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지난 주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런 표현을 드렸고,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 사랑은 어떠한 것이며, 이웃 사랑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다릅니다. 아는 것은 하늘을 안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고, 사는 것은 땅을 산다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앎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삶으로써 우리는 인간들에게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증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증거가 되는 것이고, 하늘은 성물을 말하고 땅은 성전을 말하며 이것이 결합된 것은 성령을 말한다. 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하늘은 증인이 되는 것이고, 이 땅은 증거가 될 것이며 이것이 서로 동일 인물이 될 수 있을 때 완독에 이르렀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섬김 받으러 오지 않고 섬기러 왔다. 봉사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왔다. 두 단어를 애써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첫 번째는 섬김이고 두 번째는 봉사였습니다. 섬김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고, 봉사는 땅에서 그대로 실행하면 되는 것이다. 섬김은 선물이었고 봉사는 재물이었다. 그래서 이 섬김이라는 선물은 내가 어린 양이 되는 것이고, 재물이라는 것은 내가 속죄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양으로 출발해서 속죄 양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어린 양으로 출발해서 속죄양으로 끝을 맺을 것이고, 성탄의 어린 양에서 이제는 부활로 가는 그 속죄양의 길에 우리 서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림절에서 출발해서 위령성월에서 끝을 맺습니다. 대림절은 생명에 초점을 뒀지만 위령성월은 죽음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도 잘 기억해 두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 강론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삶의 체험을 통해서 이웃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또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통해 자신의 삶의 소리를,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이 받은 삶이 어떤 것이든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형제들과 함께 나눌 때, 생활하는 신앙인이 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올렸습니다. 받은 삶을 알고 있을 때 하느님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나누는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이웃 사랑을 말한다 이렇게 표현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을 형제들과 나누며 살아갈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세례 성사를 통해 약속한 하느님과의 계약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느님께서 말라키 예언자의 입을 통해 당신의 계약을 저버린 우리들에게 심한 천대와 멸시와 저주를 내리십니다.아니,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위선자라는 비난을 종종 듣기도 합니다. 세례 성사를 받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을 비우고 겸손되이 형제들의 무거운 삶의 짐을 덜어주기보다는 신자임을 빙자하여 사랑을 강조하고, 받은 삶에 은총을 져버리고, 자기는 더 큰 은총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착각하며, 신자로서 자신의 분수를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비신자들로부터 우리는 분명 듣고 있고, 종교인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보면 정말 본받을 것이 있는가 하는 의문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과연 신자들이 나의 모습을 보고 배울 것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도 가끔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잘못된 것을 우리가 스스로 잘 느끼고, 이제는 내가 다른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데, 그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제는 저렇게 살아야 돼 이 말씀이 나올 정도로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저렇게 살아가지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그 말이 나오도록 오늘 내가 살고 있다면 이렇게 사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잘못 살았다는 것을 금방 느끼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갖고 실제로 실천에 옮겨 나갔다면, 우리는 지난 날에 모든 것을 다 용서받을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지만, 그냥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우리는 결코 주님으로부터 선택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부르심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는 이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합니다. 부르심은 뭐고 선택은 뭔가? 바로 부르심은 하늘의 뜻이었고, 선택은 땅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고 말을 하면서, 하늘만 바라보고 땅의 삶을 소홀히 여기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을 해야 된다는 뜻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받아들임으로써 증인이 되고 내어 놓음으로써 증거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교자들을 증거자,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도 그런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가치의 경중을 가늠하는 우리의 관점과 지향이 얼마나 세속에 뿌리 깊이 물들어 있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학식과 지위와 존경의 큰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남들과 다른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듯이 느끼기 때문이며, 또한 그것이 성공한 삶의 핵심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듯, 대접받는 것과 선생 노릇을 좋아하는 사람은이 세상 모든 이가 학식이나 지위, 나이나 연령에 상관없이 유일하고 참된 그 참된 스승님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가장 단순한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배우고 나누는 가르침과 존경은 주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영원한 진리를 모시고 살도록 서로서로 섬기는 형제적 사람으로 표현될 때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원한 진리를 모신다 하면서 나는 하느님 사랑에 들어가 있고, 서로서로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섬긴다 그러면서 봉사한다 그러면서 바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위선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들은 윗자리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받기를 바랐습니다. 그들은 율법 전문가라고 자칭하였지만, 실은 율법을 빙자한 허영과 가식의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남에게 보이고자 겉모습을 꾸몄습니다. 남에게 보이려는 선행과 기도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성서는 말합니다.회칠한 무덤은 아무리 겉이 화려해도 그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꼭 기억해야 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라고 자처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하느님 없이 살았던 인물로 보입니다.살아가면서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하느님 앞에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세가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성인들도 생전의 잘못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성인은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굳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경전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많아도, 사람됨을 가르치는 스승은 적다고 말들 합니다. 머리로 가르치는 것은 쉬워도 몸으로 가르치기란 어렵기 때문입니다. 겸손하게 허리를 굽혀 남을 섬기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 우리도 그렇게 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우리는 받아들이는 모습을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하늘을 제대로 본 사람은, 하늘을 제대로 봤다는 것은 내가 증인이 된 것이고, 이 증인이 내가 증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상대를 섬기면 그것이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늘을 사랑하고 있다 한다면 형제를 섬기는 자세가 되도록, 땅을 사랑하고 있다 한다면 형제에게 몸으로 움직여야 됩니다. 섬기는 것은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봉사는 몸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그런데 몸과 마음과 몸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이것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은 뭐고 몸은 뭔가 마음은 성부에 맞춰져 있고, 몸은 성자에 맞춰져 있고, 두 가지를 합치는 것은 성령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세 글자로 가장 짧게 설명을 하라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맘과 몸, 맘과 몸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진정한 마음, 참된 마음은 마음의 고통을 통해서,참된 몸은 몸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그것을 잘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은 아는 것은 무척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는 것은 또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근데 마치 아는 것이 마치 내가 사는 것으로 착각에 빠집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살아가신 그 모습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모습만 그들이 했던 것입니다. 나도 잠깐 실수하면 그러한 삶의 구렁텅이에 빠진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깊이 생각하고 늘 깨어 있으라는 이 말씀을 잊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 줘야 됩니다. 너무나 쉽게 빠집니다. 왜냐 너무나 편안이기 때문입니다. 편한데다가 인정도 받습니다. 인정받는데다가 하여튼 내 모든 조건이 나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삶을 여러분들이 스스로 포기하도록 각별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사신 분들이 또 있긴 있는데 평신도로서 농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휩싸고 깊은 영성으로 가톨릭 생명운동의 선구자가 되신 장일순 요한 선생님을 생각할 수 있는데 그는 말과 글을 아낀 사람이지만 그의 이야기들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줍니다. 그는 진리를 모시고 서로 섬기며 사는 삶이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소박하게 자신의 몫을 실천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늘 깨우쳐줬습니다.오랜만에 선생님의 거룩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진리이신 주님을 겸손하게 모시고 서로서로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점검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장일순 요한 선생님과 직접 대화하면서 말씀하신 것이 있는데 세 줄뿐이 안 되니까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돌아가신 지 30년 되었습니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만 가지를 다 헤아리고 갈 수는 없지요. 그러나 자기가 타고난 성품대로, 물가의 피는 꽃이면 물가의 피는 꽃대로, 돌이 놓여 있을 자리는 돌이 놓여 있을 만큼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하고 가면 모시는 것을 다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멋지지 않습니까? 남들이 보기에는 작게 보이고 초라해 보이고 정말 가까이 가고 싶지 않겠지만 그러나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불꽃도 마찬가지 별꽃도 마찬가지 아주 초라해 보이지만 그렇습니다. 저도 가끔 세계 기행이라는 TV프로가 나오면 가만히 바라보면서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하늘 아래에 새로운 것이 없다. 사람은 다 사는 데서 사는구나. 다 하느님의 섭리가 거기에 다 내재돼 있는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갖게 되고 우리가 어려웠을 때도 그 모습대로였습니다.
근데 우리가 조금 잘 살게 된다고 해서 그것을 가볍게 보거나 천하게 보거나 그렇게 본다면 정말 안 될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우리 본당 신자 중에서 필리핀에서 활동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제가 알고 있기로는 압구정동 신자였는데 우리 본당에 계십니다. 필리핀에서 많이 활동했는데, 우리 한국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필리핀에 가서 필리핀 사람을 많이 업신여기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나는 예전에 이 말을 들었습니다. 장충체육관을 필리핀에서 지어주지 않았습니까? 했더니 맞습니다. 했습니다. 우리가 훨씬 더 가난해서 그들은 우리를 도와줬는데, 우리가 훨씬 부자가 되어 그들을 업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가 아닌가.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 바오로사도 이 말씀과 같이 우리는 자랑을 하지 않고 자녀들을 돌보는 어머니와 같이 부드럽고 평화롭게 살아야 합니다.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항상 노심초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접 자기를 자랑함으로써 그 소원을 푼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에게 자기 자랑은 가장 지루한 것이며, 남의 험담은 뒷맛이 개운치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멸시와 천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내가 주어진 그 자리에서 나의 소임을 철저히 해 나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우리 장일순 요한 선생님의 말씀을 잘 간직하고 최선의 삶이 무엇인지를 깊이 이해하는 오늘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