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2월4일(목) 7시에는 입춘(入春)을 맞아,
신년 축하 <제 3회 아리랑 음악회>를 목동 또랑서 개최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날 : 2010년 2월 4일(목) 오후 7시
장소 : 놀터또랑(서울 목동)
초대손님 : 김명수(경기소리)
문화프로그램 : 홍어와 막걸리...
참가비 : 3만원 (6시30분부터 저녁식사 제공)
이번 초대 손님의 개인 프로필은 아래와 같습니다..
김 명수(경기소리)
1954년 서울에서 소리꾼집안의 후예로 태어났다.
전설적인 경기소리 명인으로 재조명되는 김옥심이 그의 친고모이다.
어린 시절 고모집을 드나들면서 당대 최고 명인들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으며,
귀동냥으로 고모의 소리를 따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철이 들어서는 근세경기소리를 집대성하였다 할 수 있는
이창배 선생에게서 한문과 경기소리를 학습하였다.
그러나 군대를 다녀온 후에 전업적인 소리꾼의 길을 접게 된다.
직업을 갖고 평범한 생활인(만도기계 지게차 운전자)으로 접어든 후 50대를 넘기면서도 같은 직장 같은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소리를 접은 것은 아니다.
소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한 순간도 소리공부을 놓아본 적이 없으며,
현재 살고 있는 원주의 치악산 자락에 자신만의 독공자리를 마련하여 틈만 나면 공력 쌓기에 여념이 없다.
뿐만 아니라 경기소리에 나오는 고사와 문장을 독학으로 해석하면서 한문학에 대한 연구도 깊이 진척시키나가는 중이다.
특히, 우리에게 매력으로 다가오는 것은 칸초네와 팝송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과 흡수이다. 통키타 세대인 그는 어린 시절 자연스럽게 기타를 잡게 되었으며,
자신이 사랑하는 경기소리를 기타반주에 실어 부르는 방법을 음악적으로 터득하였다.
경기소리 창법에 바탕을 두고 통성으로 시원하게 뽑아내는 그의 칸초네와 팝송은 기타 반주와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음악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현장에 맞게 즉흥적으로 팝송의 가사를 바꾸며 읊어나갈 경우엔,
음유시인과는 또 다른 세계,
즉 서울굿의 공수나 축원·덕담을 내려주는 무당 역할의 소리꾼으로 전환되어 버린다.
노동을 하는 생활인의 진솔함과 건강함이
그의 성음과 소리맛에 깊이 배어 있으면서도 정통적인 학습법을 바탕으로 한 득음에 가까운 통성의 소리맛을 함께 갖고 있는 귀한 존재이기도 하다.
자신이 아끼고 애창하는 경기소리와 서양의 대중음악을 완성도 높게 결합하여
누구나 들으면 좋아할 이 시대의 음악으로 변신시켜냈다는 점이
주목하는 그에 대한 가치이다.
제2의 장사익으로 등장할 수 있는 자질과 연륜을 이미 가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참고) 김옥심 (경기소리)
1925년 6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나 87년 11월경 작고한 경기 소리의 명창이다. 김옥심 명창은 1958년 광복 후 제1회 전국민요 경창대회에서 1등을 하는 등 1950~80년에 걸쳐 최고의 경기 명창으로 활동하였으며 이 시기에 발매 된 유성기 음반, LP레코드에는 그의 소리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약 100여종),인간문화재 이은주, 묵계월 명창과 함께 트리오로 전성기를 누렸고, 특히 정선아리랑 ,한오백년은 그의 특기로 그가 불러야만 제맛이 난다고 일컫는다. 김옥심의 목소리는 경기 소리를 위해 하늘이 내린 천성으로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맑고,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듯 윤기가 넘치며 가사를 음미하듯 호소력 또한 일품이여서 듣는 이마다 그의 소리에 탄복 않는 이 없었다. 김옥심 명창은 경기 소리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갖추어 소화해내므로 혹자는 100년에 하나 나오기 어려운 명창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참고) 이창배
벽파는 경서도 소리의 중시조이자 경제시조창(京制時調唱: 서울, 경기 지방의 독특한 시조 창법. 박절이 엄정
하고 속목을 쓰는 것이 특징)의 대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벽파는 경서도 소리의 예술적 위상뿐 아니라 학
문적 위상까지 높인 인물로 평가됨은 물론, 현존하는 경서도 소리의 체계적 전승과 발전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인정받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경서도 소리를 주로 불렀던 사람들은 선소리패(일명 산타령패: 예전 서울 마포, 왕십리 등지에서 산타령을 주로 부르던 소리꾼들)나 기생층이었다. 벽파는 이들이 불렀던 '12잡가'(아래 설명 참고)나 휘몰이잡가, 서도잡가 등이 환갑날 잔치소리나 기생들이 술을 팔 때 부르는 소리로 천시되는 것을 걱정하여, '예술성'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재정립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가요집성'이라는 책을 내고, '청구고전성악학원'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른 명인, 명창들과 겨뤄 벽파의 공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한국전쟁 이후 나라도 하기 어려운 '체계적인 제자양성'이란 국악계의 큰 숙제를 혼자서 해냈다는데 있다고 국악인들은 입을 모은다. 어려운 때에 주변의 만류에도 청구고전성악학원을 세우고 배출해낸 제자들은 현 선소리 타령 인간문화재인 황용주를 비롯 지화자, 안숙정, 이춘희, 김영임, 전숙희, 최창남 등 내로라하는 경서도 명창들이다. 그는 1951년 국립국악원 국악사가 되고, 60년부터는 국악예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선소리산타령’의 보존회를 조직하여 선소리타령의 보급과 후진양성에 힘써 왔으며, 68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산타령’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더더구나 벽파는 12잡가를 비롯 많은 민요의 사설을 지은 것으로도 유명하며, 경서도민요의 틀을 잡은 대단히 중요한 인물로 꼽힌다.
첫댓글 으헛! 개학날!
기다려 집니다.그,,울림이,,진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