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LG전자 주차장에서 승용차 3대에 회원 9명이 분승하였다. 1호차(양수랑 장휘부 김재일) 2호차(윤상윤 박남용 나종만) 3호차(강공수 정원길 이용환)가 출발하면서 목적지는 보성군 겸백면 용산길로 정하고 광주를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통화를 하여 남해고속도로 진입로를 막 지나 미력면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보성지사’ 앞에서 기다렸다가 승용차 3대가 모이면 우측으로 들어가 좌회전하는 굴다리를 뀌어 보성강 수변길을 타고 용산길 끝부분에 있는 ‘보성강댐’을 구경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뒤에 따라오던 3호차 강공수가 남해고속도로로 들어가 버려서 벌교로 갔다가 유턴하여 돌아오는 바람에 우리와 얼마간 떨어져 행동하게 되었다.
1, 2호차는 보성강 댐을 구경하고, 겸백면 수남리 주월산길222를 향하여 달렸다. 드디어 네비게이션이 종점을 알리면서 안내를 중지하였다. 우리는 목적지인 윤제림 고객지원센터 주차장을 지나서 계속 올라갔더니 ‘무냄이재’로 넘어가는 후문이 나왔다. 거기에서 우측으로 난 시멘트로 포장한 주월산 둘레길을 1km 이상을 올라갔더니 종착지는 주월산 정상이었다. 거기는 주월산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인데, 주차장은 30여대는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우리가 서 있는 활공장은 주월산(舟越山, 557m)이라고 표지석에 쓰여 있었다. 내 고향마을 득량면 송곡마을 뒤에 있는 깃대봉에서부터 예당리 뒷산까지를 방장산이라 하고, 조성면 뒷산이며 수남리 끝자락인 이 산을 주월산이라 하고, 여기에서 벌교에 있는 존재산으로 이어진다. 남으로 눈앞에 훤하게 펼쳐지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여기에서 바라보이는 일망무제(一望無際, 한번 바라봄에 끝이 없음)의 광경은 느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여기에서는 누구든지 높은 곳을 올라오는 노력을 하지 않고도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감탄을 금할 수 없었고 이 모습을 자기의 가까운 사람에게 보여주지 못함에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그렌드케년’이나 중국의 ‘장가개’같은 명소처럼 호화롭거나 광대하지는 않지만, 담백하기 짝이 없는 산채나물 같은 맛을 풍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햇빛과 비를 가릴 수 있는 정자에 앉아, 강공수의 주도로 우리들이 산행 때마다 부르는 금주의 노래를 불렀다.
오늘 부른 노래는 창작동요의 아버지이며 아동문학가인 윤석중(尹石重) 작사 박태현(朴泰鉉) 작곡의 4분의 3박자 <산바람 강바람>이었다. 1936년에 발표하였고, 서정적이어서 1948년 이후 초등학교 고학년 교과서에 수록되어 어린이들이 많이 불렀다.
우리 들이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에 있을 때, 순천에서 온 초년생 주부들(7~8명)이 왔다 가더니, 이어서 산악자전거 부대 10여명이 올라와서 구경하고 갔고, 이어서 4~5명의 역시 초년생 주부들이 와서 하늘을 향해 마음껏 호흡을 하더니 우리의 뒷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을 보고 내려왔다.
다시 윤제림으로 내려왔다.
숲정원 ‘윤제림(允濟林)’ 소개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 주월산 일대의 337ha에 달하는 이 숲은 한평생을 온통 산과 나무에 바친 윤제(允濟) 정상환(1923~2005, 양조 극장업에 종사, 83세 졸, 보성군 벌교읍 출신)의 손길로 만들어졌다. 이 산이 이제 부친의 뒤를 이은 아들 정의조(1976년 서울대 졸업, 대기업 입사, 후 무역업)씨에 의해 경영 숲의 모델로 다시 한 번 비상을 준비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보성군 득량면 송곡리와 예당리의 뒷산인 방장산과 북으로 겸백면의 초암산과 동남으로는 겸백면 수남리의 동쪽에서 조성면 뒷산인 주월산 사이의 협곡(분지:盆地) 수남리 일대에 있는 숲이 바로 윤제림(允濟林)이다.
규모 :
아버지가 조성한 265ha → 아들이 확대하여 현재는 337ha
조성 경위 :
양조업과 극장업을 하던 윤제(允濟) 정상환씨가 산림녹화에 뜻을 두고, 당시 거금 120만원으로 보성군 제헌국회의원인 이정래 씨로부터 수남리 일대의 주원산 265ha를 사서 1964년부터 조림을 시작하였다. 1970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어 수남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수남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자비 200만원을 들여 3km의 농로를 개설하여 접근성을 높이고, 염소와 젖소를 키운 부산물(축분)로 밤나무를 심고 키워(밤을 생산) 1978년에는 젖소 100마리도 더 늘려 임간(林間)에 가축을 방목(放牧)하여 조림(造林)과 축산(畜産)을 병행하였고, 1981년에 1차 조림 10개년 계획이 끝남. 주 수종인 소나무가 ‘솔잎혹파리병’으로 다 죽어, 주 수종을 참나무 숲(12ha)으로 바꾸면서 전국의 버섯 농가에 참나무를 제공하면서 삼나무 편백 등 다양한 수종의 군락지를 조성하게 됨
신 경영 목적 :
독림(篤林) 농가의 원시적 목재 생산 방식에서 환골탈태하여, 트레킹과 등산, 청정 임산물과 함께 웰빙 음식 제공, 그리고 힐링과 이에 따르는 교육 등이 총체적으로 제공되는 복합영농산업으로 육성하여, 2018년에는 윤제림 일원에 개장한 '산림복합문화센터'는 정은조 회장이 제시하는 산림의 새로운 수익창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고객지원센터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치유정원 성림원(聖林園, 전라남도 민간정원 제12호, 현 회장 정은조씨의 ?부인? 최성림씨의 이름을 딴 것으로 미루어 본 것임)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안개나무와 오색(五色) 수국(水菊)이 주종을 이루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세파에 찌든 우리의 오장육부를 청신(淸新)하게 씻어 주고 나서 돌아가게 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숲속이라 해도 폭염의 날씨는 어쩔 수 없었다. 숲정원 윤제림을 다 돌아보려면 오늘 오후를 다 소비하여도 모자랄 터이지만 밥시간이 넘었으므로, 오후 1시 30분에 발길을 재촉하여 윤제림을 나섰다.
수남리 어귀에서 좌회전하여 겸백면과 득량면의 경계인 ‘오돗재’를 넘었다. 내가 어린 시절 재수(在洙)대부 등 마을 사람들과 함께 소를 몰고 와서 놓아먹이던 ‘오돗골’을 지나 발전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차를 멈추고 동료들에게 설명하였다.
겸맥면 용산리 ‘보성강 댐’에 저수된 물을 직경 1m 이상의 도수(導水) 터널을 땅속에 묻어 2.7km 떨어진 득량면 삼정리의 대형 물탱크로 방류하여 저장하였다가, 그 물을 수위 5m의 낙차(落差)로 100여m 거리에 설치된 수차(水車)를 돌려 전력을 생산하고, 거기에서 나온 물로 송곡 들판과 득량면 간척지의 농업용수로 사용한 것이다. 이런 발상이 한 일본 농부의 발상에서 시작하여 7년여의 노력 끝에 1937년에 현실로 이루어 진 것이다.
다시 승용차에 올라 득량역(得糧驛) 주변의 추억의 거리를 지나 ‘보성글로벌표준기상관측소’(높이300m, 총사업비 260억원)를 지나 득량만 방조제 중앙 수문에 있는 ‘중앙횟집’으로 갔다. 장어볶음을 시켰다. 음식을 만드느라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오후 2시가 넘어서 점심을 먹었다. 밥이 없이 장어볶음만 먹었어도 맛이 있었다. 다음에는 장어 뼈와 대가리로 장어탕을 끓어 주었다. 세계 최고의 미질을 자랑하는 ‘득량 간척지’에서 생산된 기름진 쌀로 지은 밥이라 밥맛도 참 좋았다.
오후 2시 40분에 방조제 중앙 수문에서 내가 태어난 마을 ‘박실’로 갔다. 나의 11대조 전라병마절도사께서 조성한 다전지(茶田池, 군 등록 문화재, 강화도에서 가져 온 돌로 연못 둘레를 축조함)와 충무공 이순신장군 수군(水軍) 재건로(再建路) 표지판을 살펴보고, 1597년 8월 추석(秋夕) 무렵 충무공이 양산항(梁山杭, 나의 14대조, 광주시 광산구 박산마을 송천 양응정의 종질이며, 충민공 양산숙의 종제)선조의 집에 3숙(三宿)을 하면서 군량미(軍糧米)를 조달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송곡면(松谷面)을 득량면(得糧面)으로 바꾸었다 함.
내가 조성한 ‘대내동산’ : 죽천원(竹川園, 내 할머니의 택호가 ‘대내’댁임)에 도착하여 납골묘(納骨墓)를 조성한 경위를 설명하였다.
오후 3시 10분에 박실 나의 오두막을 떠나 광주로 올라왔다.
오늘 산행은 우리 제주양씨 문중 어른이신 양재수대부님이 우리 목요산우회 회원들에게 막걸리 사 먹으라고 주신 금일봉(50만원)으로 하였습니다. 목요 산우회를 대표하여 재수대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회원들도 모두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첫댓글 우리 회장님(양수랑)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양재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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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선조 양우급(梁禹及) 선조님께서 다전지(茶田池)를 축조한 후 오매정(五梅亭)을 지었지만 본인은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서 한가로이 정자를 지킬 여가가 없었기 때문에 형님이신 우성(禹聖)님께 넘겨 드렸지만 그 후로 관리를 소홀히 하여 쇠락해 지고 정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여 길게 유지되지 못하고 전해 지는 이야기로만 남게 된 것을 문중에서 지금과 같이 복원한 것이어서 호남의 누정(樓亭)에 기록이 없을 것입니다.
아석의 수고와 대부님이신 양재수님의 도움으로 평생 처음으로 멋진 구경 하였습니다.
주월산 헹글라이더 할공장에서 사방팔방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산바람 바닷바람 귀밑을 스치는 부드러움을 보고 느꼈고 윤제림 수국길을 걸으려 정원을 구경한 추억 평생 갈 것 같습니다.
더구나 보성의 특식 바닷장어 정식까지 대접을 받고 보니 두 분께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가내에 영광과 평화가 가득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목요산우회 회원님들도요~~~~
'주월산'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을, 잠시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