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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묵상글 들 (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 돌대가리는 아닌지, 걸림돌은 아닌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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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돌대가리는 아닌지, 걸림돌은 아닌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불평을 터트립니다.
전에 이미 말씀드린 바 있지만 이들은
하느님께 기도하면 될 것을 모세에게 또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세는 백성들의 불평을 하느님께 전하고
하느님께서는 바위를 쳐 물을 주라고 하십니다.
이에 대해 왜 바위를 쳐 물을 주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생각게 되는데 이내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바위는 도저히 물이 나올 수 없는 곳이니
물은 모세나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것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분명히 알고 확고히 믿게 하기 위함이지요.
사실 샘 구멍을 쳐서 물이 나올지라도 하느님께서 물을 주시는 것이지만
그 경우 우리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라 샘이 물을 준다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처럼 바위에서 물이 나오면 물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비슷한 맥락으로 말씀하신다는 점입니다.
당신의 정체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제자들에게 묻고,
이에 베드로 사도가 정확히 알고 대답하자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결코 알 수 있는 것인데 알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표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마치 학교에서 꼴찌만 하는 친구가 풀어오라고 숙제로 내준
아주 어려운 문제를 풀어 가지고 오면 선생님이 그것은 네 머리로,
막말로 하면, 너같은 돌대가리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 네가 푼 것이 아니라 누가 가르쳐 줘서 푼 거라고 함과 같지요.
그렇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돌대가리인 우리가 아는 것은
돌에서 물이 나오는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지요.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정체는 악령들만 아는 것이었지요.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만 아는 것이었지요.
그 외에 우리 인간에게 주님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주님의 세례 때와
내일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타볼산 위의 주님 변모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할 때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머리로 다 알 수 없는 것은 주님의 정체 뿐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모든 것은 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신비이고,
하느님의 계획도 신비이고 섭리도 신비이며 주님의 십자가도 신비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전서 1장 23절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걸림돌이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그리스도께는 그 신비를 모르는
베드로와 우리가 걸림돌이기에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이렇게 일갈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하느님의 일을 사람의 일처럼 생각하는
걸림돌이 아닌지, 아니 그보다 더 하느님의 일은 아예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돌대가리는 아닌지 성찰하는 오늘이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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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신 후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은 남들이 이러저러하게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말고,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말하기보다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은 자신을 ‘주님 손에 쥐인 몽당연필’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다.’라는 고백은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무엇입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자신을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도 환시를 통해 ‘데레사의 예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가 꾸중을 듣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23).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관해 가르쳐 주셨지만, 베드로는 그것에 때한 깨우침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꾸중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으로 말하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었고 또 그 신비를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가 생각하고 고백한 그리스도상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꾸지람을 들을 만합니다.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여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인간의 원의를 내세우려 했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분이 원하는 나’를 추구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주님’을 만들어 가려고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에 걸맞은 모습, 제자다운 모습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으로 많은 약점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직자나 수도자의 허물은 용납할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그의 약점까지도 당신의 일을 하는 데 쓰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여 이렇게 저렇게 흉을 보거나 잘못을 들춰내어 그리스도의 길을 가로막는 사탄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지?”(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을 도구로 삼아 하십니다. 부족함도 많고 허물투성인 인간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 순간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고자 하는가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내 원의를 내세우지 말고 주님의 뜻을 찾는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내 뜻에 꿰맞추려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든지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하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1고린15,5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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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서, 교회의 신비는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먼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그런데 이 신비는 베드로가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밝혀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다.”(마태 16,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바로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바위 위에, 곧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며,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바로 여기에 놀라운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는 까닭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인 당신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오늘 우리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 자신만을 챙기는 일로 주님의 걸림돌이 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닥친 고난을 우리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끝까지 다 겪어내는 일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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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열쇠로 여는 방법
“필요한 일에는 일치가, 불확실한 일에는 자유가, 모든 일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사목헌장, 92항).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5년 간 가장 논의가 치열했고 길었던 사목헌장 토의를 마치면서 교부들이 신자 개개인들과 지역 교회의 임무로서 맺음말에 달아놓은 결론입니다. 교회 내부에서 신자들끼리는 물론,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갈라진 교파들 사이에서도, 여러 종파들과의 대화에서도 심지어 사회에서 다양한 입장의 이념 집단들과도 두루두루 통용될 수 있는 대화의 원칙이 이렇게 해서 나왔습니다.
먼저, 필요한 일이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을 말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에서 직접 나오는 최고선과 공동선을 이룩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최고선과 공동선을 가로막는 세력이 우상숭배요, 마귀입니다. 따라서 타협하거나 굴복함이 없이 이 최고선과 공동선을 지키기 위하여 일치해야 하고, 일치가 어려우면 일치가 이루어질 때까지 싸워야 합니다. 최고선이란 하느님의 뜻에서 직접 나오는 가치로서 자유와 평등이며, 정의와 평화입니다. 공동선이란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최고선을 실현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가치로서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지 않고는 자유와 평등도, 정의와 평화도 이룩될 수 없으며, 이 가치들도 인간을 위하여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불확실한 일이란 이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들을 실현하자는 데 일치할 수 있다면, 무엇을 더 앞세울 것인지, 언제,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등에 관한 부수적인 일들을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에 따라 상호 자유를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유에 따라 달라질 것들이 많겠으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닮아야 할 자녀들임을 명심해서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 2천 년 동안 산전수전을 다 겪고,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 본 가톨릭교회가 최고의 권위로 최고의 지성들과 함께 알아낸 하늘 나라의 문입니다. 그러나 일치와 자유와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질 때라야 그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그 옛날 므리바의 바위에서 하느님께 반항했던 무리들이나, 예수님을 기적을 일으킬 능력자로만 보던 군중이나, 또는 하늘 나라를 원하면서도 십자가는 멀리 하려 했던 베드로는 이 하느님의 일을 한낱 사람의 일로 세속화시키려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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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1982년 우리나라에 프로야구가 개막했습니다. 인천에 살았던 저는 당연히 인천을 연고로 하는 ‘삼미슈퍼스타즈’를 응원했습니다. 그런데 너무 못했습니다. 평범한 외야플라이를 놓치고, 땅볼 타구를 가랑이 사이로 흘려보내고, 투수 앞 평범한 땅볼인데도 이상한 쪽으로 던져서 타자와 주자 모두를 살려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결과는 15승 65패라는 프로야구 역대 최저 기록을 세웠습니다.
1983년, 꼴찌팀 삼미가 2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30승을 올린 장명부 투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그마치 427이닝을 던졌습니다. 현재 규정 이닝이 144이닝인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혹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 뒤 장명부 투수의 성적은 시원찮았습니다.
야구를 딱 한 해만 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미래가 없는 것처럼 미련하게 야구를 했다고 장명부 선수 본인이 생전에 후회했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이가 지금 한순간만을 살 것처럼 삽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 시간도 만만치 않게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을 간직하는 사람만이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에 대한 질문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 등으로 말했지만,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이로 인해 베드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정답을 말하는 베드로를 보고서 이제는 말해줘도 되겠다 싶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해 이야기해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밀을 미리 말씀해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 한순간만을 바라보며 살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희망을 간직하면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래를 보지 않으려는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의 걸림돌인 사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한순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모든 시간을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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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탈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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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것은 꼭 있습니다.
어느 노작가의 자기 체험이 담긴 글을 읽었습니다. 50년 전, 이 노작가가 20대일 때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불안한 감정이 밀려 들어와 죽을 것 같은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혼자서 전철을 타지 못할 정도로 불안한 감정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병원에 가도 ‘마음 편히 먹으라’라는 말뿐, 어떤 조치도 없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 증상이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50년 전 당시에는 전혀 병명도 모른 상태에서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가는 자기에게 다가온 공황장애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첫째, 타인의 아픔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것.
둘째, 마음의 힘이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것.
셋째, 나쁜 일이 생기거나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이어져도,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일’이 별안간 찾아오기 위해 필요한 전단계라고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꼭 있습니다. 무조건 거부하고 피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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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산보를 다니면서 꼭 챙기는 것이 있습니다. 작은 보온병입니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차를 넣고 다닙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레몬을 넣은 시원한 물을 넣고 다닙니다. 겨울에 마시는 따뜻한 차는 몸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여름에 마시는 시원한 물은 더위에 지친 갈증을 시원하게 씻어 줍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봉성체를 다니면서 성체를 받아 모시기 힘든 어르신들을 보았습니다. 성체를 영하기 전에 한 숟가락의 물을 드렸습니다. 성체를 받아 모신 후에도 한 숟가락의 물을 드렸습니다. 어르신에게 한 숟가락의 물은 주님을 모실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습니다. 봉성체를 다니면서 한 숟가락의 물을 넘기지 못하는 분들을 보곤 했습니다. 그분들에게 그 한 숟가락의 물은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맛보는 마지막 물이 되었을 것입니다.
80년대에 자주 불렀던 노래 중에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습니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 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하나 타는 가슴속 목마름에 기억이/ 내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여기서 목마름은 단순히 갈증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독재와 억압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를 갈망하는 목마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르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그 길이 목마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목마르셨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의 변절입니다. 은전 몇 닢에 스승을 팔아넘긴 유다의 배반입니다.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도망갔던 제자들의 두려움입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들의 희생, 헌신, 사랑, 나눔을 목말라하시는 것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는 마실 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에서 편하게 살던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광야에서의 삶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길어지는 광야에서의 삶에 대한 갈증을 이야기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풀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목마름은 해소 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욕망의 목마름은 해소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물을 마시면서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물은 어떤 물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아는 것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조건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였던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고가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죽어서도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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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평생 공부
-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 -
새벽 일찍 하늘 병원의 조성연 요셉 원장님의 카톡 메시지를 확인하고 감동했습니다. 일상의 현장에서 주님의 ‘사랑의 전사’로 최선을 다하는 성인같은 의사 선생님입니다. 하늘에 있는 아버지의 병원이라 하여 일명 하늘 병원입니다.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를 그대로 인용합니다.
-“조성연 요셉 원장님께!
무더워 불볕더위에 수고많습니다. 요셉수도원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혹시 금주내 아무 때나, 우리 요셉수도원 엘리야 신부가 원장님 진료를 간절히 원하는데 가능할런지요? 무리한 부탁이라 송구합니다만 꼭 됐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하는 조성연 요셉 원장님! 수도원 성전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2021.8.3. 오후 7:30
이어 새벽에 확인한 하늘병원 요셉 원장님의 답신입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예, 제 진료가 월요일부터 목요일에 있습니다. 내일이라도 신부님께서 편하신 시간에 오셔서 접수하실 때 저하고 개인적으로 약속했다고 말씀해 주세요. 제가 잘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더운 날씨에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1.8.4. 오후 8:55-”
제가 8:30분 잠자리에 든 후 보내준 답신입니다. 주님의 평생 전사에 주님의 평생 학인인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구체적으로 평생 사랑의 전사, 평생 사랑의 학인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전사에 이어 제가 자주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가 주님의 학인입니다.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배우는 학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없는 열정과 근면, 겸손을 필요로 하는 주님의 평생 학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 수도자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평생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끝없는 배움에 대한 사랑으로 표출됩니다.
평생 공부의 대상은 무엇입니까?
사람 공부입니다. 예수님 공부입니다.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겸손히 마음을 열고 평생 예수님을 배워 나를 알아가는 ‘배움의 여정’, ‘앎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자신의 수도공동체를 일컬어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했습니다. 평생 주님을 섬기고 형제들을 섬기는 배움터가 수도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배움의 여정은 자기 발견의 여정, 자기 실현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도 공동체도 신비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해명이 불가능한 신비입니다. 참으로 헤아릴수 없이 무수한 면으로 되어 있는 다면체多面體의 신비입니다. 평생 공부해도 극히 작은 일부만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봐도 사람에 따라 보는 눈이 달라 평가가 달 달라 집니다. 또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인한 오해나 착각은 얼마나 많은지요.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니 단정지어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자각에서, 무지의 인정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겸손입니다. 남 판단하는 것은 참 쉬워도 자기를 아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이며 이것이 진정한 내적성장일 것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알고 보입니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사람도 다 똑같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이웃을 사랑합니다. 진정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예수님을, 이웃을 사랑합니다. 사실 하느님을 모르면, 예수님을 모르면 나도 모릅니다. 무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랑의 하느님, 사랑의 예수님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절대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주고 받는 대화가 참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
1차 질문의 답이 신통치 않자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재차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들을 통해 예수님은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싶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평생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바로 수제자 시몬 베드로의 고백이 정답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알았던 베드로입니다. 같은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과 내적 사랑의 관계의 깊이는 얼마나 다양한지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신원을 알아 준, 알아 본 시몬 베드로가 얼마나 고마웠겠는지요! 시몬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모두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역시 베드로를 통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용기백배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상에서 큰 위로와 격려가 됐을 것입니다. 감격에 벅차 시몬 베드로의 신원을 알려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계시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하늘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베드로에게 계시해 주셔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제대로 고백했다는 것이며, 이런 고백을 한 시몬을 ‘행복하다!’하시며 베드로라는 이름을 선사하십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자신의 신원을 발견, 확인한 시몬 바르요나, 베드로입니다. 반석이란 뜻이 베드로가 참 풍부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물이 터져 나오는 ‘생명의 바위’가 될 베드로임을 예시해주는 민수기의 기적입니다. 화답송 시편처럼 주님을 닮아 구원의 반석이 될 베드로임을 예시합니다. “어서 와 주님께 노래 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환성 올리세”(시편95,1)
그런데 이렇게 멋지게 주님을 고백했던 ‘반석’인 베드로가 졸지에 사탄의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충격을 받은 베드로의 즉각적 만류에 예수님의 매서운 질책입니다. 베드로의 예수님께 대한 메시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잘못됐는지 폭로됩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정체를 분명하고 정확히 깨닫게 될 사도들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이보다 베드로에게 큰 깨우침이 된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큰 깨우침이 됩니다.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할 수 있는 사탄의 가능성을 지닌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빛과 그림자가, 장단점이 오늘 복음에 나란히 나옵니다.
참 다양한 다면체로 이뤄진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알아가면서 이런 전체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이웃 형제들을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을 닮아 온전한 사람의 참 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나다 이웃, 또 공동체의 단점이나 약점에 추호도 서운해 할 것도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다면체의 존재이기에 보이지 않는 좋은 장점이 참 많기 때문입니다. 저역시 서운하다 싶으면 상대방이 잘 해줬든 좋은 기억을, 장점을, 감사했던 일을 상기하여 비교해봅니다. 참으로 서운했던 점이나 단점은 장점, 좋은 일들 감사했던 일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 역시 평생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깊이 깨달아 알아 가면서 자신을 비워 겸손의 절정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이후에도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게 인간입니다. 이래서 끝없는 회개요, 끝없는 용서입니다. 이런 인간 한계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부단한 회개와 배움의 기회로 삼아 겸손히 주님을 닮아가면 됩니다. 끝까지 평생 학인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민수기의 모세와 하느님께 불평하며 대드는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우리의 부정적 어둔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 공부에 소홀하여 믿음이 사라지면 누구나 이스라엘 자손들처럼 무지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악마도 사탄도 괴물도 폐인도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는 참으로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치열히 예수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에 정진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 믿음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모세와 아론에 대한 주님의 질책의 말씀이 우리에게 큰 경각심警覺心을 줍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자기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 우리의 구원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시어 당신의 평생 학인으로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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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무엇을 언짢아하시는지 드러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6,22)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외칩니다. 방금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하고 나서 큰 칭찬을 받고, 교회의 반석이 되리라는 선언과,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받은 터입니다.
앞뒤 가리지 않고 즉각적,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듯한 베드로의 단언이 예수님의 마음을 언짢게 합니다. 그는 말씀이신 분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니까요. 하느님의 영이 일깨워주신 대로 예수님의 신원을 발설하기는 했으나, 그 신원에 깃든 사명을 아직 내면화하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구나.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호되게 꾸지람을 듣습니다. 짧은 순간에 칭찬의 천국에서 꾸지람의 지옥까지 곤두박질 친 형국이랄까요. 물론 베드로가 스승을 사랑하는 줄 모르지 않지만,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자의 사명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사안위와 번영, 성공과 자기영광을 추구하도록 방향을 바꾸고 싶어하는 건 사탄의 의도지요. 예수님은 하느님의 영에게도, 사탄에게도 쉽사리 영향을 받을 수 있는 피조물의 마음을 간파하고 계십니다.
제1독서에서도 주님의 꾸지람이 들립니다. 이번에는 민족의 영도자인 모세를 향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민수 20,12)
광야에서 물 없는 곳에 이르자 백성이 또다시 모세에게 몰려와 대듭니다. 모세는 주님께 여쭈어, 그분이 이르시는 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쳐서 백성에게 물을 내어주었지요.
이 과정의 어느 대목이 주님의 마음을 언짢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합니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주랴?" 하고 외친 모세의 표현에서 그 주체가 '주님'이 아닌 "우리" 즉 모세와 아론이 되어버린 것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자기들의 힘처럼 이야기한 것이니까요.
아니면 바위를 두 번 친 것이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단 한 번만 쳐도 주님께서 충분히 기적을 일으키셨을 텐데, 아무래도 뭔가 미심쩍고 못 미더워 두 번이나 두드린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주님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고 총애하는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파스카 여정의 종결 매듭을 다른 이에게 넘기십니다. 모세로서는 참 송구하고 안타깝고 서운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주님께서 마음을 정하셨으니 되돌릴 방도는 없습니다. 파스카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의 안타까운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서 무엇을 바라시는지 배웁니다. 그분은 당신 뜻에 우리가 겸허히 머무르며 순종하기를 바라시지요. 비록 그분 뜻이 당장 인간적으로 손해와 고통과 실패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같지 않고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이사 55,8) 하시는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오늘 말씀의 결말에도 당연히 희망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베드로가 계속해서 줄구장창 잘 나가기만 했다면 복음은 그저 베드로의 위인전이나 성공담으로 끝났을지 모르지만, 널뛰듯 오르내리는 모습에서 우리 모두에게 열린 은총과 실패의 가능성을 볼 수 있으니까요.
또 이스라엘을 이끈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실 역시, 파스카 여정의 주체가 오직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각인시킵니다. 파스카는 모세의 업적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며, 오랜 세월 이어져 지금 여기 우리 삶 안에서도 진행 중인 여정인 셈이지요. 파스카의 완성은 진정으로 주님을 믿고 신뢰하며 하느님의 일에 자신을 던지는 이의 몫이 될 것입니다.
삶 속에서 종종 우리 각자를 헷갈리게 만드는 하느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무엇인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무리 험하고 불편해 보여도, 혹 아무리 달콤하고 풍요로워 보여도 우리가 택해야 할 것은 무조건, 무조건 하느님의 뜻입니다.
"무엇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 가려내십시오."(에페 5,10)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권고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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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입니다"(마태16,1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당신의 신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묻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마태16,14)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복음인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16,16)
베드로의 완전한 신앙고백과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의 두 모습을 바라보면서...
'십자가 없는 부활을 바라고 있는 나는 아닌지?'
'나에게 있어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이 두 물음이 오늘의 화두(묵상)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쩌자고 당신들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고약한 곳으로 데려왔소?"(민수20,5)
이집트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찾아오는 고통과 시련 앞에서 계속해서 불평불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것', '십자가는 부활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그 너머에 있고, 그 십자가를 넘어가게 하시는 분이 바로 베드로가 고백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나의 그리스도(구세주)이신 예수님 손잡고,
십자가를 넘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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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 사도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이 이루어진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사십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유다인들이 사는 가장 북쪽 지역입니다.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사건을 기점으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일정을 바꾸시어 예루살렘을 향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는 수난 여행을 시작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함으로써 하느님께서는 거짓 신이나 생명이 없는 우상들과 달리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그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교회’라는 단어는 복음서에 두 번 나오는데, 이때의 교회는 건축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롭게 불러 모으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리킵니다. ‘교회’(Ecclesia)라는 말은 ‘밖으로’(ex)라는 단어와 ‘모으다’(clein)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 우리를 불러 밖으로, 곧 당신에게로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세상 속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파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목숨을 다하는 애끊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부활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이 말씀은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물러가라!’입니다. 예수님 뒤로 물러나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수난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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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신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먼저 제자들의 생각을 묻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아마 사람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비교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에 관한 생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라고 한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도 예수님을 죽은 요한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엘리야는 예수님이 다시 태어난 엘리야이거나, 어딘가에 죽지 않고 살아 있다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어려서부터 예언에 특별한 능력이 있었고, 사람에게서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떤 예언자보다도 위대한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이 말씀은 줄곧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당신과 함께 많은 표징을 일으킨 제자들은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뜻이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라고 대답한다. 베드로는 주님을 이렇게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반석’이라고 하신 뒤, 그 반석 위에, 즉 그 고백과 믿음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고백을 한 사람에게 베드로라 부르시며, 땅에서 맺고 푸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셨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9절)
그러시면서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반론을 편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23절) 라고 꾸짖으신다. 아버지께 계시를 받고, 칭찬을 들었던 사람이 이렇게 무너졌다. 주님의 수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인간적인 생각만 하는 베드로에게 호통을 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탄”이란 히브리 말로 “반대자”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이 그분을 따르는 일과 하느님 아들의 가시는 길을 바꾸어 놓으려 한 것이 사탄의 일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에게 걸림돌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무지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제나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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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16,15-16).”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하고, “너희는 왜 나를 따라다니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스승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고,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이 질문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질문입니다.
“너희는 왜 성당에 다니느냐? 너희는 왜 나에게 기도하느냐? 너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가 신앙생활을 통해서 얻으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 질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기 때문에”(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또 삶으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라는 말에는,
하느님 외에는 모두 ‘죽은 신’이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죽은 신’은 생명력이 없는 신이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지 못하는 신이고,
사람들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신이고, 사람들의 사정을 볼 수도 없는 신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짜 신’입니다.
그래서 ‘죽은 신’을 섬기는 우상 숭배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십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이기도 하고.)
미신을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느님만이 유일하게 ‘살아 계시는’ 신이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신이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랑 자체이신’ 신입니다.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살아 있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신앙생활이(마태 7,21) ‘살아 있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기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는 기복신앙은 ‘죽은 신앙생활’입니다.
‘죽은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말은,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특별히 보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는 고백은
중요한 신앙고백이 됩니다.
‘그리스도’ 라는 말은, ‘구세주’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해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라는 고백은
우리 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되는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마태 16,18).
(우리 교회의 신앙의 토대가 되는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라는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하고,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 일도(마태 16,19)
그의 신앙고백 때문에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라는 신앙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입니다.
“그런 다음 제자들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마태 16,20).”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신 것은,
영구적으로 침묵을 지키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침묵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라는 신앙은 아무에게나 전해 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고,
믿고 깨달아야 할 ‘진리’인데,
우선 먼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믿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실 때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마태 4,17).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파견하셨을 때에도 사도들이 선포한 복음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였습니다(마태 10,7).
사도들이 “예수님이 곧 메시아” 라는 것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 강림 후부터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사도 2,32).”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을 겪기 전인데도
어떻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7).
하느님께서 그를 특별히 선택하셔서 그에게 특별한 은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그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연구나 공부를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다는 말이 나오고,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말리다가
크게 혼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마태 16,21-23).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셔서 특별한 은총을 주신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욕심과 욕망을 따르면,
또는 욕심과 욕망이 아니더라도 인간적으로만 판단한다면,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도 중요하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두 가지는 하나로 일치되어야 합니다.
(“믿는 대로 살아야 한다.”,
즉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믿기는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따르기는 하는데 믿지 않는다면?
실제로 그런 경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에 있다면, 믿음도 없이 따르는 것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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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헌신적인 삶을 통한 전인적 신앙고백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와 그 주변에서의 활약상을 마무리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 앞에 제자들은 아마도 두려움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까지 보고 체험한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이나 자신들의 신원에 대한 고백을 요구하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고백합니다(16,15-16). 곧 예수님은 생명 없는 우상들과는 달리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당신 백성을 구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하느님과 지극히 가까운 분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16,17) 하고 축복하십니다. 베드로가 축복을 받은 것은 미약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시로 그런 고백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야말로 가난한 이들의 행복이지요.
이어 그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십니다(16,18-19).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과 신앙이 아니라 그의 인격 위에, 하느님께서 새롭게 불러 모으신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베드로에게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교도권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다가올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합니다(16,22). 하느님의 계시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 고백하여 축복받은 그가 한순간에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으로 불리고 예수님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16,23).
그렇다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무엇입니까? 그에 대한 답은 내 생각이나 교리 지식에서 나오는 것일 수 없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일치함으로써 주님의 영의 이끄심으로 고백되어지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고백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타인이 나에게 전달해 준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과 일치된 내 삶에서 우러나온 전인적인 고백이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은 물론 우리 사회나 신앙공동체도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예수님을 내 삶의 방편이나 우상으로 삼거나, 내 삶과 무관하고 공동선과 모두의 행복과 상관없는 관념적 존재로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나의 삶에서 어떠한 위치에 놓고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각자 예수님의 물음에 진지하게 답해야겠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삶과 공동체와 사회가 생명 넘치고 사랑 가득한 상태가 되도록 헌신함으로써 예수그리스도야말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증거해야겠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떼고 하늘나라를 위한 수난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 또한 베드로처럼 주님의 참 제자가 아니라 ‘사탄’으로 불릴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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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거듭 배반했지만 끝까지
그분을 떠나지 않음으로 인해 교회의 영원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잘 나가던 베드로 사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승님으로부터 교회의 반석이라 칭찬받던 베드로 사도가 순식간에 사탄으로 전락하는 모습에서 오늘 제 적나라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말이나 글로는 만리장성이라도 쌓을 기세입니다만, 구체적인 삶은 너무나 초라하고 보잘 것 없어 부끄럽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럴 듯하게 비쳐지지만, 솔직한 제 내면은 속이 텅 빈 강정처럼 허술하고 빈약합니다.
이토록 모순되고 이중적인 스스로의 모습에 크게 부끄러워하며, 어떻게 하면 그 큰 골을 조금이라도 메꿔볼 수 있을까 발버둥치고 있는데,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동료 사목자들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며, 아무리 죄투성이라 할지라도 그분을 떠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분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할 때, 우리가 비록 한없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분의 든든한 반석으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자주 딴 마음을 먹었으며, 수시로 방황했으며, 결국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지만, 끝까지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크게 가슴을 치며 울었습니다. 수시로 주님의 자비를 청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의 영원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사실 배반자 유다 이스카리옷이나 수제자 베드로 사도나 피장파장이었습니다. 똑같이 딴 마음을 먹었고, 스승님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으며,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두려운 마음에 주님을 떠났습니다. 그분의 크신 자비를 믿지도 않았고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끝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원한 배반자요 멸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어쩔 수 없는 사명인 고통과 십자가, 희생과 헌신은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승리와 성공, 기적과 표징만을 기대할 때, 우리 공동체 역시 사탄의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지고가신 십자가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거듭 고백하며, 매일의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갈 때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교회의 영원한 반석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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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은총의 잔디가 아무리 좋아도 교만의 잡풀을 뽑지 않으면?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알아봅니다. 이때 예수님은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네 힘으로 알게 된 것이 아니니 교만해지지 마라!”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기가 부모가 없다면 자신이 인간이라는 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교만해져서 구원자는 수난을 당해야 한다는 말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의견을 제시하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 생각이 하나의 의견입니다. 이것을 스스로 믿는다면 하느님 앞에서 사탄이 되어버립니다. 사탄도 그랬고 뱀을 믿었던 첫 조상들도 그랬습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이래라저래라 의견을 드릴 수 있도록 교만해지면 안 될 것입니다. 옹기가 옹기장이에게 자신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어떻게 따질 수 있겠습니까?
믿음만 성장시키다가는 이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이 증가할수록 더욱 신경 써야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죄가 되지 않는 이상 무조건 ‘순종’합니다.
한 번은 레오날드 우드(Leonard Wood) 경이 프랑스 왕을 방문했습니다.
왕은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으므로 다음 날 만찬에 초대한다는 기별을 보냈습니다. 레오날드 경은 다음 날 궁전으로 갔고, 한 홀에서 왕을 만났습니다. 프랑스 왕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반갑게 그를 맞으며 말했습니다.
“레오날드 경, 나는 이곳에서 당신을 보게 되리라고는 정말 기대도 못 했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러자 레오날드 경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초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소. 하지만 경은 나의 초대에 아무런 응답도 보내지 않았잖소.”
비로소 사태를 이해한 레오날드 우드 경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왕의 초대에는 결코 가타부타 대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순종만 있을 뿐이죠.”
우리도 주님 앞에서 항상 이런 마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 불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왜 불순종했을까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은 ‘감사의 봉헌’을 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불순종하게 되고 그러면 신앙은 아무 쓸모가 없어집니다. 감사하지 않는 사람이 순종할 수 없고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믿음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감사하지 못하게 될까요?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언제 가장 감사하게 될까요? 추수철입니다. 열매를 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사해야 할 주님께서 주시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돈과 배부름과 명예가 아닙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은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감사하기 위해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감사가 나오지 않고 그러면 불순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1918년, 미국 미네소타주 보베이라는 작은 탄광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에릭 엔스트롬(Eric Enstrom)입니다.
어느 날 아주 백발이 성성하고 세상사에 몹시 지쳐 보이는 야위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노인이 보잘것없는 신발 먼지떨이를 팔러 왔습니다. 그 노인은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사진관에 들어와 잠깐 쉬고자 했습니다.
몹시 시장했든지 미안하지만 차 한 잔 얻어 마시자 해서 빵과 스프를 조금 주었더니 테이블에 앉아 소박한 빵과 스프를 앞에 두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사인 엔스트롬 씨는 그 모습을 보고 큰 감동과 전율을 느꼈습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기도를 드리는 초라한 그 노인이 큰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엔스트롬 씨는 그 노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인은 세상의 것들을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구나. 그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으니까.’
비록 그 노인은 가난하고 삶에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의 소박한 감사기도 속에서 그 노인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부유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노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이 흑백사진을 보고 엔스트롬 씨의 딸, 로다 앤스트롬 나이버그도 큰 감동을 하여 이 사진을 유화로 그렸습니다.
그 작품이 바로 ‘감사기도’ 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유화작품 ‘은혜(The Grace)’입니다. 삶에 지친 노인이 빵 한 조각과 스프를 가지고도 감사기도를 드리는 이 이미지는 2002년 미네소타 주 사진으로 선정되었습니다.
기도와 감사는 둘이 아닙니다. 사진작가는 가난한 노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잔디밭의 교만을 뽑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와 순종도 둘이 아닙니다. 하루에 어느 정도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 동안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사람 앞에서 당당한 것이 교만이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교만한 것입니다.
제가 사는 영성관 앞쪽은 성지 땅입니다. 성지 땅이 워낙 넓어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잔디밭에 잡풀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관리장님이 열심히 잔디를 깎았지만, 며칠 뒤엔 여전히 잡풀이 함께 올라와 있었습니다.
우리 영성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교만의 잡풀이 믿음의 잔디를 뒤덮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전부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잔디와 함께 자라는 교만의 잡풀을 뽑는 시간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물론이요,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도 기도가 없었기에 사탄이란 소리를 들어야 했음을 기억합시다.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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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십니다.
열쇠는 무엇을 여는 도구이며
하나의 자물쇠에 하나의 열쇠만이 기능합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맡긴 열쇠는바로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하늘나라는하느님의 다스림을 의미합니다.그 나라는 고정되지 않고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믿고 실천하느냐에 따라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살아가느냐에 따라변화하게 됩니다.우리가 꿈꾸는 목적지는바로 하느님 나라이며그분의 질서로 모두가 행복한 낙원입니다.
그 나라로 들어가는 열쇠를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맡기십니다.열쇠를 받는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고백하는 믿음이고열쇠를 사용하는 용도는하느님과의 관계 맺음입니다.
먼저 하느님을 믿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이는아직 하느님과 관계 맺지 못한 이들을 초대합니다.
자기 믿음에 확신이 있는 만큼 열쇠를 사용하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답을 해야 합니다.
그분과 내가 어떤 관계로 맺어지느냐에 따라
맺고 풀 수 있는 이들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내의 관계가 얼마나 단단하냐에 따라
초대의 정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영광만을 보지 않고
그분의 수난과 사랑을 함께 바라보기에
우리가 믿고 살아가는 그 신앙만큼
더 많은 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이 베드로에게 주신 열쇠를 기억하며
우리도 교회와 함께 온 세상을 위한 성사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를 만난 이들이 우리를 보고
하느님을 찬미찬양하며 그분께로 다가올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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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왜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을까?
왜 예수님은 다른 사도도 많은데 굳이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워셨을까요? 이에 대한 명확한 답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굳이 하나 그 이유를 말한다면 아마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베드로의 고백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바탕으로 한 찬송가도 있습니다. 이젠 그 노래도 가물가물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한 이 고백이 일단은 큰 몫을 차지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미스테리입니다. 제 세례명이 베드로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개신교 때부터 복음을 보면서 항상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성격은 영판 베드로 사도와 제가 닮은 데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드로 사도를 좋아했습니다.
다행히 천주교는 세례명이 있어서 베드로로 지었습니다. 처음엔 생일과 가까운 성인을 골라야 한다고 해서 그런 줄 알고 했는데 원래부터 베드로를 좋아했던지라 혹시나 해서 알아보니 베드로로 해도 된다고 해서 베드로로 했습니다. 저는 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셨는지 저만의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 제가 생각하는 그 이유를 한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성격이 불처럼 다혈질인 성격이 있고 즉흥적입니다. 충동적입니다. 저도 이런 성격이 있습니다.
충동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나약한 면이 오히려 긍정적인 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순간 자기의 감정을 잘못 다스려 즉흥적으로 어떤 태도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후회를 많이 하고 또 마음이 여린 면이 있습니다. 나약한 것과 여린 것은 미묘한 뉘앙스에서 차이가 납니다. 나약한 것은 어떤 결과에 대해서나 힘에 의해 주저앉을 수 있고 포기를 할 수 있지만, 여린 것은 비록 나약하지만 나약한 힘으로 자신이 나약해서 남을 실망하게 했거나 또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이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는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향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나약한 존재라 남에게 비록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일이 있다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면서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하는 성격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이 됨과 동시에 회개의 관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분명 알고 계셨을 겁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결국에는 눈물로써 참회를 하게 될 것을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확실하게 어떤 경우가 오고 어떤 시련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을 향한 그 마음이 목을 내놓고 순교를 하는 한이 있어도 결코 흔들리지 않게 될 것이라는 걸 확신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반석으로 세우지 않으셨을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서 만약 베드로 사도가 애시당초부터 강한 성격의 사람이었다면 만약 배신을 하는 상황에서는 그냥 자신을 합리화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히려 베드로 사도는 여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스승을 배반했다는 그 사실에 자신 스스로가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났을 겁니다. 결국은 그랬기에 자신의 연약함을 억누를 수 없어서 슬피 울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의 이런 성격을 아시고 미리 교회의 반석으로 만드시려고 낙점을 하고 그에 맞게 훈련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시다시피 반석으로 세우셨다가 또 사탄으로 몰아붙이시는 장면에서 보면 베드로 사도를 훈련하는 방식이 사자 새끼 키우는 방식으로 훈련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자가 백수의 왕인 것처럼 그래야 강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반석이 될 수 있겠습니까? 다 그런 모든 과정이 반석으로 만드는 과정의 일부분이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약하고 여리다고는 하지만 베드로 사도처럼 그런 훈련으로 얼마든지 나중에는 굳건한 반석으로 우리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의 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설령 베드로 사도처럼 나약하고 배신을 밥먹듯이 하더라도 예수님을 떠나지만 않으면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그렇게 키우셨듯이 저희도 그렇게 키우실 것이기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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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805.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제1독서 (민수20,1-13)
모세가 아론과 함께 공동체를 바위 앞에 불러 모든 다음,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반항자들아, 들어라. 우리가 이 바위에서 너희가 마실 물을 나오게 해 주랴?" 그러고 나서 모세가 손을 들어 지팡이로 그 바위를 두 번 치자,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 공동체와 그들의 가축이 물을 마셨다. 주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이 공동체에게 주는 땅으로 그들을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10-12)
'이 반항자들아'로 번역된 '함모림'(hammorim)은 '기억하다'(1사무12,5), '배반하다', '거스르다'(이사1,20), '반항하다'(시편78,40) 등으로 번역되는 동사 '마라'(mara)의 분사형 남성 복수형에 정관사 '하'(ha)가 결합되어 '배반한 자들','거역한 자들'이란 뜻의 명사적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보통 '마라'(mara) 동사는 거의 모든 용례에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여기서의 '이 반항자들'이란 말도 모세와 아론에게 반항하고 대든 것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 반항하고 대적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언뜻 보기에 이 말은 모세가 하느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는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민수기 20장 8절에서 단순히 "그들이 보는 앞에서 저 바위더러 물을 내라고 명령하여라" 고 말씀하셨을 뿐이지, 백성들을 질책하라는 말씀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모세 개인의 감정적 발언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마도 모세는 물이 없음으로 인해 원망하고 시비하는 이 백성들을 보면서 지난 40년간 수없이 자신과 하느님께 대들었던 광야 1세대를 떠올렸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불신앙과 죄악으로 결국 가나안 땅 목전에서 돌이켜야 했던(민수14장) 쓰라린 과거가 다시 연상되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무리 출애굽(광야) 2세대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아버지때에 있었던 지난 40년의 역사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모세의 반응은 당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모세는 하느님의 말씀만을 순종하여 그대로 준행했어야 했다.
모세와 아론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며 바위를 두 번인 친 까닭에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완수하지 못하게 된다.
'두 번 치자'로 번역된 '와야크 ~파아마임'(wayak ~paanaim)에서, '두 번'에 해당하는 '파아마임'(paamain)은 '한 번', '한 차례'를 뜻하는 '파암'(paam)의 쌍수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번의 횟수를 사실적으로 나타내기보다는 그 횟수를 특별히 강조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파아마임'은 단지 '두 번'이란 횟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두번 씩이나'라는 의미가 강조되어 드러나는 것이다(창세27,36; 41,32; 1열왕11,9).
말하자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쳤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것은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겸손히 따르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었음을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노여움이나 의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의 경험과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많은 물이 터져 나왔다'에서 드러나지만, 모세가 바위를 두 번 치자마자 곧바로 바위에서 많은 양의 물이 나왔음을 보여준다.
전에 르피딤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바위를 침으로써 물을 내게 했던 자신의 경험(탈출17,6)만을 의지하여 바위를 내리쳤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바위에서 갈증에 목말라 있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그 가축들이 마시기에 충분한 양의 많은 물이 나게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 없는 연약한 당신의 자녀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된다.
'너희는 나를 믿지 않아 이스라엘 자손들이 보는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12)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로 번역한 '레하크띠세니'(lehaqdisheni; to sanctify me)는 '거룩하다'라는 뜻의 동사 '카다쉬'(qadash)의 사역형 부정사 연계형에 전치사 '레'(le)와 1인칭 단수 접미어가 결합된 것으로 '나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본질적으로 거룩하신 분이시고 내적 영광은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새 성경처럼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여기서 거룩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하느님의 외적 영광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믿지 않아'로 번역된 '야안 로 헤에마느템 삐'(yaan lo heemanthem bi; because you did not trust in me)의 뜻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분명히 '나의 말'이 아니라 '나를'(삐; bi)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과 구원 계획을 믿지 않았다는 말로 알아 들어야 한다.
당신 백성을 햔한 하느님의 뜻과 특히 출애굽(광야) 2세대를 향한 구원 계획, 바위에서 물을 내게 하심으로써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시는 주 하느님을 확인시키시고(탈출17,7), 또한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는 자들을 통해 거룩하다 하심을 얻으시려는(레위10,3) 하느님의 뜻과 믿음으로 구하는 자에게 구원의 생수를 주시려는(요한4,10.14; 1코린10,4) 놀라운 구원 계획을 모세와 아론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모세와 아론은 '우리가 ~나오게 해 주랴?' 하며 노기가 서린 눈빛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망각한 채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했던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셨던 모든 영적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믿지 않았던 광야 1세대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모세와 아론은 그 모든 영적들 가운데 나타난 하느님의 능력과 뜻과 계획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모세와 아론이 광야 1세대와 마찬가지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모세와 아론은 주님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 그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했다.
르피딤에서의 물 사건(탈출17,1-7)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이 물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갈증의 해결만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여전히 하느님의 인도 아래 있는지 즉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계시는지 확인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탈출17,7).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복음(마태16,13~23)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7~19)
'시몬'은 베드로의 히브리식 이름이다.
즉 '시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쉬므온'(shimon)은 '듣다'(신명5,23)라는 뜻을 가진 '샤마'(shama)에서 유래하여 '들음'이라는 뜻을 가진다.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빠르'(bar)와 '요나'(yonah)란 이름이 결합된 형태인 '바르요나', '즉 '요나의 아들'이나 '시몬'이라는 호칭은 모두 히브리적 어원을 가지며, 친밀성과 더불어 베드로의 유대인으로서의 혈통적 신분을 강조한 호칭이다(요한21,15).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깨달음이 혈육이 아닌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하신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때, 베드로를 향해 이런 호칭을 사용한 것은 연약한 인간 스스로 이러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너는 행복하다'에 해당하는 '마카리오스 에이'(Makarios ei; Blessed are you)에서 '행복'('마카리오스'; Makarios)은 하느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통해 오는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나타낸다(마태5,3).
또한 '너는 ~있도다'에 해당하는 '에이'(ei; you are)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에이미'(eimi)동사의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서, 이것은 그 말하는 동작과 시간적으로 일치하는 동작 혹은 사건을 나타낸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은 베드로가 내세의 영광스러운 약속인 종말론적인 축복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뜻하기 보다는, 오히려 베드로의 현재의 상태, 즉 예수님에 대해 신앙을 고백한 그 순간에 하늘로부터 오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17절은 예수님께서 16절에서의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사실로 받아들이신 간접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대해서 칭찬을 넘어선 최고의 축복을 선언하시며, 이것을 인정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메시야이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엄숙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이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려 주셨기'에 해당하는 '아페킬륍센'(apekalypsen; has revealed it)의 원형 '아포칼륍토'(apokalypto)는 '~로 부터'라는 뜻을 지닌 전치사 '아포'(apo)와 '가리우다'(2코린4,3)라는 뜻을 가진 '칼륍토'(kalypto)가 결합된 단어로 '드러나다'(루카12,2), '계시되다'(갈라3,23)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인간에게 밝히 나타내시는 하느님의 계시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것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에 대해 베드로에게 밝히 알도록 계시해 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비록 베드로가 뛰어난 신앙고백을 했지만, 이것 또한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말인 것이다(에페2,8).
'살과 피'에 해당하는 '사륵스 카이 하이마'(sarks kai haima; flesh and blood)는 유대인들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인 인간'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관용적 용어이다(코린15,50; 갈라1,16; 에페6,12).
따라서 이것은 타락한 본성을 지닌 죄스런 인간 자체의 지식과 지혜로는 결코 알 수 없으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실 때만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통찰이나 이성으로는 예수님을 위대한 예언자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 그분께서 거룩한 하느님의 아드님되시는 신성(神性; 천주성)까지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18)
'너는 베드로이다'에 해당하는 '쉬 에이 페트로스'(sy ei Petros; you are Peter)에서 '~이다'에 해당하는 '에이'(ei; are)는 '에이미'(eimi) 동사의 2인칭 단수로써 그 자체로서 '너는 ~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너'에 해당하는 단수 2인칭 대명사 '쉬'(sy)를 추가함으로써 '너는'을 강조하고 있는데, 다시 번역하면 '바로 너는! 베드로이다'이다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예언하셨던 말씀이(마르코3,16; 요한1,42)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예수님께서 이전에 시몬을 만나신 후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You shall be called Cephas)라고 예언하신 사실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케파'(kephas)는 아람어의 희랍어 음역이다.
아람어 '케파'(kepha)는 '바위'(rock)를 뜻하며, 이것은 희랍어로는 바로 이어 나오는 '페트라'(petra)인데, 베드로의 이름 '페트로스'(Petros)와 어원 및 뜻이 동일하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18)
'교회'에 해당하는 '엑클레시아'(ekklesia)라는 단어는 4복음서 중에서 마태오 복음만이 이 구절을 포함해서 유일하게 3회를 기록하고 있다(마태18,17에 2회).
이것은 '~로부터'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에크'(ek)에 '부르다'(마태2,7)라는 뜻을 가진 '칼레오'(kaleo)가 결합된 단어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렇게 어원적 의미로 볼 때는 교회란 일차적으로 세상으로부터 하느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다.
'엑클레시아'(ekklesia)는 구약에서 '모임', '집회'(창세49,6), '총회', '공동체'(민수16,33)라는 뜻을 가진 '카할'(qahal)의 70인역(LXX)의 번역이다.
히브리어 '카할'(kahal)은 본래 여러 종류의 '집회들'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가 점차 하느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이와 같은 구약의 히브리어와의 상관성을 고려해 볼 때, 여기서 사용된 '엑클레시아'(ekklesia)는 제도, 조직, 예배 형태 또는 예배의 장소로서의 회당('쉬나고게'; synagoge)에 대한 강조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이것은 예수님에 의해 확립된 공동체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긴밀하게 연결되다는 것을, 즉 하느님의 공동체가 곧 예수님의 공동체임을 뜻하는 것이다.
결국 마태오 복음 16장 18절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앙 고백을 하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신분을 밝히시며, 그에 부합되는 그리스도 공동체, 즉 당신 자신의 백성 곧 당신의 교회를 세울 것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반석위에'에 해당하는 '카이 에피 타우테 테 페트라'(kai epi taute te petra; and on this rock)에서 '그리고'(and)라는 뜻을 가진 등위 접속사 '카이'(kai)로 시작되는데, 이것은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너는 베드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본문이 상호 긴밀하게 연관된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본절의 '페드로'('페트로스'; Peteos)와 '반석'('페트라'; petra)를 완전히 구분하고,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진 '페트라'(petra; '반석')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아주 관계 깊은 그 무엇인, 바로 마태오 복음 16장 16절의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는 교회 출발을 이루는 중요한 고백이며, 또한 그의 고백이 만세대에 계속 이어질 그리스도 교회의 기초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신앙고백도 베드로 자신의 것이 아니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마태오 복음 16장 17절에서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
그리고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에도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는 것은 보잘 것 없었다.
사실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물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고 파도에 겁먹고 물에 빠졌으며, 예수님 앞에서 다른 이들은 다 도망가고 배반해도 자신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신 주님을 결코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큰 소리를 쳤지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다.
그 이후 성령의 시간인 초대 교회 시기의 박해 때에도 사도직을 지키기 위해 로마를 피했던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신앙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물론 로마를 떠나기 위해 압비아 가도를 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다시 로마로 들어오시는 주님을 뵙고는, 자신은 아직도 주님의 뜻을 못 알아 듣는 자여서 십자가에 바로 못 박혀 죽을 자격도 없으니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고, 그의 무덤 위에 지금의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제단이 마련되어 있지만 말이다.
사실 희랍어 원문을 보면, 이 구절의 '베드로'(petros)와 '반석'(petra)은 등위접속사 '그리고'(kai; and)로 이어지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또한 성경에서 사도들을 반석으로 지칭한 사례가 있기에(갈라2,9; 에페2,24; 묵시21,14). 교회가 베드로라는 약한 자의 인격(persona)위에 세워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그를 은총으로 채워 주면서 주님께서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승해 가도록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오늘날까지 첫 교황인 베드로로부터, 법적 후계자이며 그리스도의 지상 대리자로서의 교황께서 교회의 사목권, 교도권, 사제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에서는 '반석'으로 번역된 '페트라'(petra)가 여성 단수형으로서 남성 단수형인 '베드로'와는 성(性)의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에 해당하는 지시 대명사 '타우테'(taute)또한 여성 단수형이라고 하며, '이'라는 지시 대명사가 '베드로'가 아닌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를 가리키고 있어서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고한다.
여기에 대하여, 1517년에 마르틴 루터에 의해 개신교가 생기기 전에는 어떻게 해석했는지에 대해 물어 보고 싶다. 이것은 모(母)교회인 가톨릭을 뛰쳐나온 개신교를 정당화, 합리화 하기 위한 해석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저승'으로 번역된 '하두'(hadu; of Hades; of hell)의 원형 '하데스'(hades)는 '보다'(요한1,39)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의 뜻을 가진 접두어 '알파'(a)가 결합된 형태로, 문자적으로는 '불가시적인 것'을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스올'('셰올'; sheol)에 대응되는 단어이다(요나2,3).
히브리어 '스올'은 '저승', '음부'(陰府)(창세37,35)뿐 아니라 '죽음'(시편89,49) 으로도 번역되었다.
또한 '세력도'에 해당하는 '퓔라이'(pylai; the gates)는 '문'(루카13,24)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퓔레'(pyle)의 복수형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그리고 저승의 문들이 그것에 대항하여 이기지 못하리라'이다.
여기서 '저승의 문들'은 사탄과 그 졸개들의 세력을 나타내는 말로 간주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퓔레'(pyle)는 '성문'(루카7,12), '성전의 아름다운 문'(사도3,10), '성안으로 통하는 쇠문'(사도12,10) 등 특별한 권세가 없는 사람이라면 열고 닫을 수 없는 특별한 문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세우신 것이기에 인간에 비해 큰 힘을 가졌고, 피조물에 불과한 사탄의 권세로서는 도저히 이것을 무너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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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ㅣ김보습 바오로 신부 집전
https://youtu.be/RMbQvJG5L7A 30:26
2021. 8. 5.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2021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목요일 매일미사
김보습 바오로 신부 (서울대교구 가락동 본당 보좌)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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