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 해제
광복 후의 야간통행금지제도는 미군이 진주한 직후인 1945년 9월 8일부터 시작되었으며, 미 제24군
사령관의 ‘일반명령’에 의하여 경성(서울), 인천 두 지역에 밤 8시부터 아침 5시까지의 통행금지령을 발포한
것이 처음이다. 이어 9월 29일에는 일반명령을 개정한 야간통행금지령을 발포하여 ‘미국 육군이 점령한
조선지역 내 인민’에게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금지가 포고되었다. 이 군정법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계승되어 치안 상황에 따라 시작 시간이 밤 11시로 단축되기도 하고, 또는 경우에
따라서 밤 8시부터나 10시부터로 연장되면서 지켜져 왔다.
한국전쟁 휴전 이듬해인 1954년 4월부터는 서울, 인천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어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1961년에는 통금시간이 자정에서 새벽 4시로 축소됐고, 1964년에는
제주, 1965년에는 충북이 통금지역에서 제외되는 등의 변화가 있었지만 통금제도 자체는 계속 유지됐다.
통금으로 차량과 인적이 끊긴 서울역 앞
야간 통행금지 바리케이트
야간통행금지 단속 모습
그 시대 밤 문화는 오늘과 완전히 달랐다. 술집마다 시간에 쫓기며 들이켜느라 '한국인들의 술 마시는
속도는 세계 제일'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1982년 1월 9일자). 자정이 넘으면 모든 거리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정적만 감돌았다. 곳곳에 군·경 합동 검문소가 설치됐다. 단속에 걸리면 새벽까지 파출소
신세를 지고 벌금을 물었다. 한밤 검문에 불응하고 질주하던 택시 운전기사가 군인들의 총격을
받아 중태에 빠지는 사건까지 일어났다(1972년 8월 26일자).
야간통행이 필요한 경우, 야간통행 허용 스탬프를 찍어주기도 하였다. 자정을 넘어 역에 도착하는
열차편이나 고속버스 막차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사람들이 주로 적용되었는데, 이
경우엔 해당 역/터미널의 관리 직원이 하차한 승객들에게 찍어주었다. 그 외에도 출산 등 급한 일이
있으면 처음 단속한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굳이 사정 설명하느라 귀찮지 않게 즉석에서 발급해주기도 했다.
통금 시대에 정부는 크리스마스나 대통령 취임일 등에 한해 선심 쓰듯 통금을 하루 이틀씩 반짝
해제했다. 1962년 연말 열흘씩이나 풀어준 건 이례적이다. 이에 앞서 그해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5·16 1주년을 맞아 16일간이나 통금을 풀었다. 통금 시대에 단행된 가장 긴 해제였다.
연말연시에 야간 통금을 10일간이나 푼다는 공고.
36년 4개월 동안 규제 속에 묶여 있었던 야간통행금지가 1982년 1월 5일 해제됐다. 정부는 이날
국무회의에서 통금해제 안을 의결, 전국 50개시, 139개군, 1,441개 읍, 면 중 53개군 292개 읍,
면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의 야간통행금지를 해제했다.
전두환 정권이 일부 해안·전방 지역을 제외하고 전국적으로 통금을 해제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광주시민의 피’ 위에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정통성 결여를 보완하기
위해 갖가지 유화정책을 실시해야만 했다. 교복 자율화, 해외여행 자유화, 정치·사상범 사면복권
등도 통금 해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또한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 등을 위해서라도
통금 해제는 필수적이었다.
통금해제 소식을 접하는 시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