰으며 민족의 에너지를 축적해 이후 3·1운동과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나는데 큰 영향을 주게된다.
/이승한 shlee@kukminilbo.co.kr
[신한국교회사] (13)부흥운동의 시작
기사입력 : 1998.11.04, 00:00
◀ '1백만명 구령운동' 중 평양에서 열린 부흥집회 광경
`그날 밤 길선주장로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 차있었다…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리고 도피할 수 있을까 나는 번민했다.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뛰쳐나갔다'(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 정익로장로의 술회).
`갑자기 길선주씨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방위량(블레어)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다며 보기에도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구르며 회개했다…한 교인이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를 회개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1909년 게일의 `과도기 속의 한국' 중에서).
원산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은 1903년 중국 여선교사 화이트의 내한을 계기로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 모임은 곧 장로교 선교사와 일부 한국인 신도, 침례교 선교사들도 참여한 연합 기도회 모임으로 발전됐다.
기도모임 중에 캐나다출신의 하디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회개하는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3년동안 강원도지역에서 선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했다며 자신의 무능함을 털어놓았다. 그는 무능한 원인을 우월의식과 자만감, 권위주의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은 한국 선교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제공했다. 1904년 1월에 열린 기도모임에서는 롭 선교사가 성령 체험을 하고, 전계은(全啓殷) 정춘수(鄭春洙)도 은혜를 입어 부흥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원산의 부흥운동은 평양으로 이어졌다. `1904년 12월26일 경에 평양 야소교회당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할 때 황해도와 평안도의 일반 교인들이 구름같이 모였다'(대한매일신보 1905년 2월13일자).
1906년 여름에는 평양주재 선교사들의 주도로 계속 사경회가 열렸다. 또 장대현교회 길선주장로가 주도하는 새벽기도회가 매일 계속됐다. 그 무렵 전남 목포에서도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남감리회 소속 저다인 선교사가 사경회를 인도할 때 교인들이 앞다투어 회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격적인 부흥운동은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다. 매년 개최되던 장대현교회 사경회에서였다. 1월13일 주일에 시작된 사경회는 첫날 아무런 감흥없이 지나갔다. 성령의 역사는 14일부터 시작됐다. 블레어 선교사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면서 `결코 혼란이 아니었다. 영(靈)과 성(聲)의 엄청난 조화였다. 나에게는 마치 폭포소리처럼 들렸다. 그것은 여럿이 외치는 소리였지만 하나였다. 그것은 유일하신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 한분이신 하나님께로 들리움을 받는 체험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사경회는 9일동안 계속됐다. 각 처에서 모였던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각자의 죄를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끼친 손해를 배상하기도 했다. 신자의 집이나 불신자의 집이나 가릴 것 없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자신의 잘못을 사과하고 변상했다.
장대현교회의 부흥사경회는 곧 전국으로 퍼졌다. 평양신학교와 평양여자고등학교, 감리회 부인사경회로 이어졌다. 또 당시 장대현교회 부흥사경회를 이끌었던 리 스왈른 헌트 선교사 등과 길선주는 각기 선천과 광주, 대구, 의주, 서울로 옮겨가 성령의 불을 지폈다. 성령의 역사는 1910년까지 계속돼 중국과 만주, 몽고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부흥운동이 큰 교세의 변화를 보이진 않았다. 교인들의 회개와 신앙갱신의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부흥운동으로 교인 개개인이 신앙의 성숙과 행동의 변화를 나타냈다. 전택부장로는 1903년부터 1910년까지 진행된 부흥운동의 동기로 선교사들이 이질적인 사회와 부딪치는 가운데 느낀 심한 자아분열감과 패배의식, 우월감의 좌절, 죄의식, 민족의 패망의식과 위기의식 등을 꼽았다. 서정민교수(연세대)는 부흥운동으로 “현세적 목적추구 또는 방법적 가치추구의 방편으로 접근되던 신앙양태가 내세적 궁극목적으로, 전인격적이고 1차적인 형태로 전환됐다”고 분석했다.
평양 사경회의 열기가 식어가자 1910년 선교사들은 다시 부흥운동을 준비했다. 개성에서 활동하던 남감리회 스톡스 선교사가 5만명 전도운동을 제창하자 1909년 선교연회에서는 `1백만 심령을 그리스도에게'라는 표어를 채택했다. 선교사들은 정치적인 위기감을 신앙으로 이겨보자는 뜻에서 이같은 운동을 기획했다. `1백만 구령운동'은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는 `날연보' 방법과 대규모 문서전도운동으로 펼쳐졌다.
이같은 부흥운동과 1백만구령운동은 민족사적 시각에서는 몰역사, 탈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부흥운동은 보다 견고한 민족교회화 작업이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오히려 일제는 부흥운동과 1백만구령운동으로 인해 기독교와 교회를 견제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돼 105인사건을 조작하고, 3·1운동에 대해 과잉 보복을 했다는 것이다. 결국 겉으로는 개인신앙에 치중한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민족교회로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 인해 민족운동에서 교회조직과 인물이 신앙과 민족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았다는 평가가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전재우 jwjeon@kukminilbo.co.kr
각종 부흥운동의 핵심은 회개운동............
영적 성장의 기초는 회개하고 믿는 일부터 ....
◇성화와 기도/김남준/생명의 말씀사
기도의 효능은 단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청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의 실천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쇄신하고 우리 안의 죄를 죽이는데 있다. 따라서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는 성화(聖化)의 작용 역시 그 기도 제목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열렬하고 지속적인 기도인지에 달려 있다.
평촌 열린교회를 담임하는 김남준 목사가 진정한 기도에 대해 자세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또 단순한 대화에서 그치지 않고 기도의 실천 속에서 성화의 교리를 다루고 있다.
“전세계 변화의 물결 주체는 한국교회”… 선교전문가 루이스 부시 목사
기사입력 : 2004.08.09, 17:46
“진정한 변혁은 신자들의 삶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자신의 삶을 변혁시킬 때 이 사회와 국가,세계까지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선교 전문가인 루이스 부시 목사를 초청한 ‘전민족,전세계 완전 복음화 운동전략 설명회’가 9일 오후 국민일보 빌딩 우봉홀에서 열렸다. 2007년 서울 세계교회 지도자대회 조직위원회(대회장 박종순 목사)가 주최한 이번 설명회에서 부시 목사는 “전 세계는 현재 거대한 변혁의 물결에 휩싸여 있으며 기독교는 변혁의 주체가 되고 있다”면서 “새로운 기독교 부흥운동을 통해 사회와 세계가 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르헨티나인으로 기독교21세기운동(AD2000운동)을 주도했던 부시 목사는 현재 기독교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전 세계 변혁 운동(Transform World)을 주도하고 있다.
부시 목사는 “변혁운동은 모든 개인과 교회,국가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되고 새롭게 되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으로 가치체계를 바꾸는 것”이라면서 “모든 사람이 생활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회복할 때 교회와 사회를 바꾸고 결국 세계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르헨티나와 콜롬비아 등 전 세계적으로 변혁의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세계 교회를 주도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변혁을 통해서 세계 교회의 재도약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시 목사는 내년도 인도네시아에서의 대부흥운동을 시작으로 2006년 인도,2007년 한국,2008년 브라질,2009년 아프리카 등 2016년까지 전 세계를 변혁시키는 운동이 준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 변혁의 기수였으며 새로운 갱신과 헌신을 통해 어려운 사회를 부흥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설명회에 참가한 예수영화 국제본부 아시아 디렉터인 안강희 목사는 “한국 교회가 다시 한번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순수한 힘을 통해서 변혁의 주체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우리민족 완전복음화라는 이상을 향해 모두 헌신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백광진(잠실동교회)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1부 예배에서는 유관재(원당성광교회) 목사,두상달(칠성산업대표) 장로 등이 한국 교회와 사회를 위해 대표기도했다.
한편 2007년 서울대회 조직위원회는 이날 설명회에서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이 되는 2007년까지 민족 복음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가겠다고 밝혔으며 매월 준비위원회가 모여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조직위는 조만간 300명의 행사 준비위원단과 7000명의 중보기도단을 구성키로 했다.
모임 회장인 박용규 교수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말씀과 기도를 통한 회개로 특징되는 순수한 영적 각성운동이며 신앙운동이었다”면서 “다시 한번 한국 교회와 사회에 평양대부흥과 같은 신앙 각성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번 행사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총무 박명수 교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가장 중요한 관심은 ‘마음의 변화’ 였으며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은 교회와 사회에서 적극적인 회개운동을 벌였다”면서 “이번 대회를 통해 신학생들이 말씀과 기도로 거듭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성결교회역사硏 8회 영익기념강좌] 1907년 대부흥운동은 영적각성운동
기사입력 : 2004.04.15, 16:32
한국 교회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1903∼1907년 대부흥운동’이다. 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당시 전 세계적 부흥운동의 차원에서 성령의 임재로 나타난 기도와 말씀 회개로 이어진 영적 각성운동이라는 것이다.
서울신학대학교 성결교회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는 지난 7일 경기도 부천시 서울신대 우석기념관에서 제8회 영익기념 강좌를 열고 ‘한국 교회와 1907년 대부흥운동’을 새롭게 조명했다.
이 자리에서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1907년 대부흥운동과 오늘의 한국교회’에 대한 발제를 통해 한국 교회의 대부흥운동은 세계 부흥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순수한 신앙운동,심리적이고 종교적 소망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적 역사로 일어난 운동 ,성령의 임재 속에서 기도와 말씀 회개로 특징되는 영적 각성운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대부흥운동에 대해 비정치화 또는 종교적 카타르시스 현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짙었다. 박용규 교수는 지나치게 사회현상을 부각시켜 정치 위기를 종교적 소망으로 대치하면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라고 보는 데 대해 동의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당시 선교사들이 필리핀에서의 반미운동을 거울삼아 교회를 비정치화하려고 했고 민족의 정치적인 위기가 영적 부흥운동의 배경을 제공했지만 이것이 한국 교회 부흥운동의 동인으로 보는 것은 비약이라는 것이다.
이어 발제에 나선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는 ‘초기 한국교회의 영성:1907년 대부흥운동의 신앙분석’을 통해 머리에서 가슴과 마음으로 옮겨오는,당시 기독인들의 생활로 구체화된 신앙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대부흥운동의 다양한 연구들이 있지만 신앙 유형,또는 표출된 신앙 형식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다고 지적했다.
박명수 교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 기독교 신앙의 원형”이라면서 “한국 교회사에 이같은 집단적 종교 체험은 없으며 당시 선교사들도 기독교 역사 가운데 이렇게 진실되고 철저한 종교 체험은 없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흥운동의 신앙 형태적 특징으로 성령충만에 대한 갈망,죄의 자각과 통회를 통한 철저한 회개,통성기도 중보기도 등의 뜨거운 기도회,횡령 간음 살인 갈등 등에 대한 공개적 자백,새마음 변상 평등 등의 변화된 삶 등을 들었다. 특히 당시 기독인들은 신유 축복 등의 은사보다 ‘참된 신앙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목사 등 교회 지도자들의 모범도 성도들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박명수 교수는 대부흥운동의 촉발 과정을 밝히면서 당시 선교사들은 머리로만 믿으려고 하고 정치적 성향이 강한 한국인에 대해 무척 고민했다고 말했다.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주역 하디 선교사를 예로 들면서 “그는 세속적 동기로 교회에 나오는 한국인을 걱정해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했다”며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하디에게 그런 경험을 요구했다”고 설명했다.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하디 선교사는 자신의 말대로 수치와 체면 손상을 무릅쓰고 교만과 강퍅한 마음,신앙의 결핍,죄악을 주일 설교시간에 고백했다. 대부흥운동의 한국인 주역인 길선주 목사 역시 공예배시간에 그의 죄를 자복했다. 이후 한국 기독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 성도들은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 자각으로 고통스러워했다는 점을 선교사들의 문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살인을 고백하는 사람들도 나왔다.
이같은 고백은 고백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미워했거나 싸운 일을 고백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상대를 찾아가 용서를 빌었고 횡령했거나 돈을 훔친 사람은 다 변제했다. 강도짓에 대한 고백도 나왔다. 한 관리가 이 이야기를 듣고 관찰사에게 보고하자 자발적으로 죄를 고백한 일은 조선 역사에 한번도 없었다며 그를 용서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기독교를 믿으라고 권했다고 한다.
박명수 교수는 “초기 한국 성도들은 보다 깊은 영성 추구,‘마음의 종교’에 근거한 영성,철저한 죄의 자각과 통회에 기초한 영성,삶의 변화를 가져온 영성 등의 특징을 보인다”며 “성도들의 삶의 변화와 아무 관련을 맺지 못하는 현대교회의 문제점을 볼 때 1907년 대부흥운동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설명했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온 땅에 선포하고 만유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예수님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다. 우주 만물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높은 분,그분보다 더 영광스러운 분,그 분보다 더 능력 있는 분은 없다.
이렇게 큰 권세와 찬란한 영광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교회를 통하여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신다. 병든 자를 치료하신다. 악한 영에게 눌린 자를 풀어주신다. 믿는 자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 절망에 빠진 자를 건져주신다. 악을 심판하신다. 역사를 주관하신다. 사탄과 그 무리들을 음부에 던지실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시고 자기 백성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으시며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으로 인해 허무와 절망에 빠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탄핵으로 국론은 분열되어 있고 그 갈등은 극에 달해 있다. 나라의 중심을 잡아줄 리더십이 실종되었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앞에 놓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로 우리는 복음을 힘있게 증거해야 한다.듣든지, 아니 듣든지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다시 한번 100년 전에 있었던 평양 대부흥 운동이 일어나서 한반도 구석구석에서 거룩한 백성들이 쏟아져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전도해야 한다.이 일을 위해 우리 모두는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엄숙한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 이 나라에 믿지 않는 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예수를 증거하자. 여기에 이 나라의 소망이 있다.
둘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제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사랑,예수의 선하심,예수의 거룩함, 예수의 희생, 예수의 나라, 예수의 권세, 예수의 영광을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세상이 보게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도록 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 된 우리는 날마다 사람들 눈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 앞에 투명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작은 예수가 되지 아니하면 안되는 이유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해야 한다. 우리 모두 교회마다 가정마다 작은 예수들을 부지런히 만들어 청와대로 국회로 법원으로 들여보내야 한다.그러면 이 세상은 밝고 깨끗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나라는 소망을 가지고 힘차게 일어서게 될 것이다.
셋째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약속을 믿고 선한 싸움을 싸워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되게 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개인은 물론 국가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 예수를 거부하는 사회는 지옥이 되고 예수를 거부하는 인간은 사탄을 닮게 된다는 것은 세계 역사가 우리에게 남겨준 엄숙한 교훈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린 교만한 세대가 나라를 주도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부활의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는 반기독교적?탈기독교적 사상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통째로 부정하는 주체사상과 같은 정치 이념을 용납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민족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어떤 식이든 통일만 되면 좋겠다는 순진한 통일지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거기에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밀어내는 반기독적 사상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창조자 하나님이 설 땅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오늘의 학교 교육, 그래서 학생들의 인간성을 점점 황폐화시키고 있는 죽은 교육을 먼 산의 불처럼 보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한 사람들이 문화를 주도하게 내버려두면 안될 것이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교만한 인간들이 활개치는 사회에서는 아무도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두려워 말자.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한국 교회여 다시 일어나서 이 나라를 복음화시키자. 한국 교회여 다시 일어나서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자. 한국 교회여 다시 일어나서 용기를 가지고 예수를 거부하는 어둠의 권세들을 대적하자. 그래서 부활의 주님이 다스리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자.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새벽기도·전도운동 제2부흥 이루자…나겸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
기사입력 : 2004.03.15, 15:14
침체되어 있는 한국 교회에 최근 새벽기도운동이 거세게 일면서 제2성장의 새로운 기운이 싹트고 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 교회가 폭발적으로 부흥하기 시작한 때는 1903∼1907년부터로 당시 교회 부흥의 단초가 된 것은 새벽기도였다. 새벽기도가 성령운동으로 승화되고 다시 전도폭발로 이어지면서 한국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 지금 한국 교회에는 새벽기도운동이 다시 들풀처럼 번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새벽기도운동의 역사와 전도집회 현장을 통해 한국 교회의 미래를 진단한다. 편집자주
한국교회가 언제부터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초기 부흥운동이 한창 진행중이던 1903∼1907년에 시작된 것으로 분석된다. 한국인들이 새벽기도회를 가졌다는 공식기록은 1904년 북장로회 평양선교부 보고에 처음 나온다. 그해 초 평양에서 거행된 장로교 겨울 사경회 때 참석자들은 ‘동틀 무렵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선교사들이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보고했다. 새벽기도회에 대한 구체적인 보고는 1904년 9월 열렸던 이화학당(현 이화여대) 부흥회 보고이다. 당시 이화학당 교장이던 프라이는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학교를 개학했을 때 전에 다니던 학생 말고도 스무명 정도가 더 들어 왔는데 대부분 교인 집안 출신입니다. 하디 박사께서 고맙게도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을 위해 정동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흥회가 열리기 두 주일전부터 매일 세차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마지막 주간집회 때 저는 페인 양과 함께 저녁집회에 참석했는데 학생들이 자정까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우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습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이른 아침에 몰래 예배당에 들어와 기도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새벽기도시간에 죄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1904년 9월 이화학당과 배재학당의 개학 부흥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벽기도회가 정착되었음을 알수 있다.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사무총장 한상운) 대표회장 나겸일 목사는 “당시 기록으로 보아 1903년 하디 선교사의 원산부흥회 이후 1년만에 학생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새벽기도운동이 일어난 것을 볼 수 있다”며 “공식 보고서를 통해 올해가 새벽기도운동 100주년의 해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화학당 여학생들의 새벽기도회를 시작으로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기도회로 자리잡아갔다. 1905년초에 열린 남감리회 개성지방 부인사경회 보고에서 여선교사 캐럴은 “아침 6시가 되자마자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고 증언했다.
이같이 시작된 새벽기도는 점차 확산되면서 교회 부흥의 원동력이 됐다. 새벽기도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부흥운동으로 연결되고 이후 길선주 목사에 의해 교회공동체 전체가 참여하는 정규 집회로 발전하게 됐다. 1915년 5월10일 장봉용암교회의 부흥회 기록에는 “5일간 부흥회를 했는데 크게 부흥했으며 그 원인은 새벽기도의 효력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 나겸일 대표회장은 “새벽기도의 침체가 신앙 침체와 교회 성장 침체를 가져왔다”면서 “새벽기도운동 100주년을 맞아 올해 나라와 민족을 위한 대표기도문을 공모해 보급하겠다”고 말했다. 나 목사는 “내가 담임하고 있는 주안장로교회를 비롯해 명성교회 소망교회 등이 모두 새벽기도회로 성장한 교회”라고 소개했다. 나 목사는 “새벽종이 울렸네로 시작하는 새마을운동 노래는 교회의 새벽종을 말하는 것이었다“며 “교회의 새벽종이 다시 울릴 때 교회 성장은 물론 나라가 발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평양 대부흥운동을 비롯한 3대 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그 성격과 결과를 고찰한 연구서. 한국 교회사에는 1903년의 원산 부흥운동,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1909년의 백만인 구령운동이라는 세 번의 부흥운동이 있었다. 이들 부흥운동이 한국교회의 질적,양적 성장의 전기가 됐고 지금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음에도 그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책을 추천한 한국기독교의료선교협의회 이건오 회장은 “한국 교회 부흥운동의 사실성과 역사성을 체득하는 것은 새로운 부흥운동의 근간이 될 수 있다”며 “날로 거룩함에서 멀어져 가는 이 사회를 위해 다시 한번 한국 교회에 부흥운동이 일어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 책의 저자 박용규 교수는 부흥운동을 연구하면서 “영적 각성이 선행됐을 때 영혼 구원의 열정이 자연스럽게 이어졌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전한다. 누구나 구원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면 구원의 진리를 동족에게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영적각성운동은 한국 교회의 성장 뿐만 아니라 사회적 변화로도 이어졌다는 것이 박 교수의 견해다. 한국 교회가 건강하고 건전하게 성장할 수 있는 틀을 제공했으며 나아가 우리 민족에게 정치·경제적 위기 극복은 물론 현재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체험적 복음주의,부흥운동적 전통을 이어왔으며 이 전통 속에서 새로운 교회부흥을 이뤄가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박명수 서울신대 교수는 최근 펴낸 ‘한국교회 부흥운동 연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흐름은 1907년 대부흥운동을 시작으로 김익두 이명직 김응조 이성봉 조용기 목사로 이어져 왔다고 진단했다. 이 과정에서 성서 강해,신앙 체험,선교 열정 회복이 총체적으로 이뤄졌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의 특징으로 죄의 자각, 회개, 배상, 그리스도의 보혈, 마음의 청결, 성령의 능력과 충만, 평화와 기쁨 등을 들었다. 그러나 물질적 축복과 치병만을 강조하는 샤머니즘과 달리 대부흥운동은 우리의 삶의 변화를 강조했다고 밝혔다.
이 전통은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운동으로 이어진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운동은 영적 세력과의 싸움으로 기독교의 생동력을 입증하는 것으로 박 교수는 평가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명직 목사는 부흥운동을 신학적으로 정립하면서 말씀 중심의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이명직 목사는 극단적 신비주의 운동이나 은사 중심 운동을 반대하면서 철저한 종교 체험을 바탕으로 중생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또 김응조 목사의 재림 중심 부흥운동,이성봉 목사의 전도 중심 부흥운동,조용기 목사의 은사 중심 부흥운동을 분석하고 한국교회의 뿌리와 부흥운동의 방향을 제시했다.
박 교수는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은 세계 교회의 흐름 가운데서 파악해야 하며 한국교회의 체험적 복음주의 전통 속에서 이 전통을 새롭게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늘의 별이라도 따주고 싶다는 흔한 말은 차치하고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을 사랑했던 한 무리의 기독인들은 기도생활이나 영적 체험,신학지식보다 성서를 조국에 선물하려고 했다. 이들은 나라의 밑바닥에 영구적인 기반을 만들기 위해선 백성들이 성서적 진리를 소유해야 한다고 보았다.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은 1927년 이 뜻을 ‘성서 조선’으로 표출했다. ‘성서 조선’은 1942년 3월 일제에 의해 폐간조치 당했다.
이들은 성서 조선 창간사 마지막에서 “성서 조선아,네가 만일 그처럼 인내력을 가졌거든 너의 창간일자 이후에 출생하는 조선인을 기다려 면담하라. 서로 담론하라. 한 세기 후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가 생긴들 무엇을 한탄하겠는가”라며 한민족과 그 나라를 성서 위에 놓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길 기대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과 기독경영연구원 기독교사연합 기독교한국문제연구회 기독변호사회 공의정치실천연대 대학촌선교회 새벽이슬 서울대학교회 서울대기독인연합 성경적토지정의를 위한 모임 등 단체는 25,26일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제1회 성서한국 포럼을 열었다.
이번 포럼은 각 분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윤리와 문화,제도를 새롭게 세우고 선교 한국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연대하고 연합사역을 펼쳐가기 위해 마련됐다. 포럼 첫날에는 성서한국 운동의 성서적 신학적 기초,성서한국 운동의 한국 교회사적 고찰 등 이론적 기반을 살폈다. 둘째날에는 직장선교와 시민운동,청년·대학생 운동을 통한 성서한국의 구현 방법을 모색했다.
△성서한국 운동의 성서적 신학적 기초(박영범 대학촌교회 목사)
성서한국 운동이 근거하고 있는 성경적 개념은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성서한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한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말씀을 통해 통치하는 한국이다. 완전한 통치는 신천신지(新天新地) 도래 후에 이뤄지지만 역사 속에서 이 땅에 이뤄질 수 있는 최대한의 말씀 통치가 이뤄진 한국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모든 국민이 성경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아가게 하고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실천하며 문화와 풍토 윤리 제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하는 운동을 성서한국 운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하나님 나라의 최대 확장을 위해 역사 속에 투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개인과 사회에서 말씀을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개인적 실천의 원리로는 의(義)와 사랑,약속 정직 근면 절제를 들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의를 따라야 한다. 의로운 사랑,사랑의 의를 실천해야 한다. 이 속에서 약속을 지키며 정직을 실천해야 한다. 노동하지 않고 이익을 얻는 부당한 일을 버리고 음란과 탐욕을 배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과소유와 과소비하는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종말론적 희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적 개혁적 복음주의 신학을 취한다. 중간 공리(middle axiom)를 도출해 내는 일도 중요하다. 전문영역을 담당하는 선교단체와 사역자들의 연대도 필요하다.
△성서한국 운동의 한국 교회사적 고찰(서정민 연세대 교수)
한국 교회사는 성서 사업으로부터 시작됐다. 한글 성서의 번역과 반포가 한국 기독교 선교와 수용의 내용이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북쪽에서는 민중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가,남쪽에서는 유식자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가 유입됐다. 세계 선교 역사에서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성서가 먼저 배포된 일을 찾기 어렵다.
초기 한국교회는 민족적 상황,정치적 환경 속에서 ‘민족교회’라는 독특한 진로를 형성했다. 민족 교회는 국가교회의 틀과 맞물려 이데올로기적이고 위험한 형태다. 그러나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 속에서 통일 한국 이전까지 이 개념은 여전히 ‘좋은 가치’로 작용할 것이다.
신앙의 확산과 전파는 성서 보급과 강독,사경회로 불리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이행됐다. 1903∼1907년 대부흥운동은 사경회로부터 시작됐다.
많은 신앙운동가들이 성서를 통한 민족 개혁과 민족 구원을 주창했다. 김교신과 같은 이는 성서와 한국 사이에 ‘와’라는 조사가 들어갈 틈도 허용하지 않는 ‘성서 민족주의’를 제창했다. 김교신의 성서는 이식된 교회의 제도나 교조적 신학의 틀에 갇혀있는 성서가 아니었다. 관념과 당위에 몰입된 성서가 아니었다. 율법과 형식에 구애된 성서가 아니었다. 한민족의 고유한 사명과 연결된 생명적 성서이며 민족을 향한 예언의 실천력을 지닌 성서였다.
이 운동력은 일제에게 강력한 위협으로 작용했다. 이데올로기적 기독교보다 성서중심의 기독교가 더 강력한 저항력을 지녔다는 예증이다. 단체를 만들거나 구체적인 반일 운동에 가담하지 않은 철저한 성서중심의 신앙을 견지하던 김교신 등의 소수 신앙운동가,보수적 신앙주의로 신사참배에 반대하며 정절을 지켰던 주기철 등의 반참운동가 등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1960년대 말까지는 양적 성장의 체계를 이뤘던 기간이다. 그러나 성서 중심의 신앙은 희미해졌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한국교회에는 성서공부의 붐이 일었다. 성경공부의 붐은 기독교의 확산이라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성서읽기와 이해를 앎의 영역으로 몰아가 실천력,예언성을 상실해 성서의 성육신적 요소를 포기한 듯한 부분은 여전히 과제이며 뼈저리게 반성해야 할 항목이다.
전재우기자
[한국교회 120년 (29)] ‘한국교회 120년’을 마치며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에드워드 H 카)
서울 종로 거리에서,익산의 구시장 한 귀퉁이에서 신앙의 선배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다가왔다. 이름 모를 산 언저리에서 선교사들의 묘지를 찾아 헤매면서 고향을 떠나 생경한 이국땅에서 목숨을 버린 선교사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된 교회당의 종탑에서,교회당 자리에서 갖은 고난 속에서 오직 기도로 말씀을 전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거센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 왔다.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교회는 우리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의료와 교육,독립운동,한글운동,청년과 여성운동 등 모든 분야에서 교회는 큰 역할을 했다. 국채보상운동과 절제운동 등 나라 사랑 및 사회 구제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개교회에선 철저한 신앙생활을 강조했다. 어렵고 힘든 문답을 통과해야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성도가 돼서도 덕목을 지키지 못하면 교회생활에서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성도들은 징계 받은 교우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과 권면으로 올바른 행실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길선주 목사와 선교사들의 회개로 시작된 대부흥운동은 성도들을 말씀 연구와 기도 생활에 몰두하게 했다. 1세기가 넘는 한국교회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다. 현재에도 교회들은 이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씁쓸한 모습도 많이 눈에 띤다. 주위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거대한 현대식 건물,돌보는 이조차 없는 듯한 황량한 선교사들의 무덤,개발과 효용성의 논리에 밀려 터조차 남아있지 않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며 방치돼 있는 많은 유적,누군가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무엇인지도 모를 신앙 선배들의 때묻은 흔적들,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는 교회의 모습과 크리스천으로서의 덕목을 지키지 못하는 성도들….
사회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성도로서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지 꼬리를 무는 많은 의문을 떨쳐낼 수 없었다.
최근 문을 연 새문안교회 역사사료관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윤경로 관장은 특별한 문구를 하나 소개했다. 차재명 목사가 주보 한쪽 구석에 작은 글씨로 남겨놓은 것이다. “이 주보는 장래 본 교회 역사상에 중보(重寶)가 되오니 보존하시기를 희망하나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미래의 신앙 후배들에게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전재우기자
美 대부흥 주도 애드워즈 신학 조명
미국 신학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조너선 에드워즈(1703∼1758) 연구의 거장으로 손꼽히는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 이상현(65) 박사가 최근 조너선 에드워즈 신학연구 ‘삼위일체,은혜 그리고 믿음’(대한기독교서회)을 출간했다.
미국에서 발표한 논문을 번역·출간한 이 박사는 “오순절 성령운동을 접목해 미국의 대부흥 운동을 주도한 에드워즈의 신학과 청교도 신앙에 대한 관심,연구를 통해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소개했다.
이 책의 논문들은 예일대 출판사에서 출판한 에드워즈 전집 제21권의 서론 일부분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전체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이 박사는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혜의 본질,구속론,자연에 대한 이해를 해석하면서 에드워즈가 물려받은 기독교 신학의 전통을 당시 시대상황에서 어떻게 표현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참된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시간과 공간 안에 그것들을 재현하기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과 사람,자연을 사랑할 때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재현되고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 달성에 인간이 참여한다고 밝히고 있다. 에드워즈는 미국 초창기의 신학자이면서 철학자,목회자로 미국 학계와 교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신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이 박사는 1955년 유학생으로 도미,우스터대 하버드신대원을 졸업하고 80년부터 프린스턴신대원 조직신학 교수로 부임,종신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프린스턴 최초의 동양인 교수인 이 박사는 ‘조너선 에드워즈의 철학적 신학’이란 저서를 펴내 미국 내에서 에드워즈 신학의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해 김성광(강남교회) 목사,이양호(연세대) 교수 등과 함께 한국에드워즈학회를 창립,오는 10월 에드워즈 탄생 300돌 기념예배를 계획하고 있다.
예장통합 교육부가 주최한 한국이민100주년 기념집회 참석과 책 출판을 위해 잠시 귀국한 이 박사는 현재 안식년을 맞아 ‘아시안 아메리칸 신학’ 논문을 집필하고 있다.
나는 ‘한국교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길선주 목사의 삶을 뒤돌아보며 그를 ‘한국의 어거스틴(아우구스티누스)’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거스틴이 고대 문화에 복음의 세례를 베풀어 기독교 문화를 창달하고 기독교의 초석을 놓았던 것처럼 길선주 목사는 물려받은 불도 및 선도 문화에 복음의 세례를 줘 기독교 문화를 꽃 피웠고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다. 역사는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이루어진다. 가장 값진 삶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이루어가는 삶이다. 한국교회의 역사를 만든 길선주 목사의 삶을 더듬어본다.
첫째,길선주는 불교와 선도의 도사였다. 그는 1869년 3월15일 평남 안주에서 출생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었다. 19세 때부터 산속에 들어가서 도를 닦기 시작했다. 신차력의 묘리와 선도의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그가 평양에 나타나면 사람들은 그를 ‘길도사’라고 부르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아직 영생의 진리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에게서 나름대로의 진리를 추구하던 19세 이후의 어거스틴을 보는 것 같다.
둘째,길선주는 예수님을 만났다. 평양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괴상한 서양 사람이 나타나서 서양교를 전하는데 한번 거기에 빠지면 미치고 만다는 소문이었다. 길선주는 호기심이 동하여 샘 마펫 선교사를 찾아가 그와 담론을 나누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알쏭달쏭했다. ‘천로역정’을 읽었을 때는 큰 감동을 받았다. 선도와 서양도에 대한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어거스틴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깊은 번민에 빠졌던 것과 같았다. 밤이 깊어 새벽 1시쯤 되었을 때였다. 방안에서 청아한 피리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탕탕” 하는 요란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길선주야,길선주야,길선주야!”하고 세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길선주는 너무도 무서워 엎드린 채 “아버지여,제 죄를 용서해주시고 저를 살려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가 된 듯이 뜨거웠다. 길선주는 새로 태어났다. 예수를 만났다.
셋째,길선주 목사는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길선주는 두문불출하고 기도와 성경공부에 진력했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와 만나고 구원의 진리에 도취되었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아내에게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했다. 그는 넓다리(장대현)교회의 영수와 장로,조사가 되었고 1907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그의 기도와 회개,설교를 통해 1907년 1월 장대현교회에서는 ‘한국의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사경회원 전체가 성령의 휩쓸린 바 되어 소리쳐 울고,혹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혹은 춤을 추면서 찬미하니 소리소리 합하여 소리의 기둥은 번제단에 타오르는 불기둥같이 하늘로 떠올랐다.”
길선주 목사는 1935년 11월26일 부흥회를 인도하고 축도를 마친 후 쓰러져 하나님 품에 안길 때까지 40여년동안 380여만명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30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또 800여명을 목사와 전도사,장로로 세웠고 60여개의 교회를 세운 ‘한국교회의 아버지’가 되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교회 120년(19)] 20세기초 한국 대부흥운동은
김포제일교회가 교회당을 갖췄던 1905년 무렵 한국교회사에 큰 획을 그은 일련의 일들이 일어났다. 가장 큰 일은 역시 ‘대부흥운동’.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해 전국적으로 확대된 신앙운동이다. 이 운동은 오늘을 사는 기독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교회의 몰역사성의 문제를 낳기도 했지만 초기 한국교회는 이 운동을 통해 기독교의 순수한 신앙과 정신을 체험하게 됐다. 또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도덕성이 크게 높아졌다. 성경공부와 기도에 열심이었다는 점도 대부흥운동의 영향이다. 특히 1901년부터 시작한 사경회는 한국 교회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마련하는데 큰 힘이 됐다. 기도회 역시 선교사들이 부끄러워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이와 같은 대부흥운동은 교세 확장으로 연결됐다. 1905년과 비교해 평균 267% 증가했다.
부흥운동의 동기는 1903년 원산에서 열린 선교사들의 기도모임이었다.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하디가 백인 우월주의와 자만심에 찼던 권위주의로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며 자신의 허물과 무력함을 고백했던 것. 당시 선교사들은 토속적인 음식을 함께 먹고 오막살이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겸허한 자세로 전도했다. 1895년 선교기지가 생기고 교회가 자리를 잡자 사택에 화려한 집기를 들여놓고 피서지까지 만들며 안일한 생활을 해왔다.
하디 선교사의 고백은 선교사의 회개를 끌어냈고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했다. 이 일은 1904년 1월 원산에서 열린 교파별 연합기도회로,1905년 8월 평양의 부흥회로 이어졌다.
“그날 밤 길선주 목사의 얼굴은 위엄과 능력에 가득 차 있었고 순결과 성결로 불붙어 있었다.…어떤 사람은 마음의 괴로움으로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오! 하나님,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며 울부짖었다”(정익로 장로,마펫 선교사의 1907년 한국에서의 교육 목회 중에서)
1907년 1월6일 평양 장대현교회의 연례 부흥사경회는 성령의 불길에 휩싸였다.10일동안 진행된 사경회에는 기도와 화해,사랑이 넘쳤다.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개인의 내면적 죄만 고백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끼친 피해까지 고백하고 직접 용서를 빌었다. 일부는 피해를 준 사람을 찾아다니며 손해를 배상하고 사과하기도 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회가 길선주 목사의 인도로 진행되고 있었다.장대현교회에 모인 1500여명은 길목사의 설교에도 변화가 없었다.기도도 터지지 못했고 성령의 은사도 임하지 않았다. 그때 길목사는 은혜의 단절은 자신의 탓이라 깨닫고 외치기 시작했다.
“저는 아간과 같은 놈이외다.저 때문에 여러분이 은혜받지 못했습네다.언젠가 제 친구 한 사람이 임종하면서 제게 부탁하기를 ‘나는 이제 죽지만 내 재산을 잘 처리해주게.내 아내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꼭 부탁하네’라며 세상을 떠났습네다.저는 그의 재산을 정리하면서 1백원을 잘라 먹었습네다.저는 하나님을 속였습네다.저는 내일 아침 일찍 그 돈을 그 부인에게 돌려주겠습네다” 길목사의 우렁찬 공개 자복이 터지자 회중석에선 통회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저 유명한 성령강림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성장을 가로막고 민족공동체를 분열,파괴시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책임을 떠넘기기 때문이다.“네 탓이다.네가 책임져라”라는 파행이 계속되는 한 회생의 처방은 없다.그러나 “나 때문입니다.내 탓입니다”라는 회개운동이 일어난다면 제3의 부흥운동은 활화산처럼 일어나게 될 것이다.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박용규 교수 ‘평양 대부흥운동’ 출간
‘1907년 평양은 영적 대각성 운동으로 가는 곳곳마다 뜨거운 부흥의 열기가 가득했다. 한 젊은 여인이 심장이 터질 듯 고꾸라져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울부짖자 주위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보며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생명의 말씀사가 최근 펴낸 ‘평양 대부흥운동’의 일부 내용이다. “평양…’은 한국교회의 일련의 부흥운동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고 집대성한 책이다.
700여쪽에 이르는 이 책은 선교사들과 선교본부의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원용했고 감리교의 자료가 체계적으로 사용됐다. 지난 94년 ‘초대교회사’로 신학자 대상을 수상한 저자 박용규 교수(총신대 역사신학)는 “평양대부흥운동의 기원과 발전,결과를 연구하면서 이 부흥운동은 크고 작은 영적 각성 움직임들이 연합돼 거대한 성령운동으로 발흥됐음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전체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먼저 평양대부흥운동의 서막이었던 원산부흥운동을 소개했다. 죄의 고백과 죄용서 체험을 특징으로 했던 이 운동은 1906년 장로교가 주도하면서 더 강력한 회개역사를 수반했다. 이후 사경회,선교사들의 기도회를 통해 평양대부흥운동은 탄탄하게 준비됐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첫 날에 대해 이 책은 마치 야곱이 얍복강 나루에서 ‘축복하시지 않고는 그냥 보낼 수 없다’며 하나님의 사자와 겨뤘던 그날의 심정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또 ‘몇 사람은 바닥 위에 몸을 던져 죽 뻗어 있었고…’로 기록, 뜨거웠던 당시의 열기를 전했다.
이 책은 당시 부흥운동이 가져다 준 사회변혁 가운데 두드러진 현상으로 우상숭배에서의 해방을꼽고 있다. 저자는 원산·평양 부흥운동은 영적 각성운동이라는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 반면 백만인 구령운동은 일종의 전도 캠페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구분했다. 백만인 구령운동은 한일합방이라는 위기 속에서 민족복음화라는 거대한 비전과 꿈을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었고 한국교회가 처음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정착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다.
박 교수는 책의 말미에 ‘순수한 복음의 열정을 현장에서 직접 보여주었던 초기 선교사들을 본받고 영적 열정을 되찾는 것 만이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는 길’이라고 밝혔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한국교회에는 3차례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1907년 평양대부흥운동,1909년 백만인 구령운동이 그 것들이다. 이 운동들은 한국교회가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를 특징 짓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 책은 한국교회의 오순절 성령운동이었던 대부흥운동을 체계적으로 정리,교회 부흥을 원하는 목회자들에게 필독서가 될 만하다. 한국교회내에 영성이 사라지고 전도가 약화된 오늘의 현실을 깊이 돌아보고 성령으로 재 무장되는 기회를 제공한다.
책을 추천한 민경배 교수(연세대)는 “범위나 깊이,자료의 동원과 그 해석의 정묘로 완벽을 기해 신학계에 길이 남을 공적으로 빛난다”고 말했다.
한편 이 책은 부록에서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요 사건 연표(1901∼1910)와 당시 한국 장로교 교인수,세례교인수,북장로교 교회 및 목회자 수 등을 도표로 만들어 당시의 상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노희경기자
20세기 한국교회 10대 사건
기사입력 : 1999.10.19, 00:00
20세기 한국교회의 10대 사건은 무엇일까. 최근 발간된 개신교계 월간지 「신앙계」 10월호는 숙명여대 사학과 이만열 교수, 김승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연구위원, 서정민 연세대 교수, 한규무 광주대 교수 등의 도움을 얻어 한국교회사의 전기가 됐던 10대 사건을 연대별로 선정했다.
「신앙계」는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 목사의 설교로 시작돼 한반도 전체에 부흥열기를 불러일으킨 평양대부흥운동을 첫번째로 꼽았으며, 1911년 일제가 `데라우치 총독 모살 미수사건' 혐의로 개신교계 인사를 대거 검거했던 이른바 105인 사건을 두번째에 올려놓았다.
세번째의 10대 사건은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16명이 개신교계인사였을 정도로 한국교회는 3·1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으며 반대로 3·1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도 크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37년 감리교에 이어 1938년 장로교가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은 한국교회의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이 과정에서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는 등 많은 신앙인들이 수난을 당했고 장로교 분열의 시초였던 고신파의 독립선언도 여기서 비롯됐다.
그 다음으로는 6·25로 인한 남북분단과 북한교회의 수난이 선정됐고, 1953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전밀라와 명화용이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것도 획기적인 일로 뽑혔다.
이밖에 70년대 인권 민주화운동, 73년 빌리 그레이엄 선교사에 의한 매머드 선교집회, 84년 한국교회 백주년기념대회, 98년 목사 및 장로 임기제 도입 등이 차례로 10대 사건에 들었다.
/연합
'기독교가 민족문화 파괴' 파문예상
기사입력 : 1999.08.25, 00:00
한 민속학자가 기독교의 전래 및 토착화과정을 정면으로 비판한 글을 발표해 파문이 예상되고 있다.
주강현 한국민속문화연구소장은 최근 펴낸 책 「21세기 우리문화」(한겨레신문사 간)를 통해 기독교 전래를 `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사건'으로 꼽으면서 기독교가 얼마나 우리나라의 민족문화를 파괴하고 자주정신을 훼손했는지 폭로하고 있다.
얼마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림들의 분노를 촉발시켜 유교문화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듯이 `기독교가 죽어야(?) 민족문화가 산다'는 논지의 이 글은 기독교문화에 대한 일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그는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성에 가려 본질이 희석된데다 해방 후 숭미사상이 일반화되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처럼 왜곡됐다"며 제너럴 셔먼호 사건, 제주민란,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하고 있다.
주강현 소장의 비판의 화살은 `교육가와 자선가로 위장한' 초기 개신교 선교사에게 집중된다. 1884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알렌은 운산광산을 소개해 거금을 챙기고 전차 부설권을 얻어낸 사업가이며, 언더우드 역시 설탕과 석유 등을 수입해 많은 이득을 올린 `백만장자 선교사'였다는 것이다.
또 북장로교 선교부 총무였던 브라운은 "한인은 어린애와 같이 천진하기 때문에독립할 처지가 못된다"고 친일노선을 분명히했으며 웰스는 "을사조약이 조인된 날은후대에 한국의 독립기념일로 지켜지리라고 확신한다"며 일제의 침략을 미화했다.
게일도 당시의 의병활동을 가리켜 "거짓 애국의 미친듯한 광란"이라고 매도하는가 하면 존스와 스크랜튼은 이토 통감을 만난 자리에서 "선교사들은 통감의 시정에동정을 갖고 정치적인 문제에 대하여는 초연한 태도로 임하겠다"고 말했다.
주소장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거세게 불어닥친 대부흥운동의 열풍에 대해"신도들에게 죄의식을 불어넣어 일제의 교묘한 구조적 억압을 한국인들이 수용하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난했으며 일제말 신사참배 문제와 관련해서도 "선교사들은 어느 경우에나 거짓 논리로 무장하고 순교를 각오한 철저한 투쟁을 거부했다"고 꼬집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초기 선교사들이 우리의 민족문화를 파괴한 사례로는 마을굿이나 장승제 등 민간신앙을 억압한 것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우상숭배란 이름으로금지한 것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 그는 "한국 민족문화에 대한 서양 선교사들의 편견은 뿌리깊은 백인우월주의에서 비롯됐으며 외국의 문물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린20대 애숭이들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주소장은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두들겨맞을 각오를 하고 이글을 썼다"고 심경을 털어놓은 뒤 "교회가 민족의 삶과 일치하는 문화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제안했다. /연합
“성령운동은 성장 원동력”/오순절신학회 창립기념 논문발표회
기사입력 : 1997.11.17, 00:00
◎한국교회 갱신·성장 커다란 공헌/소외층 희망… 교회에 영적활력…그릇된 신비주의운동 극복해야/「21세기 신학」 학문적 정립 시급
한국오순절신학회(회장 이영훈 박사)가 15일 서울 여의도동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창립기념 논문발표회를 열고 성령운동에 대한 신학적 정립을 시작했다.
이번 논문발표회는 「오순절 운동과 한국교회의 비전」을 주제로 박명수(서울신대) 명성훈 이영훈(이상 한세대) 김용식(한영대)교수가 오순절 운동의 기원과 영향, 특성 등에 각각 발제했다.
박명수 교수는 발제에서 『오순절 운동은 19세기 성결운동에서 등장하게 됐다』며 『존 웨슬리에게서 시작된 성결운동이 미국의 종교적 문화적 배경에서 성장한 것』이라고 밝혔다.
명성훈 교수는 오순절 운동이 교회성장에 미친 영향에 대해 말하면서 『오순절 운동은 기독교의 한 분파가 아니라 기독교 뿌리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 교회의 탄생이요 출발이기 때문이라는 것.
또 이제까지 성장하는 교회는 성령충만을 강조하고 뜨거운 기도와 역동적 예배, 영적 체험을 지향하는 신앙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성령은 교회성장의 동력이며 세계 복음화를 위한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이영훈 교수는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이 한국 성령운동의 기원이라며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의 갱신과 성장에 영향을 미쳤으며 소외계층에 새로운 희망을, 교회에 영적 활력소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은사체험에 따른 영적 우월감이나 성령을 이용하려는 경향, 신학적 정립 소홀로 잘못된 신비주의 운동 양산 등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특징에 대해 김용식교수는 『오순절 운동의 신학은 회복주의 신학, 종말론 신학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그 출발점을 『함께 계신 하나님이신 성령』이라면서 『21세기 신학을 오순절 운동의 신학으로 발전시켜 나갈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영훈 교수는 『이번 발표회를 시작으로 학회는 성령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따라 오순절신학회는 매년 두차례 논문발표회를 갖고 간행물 등을 발간해 오순절운동 정립과 확산에 힘쓸 계획이다. 〈전재우〉
놀라운 성령체험/브론스빌 하나님의 성회 교회
◎미국 플로리다 펜사콜라 스티브 힐 목사가 주인공/2년째 역사… 150만명 찾아와/절제바탕 회개통한 영혼구원/성령폭발 현장손길닿자 온몸 뜨겁고 떨리고 방언·용서·병고침·부부갈등 해소 등 경험
인구 13만의 작은 휴양도시 플로리다주 펜사콜라에 미국은 물론 전세계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펜사콜라 브론스빌 하나님의 성회 교회(킬패트릭 목사).
95년 6월 아버지의 날 주일예배때 시작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2년째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브론스빌교회를 찾은 인원은 약 1백50만명. 이중 11만여명이 즉석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첫사랑을 회복했으며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지난 5일 오후 3시 브론스빌교회 출입문앞에는 남부의 뜨거운 태양도 아랑곳하지 않고 2백여m가 넘는 행렬이 이어졌다. 7시에 시작되는 부흥회에 참석하려는 사람들이다. 이 행렬속엔 놀라운 부흥의 현장을 직접 보려는 한국목회자 80여명의 모습도 보였다.
수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저녁7시에 열리는 부흥회는 집회마다 각국에서 온 5천여명이 참석, 그 열기를 더한다. 부흥회는 경배와 찬양으로 시작돼 1시간가량 계속된다.
참석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두팔을 높이들고 감격해 춤을 추거나 통로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부흥회 설교는 펜사콜라 성령폭발의 주인공 스티브 힐 목사가 맡는다. 스티브 힐 목사는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를 회상하며 설교를 한다. 열살때 술과 담배를 입에 댔으며 16살때는 마약에 빠지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28살때 처음 예수를 만나면서 새삶을 찾았다는 말에 참석자들은 『아멘』 『할렐루야』로 화답했다.
그의 인생역정은 브론스빌 교회를 찾는 마약 알코올중독자 자살미수자 낙태자등 수많은 영혼들을 깨워 하나님앞에 나와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이어 초청기도의 시간.
아직까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비신자, 신앙은 가졌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사람들, 과거의 온갖 죄악들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강대상 앞으로 부른다.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갔다. 10대들은 맨발로 뛰쳐나가 고개를 떨구었다. 이들은 이내 어깨를 들썩이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회개의 기도소리가 성전을 가득 메우자 전 목회자와 훈련받은 기도사역자들이 참석자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에 들어갔다. 기도받은 사람들은 성령이 임해 몸을 떨고 방언하고 울음을 떠트리는 여러가지 현상들을 보였다.
참석자들은 성령의 불길로 회개 용서 내적치유 부부갈등 해소 병고침등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힐 목사님이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온몸이 뜨거워지면서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졌습니다. 바닥에 누워 몸을 떨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이 쏟아지고 방언이 터졌습니다. 성령님이 나를 만지시고 계시다는 것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1시간만에 일어 났는데 그렇게 마음이 평화로울수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펜사콜라를 찾았다는 멜슨씨(46·시애틀 거주)는 성령의 임재를 온몸으로 느낀후 10년간 고생하던 우울증과 두통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말했다. 이러한 간증은 매일밤 이어진다.
지난달 27일 세계적 권위지 뉴욕타임스지는 브론스 빌교회에 관한 기사를 1면등 2쪽에 걸쳐 자세히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들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대해 킬패트릭 목사의 입장은 단호하다.
『우리교회의 놀라운 현상들은 전사역자들의 끊임없는 기도의 열매로 순수하고도 완벽한 성령의 역사다. 이것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또한 최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하다』
국내 목회자 60여명을 인솔, 브론스 빌 교회를 찾은 조희서 목사(안디옥세계선교회·서울성결교회)는 『펜사콜라의 영적 대부흥운동은 경건과 절제를 바탕으로 회개의 기도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라며 『제2의 부흥을 소망하는 한국교회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993년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가 미국 부흥성회 인도중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예언했던 펜사콜라. 동성연애주의와 낙태주의자들의 천국으로 알려진 이 작은 도시는 이제 전세계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며 성령의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펜사콜라(미 플로리다주)=조재선〉
◎민족각성통일운동을 왜 외면하나/먼저 철저한 회개통해 부정·불신의 벽 깨고 세계교회의 리더돼야
미래 사회학자 네이스비트와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신학자 하비콕스는 향후 종교와 기독교에 대한 전망으로 성령운동이 주도하는 교회가 성장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였다. 한국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일어난 것은 1907년 대부흥운동이며 이는 회개를 통한 성령충만의 체험이라 말할 수 있다.
90년전에 이 땅에 최초로 임했던 성령의 강림은 철저한 회개운동, 뜨거운 기도운동, 성령의 각종 은사체험으로 표출되었다. 이후로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사에 큰 흐름으로 자리잡아 한국교회의 근원적 힘이 되어왔다. 무엇보다도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부흥과 성장에 크게 공헌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의 성령운동이 범 교단적 차원으로 확산되어가고 있음을 보아도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21세기를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성령운동은 교회안팎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기도 하다.
첫째로 현 상황에서 성령운동은 우리사회에 만연된 부정부패와 불신의 벽을 허물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죄의 회개를 통한 영적각성을 바탕으로 사랑실천운동과 도덕성회복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
예컨대 효도대학원 설립과 더불어 효실천운동이 교계일각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둘째로 성령운동은 민족통일운동의 바탕이라 하겠다. 성령으로 하나되자는 한국교회 일치운동으로서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가 통일을 이루는 것은 정치와 경제논리를 뛰어넘어 성령통일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90년전 평양 장대현교회에 임하였던 성령일치가 이제 서울에서 평양으로 옮겨져야 한다. 통일의 전단계로서 북한동포 돕기를 활성화하는 성령께서 긍휼한 심령을 부어주어야 가능한 것이다.
민족각성과 통일운동은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일 뿐 아니라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다. 북한동포를 돕자는 단일취지가 한국교회의 분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안타깝다.
이는 주도권 다툼이라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이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도자의 겸허하고 진실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셋째로 성령운동은 성령세계화이기도 하다. 오순절날 마가다락방에 임한 성령은 제자들로 하여금 땅끝까지 성령행전의 지경을 넓혀간 것이다. 각국 언어로 표출된 방언기도의 모습은 성령의 세계화를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계교회에서 한국교회의 역할은 새로운 리더십을 우리에게 요청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21세기 세계교회를 주도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하여야 한다. 한국기독교 내에 세계적인 안목을 갖출 수 있는 정책개발연구소를 세워 복제인간같은 세기적인 관심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세계교회에 대안을 제시, 전세계 58억 인류에게 다가서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불과 2년하고 수개월 남겨놓은 현시점에서 성령의 사역은 한국교회와 우리민족이 하나되게 하는데 중심역할을 하고 있으며 세계와 세기의 최대현안으로 부상될 것이다.
미스바구국집회의 교훈/정두섭 서전주교회 목사(설교)
▷사무엘상 7장3∼14절◁
오늘의 정국은 위기입니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시킴으로써 발생한 파업과 시위가 해를 넘겨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밖에도 정치, 경제, 안보, 도덕 등 총체적 위기입니다.
○총체적 위기와 해법
성경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정황도 정치 사회적으로, 영적으로, 국가안보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시고 사무엘로 하여금 자기를 대언, 대행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때가 어려울수록 그 누구의 말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5·16 이후 지금까지 국가경영의 최우선목표는 경제성장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가져온 폐해는 환경오염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와 엄청난 인권유린입니다. 물론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이 있었습니다만 바로 이 때부터 전국민적인 과소비, 사치와 향락이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인간에 대한 존엄성 그리고 도덕성과 봉사정신에 기초하지 않은 법과 국가는 바벨탑과 같은 모래성을 쌓을 뿐입니다. 이번 날치기 법개정은 경제성장을 최우선시함으로써 천부께서 부여한 인권과 생존권을 퇴보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전국민은 금식하면서 『우리의 하나님께 범죄하였나이다』하고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이처럼 대통령으로부터 근로자에 이르기까지 회개하며 전국민이 일대각성해야 합니다. 법개정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닙니다. 국민정신이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부터 90년전 1907년 1월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회개운동이 나라를 구했습니다. 회개의 물결이 전국교회로 확산되면서 국민대각성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교회의 대부흥을 가져왔음은 물론이요, 3·1운동과 8·15해방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앞장서서 기도했습니다. 이 민족의 파수꾼이요, 제사장으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솔선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한 의인 아브라함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교회와 일터에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운동이 일어나고 확산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하는 의인이 있는 한 우리나라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빼어난 민족, 제사장나라가 됩니다.
○기도하는 의인 많아야
위기라는 말에는 위험과 기회의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슬러 방자히 행하면 모두 파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고 경고합니다.
반면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가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결과 블레셋은 퇴폐하고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고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남북의 화해와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고 경제적 번영과 함께 세계선교와 평화에 크게 이비지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불러일으킵시다.
평양 장대현교회 성령강림 90주년
기사입력 : 1997.01.14, 00:00
◎「제2부흥」기원 초교파 성회연다/15∼19일 봉천동 서울순복음교회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강림을 통한 영적 부흥을 오늘에 되살려 한국교회에 제2의 신앙운동을 일으키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가운데 이를 기념하는 기념성회가 대대적으로 준비돼 관심을 끌고 있다.
97민족통일성령복음화대성회(총재 신현균 목사)는 15∼19일 서울 봉천동 서울순복음교회(김용완 목사)에서 「평양장대현교회 성령강림90주년기념 성회」를 개최한다. 한국대학생선교회대표 김준곤 목사,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 성민교회 신현균 목사, 숭의교회 이호문 목사가 강사로 초청된 이번 성회는 매일 오후 7시에 열리며 성령의 은혜와 역사, 영적 성장을 강조하는 메시지가 이어진다.
주최측은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집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은 당시 한국교회를 결집시키고 본격적인 전도운동을 펼치는 계기를 만들어 교회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평가하고 『만 90주년이 되는 지금, 그 영적 열기를 침체된 한국교회에 불어넣기 위해 이번 성회가 마련됐다』고 말했다.
「나부터 회개하고 성령으로 하나되어 민족의 복음화와 평화통일을 이루게 하옵소서」를 주제로 꾸준히 97성회를 준비해 온 주최측은 오는 8월 광복절주간에 열리는 대규모 본성회 외에도 이에 따른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 다양한 행사도 함께 개최, 성령운동을 통한 민족화합과 복음화를 위해 기도한다는 계획이다.
본대회에 따른 성회붐을 조성하기 위해 주최측은 전국 21개 도시에서 준비성회를 지속적으로 갖는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이번 90주년기념성회가 끝난 후인 26∼29일에는 합정감리교회에서 세번째 준비성회가 열릴 예정이다(5253673). 〈김무정〉
1997.01.06, 00:00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이 시대 목회자)
◎광야서 3만성도 일궈낸 「부농」/혹독한 연단 기도로 극복… 영적 파워 “철철”/서울 변두리에 「교인 쟁탈전」 포기하고 성전 건립/새벽기도강화… 16년만에 「부흥의 기수」로 우뚝/“「경쟁」은 정말 싫었어도. 경쟁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그요. 결국 십자가 불빛이 드물었던 명일동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출석신자 3만여명에 이르는 서울 강동구 명일동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54). 그는 새벽기도회를 통해 한국교회의 제2부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 목회자다. 새벽마다 하나님앞에 무릎꿇지 않고는 못견디는 청년같은 뜨거운 열정, 갓 하나님을 만난 초신자처럼 순수한 감동을 소중하게 간직한 그는 뜻밖에도 『모든 것이 약했기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명성교회가 창립된 것은 1980년 7월6일. 황량한 공터에 십자가탑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그는 교회를 세웠다. 교회가 없는 곳을 일부러 택한 것이다. 교인쟁탈전을 벌인다는 말은 정말 듣기 싫었다. 또 치열한 경쟁속에서 승리할 자신도 없었다.
『건강, 지식, 경험….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나의 부족함을 너무 잘알기 때문에 서울의 변두리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능력의 한계를 절감할 때마다 무릎 관절을 꺾었어요』
김 목사는 유난히도 긴 「광야인생」을 살았다. 가정환경 성장과정 건강 목회과정 등 어느 것도 순탄한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제기능을 못하는 폐와 위와 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동성서신학원 3학년때인 1963년 고향인 경북 영양의 흥국교회를 맡아 첫목회를 시작했다. 『김목사는 오래 못살 것이다』는 말을 들은 것도 수차례.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크게 쓰시기 위해 너무도 혹독한 「연단의 과정」을 예비해 놓으셨다.
질곡의 광야를 「기도」로 횡단한 그에게 언제부턴가 영적인 힘이 실렸다. 그의 메시지는 「격식의 틀」을 깨고 진리안에서 자유로웠다.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미소를 띤 그가 강단위에서 던지는 메시지는 영적인 파워가 넘쳤다. 음성은 부드러우나 내용은 비수처럼 예리한 광야의 외침. 그는 단 한번도 「갱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교회가 갱신됐다. 장로나 권사 몇사람이 출석해 꾸벅꾸벅 졸다가 끝나는 새벽기도회가 아니라 축제무드와 생동감이 살아있는 예배로 갱신됐다.
『새벽기도는 신앙생활의 기본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전통적인 신앙행위가 곧 새벽기도지요. 특별히 좋은 양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아무리 고함을 쳐도 양들이 따라와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지요』
서울 강동구의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며 「세개의 벽」을 깨뜨렸다. 점점 시들해져가는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여성들로만 가득찬 교회, 교회를 외면하는 젊은이들…. 병인을 찾아낸 의사가 능수능란한 솜씨로 병자를 치료한 것처럼 명성교회는 전혀 새로운 교회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2주간의 특별새벽기도회에는 무려 4천여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참석했다.
『교회는 젊어야 합니다. 생동감이 넘쳐나야 하지요. 목회자는 신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여러 선교단체나 연합기관으로부터 책임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는 자리에는 서지 않기로 했지요』
김 목사는 자기관리의 짐이 무거워지면 목회에 전념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기관들을 뒤에서 돕는 일은 하지만 직책을 맡는 일은 고사했다. 때로는 자신의 뜻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해 오해를 살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례적으로 김목사가 「97민족통일 성령복음화대성회」의 대표대회장을 맡았다. 대성회는 오는 8월10∼15일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다. 김목사가 대표대회장직을 수락한 것은 단 한가지 이유때문이다.
『금년은 한국교회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90년이 되는 해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이 장대현교회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킨 날이 1월6일이었어요. 부흥운동의 출발점은 「회개」입니다. 회개운동이 곧 부흥운동입니다』
김 목사는 97성회를 통해 통렬한 회개운동이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다. 시위성 집회가 아니라 「나」를 낮추고 남북한의 막힌 곳이 뚫리도록 기도하는 집회가 되길 기대하고 있다. 97성회를 통해 한국교회가 「형제」임을 선언하고 「분열」과 「경쟁」을 일삼았던 것을 눈물로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원한다. 그리고 명성교회가 바로 제2부흥운동의 진원지가 되기를 그는 바란다.
현재 명성교회는 농어촌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도 앞장서고 있다. 도시로 유학오는 농어촌교회 자녀들이 생활할 수 있는 「명성장학관」을 서울 목포 광주 대구 대전 등 5개도시에 설립했다. 전체 학생수는 1백80명에 이른다. 하남시의 선교센터에는 무의탁 노인 16명이 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매일 조석으로 식사를 제공하는 무료식당 등이 있다.
『교회가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교회가 국내선교에 더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해외선교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농어촌교회가 먼저 살아나야 합니다. 농어촌교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해야하는가를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생각으로 목회에 임하고 있다는 김삼환 목사. 그는 명성교회를 통해 한국교회 제2부흥의 가능성과 교회의 사명을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는 「약함」를 고백할 때 「강함」을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기도를 드리며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임한창〉
1997.01.01, 00:00
성장장애요소를 제거하자(한국교회가 바뀐다:1)
◎「이단 독버섯」 교회성장 발목잡는다/사이비종교인 대부분 “옛 신자”… 기성교회 한계 드러내/사회변화 못따르는 수동성·목회자 권위주의도 문제
1997년은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대부흥운동이 정확히 90주년이 되는 해다. 최근 성장둔화와 침체를 보이고 있는 한국교회에 190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의 신앙열기가 되살아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교회가 이제 더 이상 움츠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도약의 날개를 펴고 힘차게 웅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어떤 성장곡선을 그어 왔으며 정체의 원인과 문제점은 무엇인가. 오늘의 한국교회 상황을 진단하고 교회부흥을 위해 어떤 변화와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지 기획시리즈를 마련한다.
한국부흥운동의 대부로 불리는 신현균 목사(성민교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한국의 교회부흥을 예고하는 기폭제였다』고 진단한다.
1907년 1월6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행한 길선주목사의 설교는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며 온 회중을 열정의 도나니로 몰아넣었고 갈급한 심령들은 강한 은혜와 성령의 역사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밤새도록 기도했다.
신 목사는 또 이 부흥운동의 열기는 사회 각계각층과 전국으로 퍼져나가 본격적인 부흥운동의 포문이 열리기 시작했으며 한국부흥운동의 바탕을 마련했다고 설명한다.
한국교회는 일제의 암흑기와 한국전쟁을 통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어려움을 겪고 순교당했지만 질긴 생명력으로 발전을 이룩했다.
특히 70∼80년대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맞물리며 세계 개신교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교회는 이 성장을 바탕으로 괄목할 만한 해외선교의 포문을 열었고 신학과 교육 등 다방면에서 엄청난 발전을 기록했다. 그러나 황금기를 누리며 성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가 90년대에 들어서 성장속도가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최근 몇년간은 오히려 정체되고 둔화되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사실은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두 교단의 교세통계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한국교회에서 교회수가 가장 많은 예장합동(총회장 김준규 목사)은 올해 총회 보고자료에서 교회수 5천8백92개, 성도수 2백17만1천8백56명이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 숫자는 전년과 대비해 교회수는 3. 5% 증가했으나 교인수는 겨우 0. 6%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통계에서 교인수가 성장한 것으로 보기 힘든 것은 성도증가가 이뤄진 곳은 대부분 신도시나 개발지구 등 이주지역이어서 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증가였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서울 경기 대전 부산 등은 성도가 늘어났으나 대구 충남 전북 광주 강원 경북 인천 등은 성도가 오히려 줄었다.
총회에서도 『서울 경기 등의 성도증가는 교회의 교단영입과 신도시의 인구밀집에 의한 결과로 보이며 전체적으로는 성장보다 오히려 줄어든 지역이 많다』고 밝혀 성장감소를 시인하고 있다.
예장통합(총회장 박종순 목사)도 최근 통계위원회의 자료를 근거로 밝힌 내용에서 성장둔화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큰폭으로 성장해 오던 교인수가 93년에는 3. 1%로 떨어지더니 94년에는 2. 4%로 더 떨어졌고 95년에는 0. 01% 성장이라는 믿기 힘든 수치가 나왔다. 올해는 0. 5% 성장을 기록했다. 이 성장도 앞에서 밝힌 성장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을 감안할 때 한국교회는 이제 교회성장의 기로에 서 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아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위기의식은 한국교회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탓인지 올해 유달리 많은 교회성장세미나와 목회자 재교육프로그램이 교단별, 단체별, 교회별로 열렸고 교회부흥을 새롭게 전개하자는 운동이 활발히 모색됐다.
구리생명교회 김용근 목사는 『최근 현상으로 한국교회도 서구교회가 보여 준 전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느낀다』며 『공동화현상으로 한국도 화려한 역사만을 갖는 교회가 되지 않을까 불안해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래선지 최근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이제 방관자적인 목회자세를 벗어나 새로운 돌파구와 영적운동을 일으키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구습과 구태를 벗고 개혁과 갱신의 자세로 한국교회의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한국교회의 성장을 가로막아 온 장애요소들은 무엇인가.
이 장애요소는 시대적 변화와 흐름에 따른 필연적인 것도 있지만 교회가 적절한 대비와 방지에 노력을 하지 않아 생겨난 것이 더 많다고 교회성장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이단종교의 발원이다. 급속도로 뻗어가는 이단종교인들의 전력을 살펴보면 대부분 교회 출석경력을 갖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한다. 이런 현상은 기성교회가 성도들의 필요와 관심을 채워주지 못함으로써 파생된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제종교문제연구소 심영식 이사장은 『이런 신흥종교의 급속한 성장은 건전한 복음교회에 대한 큰 도전으로 작용하고 기존 성도들을 흡수해 교회성장의 걸림돌을 넘어서 마이너스요소가 되고 있다』며 『한국교회는 이단과 사이비, 신흥종교에 대한 대비책을 철저하고도 완벽하게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단과 연합단체가 이 일을 전문성이 떨어지는 이들에게 맡기고 있어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아울러 급속히 발전하고 변화한 한국의 경제와 문화, 사회는 교회성장에 모두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삶의 질이 향상됨으로 예전에 종교적 기능이었던 심리적 안정이나 봉사활동, 선교 등이 유흥산업의 발달로 여행과 취미생활, 여가활동으로 대체되어 교회의 필요성을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재빠르게 변하는 사회변화에 교회가 미처 따라가지 못함으로 그 여파가 교회성장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목회자 양성과 교회성장에 대한 연구를 심도있게 하고 있는 신인현 목사(임마누엘교회)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부각되는 교회성장의 장애요소 이외에도 교회내에서 장애요소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최근 많은 신학교에서 배출된 교역자들이 정도의 목회를 하지 못하는 리더십 부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지나친 권위주의의 만연으로 교회 이미지가 격하돼 이것이 장애로 등장합니다』
즉 교회가 교회로서의 바른 역할과 책임을 다 못할 때 주변에서 보는 교회의 대사회적 이미지가 떨어지고 이것이 전도와 연결돼 교회성장의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오늘의 움츠린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이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이제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정확히 90년이 된 지금, 다시 한번 그 뜨거운 신앙열정을 돌이켜 제2의 부흥기를 도래케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를 분명히 직시하는 정확한 판단과 미래를 내다 보는 혜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공통된 시각이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희망과 소망이 있다. 〈김무정〉
1997.01.01, 00:00
침체된 교회에 돌파구 제시/평양대부흥운동 90주년
올해는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지 90주년이 되는 해로 「97민족통일성령화대성회」가 열리는 등 이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행사가 여러 곳에서 준비되고 있다.
오늘날과 같이 침체된 한국교회는 90년 전에 일어났던 대규모 영적각성운동, 성령운동을 새로운 탈출구로 삼아야 한다는 많은 지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이같은 행사가 열리게 된 배경이다.
그렇다면 당시 이 평양대부흥운동은 어떤 배경과 양상으로 전개됐고 그 여파와 성과는 어떠했는가.
1903년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원산에서 기도모임을 가졌는데 이중 의료선교사인 하디목사는 선교사로서 자신의 무력을 고백하면서 통회의 기도를 드렸다. 백인으로서의 우월감과 권위주의적 사고를 철저히 회개한 것이다. 이 고백과 통회가 타 선교사들에게 깊은 감동과 도전을 주었고 이것이 회개와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주로 사경회를 통해 강력하게 전파된 이 운동은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의 대성회로 큰 전환점을 맞으며 급속히 확산되었다. 당시 10일에서 15일간씩 계속된 사경회는 새벽기도회와 성경공부, 부흥집회로 이어졌으며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전통으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평양의 부흥운동은 학생과 여성들에까지 확산됐고 곳곳에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이 대부흥운동은 「기도」와 「성령강림」으로 부각됐고 주로 길선주 김익두목사를 중심으로 한 사경회는 참석성도들을 울리고 웃겼다.
「죄에 대한 가책과 회개, 이를 공중고백하며 용서와 화해를 통한 하나됨」을 강조했던 당시의 부흥운동은 90년이란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날 한국교회가 꼭 필요한 내용들을 전파했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신학자들은 이 평양대부흥운동의 영향이 모두 세가지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의와 죄에 대한 인식이 생겼고 △교회신자들의 심령이 성결하게 바뀌었고 △기도생활과 삶이 변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함께 선교사들도 한국인의 삶을 십분 이해하고 선교에 더 열심을 냄으로 부흥운동이 가속화 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은 오늘 한국교회가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을 되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의 죄를 내가 먼저 통회하고 이 사회와 민족을 구원해 주십사고 뜨거운 기도를 드리는 것 그것이 바로 영적각성의 시작이며 내가 먼저 의를 실천하고 봉사에 나서는 것이 부흥운동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김무정〉
1996.12.04, 00:00
박정렬 목사 「오순절신학」 출간
◎오순절 성령운동 역사 체계적 집대성
오순절성령운동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전세계적으로 4억6천만명에 이르고 있다. 이는 지구촌 전체신자의 24%에 해당한다. 한국에도 성령운동에 관심을 가진 신자와 목회자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오순절신학」만을 주제로 집필된 책은 거의 찾아볼수 없어 오순절신앙과 신학정립에 어려움이 따랐다.
순신대 총장을 역임한 박정렬 목사가 최근 출간한 「오순절신학」(순신대학교 출판부)은 순복음교단의 교리와 조직신학및 실천신학을 연계시킨 탁월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목회자와 선교사, 교수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순절 성령운동의 역사를 밝힌 후 조심스럽게 오순절신학의 방향을 전망하고 있다.
박 목사는 『오순절은 「50일」이라는 숫자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는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인 구약의 칠칠절에 해당한다』면서 신약시대의 오순절은 영혼을 추수하는 축제라고 설명한다. 그는 한국교회 오순절운동의 시작을 1907년의 대부흥운동으로 설정하면서도 1903년 원산에서 하디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부흥운동을 간과해선 안된다고 덧붙인다.
박 목사는 이책에서 성령운동의 주역들인 김익두 이용도 최봉석 이성봉 나운몽씨등을 소개하면서 오순절신학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본래 오순절신학의 특징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현장사역에 공헌하는 신학이라고 정의하고 설교 교육 전도 선교 교제 봉사에 대한 실재와 이론을 조화롭게 강조하는 것이 오순절 신앙의 특징이라고 이 책에서 결론짓고 있다. 〈임한창〉
1996.10.17, 00:00
한국을 움직인 10대 설교가
◎연세사학회 선정·발표… 연2회 개인별 분석세미나/길선주새벽기도·부흥회 첫 개최/이성봉임마누엘 특공대 조직/이용도회개통한 갱생 강조/김재준적극적 사회참여 주장/한경직복음주의적 메시지 전달/조용기소외 민중의 아들 치유/곽선희·김선도도시교회 설교가/김장환방송·매머드집회 대가/이만신성장형 부흥설교모델
『지난 1백10년간 한국교회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설교가들은 누구일까』
70여명의 교회사가들로 구성된 연세교회사학회(회장 김홍기 교수)는 최근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10대 설교가」로 곽선희(소망교회) 길선주(장대현교회) 김선도(광림교회) 김장환(수원중앙교회) 김재준(한신대 설립자) 이만신(중앙성결교회) 이성봉(성결교 부흥사) 이용도(예수교회) 조용기(여의도순복음교회) 한경직(영락교회원로·이상 가나다순) 목사 등을 선정, 발표했다.
연세사학회는 16일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모델로 가장 많이 등장하거나 초창기 한국교회를 일구어낸 역사적인 인물 가운데 10인을 선정했다』며 『각 분야의 교회사학자들이 이들의 설교특징과 그 영향을 분석하는 세미나를 매해 두차례씩 개최하기 위해 그 첫번째로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설교를 조명하는 세미나를 21일(월) 오후 4시 연세대100주년기념관에서 갖는다』고 말했다.
학회에 따르면 길선주 목사(1869∼1935년)는 한국 최초로 새벽기도회와 부흥회를 개최하면서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을 주도한 장본인.
이성봉 목사(1900∼1965년)는 신유 중생 재림 은혜 등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부흥사설교」의 모델로 1954년 임마누엘 특공대를 조직해 약소교회를 위한 순회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재림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에 초점을 두었다.
또 이용도 목사(1901∼1933년)는 침체국면에 처해 있던 1930년대 한국교회에 대각성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목사는 회개를 통한 갱생을 강조했고 이로 인해 그가 집회를 마친 곳마다 「평양기도단」을 비롯한 초교파 기도모임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한편 진보신학의 태두로 불리는 김재준 목사(1901∼1990년)는 각종 사회문제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예리하게 분석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강조, 「예언자적 설교」의 원형으로 불린다.
이와 대비되는 한경직 목사는 「복음주의적 설교」의 대가로 손꼽힌다. 복음주의적 설교란 사회참여보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 설교스타일을 말하며 기독교의 기본적인 메시지를 충실히 전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조용기 목사는 60, 70년대 소외된 민중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민중치유설교」와 성령의 내재적 은사를 강조하는 「은사주의설교」의 모델이 됐다. 질타보다는 치유와 희망을 강조한 그의 설교는 명쾌하며 알기 쉽다는 점에서 많은 설교가들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곽선희 목사와 김선도 목사는 서울 강남에서 중산층들을 대상으로 설교해 교회를 성장시킨 「도시교회 설교가」의 대표주자로 손꼽힌다. 또 김장환 목사는 기독교에 대해 모르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방송설교나 대형집회를 통해 알기 쉽게 설교하는 「매머드설교」의 모델로, 이만신 목사는 교회성장 전도 교인배가 교회건축 등을 강조하는 「성장형 부흥설교」의 모델로 평가되고 있다. 〈이진호〉
1996.08.27, 00:00
“회개…갱신…성령운동 불지펴야”/국제 신학 학술세미나 지상중계
26일 연세대학교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국제신학연구원 주최 제5회 국제신학학술세미나는 전세계적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는 오순절 성령운동에 대한 바른 진로를 제시하고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책임과 역할을 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됐다. 참석자들은 이번 세미나가 세계 교회 속에서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이 갖는 역할과 의미,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생각하고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크게 공헌했다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이번 국제신학학술세미나 주강사인 하비 콕스박사와 김의환박사의 강연요지, 토론내용, 행사 이모저모를 특집으로 꾸민다.
◎주제발표 요지/하비 콕스 박사 “성령은 구주이시며 생명의 수여자”/김의환 총신대총장 “영적 회개가 한국교회갱신 주역돼야”
▷하비 콕스 박사◁
12세기말 이탈리아의 시토 수도원 원장이었던 플로리스의 요아킴은 독창적인 성령론을 제시했다. 그는 구약시대가 성부의 시대라고 생각했고, 교회사의 첫 천년기간은 성자의 시대이며, 자신이 속한 시대는 삼위일체 가운데 제3위격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고 가르쳤다. 즉 역사는 성령시대의 여명을 알리고 있었다.
요아킴은 성령의 새로운 시대를 예견했다. 요아킴의 예언이 있은지 8세기가 지난 현재 우리는 종교적 에너지의 전 세계적인 폭발을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한가지 간과한 것은 이 순수한 영적 에너지가 한때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적 요소였으나 수세기 동안 억압되고 무시됐다는 사실이다.
첫째 종교 다원주의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지 않는 다른 신앙들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이는 심각하고도 현실적인 도전이다.
둘째 우리 시대에 억압됐던 성령의 귀환을 알리는 또 다른 증거는 사제나 목회자나 신학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의 위치에 많은 여성들의 참여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 교회에서 여성들의 대두는 억압된 성령의 귀환을 알린다.
셋째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급속히 증가하고 있는 기독교 운동은 분명히 오순절주의다. 이러한 운동이 창조주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성령의 상호관계와 성령의 자유로움에 대한 심오한 인식없이 어떻게 이해되고 적절한 비평과 환영을 받을 수 있는가.
넷째 기독교인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직면하고 있는 가장 미묘하고 심각한 도전, 즉 세계 시장의 힘에 잘 대처하도록 도와주는데 필요한 것은 성령의 권능에 대한 철저한 이해다. 성령의 계속적인 사역에 대한 이해와 참여만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 시장 문화가 가치관을 실제로 생성하고 있으며 그러한 가치관들중 몇몇은 기독교 가치관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음을 알게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우리가 생물학적이자 영적인 생명의 근원인 성령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이는 우리에게 생태학적 윤리의 발전을 요구한다.
성령은 임의대로 불게 된다. 그 누구도 그 운동들을 통제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은 구주이시며 사망이 아닌 생명의 수여자이시다.
▷김의환 총신대총장◁
교회사적으로 볼때 오순절사건 이후로 성령운동은 반드시 교회부흥을 수반했다.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이 운동에 직접 참여한 미국 선교사 윌리암 블레어는 「한국의 오순절」이란 말로 이 운동을 표현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논할때는 이 시점을 성장의 원년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1907년 1월6일부터 열흘 동안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는 매일밤 1천5백명 이상이 모였고 회개운동이 일어났다. 선교사와 목회자와 신자들은 서로간의 불화에 대한 자책감으로 통회하며 집단적으로 죄를 자백했다. 특별히 새벽기도회의 열기는 뜨거웠다. 통성기도도 그때 시작돼 한국교회 특유의 기도형태로 정착됐다.
블레어는 이 사건을 오순절과 비길만한 사건이라고 단정했다. 그리고 목회적 차원에서 교회의 공고백이 과연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도 사실이다. 대부흥운동의 주강사는 길선주 목사였다. 길선주 목사의 설교에는 회개뿐만 아니라 기사와 이적이 따랐다. 길 목사의 설교에 은혜받은 선교사들은 그동안 우월감으로 교만했던 죄를 한국신자들 앞에서 자백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 부흥운동의 성격을 정리해보면 첫째로 사경중심의 부흥회였다는 것이다. 낮에는 성경공부가 있었고 밤에는 회개와 결심이 있었다. 둘째는 기도운동이었다. 통성기도와 새벽기도운동은 이때부터 한국교회 기도운동의 특징으로 자리잡았다. 셋째는 회개운동이었다. 넷째는 초교파적 연합운동이었다.
이런 부흥운동의 결과 성경공부 중심의 사경운동이 일어났고 교회부흥과 질적 성장을 가져왔다. 또 국내외에 전도와 선교운동이 일어났다. 한국교회는 일본 중국 만주 연해주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1907년의 부흥운동은 전도운동이라기보다는 회개와 갱신운동이었다. 새벽기도회를 세계교회 초유의 모델로 만든 영성운동이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적 시련기에 한국교회에 허락하신 영적인 복을 단회적 은혜로 받아들여선 안된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아픔을 간직한 이 나라에 다시한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교회갱신운동이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한다.
오늘의 갱신운동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 한국교회의 영적 갱신운동이 목회자, 장로, 신학대학 교수, 신자들에게 일어나야 한다. 이제 우리는 오순절을 통과한 베드로처럼 성령을 통한 뼈저린 회개로 한국교회 갱신의 주역이 돼야할 것이다.
◎토론내용/말씀운동 통한 교회·사회변화 절실/성령의 역사는 모든 제도·권위 초월/한국신학 문제점 진단… 한단계 높여”
이번 5회 국제신학학술세미나 참가자들은 김의환 박사와 하비 콕스 박사의 주제강연내용은 물론 토론자들이 강연자와 나누는 주제토론회에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특히 이번 세미나 토론회 강사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교단별 신학교 교수들이 망라됐으며 의욕적인 토론을 통해 한국교회 성령운동의 진로를 모색했다.
오전강연을 맡은 김의환 박사의 발제토론에는 연세대 민경배 교수의 사회로 장신대 성종현 교수, 아세아신대 김기홍 교수, 감신대 김홍기 교수, 침신대 피영민 교수가 참여했다. 오후 콕스 박사의 토론은 연세대 김중기 교수의 사회로 총신대 차영배 전 총장, 서울신대 최인식 교수, 총신대 권성수 교수, 순신대 명성훈 교수가 참여했다. 또 이에대한 총평은 박봉배 박사가 맡았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중심으로 성령운동과 교회갱신에 대해 강연한 김의환박사의 강연에 토론자들은 『성령운동이 한국교회 회개운동과 갱신운동의 시작이며 한국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는 내용에 공감하며 오늘날도 그와 같이 회개운동을 통한 사회변화와 교회갱신이 요청되고 있다』고 총평했다.
또 콕스 박사의 발제토론은 동방신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이해와 삼위일체교리의 차이, 영적부흥의 시점,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가 아닌 것의 기준,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자유의미 등에 대한 질문 등으로 2시간 동안 격론을 벌였다.
콕스 박사는 『성령운동은 언제나 하나님 말씀운동으로 열매를 맺어야 하며 성령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강조한 뒤 『성령운동이 교회의 제도와 권위주의에 묶일 경우 그 역사가 제한받는다』고 말했다.
한편 토론자들은 콕스 박사가 예전의 신학사상과 크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콕스박사 자신이 성령을 통해 크게 변화됐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세미나에 참가한 김정수 목사(41·성광교회)는 『성령운동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관심을 갖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며 『콕스 박사와 같은 세계적 석학들을 초청한 이런 행사가 자주 열린다면 한국신학발전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신학연구원은 이번 발제강연과 토론내용 테이프와 자료집으로 만들어 배포할 예정이다(7807981). 〈김무정〉
1996.05.25, 00:00
「성령강림주일」 맞이한 한국교회 진단
◎“침체교회 성장 돌파구는 성령운동”/교회일치·사회봉사·의식개혁으로 확산 발판/영의 파급통해 성도의 신앙과 생활 변화토록
26일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성령강림주일」이다. 성령강림주일은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기독교가 지키는 3대절기로 오순절이라고도 부른다. 오순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로 이날 초대교회성도들은 성령의 강림을 체험했다. 특히 이날은 교회의 탄생일로 기념된다.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의 대부흥운동을 성령운동의 초기로 보며 30년대를 시련기, 50년대를 회복기 70년대 이후를 발전기로 분류한다.
그런데 이 발전과정에 있어서 성령사역에 대한 논쟁이 여러차례 있었고 성령신학에 대한 바른 정립이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축하하고 기념해야 할 성령강림절이 부활절이나 성탄절에 비해 축하행사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와 신학이 정립돼 어느 교회에서나 성령사역이 일반화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80년대 들어 오순절신학을 바탕으로 한 교회들의 급격한 성장과 발전은 한국교회에 큰 도전을 주고 있다.
세계교회사에서도 성령사역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1906년 미국의 한 작은 도시 아주사에서 시작된 성령운동은 세계교회성장의 한 맥을 형성하는 흐름으로 자리잡았으며 지금도 그 역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큰 교회 대부분이 오순절교회임이 이를 증명한다.
세계적 선교학자 바렛트박사가 밝힌 자료에 따르면 95년 말 현재 전세계 오순절은사운동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숫자는 4억8천만명 정도 된다고 보고 했다. 이 수는 세계 신구교인구를 합친 수의 25%가 되는 높은 수치이다. 이 성장세는 특히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시아 각곳에서 놀랍게 퍼져 나가고 있다. 중남미의 오순절 운동바람은 가장 큰 종교적 파워를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아프리카 각국에서의 오순절교회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한국교회는 최근 오랜 갈등구조를 보였던 보수 진보의 두터운 벽을 허물고 새로운 화합시대를 열어가려고 하고 있다. 반면 교회성장은 정체되거나 오히려 감소되고 있다는 보고가 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지금 교회성장의 큰 역할을 해온 열정적인 성령운동의 재확산과 건전한 오순절문화보급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국제신학연구원 이영훈 원장은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을 통해 보다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여기서 응집된 힘을 선교뿐만 아니라 대사회적 봉사와 의식개혁에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성령운동을 근저로 한 영적대각성운동과 구제사업, 의료사업, 미자립교회지원 등 제반사업을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많은 목회자들은 한국교회가 성령강림주일을 맞아 특별한 관심과 관련행사를 가짐으로 성령운동에 대한 바른 인식과 영성개발, 사회참여의 인식을 높여주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각 교회가 이 기간에 성령관련세미나와 서적전시회를 비롯, 「순결서약운동」등을 개최함으로 성령강림주일이 단순히 교회절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공감대를 형성하는 뜻깊은 시간으로 승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사에 유래없는 폭발적 성장을 한 배경이 뜨거운 성령운동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성령운동전문가들은 『이제 한국교회는 이 거룩한 영의 파급을 통해 행동으로 보여지는 구체적인 열매를 맺어 성도 개개인의 생활과 신앙을 구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김무정〉
1996.03.19, 00:00
총신대 특별강사로 내한 웨일즈대 데이비스 학장
◎“교회들은 경쟁 상대 아닌 협력 파트너”/“5가지의 「깨끗함」 목회자 철학 필수”
『한국 교회의 성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에 자만하지 않고 늘 깨어 있어서 말씀으로 무장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웨일즈복음주의신학대학 학장 얼 데이비스(61)는 지난 2일 총신대학교 개강 수련회 특별강사로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는 우리나라 교회와 신학생들을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신학사조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갈등과 억압 속에서도 신앙에 큰 변화를 겪지 않는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교회는 경쟁대상이 아닙니다. 지역분배에서 활동방안까지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웨일즈는 우리나라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
북한지역에 최초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로버트 토머스가 웨일즈 출신이다. 또 1904년 웨일즈에서 일어난 영적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1907년 우리나라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웨일즈복음주의신학대학은 선교사 로버트 토머스를 기념하고 그의 선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교내에 로버트 토머스·한국 기념도서관을 건립할 계획이다.
데이비스학장은 『목회자들이 깨끗한 인격을 소유하고 순결성을 유지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목회자들은 깨끗한 말, 깨끗한 마음, 깨끗한 손, 깨끗한 가정, 깨끗한 목회 등의 품성과 행동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이 다섯가지를 지키고 말씀으로 무장하며 기도하는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부탁했다. 〈전재우〉
1995.12.04, 00:00
미 블레어 지음 「속히 예수 밋으시기를 바라나이다」우리말 번역
◎선교사의 파란눈에 비친 한국인의 삶과 신앙/1901년 내한 이후 40여년간 사역/일제하 생활·초대교회 활동 “생생”
1901년 한국땅에 발을 디딘 후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거당할 때까지 40여년을 선교했던 미국인 선교사가 기록한 당시 한국교회와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최근 책으로 나왔다.
미국북장로교회 윌리엄 뉴튼 블레어 선교사의 글 「골드 인 코리아」를 완역한 「속히 예수 밋으시기를 바라나이다」(두란노)는 러·일전쟁 을사조약 한일합병 등 구한말의 시대적 정황을 비롯 문명에 눈뜨는 한국인의 모습과 신앙생활을 선교사의 시각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책에서 한국인의 습성에 관해 『본래 한국인은 시를 즐기는 매우 영적인 백성이며 공부하기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또 그는 무엇보다 한국에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은 바로 「가난」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이 가난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은 전쟁으로 황폐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정부도 부패하고 비능률적이었다. 수세기동안 그 나라 왕들은 불쌍한 백성들을 쥐어짜는 지방관이나 관리들을 통해 백성들을 다스리게 했다』고 고백했다.
또한 한국은 러·일전쟁후 가장 큰 불행이 덮쳤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런 한국의 모습속에서 역사하실 것이라면서 바로 한국국민은 상한 심령을 가진 국민이고 이 모습은 그리스도시대의 팔레스타인과 흡사하다고 전했다.
이 책에는 이외에 하얀 무명치마 저고리의 아낙들, 상투 튼 머리에 팔자걸음으로 기침하던 노인장들, 길게 땋아내린 댕기머리를 나풀거리며 뛰놀던 짚신발의 아이들 등 우리 선조들의 사는 모습이 소개돼 있다.
블레어선교사는 교회사적으로 1907년 대부흥운동과 1920년 진흥운동, 1930년대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주역이기도 하다. 그는 40여년동안 한국인들과 교우하면서 그들의 정금같은 신앙을 수없이 접하고 감격했다면서 『한국의 가장 좋은 금은 산이나 모래 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밝혔다. 〈노희경〉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33:1∼3)/조다윗 세계하나님의성회 연합회총회 총재·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오늘 우리는 천지와 만물의 창조주 되신 야훼 하나님께 마음 문을 열고 통회하며 자복하고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굳게 믿고 기도해야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전세계의 영적각성을 위해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개인과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킨 대 부흥운동과 영적각성은 언제나 뜨거운 성도들의 기도를 통해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탄생은 오순절 다락방 제자들의 기도에서 비롯되었고 이방선교의 출발도 바울을 중심으로 한 주의 종들이 안디옥교회에서 금식하며 기도할때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시작되었습니다.
1904년 영국의 대부흥운동은 에반 존 로버트를 중심으로 한 탄광노동자들의 기도모임에서, 1907년 한국의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대부흥은 길선주목사를 중심으로 한 새벽기도에서 출발되었습니다.
또한 금세기의 성령운동은 1901년 1월1일 미국 캔자스주 토페카의 벧엘성서학교에서 기도하던 아그네스 오즈만양의 첫 성령세례 체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온 지구촌의 50억 인구위에 성령의 물이 임하여 영적인 갱신과 부흥이 다시 일어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둘째, 우리는 기구촌의 생태계 파괴로 인간이 살 수 없는 지구가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이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후 세계를 다스리고 지키는 청지기의 사명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함께 생존해 가는 운명공동체의 한 일원으로서 산업화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지구를 보호하고 지켜야 합니다.
셋째, 북한 핵문제와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핵은 대량살상의 무기입니다.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독재체제에서 고통받는 북한동포와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성도들의 영적인 재무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가복음 21장 34절에서 36절을 통해 성도들에게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죄를 자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씻고 간절히 주님앞에 기도드려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크신 권능과 능력으로 응답하십니다.
◎“뜨거운 간구 반드시 응답”/하나님 왕국의 도래(이사야9:6∼7)/로렌 트리플렛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위원장·목사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를 위해 이 아름답고 역사적인 여의도광장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구체적으로 역사하십니다.
기독교회 역사상 가장 큰 기도집회로 기록될 이 자리에서 나는 「하나님 왕국의 도래」에 대한 기도를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친 기도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중요한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잃어버린 세계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아갈 방향과 존재이유를 상실한 세계에 하나님의 왕국이 온다는 사실을 알리고 복음을 전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급박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이 혼동된 세상을 떠맡아 모든 것의 왕이 되며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길 염원하는 기도는 많은 곳에서 성령충만과 영적변화를 일으킬 것이며 우리에게 선교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사명을 일깨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10·3세계기도대회 이후에 일어날 모든 「하나님의 왕국」을 기대합시다. 하나님의 왕국이 모든 나라, 모든 대도시, 모든 마을, 모든 가정에 도래하도록 염원합시다. 하나님의 왕국은 반드시 모든 곳에 올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래왕국에 대한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계획 안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수확을 위한 기도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응답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지만 그 문을 여닫는 힘에 대한 열쇠는 결국 우리가 쥐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당신은 예수님과 함께 무엇을 할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인생의 왕이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 자리에 서길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당신 마음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래서 왕국의 왕인 예수님이 그 자리에 들어가 우리의 기도가 세밀히 응답되길 기대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왕국의 조속한 도래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문을 활짝 열고 영광의 왕이 우리 마음 속에 자리잡도록 합시다.
오늘 1백만명의 하나된 기도가 분명히 하늘보좌를 움직일 것입니다.
1994.10.01, 00:00
하나님의 성회/제3의 물결 성장의 비결(주간 초점)
◎서울총회 계기 조명 세계 하나님의 성회/성령이 삶을 변화시켰다/경험신앙 오순절 등 불씨 1914년 미국서 조직/조다윗목사의 여의도순복음교회 견인차/1백50개국 성도 3천여만명 기하급수 증가
현재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제1회 세계하나님의성회연합회(WAGC)총회를 계기로 성령운동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같은 이유는 하나님의성회(Assembles of God)가 오순절 성령운동을 모토로 발전해 왔으며 지금도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하나님의 성회는 1백50여개국에 전파됐으며 교회 17만여개, 성도 3천만여명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숫자는 세계의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등 모든 교파중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며 앞으로 그 성장속도는 더 빨라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렇다면 교단발전의 원동력이 돼온 성령운동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 신학적 배경과 이 운동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무엇일까. 「제3의 물결」로 통칭되는 성령운동과 하나님의성회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본다.
일반적으로 성령신학자들은 오순절 성령운동이 사도행전적 교회로 돌아가는 현대적 부흥이라고 정의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걷잡을 수 없는 부흥의 역사를 이루던 초대교회는 시간이 흘러가면서 제도화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령을 상실해 갔다. 소멸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줄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가운데 현대 오순절운동이 새롭게 시작된 것으로 보는 시점은 1901년이다. 미국의 파함목사가 지도하던 신학생중의 한명인 오즈만양이 성령을 충만히 체험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당시 학생들은 사도행전에 대한 귀납적 성경연구결과 성령충만이 영성을 강화하고 삶의 현장을 변화시킨다는 확신을 갖고 함께 간절히 기도해 큰 은혜를 받았다.
성령운동은 점점 퍼져 나가기 시작해 1903년 중국에서, 1906년 미국 LA에서, 1907년 한국에서 강력하게 일어났다. 마침내 1914년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미국 핫스프링스에 모여 「하나님의 성회」를 조직, 성령운동을 앞세운 교단으로 출발했던 것이다. 오순절운동을 지향하는 교단은 하나님의 성회 외에도 「하나님의 교회」등 여러 곳이 있으며 3년마다 정기적으로 세계오순절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순절교회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세계적인 교회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박사는 그 요인을 4가지로 나누어 분석했다.
첫째, 순결의 교회로서 성장에 대한 믿음, 건전한 교리, 놀라운 생활양식의 변화이며 둘째, 기도의 교회로 방언및 통성기도, 예언,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이며 셋째, 능력의 교회로 표적과 기사, 신유등과 같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마지막 네번째는 가난한 자의 교회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가난을 체험한 사역자 등을 들고 있다.
즉 원색적인 성령의 역사가 교회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오순절신학은 「불의 신학」으로 불린다. 오순절 성령충만을 강조하는 집회에 참석하면 구원의 은총에 대한 이해와 설교에 앞서 실제적인 체험과 복음에 의해 회개가 이뤄진다.
또 오순절신앙은 이론이나 개념이 아니며 임재와 능력으로 함께하는 「직접성의 신학」이며 경험론적이고 행동적인 「움직이는 신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런 오순절신학과 성령운동이 체계적인 모습으로 한국에 나타난 것은 1928년 미국의 럼시선교사에 의해서였다. 물론 그 전에도 원산의 대부흥운동등 성령의 역사가 한국에서도 강하게 나타났지만 신앙의 한 형태로만 이해했다.
럼시선교사는 1907년 LA부흥성회에서 방언과 성령을 체험한 여성이었는데 그녀는 한국의 허홍이라는 구세군본부직원에게 성경공부를 인도해 그 역시 성령체험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국내 최초의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를 1950년 창립했고 드디어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결성됐다.
기하성이 한국교회에 뿌리내린 기존교단들 사이에서 성령체험에 대한 일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기도운동과 말씀운동, 성령체험과 은사운동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특히 조다윗목사가 세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오순절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 70년대 중반에 이미 세계 최대의 교회로 자리잡은 이 교회는 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교회성장비결의 비전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 결과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를 역동적으로 성장시킨 한 줄기가 되었다.
아울러 1993년 9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세계하나님의성회연합회가 창립, 초대 총재에 조다윗목사가 선출됨으로써 성령운동을 강조하는 하나님의성회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게 되었다.
더구나 여의도순복음교회가 1976년 발족한 국제교회성장연구기구(CGI)는 전세계 교역자 1만3천여명이 가입해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을 배우게 됨으로써 오순절운동은 기하급수적인 발전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편 오순절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어느 정도인가. 한국교회가 세계 교계가 놀랄 정도의 빠른 속도로 부흥할 수 있었던 많은 요소와 원인이 있지만 그 직접적인 이유를 오순절적인 영향으로 돌리는 신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이 오순절운동이 한국교회의 교리해석 차이로 잘못 비친 면도 있었다. 이 견해차이로 일부 교단의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지난 9월12일 장로교총회에서 「오순절신학의 인정」을 연구 발표함으로써 이제 성령운동은 한국교회의 커다란 관심사로 부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최근의 오순절 성령운동은 개인의 영성강화와 함께 이웃에 대한 사랑과 사회적 책임의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어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번 WAGC총회에서 「구호개발기구」를 신설, 르완다등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들을 지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한국교회와 함께 성장해온 오순절성령운동이 이번 서울 WAGC총회를 계기로 더욱 성장, 발전될 것으로 기대된다. <김무정기자>
기독교의 영적 삶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연약한 자와 죄인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의를 위해 싸우며, 제자의 발을 씻는 섬김 등), 마음(빌 2:5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었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으심),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과 헌신을 닮은 것이다.
* 어떤 교회의 틀을 만들 것인가? (form 짜기)
- 사람을 잃어서는 안된다.
모든 사람이 일하게 해야 한다.
한 사람도 반대하지 않고 일해야 한다.
행사하며, 교회지으며 부흥해야 한다. 성장해야 한다.
(예) 빈야드 교회의 입구에 써있는 글 - "종으로 섬기는 교회"
- 전도도 버스비대주고, 주차비 대주고, 전화비 대주고, 지역사회에 꽃 보내고... 쓰레기 봉투나눠주고....
- 지역교회가 되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 세차해주고...차 세워놓았다고 싸움하지 말라!
교제는 날마다 새로운 얼굴과 마음과 정신과 가슴으로 하라!
* 가장 중요한 교회 모델은 말씀(성경)안에서 찾아야 한다. 성경의 다양한 교회들의 특징들처럼, 많은 교회가 있지만, 모든 교회는 다 다르다. 어느 교회를 copy하려 하지 말고, 목사(교인)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까?
1.비전교회 - 목사가 지도력이 있다.
1)판단지향적 - 결정을 잘 내린다. 계획과 명령, 통제를 잘한다. 쉽게 포기를 안한다.
2)재능이 있다 - 창의성 강함, 열정, 활동성 있고, 자신감있고, 문제해결 능력 강함, 미래보는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능력이 있고, 해결지향적 → 열려있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3)지도자은사 소유 - 리더쉽 있다. 하나님의 비전을 볼 줄 알아야 한다.
4)영분별의 은사 - 어떤 말이나 행동에 하나님이나 사탄적인 것을 구별할 줄 안다.
비전은 하나님의 정확한 것을 더 빨리 볼 수 있어야 한다.
5)지식의 은사 - 성장에 필요한 지식, 분별력 소유
6)다스리는 은사 - 교회 장단기 목회를 점검
2.꿈이 있는 교회 - 사람을 키운다. 자꾸 꿈을 주기 때문이다.
평신도 지도자를 키우는데 집중한다. 교인들의 은사 활용사업을 한다.
축제 프로그램과 비전 집회를 한다.
듣는 목회가 약하기에 보는 목회를 한다.
3.미래교회 -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준다. 사람들의 생각보다 앞서서 문제를 풀어준다. 따라오지 못하는게 아쉽지....
하나님의 비전에 비해 우리의 비전은 너무 작다.
→ 전문인들을 키워라!
치유사역 먼저가 아니고, 내적 성장사역 즉 의식변화를 시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우리 교회에 온 것이다. 일꾼 의식을 갖고 일하라!
교회가 밝고, 칼라가 밝아야 한다. 특히 안내위원들의 얼굴이 밝아야 한다.
교회는 생산적이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때도 새롭게, 즉 새신자 중심으로 일을 시킨다.
교회는 신지식(72년이후 태생의 젊은이)을 알려고 해야 한다. - 이들의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영성개발1 / 충만교회 민창근 목사
20010405 새벽기도회
* 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영성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영성신학, 영성훈련, 영성개발은 전 성서와 함께 이천년 교회사가 추구하여온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영성을 가진 사람의 모형이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의 영성운동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인식하고, 그의 삶을 자신의 인격으로 재현시키는 성령의 역사"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성개발의 초점은 예수요, 그 내용도 예수이다. 따라서 그 결과 예수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따르지 않는 사회운동, 영과 육을 분리시키는 신비주의 운동, 인간의 고행을 강조하는 수도원 운동은 진정한 기독교 영성운동이라 할 수 없다.
예수님은 12제자를 부르시고 철저하게 영성훈련을 시키셨다. 제자들은 3년동안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말씀을 들었다.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며 봉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영성의 사람이 되지 못했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지 못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은 가르침을 받고 훈련을 받았으나 그것으로 영성의 사람이 될 수 없었다.
/ 마16장의 베드로의 고백과 충격 - 인간적인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 사역은 '존재'(being)의 문제이지, '행함'(doing)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자신의 인격문제이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내 증인이 되리라"(행1:8)라고 약속하셨다.
결국 제자들은 이 약속의 말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서야 완전히 변화된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을 소유한 사람이 되었다.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행1:8)으로서 케리그마 영성이다.
1)케리그마 영성은 성서에 계시된 영성이다.
성경은 영성의 보고(寶庫)이다. 성경은 인간의 영성을 개발시키는 하나님 말씀이다. 전 성서의 내용이 영성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인물들은 영성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사람들의 영성을 개발시켜 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여 주셨던 것이다. 저들의 인격 속에 케리그마를 개발시킨 것이 곧 영성이었다.
(예)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신 것도 그의 영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고 증거할만한 케리그마가 있었기 때문이다(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 또한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의 왕궁에서 미디안 광야로 내몰아 40년 동안 연단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인류 구속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를 받을만한 영성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다.
2.케리그마 영성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신 계시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적 권능으로 선포하고, 민중을 구제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많은 기사와 이적을 행하신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군중이 따랐다. 이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육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셨으나 영성을 기대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만 알려준 비밀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부활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부활을 향하여 일직선으로 가셨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제시한 영성의 길이었다. 기독교의 영성은 십자가와 부활의 영성이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삶을 강조하고, 본받고 따르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타락한 죄인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은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고,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 안에 살기 위해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은 기독교의 최대 영성이다.
3.케리그마 영성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영성이다.
많은 종교들의 영성은 자기 노력과 훈련으로 이룩된다. 가장 위대하고 이상적으로 생각되는 정신을 목표로 삼고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성은 노력이나 훈련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예수님의 청빈, 고독, 침묵, 봉사, 순종, 고백기도, 금식, 말씀묵상 등 여러 가지 영성훈련 방법이 있다. 그러나 영성개발은 성령의 능력이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서 성서의 비밀인 케리그마를 알았고(행2:30,31)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다(행2:32).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이 되었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새로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를 부러워한다.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전 성도의 삶에 흐르고 있던 영성이 한국교회에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예수의 인격이 재화육(再化肉)되는 케리그마 영성운동의 부흥이다.
→ ①신령한 젖을 먹이라!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즉 생명의 영성이다. 이 사건을 만날 때 큰 일이 이루어진다. / 자기가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산 사건의 체험 속에서만 공급되어지는 신령한 젖
②신령한 집을 세우라! - 세상적인 건물로서의 성전을 짓지말고(솔로몬, 헤롯 ↔ 다윗), 신령한 인격의 집, 예수님이 거하실 집을 지으라. / 베드로의 변신 - 순교자의 길, 즉 십자가와 부활을 몸으로 증거함.
③신령한 제사장이 되라! - 제사장은 짐승을 잡는 사람. 말씀의 칼로 동물과 짐승의 근성을 죽이고 불태워야 한다. 하나님이 기쁘시게 받으시는 신령한 제사를 드려야 한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양은 젖을 짜먹고 털을 깎아 가지기 위한 양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는 양이다.
신령한 목회는 양들에게 신령한 것을 먹이고, 신령한 집에서 살게 하다가 결국 신령한 제물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예) 로마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발레리아누스 황제로 인하여 순교의 길을 걸어갔다.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따라오는데,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과 과부와 불구자들을 살리는 일을 대신하고, 교회 재산을 상납하라는 명령을 연기받고 민중들에게 나누어줌.
후에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로마 황제 앞에서 숯불로 달구어지는 수난을 당함.
힘으로도 안되고, 능으로 못하던 일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일어났다.
주여 우리에게도 성령의 능력을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