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어머님의 탯줄 날도 꾸무리 한데 어데 갈라고 가자 카노? 남편이 네모진 검은색의 스윗치를 누르자 뜨륵 소리를 내며 검은색의 문이 반응을한다. 장마철이라 그런지 안개가 무겁게 내려앉아 시야를 가리더니 하늘이 컴컴하면서 장대비가 마구 쏟아진다. 차창 밖 와이퍼가 요동을친다.
바닷가 돌 틈 사이로 기어가는 게를 잡으려고 돌멩이를 재끼다가 검은 고무신 한 짝이 벗겨져 파도에 밀려 바다로 동동 떠내려갔던 일, 더운 여름날에 책가방은 자갈밭에 던져 놓고 검은 팬티만 입고 친구들과 해수욕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해가 뉘엿뉘엿 서산 마루에 걸렸을 때 집에 돌아가면 엄마는 싸리 빗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춤을 추셨다. 그때 서야 동생들을 돌보아야 하는 나의 처지를 실감 할 수 있었다. 조그마한 어촌 마을에 자리 잡고 있었던 감천 국민학교, 후문으로 연결되었던 그 옆에는 항상 물이 철철 넘쳐대던 커다란 샘물은 지금도 흘러넘치고 있을까. 어장 집 아들로 노란 알미늄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볶음을 싸 와서 우리들의 부러움을 샀던 그 머슴애는 어디서 살고 있을까? 지척에 있으면서 무엇이 그리 바빴는지, 항상 그리워하고, 가고 싶었던 그곳! 세월이 벌써 반 백년이 넘게 흘렀다.
푸른 바닷가는 보이지 않고 수산물 가공 처리하는 공장들과 냉장 냉동 창고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었다. 오고 가는 컨테이너 화물 트럭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고 지나간다. 세월이 흐른 탓일까? 주위의 모습이 너무나 변해 버렸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버드나무 횟집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의 멋진 모습의 포스터가 붙어 있던 동사무소는 어디로 갔으며 번데기와 물밤을 팔던 조그마한 문구점은 어디로 이사를 갔을까? 공원 입구에는 제법 나이를 먹은 느티나무 한 그루와 후박나무, 먼나무들이 마치 공원을 안고 있는 것처럼 서 있었다. 제당 앞에는 배롱나무 서너 그루가 줄기가 매끈한 푸른 잎 사이로 붉은 꽃을 매단 채 각선미를 뽐내듯 요염하게 서 있었다.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언제나 물이 넘치던 그곳. 큰 샘을 찾았건만 보이지 않았다.
오십여 년 전에는 우물 옆에 그저 큰 나무가 서 있었고 네모지고 기다랗게 생긴 지붕 있는 샘물이 매일 퐁퐁 솟아나고 있어서 학교 청소가 끝나면 친구들과 걸레를 빨고 세수를 하고 나면 그렇게 상큼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어머니의 따뜻한 양수 안에서 그저 평화롭고 즐겁게 놀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옛 주민들과 우리들의 소중한 식수원이 되어주었던 그 샘물은 생소하리만큼 다른 풍경을 담고 있었다. 1960년대의 흑백 전경을 현대 문명인 타일 벽화 등으로 조성되어 있었고 그 앞에는 조그마한 사각기둥처럼 만들어 샘물이 있었던 자리임을 알리는 표식에는 ‘아~아, 생명이여, 감천이여! 면면히 이어갈 혼불로 마중물이 되셔서 감내골을 지키는 감로수가 되소이다!’ 라는 글귀를 한없이 쳐다보면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섭섭함과 먹먹함을 느끼며 제발 이 마을의 생명수가 마르지 않기를 진정으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수도꼭지를 틀어 보았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노쇠한 엄마의 젖은 이제 말라 버린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나는 공원을 둘러보았다.
제당 앞에 서 있는 팽나무는 약 400살이 넘는걸로 추정된다고 하면서 옛날 안동 장씨 성을 가진 할매가 이 당산목을 심었다고 하는 안내판이 보인다. 내 어린 시절에는 그저 큰 아름드리나무라고만 생각했었다. 팽나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며 특히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 바닷가에서도 끄떡없이 잘 자란다고 한다. 갯내음 물씬 풍기는 포구 부근에서 흔히 자라서 포구 나무라고도 부르며 크게 자란 고목은 배를 매어두는 나무로 쓰이기도 한다. 아마 그 옛날 어부들이 이곳 팽나무에도 배를 매어두었으리라 추측이 된다. 바닷물이 이 나무 앞에까지 들어왔다 나갔다를 한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더운 날씨탓 때문일까 치료 목적이겠지만 큰 나뭇가지 중간에 채워진 시멘트 비슷한 것을 보면서 팽나무가 왠지 힘이 없어 보인다. 왜구의 침략이 잦았고 거친 바다로 나가는 어부들의 안녕을 바라고 왜구로부터 나라를 수호하길 바라는 마음에 에너지를 전부 소진한 까닭이리라. 나는 문득 나무 영양제를 큰 것으로 한 대 놓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느릅나무 노거수 아래에는 감천동에서 발견된 청동기 고인돌 6기중 하나가 있는데 고인돌(지석묘)은 부산에서 발견된 해안 고인돌로 지역의 지리적 특징을 담고 있으며 사료적 가치로서 큰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보았던 고인돌과는 다르게 소박하고 크지 않은 게 특징인 것 같았다.
자태가 의연하고 늠름한 노거수인 느릅나무는 약 2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옛날에 아기를 낳고 젖몸살이 심하고 유방에 고름이 찼을 때 느릅나무 껍질을 붙여 놓으면 피고름을 쫙 빨아 내놓는 그런 생약 성분을 가진 나무였다고 지인께서 가르쳐 준 생각이 난다. 또 조선 시대 때 흉년에 대비해서 백성들이 평소에 비축해 둘 것으로 솔잎과 함께 느릅나무 껍질을 들었다고 하면서 배고픔을 달래 주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 팽나무 공원에는 꼭 느릅나무가 같이 서 있어야 제대로 된 공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나이는 팽나무보다 어리지만 서로 형님! 아우님! 하면서 어깨를 맞대고 온갖 세월을 이겨내며 마을의 안녕과 코로나 19로 근심 걱정을 안고 있는 주민들에게는 든든한 지킴이가 되어줄 보호수와 노거수가 아닌가!
내 유년 시절을 돌아보며 어머니의 품속같이 따뜻했던 큰 샘물이 없어짐에 대한 아쉬움과 섭섭함을 아셨는지 팽나무 할머니께서 ‘너무, 아쉬워하지 마시게나, 우리는 언제든지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게야.’ 하시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손을 흔들며 잘 가라는 듯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