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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702
3월17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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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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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7bkn2-oY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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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공과 기쁨의 날에도 함께 하시지만, 실패와 슬픔의 깊은 밤에도 함께 하시는 주님!>
오늘 주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 인간을 향한 당신의 뜨겁고 절절한 사랑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계시는데,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듭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부모, 그 어떤 연인들이 이같은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4~15절)
예기치 않은 고통이나 환난이 찾아올 때 우리 역시 이스라엘 백성처럼 부르짖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공과 기쁨의 날에도 함께 하시지만, 실패와 슬픔의 깊은 밤에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주님이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 할지라도 주님만큼은 항상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며 끝까지 응원하시고 지지해주시겠다니,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하지 않은 우리 인간 존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유형의 버림을 받습니다. 결코 원치 않았지만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속절없이 세월이 흐르고, 든든한 산 같던 아버지, 편안한 언덕 같던 어머니도 병들고, 늙고, 세상을 떠납니다. 엄중한 세월의 순환 주기 앞에서 그 누구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만은 다릅니다. 세상의 부모들과 사랑했던 사람들, 믿었던 친구들과 숱한 인연들이 세월과 더불어 사라지고 떠나가지만 주님만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따지고 보니 참된 아버지요 진정한 어머니는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인이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이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란 주님 말씀이 참으로 오래도록 제 가슴 속에 큰 여운을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 한명 한명을 바라보는 주님의 시선은 분노와 실망의 시선이 아니라 한없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시선입니다. 마치 갓 태어난 젖먹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시선처럼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통상적인 어머니들의 시선은 어떻습니까? 자신의 몸을 통해 세상에 나온 자신을 꼭 빼닮은 한 생명체의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놀라울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너무나 사랑스럽고 대견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행여 어디 잘못되기나 할까? 혹시라도 어디 아플까 늘 걱정스러울 것입니다. 애지중지 혹은 노심초사란 말이 딱 맞을 것입니다.
오늘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역시 은혜롭게도 애지중지, 노심초사가 가득 담긴 시선이 틀림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떠나간다 할지라도 끝까지 내 곁을 떠나가지 않으시는 분, 끝까지 내 등 뒤에 서서 나를 응원하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내가 깊은 수렁에 빠져 허덕일 때, 친구들이며 지인들이 다 나를 두고 수군거릴 때도 끝까지 나를 잊지 않고 보살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떠나 큰 죄를 짓고 방황할 때조차도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귀히 여기시는 분, 나를 존중하고 나에 대한 구원의지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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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xQ7RL37uov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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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나라에서 많은 고을을 다스리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대등해지는 방법은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면 아버지와 대등해진 것입니다. 자녀가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수 있다면 아버지처럼 성장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와 대등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아버지와 함께 다스리게 된다는 뜻입니다. 루카 복음에서 다섯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종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이 말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다스릴 권한을 착한 종에게 준다는 뜻입니다. 고을은 분명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늘에서 사람을 다스리게 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과 사람을 살리는 것, 곧 구원에 따른 ‘심판’이 연관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이 원죄로 심판받아 태어나기 때문에 예수님의 일로 구원받는 사람만이 심판을 이기게 됩니다. 아버지의 일이란 이렇듯 누군가를 구원하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결혼한 지 6주 만에 사라진 남편의 행방을 70년 뒤에 알게 된 여인이 있습니다. 1940년 스물두 살의 페기는 공군 조종사 빌리를 만났습니다. 둘은 단숨에 사랑에 빠지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행복한 신혼의 달콤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것입니다. 공군 중위였던 빌리는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로 발령이 나서 부부는 쓰라린 이별을 합니다.
페기와 빌리는 그것이 마지막 인사였고 전쟁 내내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하며 긴 전쟁이 끝나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재혼도 하지 않으며 7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폐기 역시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남편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국회의원 톤 베리에게 보낸 편지가 답장이 옵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편지를 열어보는데, 빌리는 기록에 따르면 임무 수행 중 실종 상태라고 하고 생사는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페기는 여기서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빌리와 관련된 모든 곳을 수소문하며 진실을 밝힙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페기의 삼촌이 직접 군에 찾아가 군사기록을 밝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들은 6개월 뒤 페기와 친척들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합니다. 한 프랑스 여성이 얼마 전 이미 복사본을 가져갔다는 것입니다.
페기와 친척들은 당장 그 여성을 찾기 시작하였고 얼마 후 군의 도움으로 그 여성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빌리는 프랑스 마을의 영웅이었습니다. 1944년 빌리는 적의 폭격을 맞아 방트 마을 인근에 추락하고 있었고 전투기는 화염에 싸여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는데 빌리는 그냥 추락한 게 아닙니다. 그는 무고한 민간인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가는 순간에도 조종간을 마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있었으며 인적이 드문 장소에 추락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한 빌리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까지 치러주었고 70년 동안 매년 빌리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를 열고 있었습니다. 방트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에 빌리의 이름을 딴 거리를 만들어 그를 기리고 있었습니다.
현재 빌리의 유골은 노르망디 국립묘지로 옮겨졌고, 방트 마을 빌리의 무덤은 영웅을 추모하는 의미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페기를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70년 만에 남편을 만난 페기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결혼 6주 만에 사라진 남편’,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주신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아버지의 일이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보고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구원을 받고 구원의 공동체가 형성됩니다.
빌리의 희생으로 방트 마을 수백 명의 사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교회라는 공동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심판을 맞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교회라는 고을을 다스릴 권한을 가지십니다. 교회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다스림을 ‘왕직’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 모습대로 당신을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교회라는 마을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교회를 다스리게 되셨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행하시는 모든 일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 하늘 나라에서 여러 고마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으로 가족이라는 작은 마을이 생기듯, 우리도 사랑하면 마을이 만들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만든 마을이 있고, 마더 데레사가 만든 마을이 있으며, 이태석 신부님이 만든 마을이 있습니다. 모든 마을은 그리스도를 따른 피의 희생으로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가져가야 하는 유일한 인생의 결과물은 이렇게 나의 피로 세워진 사랑의 공동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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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5,17-30 :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실상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고 하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으며, 그래서“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으로가 아니라,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힘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육은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4,41)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한다. 즉 아버지께서 심판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공경을 받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라고 하신다. 도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고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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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길을 지나가다 같은 옷을 입고 가는 연인을 본 기억이 납니다. 저렇게까지 하고 싶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미소를 지었던 기억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서로 같은 것을 입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서로 각자의 것을 내어놓고 상대의 것들을 담고 살아가는 모습, 자신의 것보다는 상대의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를 만나 이야기하다가 두 사람이 많이 닮아 있음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그런 마음 때문에 닮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삶 속에 담고 살아간다면 그 사람과 닮아 갑니다.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담아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것을 알아 가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을 아드님께서도 그대로 당신의 삶 속에 담아 똑같은 일을 하십니다. 스스로 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실 뿐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과 마음속에 아버지 하느님을 담고 살아가십니다. 그 ‘담음’은 바로 ‘닮음’으로 변합니다. 외모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 그리고 사랑까지도 닮아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들을 보고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예수님의 삶과 희생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그리스도요, 예수님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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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1)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쉬지 않고 일하시니 나도 쉬지 않고 일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단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사랑과 자비를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하느님은 안식일에도 인간들을 보살피는 일과 인간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는 일을 멈추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안식일에도 쉬지 않으시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시던 일’이라는 말은 천지창조 사업을 가리킵니다. ‘쉬셨다.’ 라는 말은 아무것도 안 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창조 사업의 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렛날에 쉬셨다가 여드렛날부터 다시 일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천지창조 이야기에서 여드렛날은 없습니다. ‘지금’은 ‘이렛날’의 연속입니다.) 십계명에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는 것은, 중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들, 특히 종들에게 휴식을 보장해 주라는 뜻입니다.(탈출 20,8-11; 신명 5,12-15) 그래서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은, 사랑과 선행 실천마저도 중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늘 사랑과 선행 실천을 해야 하지만, 안식일에는 특히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2) 하느님의 사랑은 ‘숨을 쉬는 일’과 같습니다.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숨’을 쉬고 있습니다. 그 ‘숨’이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멈추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의 사랑은 ‘심장이 뛰는 일’과 같습니다. ‘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의식을 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의 심장은 멈추지 않고 계속 뛰고 있습니다. 심장이 멈추는 날이 곧 죽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도 바로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던 당신의 사랑을 거두시면, 우리는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단 한 순간도 하느님의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 때가 많습니다.)
3)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하느님과 대등한 존재라고 말씀하신 것을 신성모독 발언으로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고,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인으로 보일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간격은 구원과 멸망 사이의 거리입니다. 지금 이 말은, 신앙생활은 목숨을 걸고 하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요한 5,29)
1)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믿는 대로 실천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때가 온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도 믿지 않으면, 그것은 들은 것이 아닙니다. 또 말씀을 믿더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라는 말씀은, “이미 시작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종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종말의 날’은 사실은 ‘종말이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어야 할 때도 지금이고, 믿음을 실천해야 할 때도 지금이고, 회개해야 할 때도 지금입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는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서둘러야 합니다.
2) 일부 사이비 종파에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천당에 간다고(구원을 받는다고) 선전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선행, 사랑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선행과 사랑 실천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사이비 믿음입니다. 믿는다고 주장하면서도 악을 저지른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믿는 척’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살고 싶다면 회개하고 보속하라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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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계몽사’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저도 계몽사의 책을 읽었습니다. 예전에는 계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을 깨우치는 의미가 있습니다. 선진 문명과 문물이 뒤쳐진 문명과 문물을 이끄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이 있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계몽주의는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는 위험이 있습니다. 21세기는 ‘공감의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100세 시대를 살면서 계몽의 시대보다는 재미와 의미의 시대를 이야기합니다. 은퇴한 후에 살아야 할 시간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는 시대입니다. 재미와 의미가 만나서 오늘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 공감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는 계몽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사람들은 계몽의 대상이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있는 사람도 죄인이 되었습니다. 계몽의 시대에는 권위와 가식이 있었습니다. 차별과 통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만남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계몽의 만남이 아니었습니다. 공감의 만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머물면서 함께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벗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권위와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권위와 질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공감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핵심인 성체성사는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성사입니다. 이보다 완벽한 공감은 없습니다. 교회가 생기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것은 교회가 계몽의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가시어 이사야서를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오빠 나자로를 잃고 슬픔에 잠겨있는 마르타와 마리아를 위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자로를 무덤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 나병환자, 중풍병자, 청각장애자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권한과 능력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 복음을 선포하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측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5,000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공감의 가치를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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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제2 이사야에서 뽑은 오늘 독서의 배경은 바빌론 유배 시기(기원전 6세기)에 속합니다. 끌려간 이들은 시온의 행복한 나날을 회상하며 현실의 고통을 한탄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주님께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당신의 행복과 사랑을 상기시키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다가오는 귀환으로 당신 사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규정을 어기면서 중풍 병자를 낫게 해 주셨다고 비난하는 이들에게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부르시고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견주어 말씀하심으로써 추문 이상의 근거를 덧붙이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창세기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창조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여기에서 ‘휴식’(안식)을 뜻하는 유다교 안식일 제도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휴식은 일하지 않음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한 만물의 생명을 보존하는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구원을 베푸시고 생명을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만드신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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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바오로회 故 유광수 야고보 신부님]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요한 5, 17-30)
오늘 복음에서 아들이라는 단어를 10번 사용하였고 아버지라는 단어를 7번 사용하였다. 구약에서 아버지란 단어를 모두 15번 사용하였는데 그것에 비해 신약에서는 모두 170번 사용하였다. 그 중에서 요한 복음에서만 109번, 마르코 복음에서 4번, 루카 복음에서 15번, 마태오 복음에서 42번 사용하였다. 이마만큼 아버지와 아들에 관한 주제는 예수님 메시지의 중심이며 모든 복음의 핵심 메시지이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 아버지의 단어를 많이 사용한 것은 그마만큼 아버지에 관한 것을 많이 부각시키기 위한 것일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하느님이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이 세상에서 아들이 하시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다.
결국 아들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버지의 사랑을 드러내시는 일이다. 그래서 아들은 당신 뜻대로 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그대로 하시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결국 아들이 하는 모든 일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며 아버지께서 보여 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이 원하시는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신 분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즉 아버지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모든 일은 다 아들을 통해서 하시고 아들이 하도록 하시기 때문에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따라서 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 아버지의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다 아버지의 것이요,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다. 아들은 누구인가? 아들은 모든 것을 아버지한테 받으시는 분이시다. 아버지가 아닌 다른 분한테는 아무것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이 집으로 들어오다가 아버지가 집을 나갔던 작은 아들이 돌아오니까 기뻐서 잔치를 벌리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오셨다고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다고 말하니까 큰아들은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라고 불평했을 때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 찾았다. 그러니 즐기며 기뻐해야 한다."(루카 15 29-32)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요, 아들의 것이 아버지의 것이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같은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분이신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한다. 즉 하느님의 아들이며 딸이다. 이 세상에 부자관계보다 더 사랑의 관계, 더 친밀한 관계는 없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고 하듯이 아버지와 자녀는 같은 것이다. 아버지 없이 자녀가 존재하지 않으면 자녀 없이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와 자녀는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요, 서로 서로 직접적으로 통하는 관계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 이것보다 더 우리의 신분을 영광스럽게 만드는 것은 없다. 하느님의 자녀가 곧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다. 우리의 신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자녀로서 존재해야 한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자녀로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항상 아버지가 무엇을 원하시는지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매순간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기 위해서 늘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그대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먼저 보여주시는 분은 아버지이시고 아들은 그것을 보고 그대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려면 아들은 늘 아버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아들이 늘 아버지를 바라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내용은 복음이다. 따라서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담겨져 있는 복음을 본다는 것이요, 복음에 나타나 있는 내용에 따라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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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누가 이토록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가?>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선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어제 복음에서 안식일에 38년 동안 앓던 병자를 치유하여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 금지규정을 어기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유다인들이 유일신으로 섬기는 하느님 야훼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아버지이시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내리신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므로 아들인 예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도 자동적으로 안식일 율법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근거를 아버지와의 철저한 일치성에 두고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고, 일치성으로 하느님과 같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변호와 자세한 설명이 가르침으로 이어진다.(5,19-47) 우리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보도하는 방식을 통하여 지상 예수에서 메시아 그리스도로 향하는 신학(상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는 반면, 요한복음은 전승된 사료들을 심층적으로 분석, 명상, 해석하여 하느님의 아들에서 예수로 향하는 신학(하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상향 그리스도론이나 하향그리스도론이나 출발점만 다른 것이고 실상은 같은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은 예수가 육화(肉化)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이미 세상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선재(先在) 그리스도론을 펴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둘도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신학은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구원경륜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등 다양한 분야의 신비를 조명하게 된다.
물론 더 중요한 자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세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신 그만큼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복음사가는 그만큼을 성령의 감도에 의하여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과 같다는 발언은 유대인들에게 천지개벽할 일이었고, 이는 곧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예수를 신앙하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언명이지만 '하느님은 오직 야훼 한 분뿐이다'는 철저한 유일신관을 가진 유다인들에게는 용납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외적 원인이 율법을 어긴 범법자로서가 아니라, 신성모독이라는 독성죄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의 위탁에 의한 것이었다. 아들은 하느님 아버지 스스로의 말씀이며 계시(啓示)이다. 이 말씀은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음을 살려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은 '금(禁)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느님 말씀의 이 두 작용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말씀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순명(順命), 아니면 항명(抗命) 뿐이다.
하지만 '행(行)하라는 말씀'이 항상 먼저이고 그 다음이 '금(禁)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말씀과 계명을 통하여, 비록 그것이 내용상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온전한 우리 자신이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원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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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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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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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예수님의 권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고, 당신 자신은 하느님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권한은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나왔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것을 당신 자신도 하고 있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5,30)
우리도 같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할 따름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한없이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다.(육화) 그리고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광야에서 받으신 유혹을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너의 구원을 위해 땀을 흘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하늘에 올라 하느님 품으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먼저 걸어가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완전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분이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걸으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위한 완전한 계시가 되셨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이사49,8)
임마누엘이신 예수님!
우리와 가까이 계셔주시는 예수님!
우리에 앞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미리 걸어가신 예수님!
이런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닦아 놓으신 길을 잘 걸어갑시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복음환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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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해야 합니다>
요한 5,17-30 (아드님의 권한)
그때에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니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라시니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듯이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만을
나는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나는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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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현미경을 처음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 바로 위의 형님이 어디서 빌려왔다면서, 현미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현미경의 슬라이드글라스 사이에 나뭇잎, 물, 흙 등을 넣고는 현미경 렌즈로 보았습니다. 직접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눈으로 도저히 볼 수 없는 것들이 현미경 렌즈 안에 있었습니다.
내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미경으로 보면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 배율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의 이 기억을 떠올리며, 하느님이 비록 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의 현미경이 필요합니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믿음이 커지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의 현미경을 장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나의 눈으로 볼 수 없다며 안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마음의 현미경을 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했다는 점을 두고 유다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말씀을 “땅을 다시 일으키려고 내가 너를 백성을 위한 계약을 삼았다.”라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인해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지 않음으로 인해서 계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아버지와 하나의 본질이며 당신과 아버지께서 공통으로 지니신 본성에 어긋나는 행동은 할 수 없으므로 당신의 뜻과 아버지의 뜻은 하나임을 보여주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두 분의 본질이 하나임을 증명해 줍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중풍 병자의 치유보다 더 큰 일들을 당신 아들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더 큰 일’이란 하느님만이 지니신 권능, 곧 부활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되살리시는 분으로서 당신께서 아버지와 대등하심을 또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이 주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마음의 현미경 없이는 도저히 주님을 볼 수 없으며, 주님과 함께 할 수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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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상에 담긴 이야기}
미켈란젤로는 키가 작아서 4m가 넘는 다비드상을 조각할 때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당시 피렌체 행정부의 고위 관리가 미켈란젤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작품은 정말로 훌륭하지만, 코가 지나치게 높고 커서 전체 조각상과 조화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기분 좋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가의 고집을 부려서 화를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곧바로 날카로운 정을 다비드의 코에 대고 망치질을 했습니다. 망치질과 함께 대리석 가루들이 바닥으로 떨어졌지요. 이 관리는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말을 따르는 미켈란젤로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의 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손안에 미리 쥐고 있던 대리석 가루를 조금씩 떨어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의 만족을 가져올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런 지혜가 없는 것 같지만, 한 번 더 생각하고 상대방 처지에서 바라본다면 지혜로운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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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마음 둘 자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마더 데레사)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길 기도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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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수술 :
못난 얼굴 수술 하는 것보단 못난 마음 수술하는 것이 더 낫다.
못난 얼굴 수술하면 얼굴만 예뻐지지만 못난 마음 수술하면
얼굴은 따라 예뻐지기 때문이다. -이규경-
이 사순절에 마음을 수술하여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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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예수님 닮아가기)의 여정>
-주님과 사랑의 일치-
바햐흐로 피어나기 시작한 영춘화, 산수유, 민들레, 매실, 수선화 봄꽃들입니다. 겨울을 지내고 봄을 맞이한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참 청초하고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영혼들도 나이에 관계없이 파스카의 봄꽃들처럼 청초한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탐욕이라 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수도자라면 꼭 지녀야 할 좋은 탐욕도 있습니다. 열정이라 하여 다 나쁜 것이 아니라 수도자라면 꼭 지녀야 할 좋은 열정도 있습니다. 바로 이 좋은 탐욕이, 열정이 성소의 잣대입니다. 끊임없이 샘솟는 좋은 탐욕, 좋은 열정입니다.
바로 이 좋은 탐욕을. 열정을 일컬어 불가의 용어로 청정욕淸淨慾, 맑고 깨끗한 눈밝은 욕망이라 합니다. 무엇이 이에 속합니까?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싶은 욕망, 진리와 배움에 대한 욕망, 기도 잘하고 싶은 욕망, 성인이 되고 싶은 욕망, 거룩한 수도자가 되고 싶은 욕망, 수행생활에 대한 사랑의 욕망, 진선미眞善美의 사람이,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 최소한의 소유로 만족하며 행복하고 싶은 욕망. 좋은 친구나 좋은 책을 지니고 싶은 욕망등 끝이 없습니다.
이런 청정욕을 지닐 때 세상의 헛된, 눈먼 탐욕에서 초연하여 자유로워집니다. 세속에 살아도 탈속脫俗의 고결한 인품의 사람이 됩니다. 참으로 좋은 탐욕의 청정욕의 사람들은 알고보면 참으로 대단한 탐욕의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모든 진선미의 원천인, 신망애의 원천인 하느님만을 차지하겠다는 대단한 탐욕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아닌 무엇으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진리의 연인, 청정욕의 사람들이요, 다음 민들레꽃 시가 상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이런 청정욕의 사람들의 원조가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이며 성서와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했던 주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분들입니다. 누구보다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의 사랑을 살았던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이기에 마음 깊이에는 하느님과 일치의 사랑을 살고 싶은 근원적 욕망이 있습니다. 인간 영혼은 하느님을 포괄할만큼 위대하다(homo capax dei)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입니다. 시편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어떻게 하느님과 일치의 사랑을 누릴 수 있겠는지요? 바로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면서 예수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저절로 하느님과 사랑의 일치도 깊어집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나중에 예수님 앞에 갔을 때도 천국입장 심사는 영혼의 얼굴 검사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닮았나 안닮았나가 천국입장의 판단 잣대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예수님을 사랑했는지 영혼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늘 주님 사랑을 새로이 하며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2018년 10월26일 형제들의 권유로 써서 참 많이 나눴던 기도문이 있습니다. 기도문 제목의 변경도 이채롭습니다. 처음에는 감사기도, 다음에는 행복기도, 마지막에는 예닮기도로 바꿨습니다. 들어보셨겠지만 다시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이제 당신을 닮아
온유와 겸손, 인내의 사람이 되는 것이 제 소망이오니
간절히 청하는 제 기도를 들어주소서
당신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오늘 복음은 온통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된 예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의 고백입니다. 아버지를 그대로 보고 배운 예수님의 고백의 증언입니다. 그 일부만 인용합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바로 지금이 그때다. 아버지께서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버지 하느님과 깊은 결속의 사랑의 일치관계에 있는 지, 구구절절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할 때 그대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닮는 우리 영혼의 얼굴이요 우리 필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입을 빌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사야 예언자 역시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일치의 사랑의 관계인지 깨닫습니다.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 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신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사야 예언자의 하느님 체험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그대로 보여주신 우리의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닮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어 당신과 일치의 사랑을 날로 깊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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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부전자전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해 주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 5,19)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친밀하게 부르시는 것이 영 못마땅합니다. 안식일을 어기는 죄인이 자칭 하느님의 아들로, 하느님을 서슴없이 아버지라 부르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예수님께서 누차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러나 마음을 열고 듣지 않는 한, 그분의 죄목은 점점 더 가중될 뿐이지요.
예수님의 존재, 말씀, 행위는 하느님 아버지를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 사람이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느님을 아드님께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신 하느님이 육화하신 사랑이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이는 아버지를 압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가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 감지해 가며 아버지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커집니다. 결국 아드님을 믿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 그 사랑을 누립니다. 그에게는더 이상 심판이 필요 없습니다. 이미 그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까닭입니다.
제1독서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고 또 그대로 행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인간 세계에서 최고의 사랑을 설명하는 표상으로 흔히 어머니의 사랑을 들지요. 그런데 주님의 사랑은 인간이 말하는 이 극치의 사랑조차 넘어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깊고 진하며 무한히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잊지 않으시는 사랑! 아버지의 그 사랑을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성하십니다. 그분은 극한의 죽음이 닥치는 순간까지 우리 이름을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가 받을 심판을 죽음으로 무마하셨으니 당신이 속량하신 모든 존재의 이름은 예수님의 심장에 새겨졌고 어깨 위에 지워졌습니다!
"은총의 때이옵니다."(입당송)
사순 시기가 깊어갈수록 말씀은 징벌과 심판의 위협보다 주님의 지극한 사랑과 어지신 자비를 일깨워 줍니다. 사랑을 깨달은 영혼이 죄를 끊어내고 더 깊은 사랑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지금이 은총의 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는 그 사랑 때문에 다시 주님께로 마음을 돌려 되돌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믿고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이는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이미 지고의 사랑을 누리며 사랑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런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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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드러내놓고 그 앞에서 울부짖는 것은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존재의 목적에 패배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고통은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성질들을 통합하는 몫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고통에 대한 강력한 흡입력으로 말미암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끊임없이 망각하거나 거절하는 하나의 대상물이 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가치」: 제물의 내적 기쁨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코린1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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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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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HGnjwJFx1w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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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 25)
생명의 순간은
바로 지금이다.
마음과
마음 사이에
생명이 있다.
생명은
변화이며
신뢰이다.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께
맡기는 신뢰가
우리들의 참된
변화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자녀들에게는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이 이미
흐르고 있다.
신뢰는
신뢰로
이어진다.
지금이
바로
신뢰할
때이다.
사순시기는
참된 자아를
만나는 때이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신뢰할 마음이
없다.
도움을 주고
사랑할 순간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다.
사랑의 순간을
놓치고 사는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들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강하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살아있는
지금의
선택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신다.
살아나는
생명은
하느님의
뜻이다.
삶의 여정이란
하느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생명의
여정이다.
생명은
처음이신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그 여정이다.
영원하신
사랑
영원한 생명을
진실로 진실로
믿는다.
하느님의
구원을
믿어야 할
지금이 바로
그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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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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