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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9) 노동
일 중독으로 지친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자기 돌봄’
구약 성경은 노동과 관련하여 인간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다”(창세 3,19)라고 기술한다. 성경 구절의 맥락상 노동은 인간이 하느님의 금기사항을 어긴 데서 오는 죄의 결과로 묘사되지만, 여기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노동하는 존재’라는 더 근원적 통찰이 자리하고 있다.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노동을 통해 끊임없이 수고해야 하지만, 인간에게 노동은 단순한 생명활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철학자 아렌트(1906~1975)는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과 관련해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고대 노예제도를 통해 인간은 자연환경의 노동(labor)으로부터 해방되어 제작환경의 작업(work)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노동이 자연환경 속에서 적응하고자 하는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라면, 작업은 자연환경이 아닌 제작환경을 통해 인공 세계의 사물 대상과 관계하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을 의미한다. 즉 노동이 제작과는 무관한 생명활동의 영역이라면, 작업은 생산품을 만드는 제작활동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인간은 더는 ‘노동하는 인간’(homo labor)이 아닌, ‘제작하는 인간’(homo faber)과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노동과 작업의 분리는 근대의 자본 집약적 사회구조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된다. 인간이 작업을 통해 물건을 대량 생산하고, 교환을 통해 파생되는 잉여가치를 향유하게 됨으로써 현대의 노동은 작업의 결과인 ‘잉여가치’와 ‘잉여향유’ 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와 관련해 지젝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잉여가치를 맹목적으로 추구함으로써 ‘잉여향유’의 욕망을 부추긴다고 비판한다. 문제는 이런 욕망이 인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소진케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현대인의 ‘번아웃’(burnout) 현상은 끝을 모르는 인간 욕망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노동하는 인간은 과도한 작업과 과잉 활동을 통해 성과의 극대화를 꾀하는 ‘성과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 이들의 삶은 전혀 ‘여유로움’이 없는 ‘조급함’으로 가득하다. 고대 희랍어나 라틴어의 어휘에서 보듯이 ‘일’(ἀσχολία/negotium)과 ‘여가’(σχολή/otium)는 서로 대응 관계에 있으며, 피로는 과도한 일로 인해 충분한 여가를 갖지 못한 데서 오는 심신이 지친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을 ‘성과 중심’에서 ‘열매 중심’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열매 중심의 노동은 성과를 지향하기보다는 노동 그 자체로부터 의미를 찾고, 또 노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결실을 지향한다. 이는 전혀 여유로움이 없이 과도한 자기 긍정과 성과만을 지향하는 ‘성과 주체’가 아니라 자기 재능과 능력에 부합한 ‘열매 주체’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의 철학자 플라스푈러는 현대인의 ‘우울한 노동’을 경고하면서 현대인은 일 중독에 빠져 있으며, 이는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적 사랑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일 중독자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기보다 오히려 일을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일 중독으로 인해 자신을 돌볼 여유조차 없는 현대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자기 돌봄’이 아닐까 한다.
[과학과 신앙] (36) 착한 사마리아인 법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사람의 심장은 ‘정신의 자리’로 여겨졌다. 따라서 죽은 이를 미라로 만들 때 대부분의 내장 기관은 제거했지만, 심장은 사후 세계에서 그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로 여겨졌기에 방부 처리한 후 제자리에 두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심장을 ‘지식의 자리’라며 몸에서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여겼다. 하지만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지능과 감정을 담당하는 것은 심장이 아니라 뇌라고 주장했으며 로마 시대의 의학자 갈레노스 역시 뇌가 사람의 생각과 정서·기억을 조절한다고 보았다.
이처럼 뇌와 심장은 예로부터 중요하게 여겨진 신체 기관이며 뇌와 심장에 이상이 있을 경우 생명을 잃을 수 있다. 뇌는 사람이 하루에 소비하는 전체 에너지양의 20%와 전체 산소량의 30%를 소비하는데, 뇌에 에너지와 산소를 공급해주는 펌프 역할을 하는 것이 심장이다. 사람의 심장은 보통 자기 주먹만 한 크기로 질량은 250~350g 정도이며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약 심장이 정지해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 4~5분 후에 뇌세포 손상이 시작되고 의식 소실 및 사망으로 이어진다. 심정지로 쓰러진 사람에게 즉각적인 심폐소생술(CPR)을 실시해야 하는 이유다.
2022년 5월 서울 구로구에서 중국 국적의 한 40대 남성이 길을 가던 60대 노인을 이유 없이 무차별 폭행해 쓰러뜨리고 사망하게 한 사건이 뉴스에 보도되었다. 경찰 조사 결과 놀랍게도 길 가던 50여 명의 행인이 쓰러진 노인을 본채 만채 지나친 것이 주변 CCTV에서 확인되어 더욱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건이었다. 그때 누군가 빠르게 심폐소생술만 실시했어도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 현장에 착한 사마리아인은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독일·벨기에·핀란드·이스라엘·호주·캐나다의 일부 주에서는 ‘자신 또는 제3자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고 위험에 처한 다른 사람을 구조할 수 있음에도, 고의로 구조하지 않은 자에 대하여 구금 및 벌금에 처한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번 주일 미사 복음에서는 강도를 당해 쓰러진 사람을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루카 10,30-37)가 나오는데 이 말씀에서 따온 법을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법이 아직 시행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응급의료 종사자가 아닌 사람이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에게 응급의료 또는 응급처치를 제공하여 발생한 재산상 손해와 사상(死傷)에 대해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그 행위자는 민사책임과 상해(傷害)에 대한 형사책임을 지지 아니하며 사망에 대한 형사책임은 감면한다’는 면책 조항 정도만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에서 명시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항을 법률로 강제하거나 처벌한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기적 유전자뿐 아니라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됨의 고결한 유전자가 분명히 있다. 자신의 이해득실을 떠나 참 신앙인이라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상황에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라는 말씀을 몸이 먼저 기억하고 행동해야 하지 않을까?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8) 욕망
욕망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 경계해야 건강한 삶
끊임없이 무엇인가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스스로를 닦달하는 현대사회를 욕망의 과잉시대라고 불러도 전혀 과하지 않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1959~ )은 현대사회를 ‘긍정성의 과잉’이 빚은 ‘피로사회’로 규정하는데, 과연 우리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 긍정성의 과잉 때문일까, 아니면 욕망의 과잉 때문일까?
인간은 자연 안에서 육체적인 본능적 욕구를 넘어 정신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고자 하는 유일한 주체다. 그러나 욕망은 결코 충족되는 법이 없기에 욕망만을 추구하는 삶은 결국 절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라깡(1901~1981)은 이런 욕망을 무의식으로부터 발호하는 모호한 대상을 끊임없이 쫓는 ‘주체의 결핍이자 환유(métonymie)’로 정의한다. 다시 말해 욕망은 무의식 속의 자아(상상계의 ‘이상적 자아’, moi idéal)가 주체적 자아(상징계의 ‘자아 이상’, idéal du moi)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실체 없는 존재의 실재를 붙잡으려는 데서 오는 주체의 근원적인 결핍 현상을 의미한다.
욕망은 오래전부터 몸(육체)과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발원하는 본능의 하나로 이해되었으며, 육체적 결핍에서 오는 몸의 욕망은 정신적 결핍에서 오는 정신의 욕망보다 철학적으로 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심지어 욕망 자체가 오로지 감각적인 것에 예속해 있는 육체의 탓으로만 돌려지기도 했다.
이는 전통적으로 변화하는 육체보다 불변적인 정신을, 그리고 쉽게 외부로부터 감염되는 감정보다 순수한 이성을 중시해 온 서구 주류 사상의 영향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생물학적 필요와 요구로부터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그것이 충족되면 소멸하는 일반적 욕구와 달리 근본적으로 한계가 없는 정신의 무제약적 행위에 근거한다. 즉 신체적 욕구는 생리적 한계를 갖지만, 정신적 욕망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다.
인간이 ‘욕망의 주체’인 것은 신체에서 비롯된 결과가 아니라 바로 인간이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욕망이 신체와 전혀 무관하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 몸은 정신을 매개하는 수단인 만큼 욕망 역시 본질적으로 신체의 기능 없이는 불가능하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결핍을 메꾸려는 데서 비롯되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요소는 다양하다. 현대사회는 구조적으로 끊임없는 탐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인간을 다양한 욕망으로 이끈다. 탐욕이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갖고자 하는 인간 욕망의 한 모습이다. 미디어의 발전이 ‘인간의 확장’을 가져왔다고 주장한 매클루언(1911~1980)의 말처럼 현대사회는 미디어·인터넷·인공지능의 눈부신 발전으로 물리적인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확장이라는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이와는 달리 지젝(1949~ )은 현대사회를 일상화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로 규정하고 이를 경고하는데,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란 참여하는 자들의 무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망의 실재를 은폐하는 ‘환상적 구성물’의 일종이다. 이런 욕망의 이데올로기는 특히 우리 사회에서 집단의 이익과 권력을 숨기는 충실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현대 영성가인 그륀(1945~ ) 신부의 말처럼 탐욕은 결국 병적인 소유욕으로 발전하는 만큼 우리는 건강한 삶을 위해 무엇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과도한 탐욕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과학과 신앙] (34) 그들은 진정으로 ‘일어서는 사자’일까?
1986년 방영된 TV 영화 ‘기드온의 검(sword of Gideon)’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검은 구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들을 학살한 것에 대한 이스라엘의 복수를 다루고 있다. 액션과 스릴이 가미된 첩보 영화이지만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악순환 속에 결국 폭력의 끝은 어디이고 진정한 평화와 용서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수작이었다. 이 영화는 같은 사건을 다룬 유다인 출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뮌헨(2005년)’에 영향을 주었다.
이스라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탈출 21,24-25)는 구약성경 구절을 너무나 문자 그대로 실천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은 2023년 가자지구에서 하마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이래 지금도 가자 지구를 초토화시키고 있으며, 이번 6월 13일 새벽에는 이란의 핵 연구 시설과 과학자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란을 공습했다. 이에 따른 민간인 피해도 많은 것으로 보도되고 있으며 이란 역시 미사일 공격으로 맞대응하며 중동 지역에 전쟁 확산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전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이란에 대한 공습 작전명을 ‘일어서는 사자(rising lion)’라 부르며 자신들의 군사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열변했다. ‘일어서는 사자’의 본래 의미는 ‘사자처럼 용맹한 민족’이란 뜻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사자처럼 강하고 용맹한 민족으로 인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의 일련의 행동들을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려되는 점들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와 생태학은 생물학의 중요한 분야로 부각되고 있는데, 이는 인간도 결국 생태계를 이루는 수많은 생물 군집 중 하나이며 동물 세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원리들이 인간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인구팽창과 그에 따른 식량·자원 부족, 주거 공간 부족, 환경오염, 자연파괴 등 인류가 당면한 많은 사회적·지정학적 문제들은 결국 생태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그 원인과 해결점을 찾을 수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생태계에서 어떤 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먹이 지위, 그 생물의 서식 공간이 차지하는 지위는 공간 지위라 하며 이 둘을 합쳐 생태적 지위라고 한다. 만약 서로 다른 두 생물 사이에 생태적 지위가 겹치게 되면 한정된 먹이와 생활공간을 두고 치열한 다툼인 경쟁이 일어난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생물 종의 싸움이 치열해지면 한 종이 다른 종을 전멸시켜버리는 경쟁·배타의 원리가 작용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동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성이 있으며 관용과 용서, 박애의 마음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모든 세상의 눈이 멀게 된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라고 역설했다.
6·25 발발 75주년을 맞는 6월 25일 「남북통일 기원 미사」 제2독서 말씀이 오늘따라 더 무게 있게 들려온다.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에페 4,31-32)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6) 절망
절망에서 벗어나려면 어긋난 자기 관계 회복해야
삶이란 수많은 역경과 시련의 연속이다. 더 나은 삶에 대한 의미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릴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절망스러운 현실을 잊기 위해 알코올과 약물 과다 복용·자살 등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해마다 증가한다.
경제학자 디턴(Angus Deaton, 1945~)은 이러한 죽음을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부른다.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절망사는 빈부격차의 확대 속에 삶에 지친 빈곤층이 누적된 심적 고통에 짓눌리다 자살·마약·알코올 중독 등으로 생을 마감하는 일종의 ‘사회적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절망사를 막기 위해 경제적·사회적 안전망 확보와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외부적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다. 사람들은 절망을 외부적인 장애 요인들과 연결해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절망은 철학적으로 더 근본적인 인간의 실존적 현상이며, 외부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다고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망을 인간 실존의 근본 현상으로 고찰한 철학자가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다. 그는 현대를 ‘절망의 시대’로 진단하고,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절망을 본래적 자기를 획득하는 ‘자기 됨’의 주요 계기로 삼는다. 절망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종합, 즉 영혼과 육체, 유한과 무한,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 자유와 필연의 관계를 자기 삶에 관계시키는 가운데 오는 불균형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 소진하는 ‘자기 잠식’이자 절대적 존재인 신과의 관계 단절에서 오는 ‘죄스러운 상황’을 의미한다.
이런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절망을 키르케고르는 ‘자기 관계의 병’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절망이 죽을 만큼 고통스럽고 위험하며,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지만 또한 그로 인해 누구도 죽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맞지만, 육체의 질병과 다르게 영혼의 질병으로서 죽는 것이면서도 죽지 못하는, 즉 죽음을 소망할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는 ‘실존적 병’인 것이다. 그럼에도 키르케고르는 ‘절망이 그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영원성을 잠식시키는 일은 없다’고 주장한다.
절망은 특수한 일부 사람만이 겪는 병이 아니라 실존하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현상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절망 가운데에 있지만, 이 절망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으며, 설사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를 회피하거나 반항한다. 그러나 절망이 자기 관계의 병인 한, 인간은 자기 관계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절망과 대면할 필요가 있다.
어긋난 자기 관계의 회복은 자기 위선 없이 절대자(신) 앞에 홀로 서는 ‘실존적 양심’에 있다. 실존적 양심은 자기기만이나 가식 없이 자기를 투명하게 보는 ‘진정성’과 ‘자기 책임’에 기반한다. 진정한 자기를 좇아 실존하는 자에게 삶이란 잔잔한 대하(大河)가 아니라 사나운 돌풍이며, 그 진실은 고통이다. 이에 철학상담은 삶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이 고통으로 절망할 때, 자기 성찰을 통해 스스로 자기 삶을 결단하고 고유한 자기 실존을 짊어질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박병준 신부의 철학상담] (25) 자기 경계
경계는 세계 자체임과 동시에 나의 고유한 세계
인간은 경계를 짓고 경계 안에 사는 존재다. 경계는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다인 사회심리학자인 레빈(1890~1947)은 사회학적인 차원에서 다른 문화권에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을 ‘경계’라는 개념으로 해석한 바 있다. 여기서 경계는 자기를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자기 정체성을 찾아 삶의 뿌리를 내리는 터전이기도 하다.
철학적인 차원에서 경계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어떤 조건 속에 있음을 가리키며, 이는 인간이 양극 ‘사이’에 놓여 있음을 말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영혼과 육체, 무한과 유한, 영원과 시간, 위대함과 미소함 사이에 놓여있으면서 진정한 자기로 있기 위해 둘 사이를 끊임없이 조정하는 가운데 자기 경계를 설정하는 존재다. 그러나 이 경계가 균형을 잃고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지면 절망한다.
인간의 경계 짓기는 세계 속에서 실현된다.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그 태어난 세계로 던져지며, 또 그 세계에서 자기 실존을 위한 투신이 이루어진다. 이 세계가 바로 앞서 이해된 경계 지어진 세계다. 이미 이해된 세계는 과거와 현재의 해석 사이에서 경계를 이루지만, 곧 그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이해로 우리를 초대한다. 새로운 이해를 통해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을 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여러 제약으로 경계 지어진 근본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매 순간 결단과 도약을 통해 경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시도한다. 경계를 넘어서는 체험은 절대적 존재 혹은 초월자를 향한 정신의 초월성을 발휘함으로써, 또 자기 존재 가능성을 향해 세계에 자기를 ‘기획 투사’함으로써, 끊임없는 자기규정 안에서 자기를 초월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철학상담적인 차원에서 경계는 세계 자체임과 동시에 나의 고유한 세계를 의미한다. 정신에 의해 매개된 나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상담에서 내담자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나의 경계는 정신에 상응하여 고유한 방식으로 조직되어 있고 구조화되어 있다. 인간은 정신적 존재로서 감정을 표현하고 사고하며 행위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세계에 기반하여 자기 고유한 세계를 형성하며, 이는 나를 경계 짓는 조건이 된다.
이런 경계는 반복적이고 고정된 일정한 나의 ‘행동양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일정한 세계관이 자리 잡고 있으며, 또 개인의 고유한 관습·습관·교육·체험 등이 크게 영향을 미친다. 이때 행동양식은 일정한 ‘개념’과 ‘고정관념’을 통해 이루어진 ‘상황 해석’이자 ‘판단 작용’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개인 및 집단적 경험에 기반한 문화(역사)와 이념(철학)의 영향 아래 놓여있으면서 나의 행위 전반에 걸쳐 강한 힘을 발휘하며 삶을 통제하기에 쉽게 자기 경계를 허물지 못한다는 뜻이다.
오르테가(1883~1955)는 「대중의 반역」을 통해 오늘날 자기 성찰이 부재하는 비인격적이며 무책임한 거대한 대중 집단의 고정관념에 우리가 너무도 쉽게 노출되어 있음을 경고한다. 이러한 대중 집단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의무와 책임을 도외시하고 자기 의견만이 무조건 옳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존재도 무시한다. 대중 집단이 휘두르는 폭력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은 대중에 편승하여 안정감을 추구하는 자기 경계를 비판적으로 탐색하고 허물 때만 가능하다.
[과학과 신앙] (31) 페루의 숨겨진 아픔
1901년 오스트리아의 칼 란트슈타이너는 서로 다른 환자들의 혈액을 섞었을 때 일어나는 응집반응을 통해 사람의 혈액을 A형·B형·C형(현재는 O형) 세 가지로 구분했다. 그 후 1902년 AB형이 추가되면서 지금의 ABO식 혈액형 분류법이 완성되었다. 혈액형을 판정하는 방법은 적혈구 표면의 응집원과 혈액의 액체 성분(혈장) 속의 응집소가 결합해 적혈구가 엉겨붙는 응집반응을 이용한다. 과거 17세기 의사들은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려고 시도했으나, 사망에 이르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인간의 혈액이 한 종류가 아니라는 것과, 동물과 인간의 혈액은 다르다는 의학적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ABO식 혈액형 판정법 발견으로 같은 혈액형끼리 수혈이 가능해지면서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때 많은 군인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으며 란트슈타이너는 이러한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혈액형을 판정하는 방법은 ABO식 혈액형뿐 아니라 Rh식 혈액형, MN식 혈액형 등 무려 31가지 방법이 있다. 혈액형은 국가별·인종별 차이를 보이는데 우리나라 국민의 경우 A형(34%)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은 O형(28%)·B형(27%)·AB형(11%) 순이다.
중국은 전 국민의 48%가 O형이며 미국의 경우 백인의 45%, 흑인의 49%가 O형이고 프랑스와 러시아는 A형이 가장 많다. 특이한 것은 페루 원주민인 인디오들의 혈액형은 거의 100% O형이라는 점이다. 마야인의 O형 비율도 98%나 된다. 이는 유전적 요인과 그들이 겪은 가슴 아픈 역사적 배경의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5세기 무렵 아메리카에는 당시 세계 인구의 10%나 되는 6000만 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후 유럽 정복자들의 잔혹한 식민통치로 아메리카 원주민 인구는 500~600만 명으로 감소하는데 페루나 마야의 경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퍼진 전염병이 가장 큰 이유로 지목된다. 천연두나 홍역 같은 유럽의 질병에 면역력이 없던 원주민들이 속수무책으로 감염되어 치명적 피해를 본 것이다.
특이한 점은 O형은 다른 혈액형에 비해 면역력이 다소 우세하여 이들 질병에서 생존율이 높았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페루와 마야 원주민들의 혈액형이 O형 한 가지인 이유가 나름 설명되는 부분이다. 페루 원주민들은 긴 식민지배의 결과 아직도 가난과 저개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출신으로 페루 시민권자인 레오 14세 교황은 그곳 빈민가에서 20년간이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했다. 그들과 함께하면서 사회 정의와 환경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교황은 현지인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가난이란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부족한 상태다. 그러한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참 신앙인의 자세다. 또 가난은 다른 의미로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서 물욕(物慾)을 비우고 검소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인이 추구해야 할 자세일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사도로 활동한 레오 14세 교황을 떠올려보며 그리스도께서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고 말씀하신 산상설교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