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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예고(3)
마 20:17-28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3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4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 20:17-28 /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고;막10:32-34,눅18:31-3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불러 18) 예루살렘에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하셨다. `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19) 그들은 나를 로마 정부에 넘겨 주어 그들의 조롱을 받으며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 [으뜸이 되고자 하거든 종이 되라;막10:35-45] 그때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절을 하며 청을 드렸다. 21) `무엇을 원하느냐?' 예수께서 물으시자 그 부인이 대답하였다. `주님의 나라가 서거든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22) 그러자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내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하고 말씀하신 뒤에 야고보와 요한을 향하여 다시 `너희는 내가 마시게 될 그 무서운 잔을 마실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예, 저희는 마실 수 있습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도 정녕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누가 앉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내 권한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24) 다른 열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게 분개하였다. 25) 그리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이방인이 왕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백성을 내리누른다. 26) 그러나 너희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 너희 가운데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7) 만일 너희가 으뜸이 되기를 원하거든 반드시 종처럼 섬기는 사람이 되라. 28)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의 죄값을 치르기 위하여 목숨을 내주려고 온 것이다.'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17-21)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예수님의 발걸음은 무겁습니다. 그 길의 끝이 무엇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그 말씀이 귀에 들리지 않습니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주의 나라에서 차지할 높은 자리입니다. 심지어 이를 위해 어머니가 나서서 높은 자리를 청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세배대의 아들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22-23) 예수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22)고 질문하십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잔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마 26:39).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23)라고 대답하십니다. 22절의 잔과 23절의 잔은 의미하는 것이 다릅니다. 22절의 잔은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의미하고, 23절의 잔은 제자들이 마실 성찬의 포도주 잔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양적으로는 다를지라도 질적으로는 같습니다. 예수님이 마신 잔에 담긴 고난과 우리가 마셔야 할 잔에 담긴 고난은 양적으로 감히 비교가 되지 않으나 질적인 면에는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인류를 대속하시기 위한 십자가)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는 분명히 질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부활하심을 온 천하에 알려합니다. 이로 인하여 수많은 핍박과 환란이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인 줄 알지만 우리도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24-28)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찾아와 청탁하는 장면을 본 다른 제자들은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나라의 통치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권력으로 백성을 억압하지만(25), 하나님의 나라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통치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섬김의 삶’은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추구해야 할 자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비록 세상의 통치 안에서 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인식과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권력 중심이 아니라 실제로 섬김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이미 섬김이 중심으로 운영되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인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적 용 : 세상의 권력은 다른 사람을 딛고 일어서서 쟁취하지만 하나님의 권위는 다른 사람을 섬겨서 얻어집니다. 권력이 아닌 권위를 얻어가는 예수님의 본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볼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무서운 시간의 속도에 굴복하면서 항상 무언가에 쫓겨서 사는 서두르는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에 ‘서두르는 삶’ 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막연한 삶을 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다 깊이 인식하면서 살 것을 말했습니다. 성경에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골로새서 4장에 있는 말씀을 새기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무엇을 원하느냐?
마태복음 20:17-23
■ 요한 페터 헤벨이 쓴 <세 가지 소원>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젊은 부부가 별로 부족한 것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들에게도 지금보다 조금만 더 행복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두 부부가 난로 가에 앉아 호두를 깨먹고 있는데, 한 요정이 찾아와서 ‘소원 세 가지를 말하면 내가 들어주마’라고 말했습니다. 두 부부가 무슨 소원을 말해야 할지 망설이자, 요정은 ‘1주일의 시간을 줄 것이니 잘 생각해 보라‘고 말하더니 이내 사라졌습니다. 두 부부는 무슨 소원을 이야기해야 할 지 고민이 되어 다른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혹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소원을 불쑥 이야기하게 될까봐 두렵기도 했습니다. 요정이 다녀간 이튿날 저녁이었습니다. 저녁식사로 먹을 감자가 냄비에서 익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앞으로 누리게 될 행복을 생각하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잘 익은 감자를 꺼내 접시에 올려놓는 순간,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찌르자 아내는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에다 방금 구운 소시지나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아내는 별다른 생각 없이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그 첫 번째 소원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방금 구운 소시지 하나가 굴뚝을 통해 접시로 떨어졌던 것입니다. 겨우 소시지 하나를 빌다니, 몹시 화가 난 나머지 남편은 불쑥 이렇게 말해 버렸습니다. “이 놈의 소시지 저 여자 코에나 가서 붙어라.” 그러자 두 번째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남편이 말한 대로 소시지는 아내의 코에 철썩 달라붙고 말았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두 부부는 크게 낙심이 되었습니다. 세 가지 소원 중 두 가지 소원을 썼는데도 그들에겐 은전 한 닢도 생기지 않고 아내의 코에 소시지만 하나 붙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는 수 없이 두 부부는 요정에게 부탁하여 아내의 코에 붙어 있는 소시지를 떼어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코에 붙어 있던 소시지는 떨어져버렸지만, 결국은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본래의 자신에게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만약 <세 가지 소원>이란 동화에서처럼,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소원을 말하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들은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입을 열어 말하지는 말고, 한 번 속으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제자인 베드로조차 스승이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예루살렘에 올라가 서기관과 장로들에게 고난을 당하여 죽은 다음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가, 주님으로부터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라는 심한 책망까지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유월절이 다가오자,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말씀하셨습니다. 다같이 18절과 19절을 보겠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다시 한 번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과 같은 내용이 누가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누가복음 18장 32절과 34절을 보면 제자들의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을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제자들은 3년 동안이나 따라다니며 훈련을 받았으면서도, 주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이유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고 말씀하는데도,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면 로마제국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임금에 오르게 될 것이고, 제자들인 자기들이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갑자기 한 여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세베대의 아내이자,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였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였기 때문에, 족보로 따지면 예수님은 살로메의 조카가 됩니다. 살로메는 친척관계를 이용하여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여기 ‘그 때’란 본문 바로 앞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후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살로메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 캔사스 출신의 한 목사가 뉴잉글랜드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차역에서 한 성도를 만났습니다. “고향에는 별일 없습니까?” “토네이도가 불어 저의 집이 조금 무너졌습니다.” 목사는 눈살을 찌푸리며, “전혀 놀랄 일이 아니군요. 그러게 제가 전부터 똑바로 살라고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한 벌을 받는 것입니다”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는 “그런데 목사님, 목사님의 집은 다 무너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목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아, 역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군요”.
살로메는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주님께서 곧 벌어질 십자가의 사건을 말씀하고 있는데, 야고보와 요한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지 만족시켜 주십시오.” 한마디로 말하면 살로메는 지금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원래 ‘치맛바람’을 국어사전에서는 ‘치맛자락이 야단스럽게 움직인다’고 되어 있지만, 요즘에는 ‘여자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치맛바람이라는 말은 투기바람, 애정바람, 등과 함께 요즘 많이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대치동 엄마, 강남 아줌마, 헬리콥터 엄마들을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엄마들로 손꼽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살로메는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극성을 부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살로메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지금 주님께서는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도, 두 아들을 위해 청탁을 하고 있는 살로메의 행동이 이해가 되십니까?
▶ 결혼하기 전에는 그녀의 행동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이해는커녕 몰상식한 여자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다 보니 그녀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됩니다. 아마 이미 결혼해서 자식을 키우는 부모들, 특별히 엄마들은 살로메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이 자리에 세익스피어의 명언 가운데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실제로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대학교 신경과학과 그레이그 킨슬리 교수팀이 '엄마가 된다는 것이 여성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쥐 실험을 통해 연구한 결과, 아기를 출산해서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여성은 아기를 잘 키울 수 있도록 그에 맞게 두뇌의 힘이 강화된다는 연구결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미가 되기 전후 쥐의 뇌를 촬영해 분석한 결과, 뇌의 많은 부분에서 모양과 크기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또한 움직임을 관찰했더니 새끼를 출산한 어미 쥐는 전보다 더 용감해지고, 먹이를 찾기 위해 5배나 더 빨리 움직이며, 공간 지각력도 더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면,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도 자식을 위해 치맛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통스런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도 두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저는 당신이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인 것을 압니다. 우리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십시오.”라고 청탁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살로메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그 때 살로메가 무엇을 부탁한 줄 아십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여기에서 ‘주의 나라’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녀가 말하는 나라는 성경적 의미가 아닌, 세속적인 성격의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임금이 되신다면,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주님 다음가는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살로메는 두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주님께 청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과 같은 내용이 마가복음 10장 35절 이하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여고보와 요한 두 사람의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막 10:35,37) 어머니 살로메만 ‘높은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주님께 청탁을 한 것이 아니라,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도 주님께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아들들도 어머니처럼 권력에 대한, 출세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욕심은 비단 살로메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24절에서 “열 제자가 듣고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나머지 10명의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 못지않게 출세에 대한 욕심이 많았습니다. 살로메와 두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선수를 쳐서 주님께 높은 자리를 달라고 청탁을 하는 것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그들이 무슨 특별한 잘못을 저질러서 분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먼저 했기 때문입니다. 10명의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살로메처럼, 높은 자리에 대한 욕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높아지는 것보다 이 땅에서 높아지는 것을 원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다같이 22절과 23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은 높은 자리에 욕심을 내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마시려고 하는 고난의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즉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는 고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재직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고향이 평안북도 평산군 능내면인데, 어느 날 고향에서 한 청년이 대통령이 기거하는 경무대에 와서 비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대통령의 고향 친구 아들입니다. 능내동에서 아무개 왔다고 하면 만나주실 것입니다.” 비서로부터 전해들은 이대통령은 그 청년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 부친은 잘 계신가?” “저의 부친께서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 우리 선산은 어떤가? 우리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선산은 어떤가?” “예, 저의 부친께서 돌보시다가 돌아가신 다음에는 제가 각하 조상의 무덤을 돌보다가 내려왔습니다.” “고맙네. 자네 혼자 살려면 힘들겠군. 내게 뭐 부탁할 것이 없는가? 자네 소원이 뭔가? 나에게 말하게.” 청년은 너무 기뻐서 말했습니다. “각하, 있습니다.” 소원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게 뭔가?” “예, 저는 순경이 되고 싶습니다.” “어렵지 않네.” 그리고는 비서실장을 불러서 “비서실장, 자네가 이 청년에게 순경 자리 하나 마련해주게”라고 말하며 청년의 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청년은 자신이 순경이 되었다고 좋아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때 대통령이 기가 막힌 표정으로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불쌍한 녀석, 겨우 구하는 것이 순경 자리인가? 조금 더 큰 것을 구해도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겨우 순경 자리 하나 구하다니!” 그 청년은 대통령이 자기 아버지의 둘도 없는 친구이고, 또 자기가 대통령 조상의 무덤을 돌보아 준 사람인데, 겨우 순경 자리 하나 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자세히 보면, 이승만대통령에게 ‘순경 자리 하나 달라‘고 요청했던 그 청년과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치 주님으로부터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책망을 받은 살로메와 제자들처럼, 주위에 보면 겨우 눈앞에 있는 조그마한 문제에만 매달려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을 먼저 구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구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본다면 솔로몬은 우리에게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3장 4절과 5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야훼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주님께서 살로메에게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언뜻 보면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기도가 왜 특별한지 왜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기도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무엇 때문에 지혜를 구했는지를 알게 되면, 그의 기도가 왜 그렇게 탁월한 기도로 손꼽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기도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솔로몬이 지혜를 달라고 했을까요? 그는 왕이었습니다만, 아직은 그의 왕권이 안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왕권은 불안했습니다. 다윗 왕에 비해 솔로몬은 상대적으로 강력하지 못했습니다. 또 쿠데타를 일으킨 적이 있는 압살롬과 아도니야를 따르던 사람들이 아직도 솔로몬의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든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를 잘 다스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용감한 병사나 강력한 무기나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그의 이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래서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전무후무한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하지 아니한 부와 명예와 강력한 왕권도 같이 주셔서 이스라엘을 잘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기도는 은혜와 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됩니다. 영국의 소설가 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 1898~1963)는 “하늘의 것을 목적하라. 땅의 축복은 저절로 따라온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말에도 ‘소부유근 대부유천(小富由勤 大富由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작은 부자는 근면이 만들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만든다’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작은 것을 성취할 수는 있지만, 큰 것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제학의 대부인 아담 스미스(Adam Smith ; 1723~1790)는 “경제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 곧 하나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헛된 영광’이란 자신만을 위한 영광입니다. 결국 자신의 이익과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나의 이익과 정욕을 위한 헛된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끝으로 실제로 있었던 한 실화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느 노처녀가 중매로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외모나 성격이 마음에 썩 들지도 않아서 계속적으로 만날 것인가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를 만났던 근처 병원에 일이 있어 갔다가, 저 멀리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지나가는, 그 남자를 보았습니다. 순간 ‘노처녀 인생에도 볕들 날이 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중매 때 만나고 더 이상 만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주말에 그 남자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그 남자가 핸드폰으로 전화를 받더니 갑작스런 수술이 생겼다고 가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괜찮으니까 빨리 가보라’고 밝은 미소를 하면서 보내 주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그 남자가 프로포즈를 하자 노처녀는 기쁘게 OK하고, 쇠뿔도 단김에 하라고 얼마 있지 않아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남편은 외과 의사가 아니라, 수술실에서 수술할 때마다 털들을 깨끗하게 밀어주는 면도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 실망이 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노처녀가 면도사를 의사로 착각하고 덜컥 결혼을 한 것입니다. 줄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주위에 보면, 실세가 아닌 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게 보이는 것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를, 또 어떤 사람은 OO 직업을 가진 사람을,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인, 정치가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줄을 잘 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실세 중의 실세가 되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주 전에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최근 현대사에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만한 부자는 없습니다. 록펠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당신은 어떻게 하여 그 엄청난 재물을 모을 수 있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기도하는 법을 배워, 가장 부자이신 하나님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의 시시한 것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축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명예와 재물과 건강을 붙잡기보다, 명예와 재물과 건강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주변사람을 의지했다가 실망하거나 권력을 의지했다가 허탈해하지 말고, 실세 중의 실세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복된 인생을 사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