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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t1CVdITkvoI&t=11s
* 녹화 중에 화일이 손상되어 설교편집은 하지 못하고 예배실황만 게재합니다.
2025.1.26(주일) 다니엘 9:20~27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고 깨달을지니라’
성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일은 매우 다양하고 깊이가 있지만, 주된 내용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며,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를 크게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창조의 일 : 하나님은 세상과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창세기 1-2). 이 창조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를 나타내며,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2) 구원의 일: 인간이 죄에 빠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을 통해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3:16, 에베소서 2:8-9).
3) 성령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어 신자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그들을 진리 가운데 인도하십니다. 성령은 또한 교회를 세우고, 믿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사도행전 2장, 요한복음 14:26).
4)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일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확장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고 선포하시고, 이를 위해 가르침과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신자들은 이 나라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질 날을 기다립니다(마태복음 4:17, 요한계시록 21:1-4). 이러한 하나님의 일들은 창조, 구원, 성령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포함한 전반적인 구속 역사로 연결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주요한 일인 창조,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나라 중에서 구원의 일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 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구하시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죽음, 부활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고, 그 결과로 영원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과 자비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이기시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는 증거입니다. 구원의 핵심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에베소서 2:8-9).
결국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가장 중요한 일인 구원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사랑과 은혜로 주신 선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입니다. 믿음으로 그 은혜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인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인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고 깨닫는 삶이 아주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단순히 이 땅에서의 삶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 놓여 있으며, 그 계획은 태초부터 시작되어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대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자주 생각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일상에 묻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바라보는 시야를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다니엘이 기도 중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깨닫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다니엘은 민족의 죄를 자복하며 간구하는 중에,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이스라엘의 미래와 메시야를 통한 구속의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이 메시지는 단지 다니엘의 시대만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일까지도 포함된 놀라운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니엘처럼 우리도 말씀과 기도를 통해 구원의 일을 묵상하며, 그 구원의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고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죄를 자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20~23절).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생각하고 깨달으려면 죄를 자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이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회개하고 기도하기를 학수고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다니엘은 자신과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기도합니다(20절). 그러나 즉시 하나님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그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21~23절). 20절에서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간절한 기도를 하되 말하여 기도합니다. 때로 우리의 기도가 침묵하고 깊이 묵상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간절한 기도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입을 열어 말로 부르짖게 됩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기도 소리를 내 귀로 들으며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그 생각이 깨달음이 되어 자복하게 됩니다. 기도 내용이 내 머리 속에 있을 때는 막연하던 것들이 입으로 고백할 때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1절에 보니 기도가 끝나서 응답받은 것이 아니고, 다니엘이 입을 열어 기도할 때, 이미 천사 가브리엘이 응답을 주고자 출발했다고 합니다. 21절에 “빨리 날아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빨리”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이 곳에서만 쓰였습니다. 이 구절은 내 죄를 자복하며 입을 열어 부르짖는 간절한 기도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계시를 깨달아 알도록 지혜와 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죄 가운데 거하면 징계하시고 고난을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23절의 주께 “크게 은총을 입은 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생각하고 깨닫는 자입니다.
마태복음 13:23에 보면 씨뿌리는 자의 비유가 나오는데 그 중 마지막에 좋은 땅에 뿌려진 씨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 말씀을 읽어보면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니라” 좋은 땅에 말씀이 뿌려지는데, 그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이며, 그 말씀이 그에게 결실을 맺어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맺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크게 은총을 입은 자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씀을 통해 생각하고 깨닫는 자라고 하는데, 이 씨뿌리는 비유와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다 기록이 될 만큼 유명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좋은 말씀을 해 주셔도 말씀을 듣는 자세가 좋아야 말씀에 은혜를 받고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다’는 말을 한자로 풀어 보면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들을 청(聽)자는 귀 이(耳)자 밑에 임금 왕(王)자가 씌어져 있습니다. 그 오른쪽 위에는 열 십(十)자가 씌어 있고 아래 눈 목(目)자가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 일(一)자가 씌어져 있고, 또 마음 심(心)자가 있습니다. 결국 들을 청(聽)자는 왕일지라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열 개의 눈을 가질 정도로 깊이 관찰해야 들린다는 뜻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의 마음을 품어 집중해야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자 보십시오. 귀만 있다고 다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왕의 귀라 할지라도 눈으로 열심히 살피고 마음을 다해야 들을 수 있습니다. 듣는 것이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눈도 동원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주일 말씀에도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메신저를 잘 봐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들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집중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비유를 드셨는데 씨에다 비유하셨습니다. 말씀이 씨와 같다는 것입니다. 씨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씨는 대부분 크기가 작습니다. 색깔이 까맣고 못생겼습니다. 씨앗은 대부분은 껍질 속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그래서 얼른 보면 하찮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절대로 씨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씨 안에는 풍부한 영양분이 농축되어 있습니다. 씨 안에는 놀라운 DNA구조가 접혀져서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씨 안에는 생명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 씨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에서 보관만 잘 해 주면 수천 년이 지난 후에도 그 생명력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씨는 보잘 것 없는 것 같아도 그 속에 창조의 신비가 숨어 있습니다. 큰 나무를 만들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수 만명을 먹여 살리는 놀라운 능력이 바로 이 작은 씨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이 씨앗에 비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점에서 씨앗과 같을까요? 하나님의 말씀도 씨앗처럼 얼른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습니다. 씨앗이 껍질에 싸여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베일에 가려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보면 말씀의 진가를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수 십 년 동안 성경책을 옆에 끼고 교회 왔다갔다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신비한 능력을 알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고, 성경책 배달부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씨앗이 발아 되어서 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모습이 환상적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인생을 아름답게 하고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모습을 보면 정말 환상적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책을 덮어두기만 하면 안 됩니다. 예쁘게 깨끗하게 자크로 채워두기만 하면 안 됩니다. 자꾸 펼치고, 자꾸 읽고, 끊임없이 묵상해서 그 생명력과 감격을 적극적으로 누려야 하겠습니다.
씨앗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안에도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디모데 후서 3:16절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영감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운동력, active, dynamic power)이 있다”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2:3절에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보배롭고 신비로운 말씀을 우리에고려 공민왕 때에 문익점이 중국 갔다가 붓대롱에 목화씨 몇 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솜 이불을 덮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목화씨 몇 알 때문에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나게 되었습니다. 누비 옷, 솜 바지, 파카를 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얼마나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까? 이 차갑고 삭막한 세상에 얼마나 따뜻하고 포근하고 풍성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70년동안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와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수문앞 광장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이때 학사 에스라가 성경을 펴서 읽어 주면 백성들이 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벽부터 정오까지 6-7시간동안 꼼짝하지 않고 서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듣다가 은혜를 받으면 엎드려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느8:3).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가 대해야 할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앞에 경외심을 가지고 겸비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대하면 왜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왜 감동과 은혜를 받지 않겠습니까?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9편에 보면 시편기자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는지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다(131)”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새벽녘에 눈을 떴다(148)”고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주의 말씀의 맛이 어찌 그리 단지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103)”고 했습니다. 이런 밭이 좋은 밭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자세로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면 성령의 열매가 30배, 60배, 100배로 맺혀서 성숙한 성도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처럼 좋은 밭을 평생 동안 유지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이후 인간의 마음은 갈수록 황폐해져 갑니다. 척박해지고, 완악해져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 밭을 좋은 밭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첫째, 수시로 딱딱해진 우리 마음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4절을 보니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어떤 사람은 그 마음이 닳고 닳아서 길가와 같이 뺀질뺀질해진 사람이 있습니다. 마음에 순수성을 잃어 버리고 세속적이 된 사람은 내면이 딱딱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 있기 때문에 말씀의 씨가 뚫고 들어갈 구멍이 없습니다. 이런 마음은 불신자만이 아니라 신자중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것이 식상합니다. 말씀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기본 상식만 많아 가지고 자꾸 판단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때 마음에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는 ‘내 마음이 길가와 같이 딱딱해졌구나’ ‘내 마음에 너무나 많은 발자국들이 왔다갔다 했구나’ 생각하고 빨리 회개의 쟁기로 내 마음을 갈아 엎어야 합니다. 호세아 10:12절에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둘째로, 좋은 밭은 말씀의 뿌리를 깊이 내리는 밭입니다. 5,6절에 보니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어떤 사람은 표면적인 심령은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일단 말씀의 은혜는 잘 받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마음 깊은 곳, 영혼의 심층부까지 뚫고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받는다고 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기쁨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씀을 듣는 그 순간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감동이 몰려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은혜로 받은 말씀이 나의 내면 깊숙이에 파고 들어가서 견고한 뿌리로 자리매김을 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내 의식 저변까지 뚫고 들어와서 나의 사상이 되고, 내 삶의 가치관이 되고 인생관이 되고, 소망이 되고 비젼이 되어야 합니다. 크고 튼튼한 나무를 보십시오. 뿌리를 파 보면 그 뿌리가 뚫고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어떤 뿌리는 20미터까지 뿌리를 뻗는다고 합니다. 우리도 말씀이 내 내면에 파고 들어와서 내 생활 전반에, 학교생활, 직장생활, 가정생활, 결혼관, 물질관,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말씀의 뿌리가 다 뻗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인생의 시련이 왔을 때에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셋째로, 좋은 밭이 되기 위해서는 염려와 유혹이 가시를 제거해야 합니다. 22절을 보니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그 사람이 아무리 내면이 부드럽고 소원이 많아도 염려와 유혹의 가시를 제거하지 못하면 말씀이 성장하지를 못합니다. 염려와 유혹이 말씀의 기운을 막아 버리기 때문입니다. 염려와 유혹의 성장속도는 말씀의 성장속도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그러므로 염려와 유혹의 가시를 수시로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염려와 유혹의 가시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5: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그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2:15절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수시로 파고드는 마음의 탐심, 유혹과 싸워야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그 비밀을 깨우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 속에 있는 천국의 비밀을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기간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찌 깊은 천국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 영적인 세계를 한 순간에 다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조금씩 조금씩 깨우쳐 가는 것입니다. 나의 겸손의 깊이만큼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나의 순종의 정도만큼 말씀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나의 헌신과 충성과 열정의 정도 만큼 깨달음의 정도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열매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니라 100배가 있고 60배가 있고 30배가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100배의 결실을 향해서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머리의 신앙에서 벗어나 마음의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마음으로 깊이 새겨서 백배, 천배, 만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길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깨닫기 위해서 다니엘은 자신과 민족의 죄를 자복하며 입을 열어 부르짖는 그런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천사가 빨리 날아도 저녁 제사를 드릴 때 도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바벨론 뿐 아니라 바사에서도 저녁에 예배는 없었습니다. 오직 다니엘만이 이스라엘에서 드리던 저녁예배를 바벨론 땅에서 드린 것입니다. 이 저녁 제사 때문에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져서 죽을 뻔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니 주님이 천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깨달음과 응답든 이렇게 여전한 방식으로 내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라는 것이지요. 또한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다니엘은 예배 뿐 아니라 왕의 진미를 거절하며 아주 사소한 일에도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이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왕궁에 살아도 오직 하나님의 일인 구원의 일에 관심을 최우선으로 두었습니다. 이렇듯 매사에 말씀으로 나의 삶을 들여다 보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생각학 깨닫는 은혜와 총명을 주시고,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구원의 일을 생각하고 깨닫게 되도록 입을 열어 말로 기도하나요?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와 큐티를 통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힘쓰고 계시나요? 이번 긴 명절 기간 중에도 큐티를 빼먹지 말고 하나님에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양심껏 살도록 적용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작은 일도 하나님 앞에서 양심껏 행하며 나의 욕심대로 행하지 않기를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지금 내가 겪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이 무엇인지 깨닫습니까?
2. ‘일흔 이레’의 영적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24-27절).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기도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응답하시는데, 가브리엘은 다니엘에게 “일흔 이레”(24절)의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일흔 이레를 기한으로 정하였나니 허물이 그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용서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환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긴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은 ‘일흔 이레’라는 말에 관심이 갈 것같아요. 이 기간이 언제 끝나나? 이 고통의 순간이 언제 끝나나? 저도 부교역자의 시간들을 15년 겪으면서 언제 이 기간이 끝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이 힘들어하고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흔 이레’의 기간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언급되는 '일흔 이레'는 오늘 본문인 다니엘서 9장 24-27절에 등장하는 중요한 예언의 개념입니다. '일흔 이레'는 문자적으로는 '일흔 주'(70주)라는 의미인데, 이 "주"는 일반적으로 "일주일" 또는 "7년"을 의미하므로 따라서 '일흔 이레'는 70개의 7년을 가리킵니다.
1) 문자적 의미: '일흔 이레'는 다니엘서에서 주어진 예언으로, 70주 동안 일어날 일들을 다룹니다. 다니엘서 9:24에 따르면, 이 ‘70주’는 여러 중요한 사건들을 포함합니다.
(1) 죄와 불법을 끝내기 위한 기간입니다. 이 기간 동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와 불법을 처리하시고, 의의를 이루시며,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한 계획을 완성하십니다.
(2) 성소와 성읍이 재건될 기간입니다. 이 기간은 황폐한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성전이 다시 세워질 기간을 포함합니다.
(3) 메시아가 나타나고, 그가 고난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70주 중에 메시아가 등장하고, 결국 고난을 당하며, 구속 사역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4) 마지막 70번째 주에서는 심판과 구속의 완성이 이루어집니다. 70번째 주는 이 모든 예언이 완성되는 시점으로, 종말과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예고합니다.
2) 영적 의미: '일흔 이레'는 문자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넘어서, 하나님이 구속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과 관련된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 구속의 계획의 완성: 70주 기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 계획을 완성하는 시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간은 구약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부활, 그리고 궁극적인 종말에 이르는 시간의 연대기를 상징합니다.
(2) 메시아의 오심과 고난: '일흔 이레' 중 특히 중요한 부분은 메시아의 오심과 그가 겪을 고난입니다. 다니엘서 9장 26절에 나오는 "기름부음 받은 자가 끊어질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3) 하나님의 구속의 시간적 계획: 이 예언은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구속의 시간적 계획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죄와 타락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절차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4) 최종 구속과 심판: 70번째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때를 상징합니다.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고, 악이 심판받으며,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일흔 이레'는 단순히 역사적인 시점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 계획과 메시아의 고난과 승리, 그리고 궁극적인 구속과 심판을 포함하는 깊은 영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쉽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 이 ‘일흔 이레의 기한’은 우리가 죄를 끊고,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을 만나도록 허락된 시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며 참으시는 기한입니다. 또한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자 주님이 지체하지 않고 오실 기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25~27절에서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일흔 이레 동안 일어날 일들을 깨닫게 하십니다(25~27절). 25~27절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서 ‘허물이 그치고 죄가 끝나는 것’은 죄가 봉해진다는 뜻입니다. 죄악이 용서된다는 것은 덮는다는 의미로 봉해진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덮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적용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창세전부터 예비된 환상과 예언이 이루어지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극히 거룩한 이가 곧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고 하는데,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오직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을 세울 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지극히 거룩한 이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는 말은 유대인의 왕이자 온 인류의 왕이신 예수님이 선지자로 오셔서 회개를 선포하시고 예배를 회복하는 제사장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죄로 죽을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중재하는 중보자의 사명을 감당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우리도 그 분의 발자취를 따라 믿지 않는 영혼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전도의 사명을 받은 자들이고 우리들이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풀꽃 시인’ 나태주 시인도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앙을 갖기 까지 “일흔이레‘의 기간을 겪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2007년 죽을 병에 걸려 6개월 동안 치열하게 투병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세상 빛을 다시 본 사람입니다. 투병생활 중 신기하고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각도기각을 세운 듯 둥그스름한 동굴 모양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과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일, 스르르 허공으로 올라가던 삼베 빛깔 손수건과 병실 천정에 생긴 청옥빛 우물 형태 등등 놀라운 것은 이튿날 “병세가 호전되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같다”는 담당의의 말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내 몸에 기적이 통과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대라는 걸 믿습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모를 때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합니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그를 사랑하는 게 하나님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오른쪽 눈알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하나님을 나를 살려줬습니다. 베트남 파병 시절에도 보살펴주셨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위기마다 건져주셨습니다. 2007년 힘겹게 앓고 나서 2년 뒤 수술을 받아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첫수술이 잘못돼 다음 날 재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소생했습니다. 우주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나태주 시인은 올해가 등단 55주년이 되는 데 그의 시 중 유명한 구절로 늘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일흔 이레‘를 통과한 자들은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 그 분이 내 영혼을 구원해주셨고, 또한 나로 하여금 다른 영혼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사명을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일흔 이레‘의 기간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에게 해당하는 ’일흔 이레‘는 무엇입니까? 저에게도 이런 일흔 이레의 기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에는 몸이 너무 약해서 밤에는 늘 경기를 앓고 밤에 부모님 들에 실려가던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는 건강한 몸이 되었고, 내 욕망과 야망에 살려던 저를 구해주시고 이제는 목회자로서 시간을 살게 하심을 감사드리며, 또한 15년동안의 부교역자 시절도 저에게는 ’일흔이레‘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도 부임하여 임대교회에서 온갖 수모와 수치를 당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할 때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우리교회는 ’일흔 이레‘의 시간 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기간이 끝나게 되면 회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일흔 이레’의 시간은 우리에게 주신 영혼구원의 사명을 생각하고 깨닫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주신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일흔 이레의 시간은 내 곁의 지체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구원의 길로 안내하도록 하나님이 나를 위해 특별히 예비하신 연단의 시간입니다. 이 기한은 성도의 회개와 거룩을 위해 허락하신 시간입니다. 따라서 이 기한이 다하기 전에 우리는 회개하고 회복하고 화해해야 합니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위한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수고는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삶을 준비하는 수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구원을 소망하며 말씀과 기도로 깨어 힘든 오늘을 살아내야 합니다. 적용) 현재 나는 길고 긴 고난의 터널 속에 있습니까? 세상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에도 그 기한이 있음을 압니까? 지금의 작정된 고난 끝에 구원이 있음을 믿습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당뇨 판정으로 식단 조절과 운동을 처방받은 것이 기도 응답이라 해석하며 건강한 일상을 보내고자 노력한다는 한 성도님의 큐티인 묵상간증이에요.
저는 137kg의 초고도비만 당뇨환자였어요. 일에 지칠 때면 편의점으로 달려가 폭식하고 더운 여름에는 캔 커피를 하루에 10캔 이상 마셨죠. 주변 사람들은 저의 건강을 걱정하며 기도해 주었지만 저는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밤 저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건강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두려웠고 저의 무절제한 식습관을 회개하며 큰 병이 아니길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병원에서 당뇨 진단을 받아 식단 조절과 운동을 병행하라는 의사의 처방을 받았어요. 제 몸이 더 망가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주신 기도 응답이라 생각되었지요. 22절 말씀에 가브리엘이 다니엘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듯이 의사 선생님은 제가 먹어야 할 음식을 알려주셨고 재활 선생님은 운동을 알려 주셨어요. 그렇게 처방받은 약과 음식을 제때 챙겨 먹고자 애쓰고 무거운 몸으로 재활 선생님과 운동하며 겨우겨우 한 달을 지냈지요. 그러자 저는 밤새 뒤척임 없이 숙면을 할 수 있었어요. 근력이 생겨 일상생활도 버겁지 않았고요. 그렇게 1년이 지나 저는 혈당이 정상이라는 진단도 받았답니다. 그럼에도 건강을 회복하자 예전처럼 식욕을 조절하지 않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지 않아요. 오늘 말씀에 힘입어 다시금 하나님이 허락하신 경계와 질서에 따라 육의 성전을 회복하도록 힘쓰겠습니다. 저의 적용은 잡곡밥, 샐러드 등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일주일에 3번 이상 운동하겠습니다. 매달 병원을 방문하여 당뇨 검사를 받겠습니다. 입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의 본문과 메시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그것을 깨닫는 방법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깨닫기 위해 회개하고 간구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 응답을 받은 장면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구원의 일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나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정 그리고 이 나라의 죄를 내가 끌어안고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다니엘처럼 우리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기도할 때, 그분의 구원 계획이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깨닫고, 그분의 구원의 일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삶에 가장 중요합니다. 특히 ‘일흔 이레’에 대한 해석과 그 영적 의미를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합니다. ‘일흔 이레’의 시간은 우리에게 주신 영혼구원의 사명을 생각하고 깨닫게 하시고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주신 사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계획이 특정한 시간표와 약속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면, 우리 각자의 삶과 이 땅에서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획을 믿고 인내할 수 있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