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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연구기사 49
요점: 1 영원히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①여호와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느님이시라고 알려 줍니다. 시편 102편에도 비슷한 사상을 전달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3 ② 여호와께서 땅에 창조하신 모든 생물은 제한된 수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만은 예외입니다. 4 ③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이 사랑 많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었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계속 살고 싶어 하는 열망과 계속 살 수 있는 역량을 결코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5 주께서는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그들에게 영원히 살 기회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6 하느님의 목적에는 사람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여호와께서는 아들을 메시아 왕국의 왕으로 임명하셨습니다. 7 “맨 마지막 적인 죽음이 없어질 것입니다.” 8 영원한 생명의 희망은 하느님의 말씀에 확고한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9 주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계속 머물러 있을지는 우리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
비평: 1 성서의 약속들에 신뢰를 두는 사람은 워치타워가 무엇을 주장하든지 성서에서 말하는 희망을 붙들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사도가 요한 복음에서도 보증하였다(요 3:16). 2 하나님께서 영원하다거나, 무한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의 지속성이나, 수나 양의 무한을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적 차원이 아니라, 신적 차원을 의미한다. 3 현재 조사된 생물 개체들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물들이 그러하다, 바다가재나 불가사리 등은 수명이 끊기지 않는다. 4 본성을 유지하려는 것은 물(物)의 기본 속성이다.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거나 말하지 않지만 모든 물은 자신의 존재 본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본성이 있다. 다만 보다 큰 힘에 의해서 그 존재는 파괴되는 것이다. 5 부활이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 이성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연의 섭리대로 움직여져 나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연의 자기섭리를 벗어나 행동하지 않으신다. 인간의 이성이 활용되는 방식으로 영생과 부활은 이루어질 것이다. 6 사람이 영생하기 전에 먼저 환경들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세상의 정치제도이다. 예수 그리스도 또는 그와 같은 자들이 통치할 때, 비로소 정치는 바로 잡혀질 것이다. 7 죄와 사망은 바늘과 실처럼 상호연관성을 갖고 있다. 사망이 없어진다는 것은 죄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마치 천연두가 이 세상에 나타나 기승을 부렸으나, 이제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것처럼 더는 사람이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8 영원한 생명은 성서에서 약속하는 최고이자 궁극적인 희망이다. 이를 밎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철학으로 영생의 의미를 바꾸려고 한다. 9 영원한 생명에 머무른다는 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다. 다시 말해서 어떤 종파의 종교인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성서의 영생의 약속을 믿고 그에 따른 삶의 길을추구하고 진행하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 |
영창조와 영원한 생명 1. 세포적 사건과 창조성 하나의 사회는 무질서하게 널려있는 사건의 군집이 아니고 시간의 경과 속에서 어떤 질서(통일성과 형상의 관련성)를 가지고 있는 사건의 켜들의 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질서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사건의 군집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볼 때, 현재의 사건 보다 선행하는 과거 사건들에게서 발견된 하나의 형상이, 현재는 물론 앞으로 후속하게 될 미래의 사건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우주에는 이렇게 질서를 갖는 사회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우주는 단순히 무질서하게, 즉 통일성과 형상을 지닌 관련성 없이 발생하는 사건들의 군집이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무질서와 카오스의 상태에서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렇게 질서를 발견하고 만들어 내는 것이 바로 ‘창조’이다. 바꾸어 말하면 창조란 무질서하게 널려져 있는 혼돈 속에서 순차적인 질서를 갖고 있는 사회를 발견하거나 혹은 만들어 내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이 현실적 사건으로서 기능할 수 있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의 현실적 사건이 타자를 위해서 도구가 되기에 앞서서 자기 스스로 어떤 것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하나의 사건이 자기 고유의 자기-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가치란 내가 한 사건의 고유한 실재성을 말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다” 라고 화이트 헤드는 말했다. 다시 말하면 무질서한 사건들의 군집에서는 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새 것의 창조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현실적 존재라고 불리울 수도 없다. 예를 들어서 하나의 전자 사건은 어쩌면 무가치한 상태에서 무시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의 군집이 순차적 질서를 갖고 있는 사회를 구성하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는 하나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창조성과 새 것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면 결국 단순한 사회보다는 복잡한 사회가 더욱 더 추천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보다 상세히 규명해 보자. 하나의 원자의 내부에는 전자적 사건들과 중성자적 사건들이 시리즈로 존재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원자라는 하나의 현실적 존재는 그 안에 전자사건과 중성자 사건들을 속성으로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미 말한대로 하나의 존재자는 과거의 종합이지만 동시에 통일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사건의 시리즈이다. 이런 법칙을 원자에 적용한다면 하나의 원자는 자기의 부분들이 가지고 있는 전자사건과 중성자 사건들의 개별성을 각각 포용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사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결국 하나의 원자는 여러 가지 부분들의 종합, 그 이상이 된다. 이것은 분자에도 마찬가지다. 분자라는 사건은 단순히 원자적 사건들의 부분들을 종합해 놓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가치의 창조와 한 존재 또는 생명의 ‘누림’, ‘즐김’, ‘맛봄’, ‘경험함’ 등의 의미로 ‘향유(享有, enjoyment)’될 수 있는 개념을 빌어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새로운 존재의 단계들은 복잡성의 강도가 상승하게 되면, 이에 따라 가치도 증대된다. 즉 하나의 분자 사건이 있다고 하자. 이 때 그 분자사건은 선행하는 분자사건에서 가치를 접수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에게 종속되어 있는 부분들에서도 가치를 받아들인다. 즉 10분 전에 존재했던 분자사건 A는 현재에 A'가 되었지만 그 현재의 A'는 과거의 사건 A에서만 경험과 가치를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원자사건들과 같은 하부조직들에게서도 경험과 가치를 접수한다. 이런 이유로 하나의 경험사건이 발생할 때 그것을 구성하는 환경이 보다 복합적이면 복합적일수록 가치도 그만큼 증대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것은 미립자 차원에서 출발해서 분자의 차원에 이르는 사건들과 그것들이 경험하여 만들어내는 창조성과 가치였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분자의 차원 정도는 우리 인간 차원의 경험에서 볼 때 아주 미미하고 사소한 창조성과 가치의 발생만으로 보여질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창조성과 가치의 차원을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사실상 세포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가능하다. 화이트헤드는 세포의 출현을 우주의 생명사에 있어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즉 전자 사건의 경우를 보면 그 사건은 그저 과거 사건을 반복하는 수준에 머무는 특징을 갖는다. 사실 100년 전 있었던 전자적 사건이나 1초전에 있었던 전자적 사건이나 앞으로 전개될 전자적 사건 역시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며 새로운 경험세계나 가치체계를 창조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에게도 새 것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포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세포의 차원에서는 그저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수준을 넘어 서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색다른 면이 발견된다. 특히 하나의 살아있는 세포는 단순히 분자 사건들을 모아 놓은 군집이 아니라 이제까지의 사건 들의 차원을 초월하는 새로운 통일성을 가진 경험사건으로 존재한다. ‘구조를 갖는 사회’는 종속적인 사회를 자신의 하부에 갖고 있는 사회이다. 여기서 구조를 갖는 사회, 즉 세포는 다시 종속적인 구조를 가진 사회와 통제적인 구조를 갖는 사회로 구분지어진다. 이는 그들이 맺는 관계에 따라서 식물세포와 동물세포로 구별되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하나의 사회 안에서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단순히 동일한 수준에서 평등하게 결합체를 이루는 경우는 식물 안에 있는 세포사건들이다. 이와는 대조되게 동물 안에 존재하는 세포 사건들이 만들어낸 사회는 종속적인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계승시키며 이를 통해 사회 전체에게 ‘군주적’인 막강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된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과와 하나의 원숭이는 다르다. 사과에서도 가치가 실현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원숭이에게서 실현되는 것은 원숭이를 이루는 세포가 보다 강도 있는 통제력을 행사하여 높은 차원의 가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경험 사건에 대한 분석이 미립자의 차원에서 시작해서 동물세포의 차원에까지 이르렀다. 이제 마지막으로 같은 동물세포의 차원이라고 할지라 도 인간세포의 차원은 또 다른 차이를 보여준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인간의 두뇌세포를 이루고 있는 사건 중에는 어떤 독특한 군주적 사건이 있어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경험 사건을 순차적으로 배열하고 통제하면서 최고의 가치를 생산해 내는 것이다. 정신 사건은 전자적인 사건이나 분자적인 사건, 혹은 세포적인 사건들만큼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현실적인 사건이면서도, 동시에 그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현실적 사건들의 새로운 시리즈이다. 2. 정신-신체의 문제의 재해석 정신이 현실적인 사건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라는 기존 해석은 이제까지 문제가 되어 왔던 전통적 영혼 불멸설의 이원론적 인간학의 문제들을 간단히 해결하면서, 동시에 영혼이나 정신은 육체활동(두뇌 세포 활동)의 부수적 산물일 뿐 실제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비종교적인 학문들, 즉 유물론에 입각한 행동주의(behaviorism), 환원주의 (reductionism) 혹은 부수현상론(epiphenomenalism) 등의 태도와도 새로운 입장을 취한다. 영혼 불멸설, 윤회설, 지옥설 등 이원론적 인간학에 근거한 이론을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이라 하고, 유물론, 행동주의, 환원주의, 부수현상론 등 영혼과 정신의 실체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론을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이라 칭할 수 있다면, 그런데 여기에 제3의 이론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 대두된 것이다. 이 철학의 요점은, 현대인들이 죽음 이후의 삶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영혼과 육체의 낡은 세계관과 과학관에 근거하여 보는 시각, 즉 심신이원론 혹은 심신일원론 때문이다. 먼저 많은 현대인들은 심신일원론에 근거해서 정신이나 영혼은 두뇌활동의 연장이나 부수현상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영혼의 지속성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영혼은 신체가 죽으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비독립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주의는 현대의 많은 지식인들의 공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신체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분석하는데 있어서는 실패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오늘날의 과학은 물론이거니와 우리의 상식이 알고 있는 대로, 우리는 신체의 부수적 현상과 상관없이 별도로 자유하는 정신의 세계를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현재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분명히 두뇌사건이 만들어 낸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나의 의지가 만들어 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틀림없다. 내가 지니고 있는 의도대로 나의 행동과 생각을 주관하고 원하는 방향에 따라 리드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정신일도 하사불성’이라는 말처럼 정신이 우리의 신체사건들을 이끄는 경우는 얼마든지 경험될 수 있다. 한편 심신이원론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지속성을 말하는 데 있어서는 장점을 지닌다. 정신이나 영혼은 신체와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신체가 어떻게 정신과 연결되고 상호 소통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실패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며, 무엇보다도 ‘전적죽음이론’ 이 지적하는 대로 영혼의 불멸 등에서 따라오는 반성서적인 문제가 기독교파에서 여러 가지 폐단을 낳아 현대신학에 의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화이트 헤드의 철학이 이러한 난점들을 극복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이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세포 사건은 그것에 종속하는 사건들을 하나의 형상으로 통합시키면서 새 것을 창조해낸 다고 하였다. 이는 물론 그 세포적 사건 자체에서 연유한 것도 있지만, 또 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런 식으로 의지를 가지고 과거의 사건들에게 형상을 부여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통합하고 제어하는 사건은 그 세포적 사건의 물리적 측면과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물리적 측면은 그저 과거의 것을 반복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세포 사건에 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즉 과거를 반복하는 측면과 새 것을 만들어 내는 측면이 바로 그 것이다. 여기서 후자는 물리적인 측면과는 구별되는 것이어서 이를 정신적인 측면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것이 다. 이렇게 하나의 세포적인 사건은 물리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이 함께 양극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러기에 하나의 세포 사건은 신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과정철학에서는 육체는 물질적 실체이고 영혼은 정신적 실체라는 식의 이원론이 발생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두 개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실적 존재로서의 정신-신체적 사건 뿐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 말은 현실적 존재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정신적인 현실적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적인 현실적 존재라는 말이 결코 아니며, 모든 현실적 존재들은 정신적인 면과 물리적인 면을 양극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신은 둘이 아니고 하나이며, 동시에 그 하나의 심신은 물리적인 면으로서의 신(身)과 정신적인 면으로서의 심(心)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과정신학에 있어서는 이런 식으로 육체와 영혼이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상호 밀접하게 의존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3. 영혼의 존속과 독립 부수현상론, 환원주의 등에 기초해서 영혼의 실재를 부정하고, 그것이 존속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결국 세포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험 사건이 자신의 부분을 이루는 종속 사건들의 도움 없이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셈이다. 그러므로 영혼의 존속 문제는 결국 어떻게 두뇌 세포에서 발생하는 사건 중에서 소위 정신적인, 혹은 영혼적인 사건이 자신의 부분을 이루는 종속 사건들의 도움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결정적 열쇠는,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정신은 하나의 ‘군주적 사회’이며 나아가서 살아있는 인격이라는 사실을 분석함으로 써 제공될 수 있다. 우선 정신은 군주적 사회를 이루는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군주적 사회는 민주적 사회와 다르다. ‘민주적 사회’ 는 말하자면 환원주의적 이해, 즉 세포 단위의 어느 사건도 물리적 사건에 의존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에 부합하는 사회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민주적 사회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의 사건이 다른 여타의 사건들을 통합하고 제 어할 수 있는 리더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사회이다. 이러한 민주적 사회와 다르게 인간의 정신이나 영혼은 하나의 군주적 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그러한 정신 혹은 영혼은 단지 단순한 결합체가 아니라 충만하게 ‘인격적(personally)’으로 질서 잡힌 사회를 이룬다고 화이트헤드는 생각한다. 여기서 인격적으로 질서가 잡혀있는 사회란, 영혼이나 정신과 같은 사건이 자기의 과거 사건들을 기반으로 하면서 두뇌 세포가 가지고 있는 특징들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나름대로의 자유와 의지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정신 사건을 기술하면서 ‘인격적’이라는 말을 굳이 사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이미 암시한 바대로 이 인격적인 인간의 정신사건은 자신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건들에게 영향을 받지만 동시에 그것들로부터 의지를 가지고 자유한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들의 경우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자유의 확보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을 인간답게, 즉 인격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동물에게서 정신 혹은 영혼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동물의 영혼 안에서 발견되는 자유는 과거 사건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고 비약할 수 있는 종류의 자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영혼은 과거 사건의 특징들을 파악하면서 현재에다가 새 것을 공헌하는 반면, 다른 여타의 동물들은 세포의 차원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이 거의 전적으로 물리적 신체에 의존하면서 그저 거기에 만족하는 것에 그치고 만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인간의 영혼은 자신의 신체적인 사건에서 독립하여 존속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정 철학에 있어서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신체 사건으로부터 진정한 의미에서 영속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신(神) 개념의 도입에 의해서이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하나님과 영혼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를 통하여 어떻게 인간이 죽음 이후에도 영생할 수 있게 되는지를 살펴볼 차례이다. 4. 과정신학의 죽음과 기독교적 영생 하나의 사상체계 안에서도 여러 학파가 의견이 분분하듯이, 물론 과정 신학 안에서도 죽음과 영생에 관한 여러 가지 입장이 다양하게 있으며 화이트헤드 자신도 이 주제에 관하여서는 다소 불명료하다. 비록 죽음 이 후의 상태에 관한 이론이 아직 과정신학에서도 영원한 신적 신비로 남아 있다고는 하나, 다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고 불멸(영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는 다른 말로 천국-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과정철학의 기초이론에 입각하여 볼 때, 과정신학이 이해하고 있는 죽음의 의미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죽음은 변화의 과정(사건)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죽음에 대해서 그의 이론적인 체제에 있어서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또 목회적인 목적들을 위해서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 방식으로 다룬다.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는 죽음(사멸, 소멸)은 탄생(출현, 신생)의 반대적 개념이며, 출현과 사멸 은 실재를 이루고 있는 모든 사건의 조각에 매순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끊임없는 출현과 사멸의 홍수 속에서만 변화와 향상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사멸은 출현과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서는 본질적인 것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여러 차원에서의 변화를 겪고 있으며, 그 변화는 사실 신생(탄생)과 소멸(죽음)을 뜻한다. 특정 시간, 특정 공간에서 특정한 세포 조직으로 구성되었던 우리 자신들은 사실 그 다음 순간에 -우리가 통상 의식하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같은 강을 두 번 건널 수 없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처럼, 화이트헤드는 아무도 두번 생각하지 못한다고 했다. 즉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는 매 순간 죽고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어떤 생각을 하고, 그것을 다시 생각할 때의 나는, 흘러간 강물처럼, 이미 그 이전의 내가 아니다. 죽음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래서 인간은 어쩌면 아주 특유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정 시간과 공간을 특정 방식으로 점유하고 있던 특정 개체의 해체가 죽음이라고 한다면, 죽음이란 모든 생명체, 아니 만물이 서로의 모습을 달리하는 즉, 변화되는 것일 뿐인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과정신학은 영혼 불멸설에서 이야기하는 ‘이원론적 인간관에 근거한 영혼’ 따위 는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영혼은 존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름하는 소위 ‘영혼’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영혼이 존재하지 않고 단지 육체(물질)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다른 사물과 구별되지 않으며, 독자적으로 존재하지도 못한다. 무엇인가 참으로 존재(사건) 하려면 그것은 그것의 육체를 일정한 방향으로 운동케 하는 결정을 내리는 ‘지휘통제부’가 거기에 함께 사건할 때 뿐이다. 만일 그 지휘통제부가 어떤 이유에서든 제구실을 못하게 되면, 그 개체는 전체적으로 보아 사멸 (죽음)하게 되고, 다른 형태(성질)의 사건으로 다시 등장(출현, 신생)하게 된다. 이는 변화의 과정일 뿐인 것이다. 예컨대, 시계가 고장이 난 경우라든가 자석이 자력을 상실한 경우는 어떤 사람에게 정신 이상이나 죽음이 발생한 경우와 질적 차이만 엄청날 뿐이지 기본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새로운 존재 양식을 갖게 된 고물(시계), 돌덩이(자석), 살덩이(인간)는 그 모든 수준은 훨씬 낮아졌지만, 아직은 그들 나름대로 통일성을 지니고 있 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형태로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렇듯 그것들은 그 이전의 수준에서 보면 분명 죽은 것이지만, 그 물체들은 그 자체의 내부적 통제력에 의해서 새로운 통일성을 유지한다. 이 같은 통일성이 없이는 하나의 사건-사회, 즉 단위 존재라고 말할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높은 수준의 사건을 보면, 영혼이란 우리의 하부 조직체들 사이를 유기적으로 연관시킴으로써 ‘내적 통일성’을 유지 시켜 줄 뿐 아니라, 하나의 커다란 단위 개체로서의 우리의 대외적 활동 방식까지 일정한 방식으로 규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란 하나의 개체를 참으로 존재케 하는 내적 원리(질서)가 될 뿐 아니 라, 그것을 다른 것과 구별시켜 주는 외적 원리(정체성)도 된다. 종합하면, 영혼이란 독자적 사건이 아니라 특정 개체의 통제본부요, 행위 방식을 규정하는 그 자체의 내적 구조이다. 그러므로 현실 사태의 사멸이 그 사라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양태전환으로 이해될 수 있다. 죽음을 통해서, 현실적 존재는 새로운 방법으로 미래를 위하여 사용되기 위해 현재를 처분한다. 이를 간단히 요약해 화이트헤드는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들은 주체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사멸(perpetually perish)하고 객체적으로는 불멸(immortal objectively)한다” 라고 말했 다. 즉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 감으로써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로 변해 가며, 그와 동시에 내적 구성에 있어서도 미세하나마 지속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어떤 변화는 너무나 현격하여 눈에 띄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것이 감지되지 않는다. 세포의 사멸, 정신분열증,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죽음 등 이런 것들은 철학적으로 보면 같은 원리의 변용들에 불과하다. 죽음의 형태에 따라서 우리의 반응하는 정도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다 같이 죽음임에는 틀림없다. 그리하여 하나의 세포가 죽을 때 그것들의 집합체인 ‘나’ 는 사실상 죽어, 그 다음 순간 다른 사람이 된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서 있는 특정 구조의 ‘나’ 를 주체로 설정한다면, 그 주체인 ‘나’ 는 지극히 짧은 순간을 살고는 곧 죽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주체적으로 보면, 이렇듯 끊임없이 일어나는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만물은 매 순간 죽는다. 그러나 죽는다고 하여 기존의 ‘나’ 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과거의 나’를 이어받은 누군 가가 있다면, ‘나’ 는 그 안에서, 의존적으로, 그런 의미에서 주인이 아닌 ‘객(客)’으로서 남아 있게 된다. 철학적으로 또 현실적으로 보면 ‘과거의 나’를 이어받는 그 누군가는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나’ 를 이어받는 현실적 존재는 고귀한 존재일 수도 있고, 흙덩이와 같은 하찮은 존재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상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과거의 나’ 를 이어받고 다시 존재(사건)하는 것은 여전히 ‘나’이다. 그리 고 ‘과거의 나’ 와 다시 태어난 ‘나’ 사이에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통일성, 연속성이 부여된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아보 고, 남들이 또한 우리 자신을 알아본다.) 이렇게 볼 때, 원리적으로 보 면 ‘나’ 는 죽지만, ‘나’ 를 이어받는 새로운 사건들에 의해서 ‘나’ 는 계속 남아 있게 된다. ‘과거의 나’ 를 다음 순간의 내가 또는 나를 사랑하는 타자가 사랑으로 포용하는 경우, 주체로서는 죽은 우리가 ‘객체로서’ 는 살아 있게 된다. 이것이 부활이다. 이것은 이원론적 사고관의 영적 불멸이나 다른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정신적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를 이어받는 새로운 존재가 가끔씩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못 알아보거나 오래전에 만났던 친구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이는 그 만큼 동일성과 연속성이 ‘사멸과 신생’의 변화 가운데 조금 더 파편처럼 흩어졌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전체로서의 ‘나’, 영혼과 육을 포괄하는 ‘몸’을 이어받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사상만을 물려받는다고 할지라도, 나의 사상이란 나의 세포적 사건의 특수한 정신적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역시 몸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정신학으로 보면 육과 분리된 영혼, 정신이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기능적으로만 이름 할 뿐이다. 따라서 나아닌 누군가가 나를 ‘포용(사랑)’해 준다면, 나는 그 타자에 의해서 몸으로써 부활하며, 객체적으로 불멸하게 된다. 그리고 그 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마침내 영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아 상실 (소멸, 죽음)이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두려움은 ‘사랑’에 의해서 극복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찰스 하트숀(Charles Hartshorne)은 우리의 삶의 역사는 ‘삶의 책’이라고 말한다. 하트숀은 “이 책은 죽음과 함께 (주체적으 로는) 완결 되지만 (객체적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 억 속에 영원히 현존 한다”고 했다. 화이트헤드는 또한 향유를 설명하 면서 “하나님은 우리를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그에게 영원히 현존하며, 영원히 현재적인 것으로 존속하며, 우리는 그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는다”고 했다. 종합하자면, 과정신학은 이원론적 영혼 불멸설에 근거한 내세의 허구적인 천국과 지옥(혹은 연옥)은 언급하지 않는다. 죽음 이후의 상태에 대해서도 윤회설이나 전적 죽음설과는 진지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죽음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생각을 보았다. “객체적으 로 불멸한다”는 이 입장을 ‘객체적 불멸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같은 희망이 인간의 이기심과 결합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할지 우리 모두는 익히 알고 있다. 가정 단위의 집단에서 못다 이룬 부모의 욕구 충족을 위해 자녀를 대상물로 전락시키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불행을 비롯하여, 사회적, 국가적, 인종적, 종교적 이기심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수반한 수많은 분쟁과 갈등을 낳았다. 과정신학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불멸은 이기적 욕망의 불사(不死)를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오그덴(S. M. Ogden)은 “인간의 개인적 불멸은 기독교 희망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기독교 희망의 근거요 대상이다”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염려할 바는 어떻게 하면 영원할 것인가가 아니라, 죽음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이다. 좀 더 과정신학적으로 설명하면, 남긴다는 것은 달리 말해 ‘향유’, 즉 ‘차이를 만든다’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 즉 ‘나’ 라는 사건을 통하여 타자와 사회에게 (좋거나 나쁘거나) 끼치는 영향력이다. 우리의 일생의 의의를 갖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그리 고 죽고 나서라도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 해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기여도와 영향력에 따라서 우리는 길이 살 것이다. 그들은 주체로서는, 즉 행위 결정권의 소유자로서는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객체로 살아남아, 인류의 문명과 더불어 영속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함이 아니라 ‘창조적-응답적 사랑’의 강함을 뜻한다. 우리가 무엇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한다면, 우리의 수고와 우리가 이룩한 가치를 하나님은 경험하시고, 기억하시고, 향유하실 것이다. 우리가 기여한 가정과 사회와 세계는 결국에는 일정한 시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하다가 마침내는 가정과 사회와 세계의 주체성마저도 사멸을 맞이함으로 망각 속에 우리의 수고도 함께 매장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우는 다르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기억과 사랑은 영원하다. 지금의 하나님이 자신의 주체성을 상실하고 다른 속된 객체로 변화되어 가거나 사멸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삶의 과정 중에 만일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포용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불멸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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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의 내용은 영생과 부활의 의미를 영혼불멸이나, 영혼멸성의 중간적 이해라 할 수 있는 화이트 헤드의 신학을 요약하였다.
물론 이 신학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차원보다, 생각해 볼만한 점이 있다는 점이다. 성서에서는 인간 생명, 그 자체가 영생하는 존재로 설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