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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8회) <낙랑은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낙랑은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1.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권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거시적으로 바라보면, 북방의 유목세력과 남방의 농경세력 그리고 동방의 해양세력 등 3대 세력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펼치는 장엄한 드라마였다. 이들 3대 세력들은 서로 이질적인 환경에 적응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끊임없는 문화적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 문화적 충돌은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움직이는 거대한 원동력이었다.(아래의『상고시대 아시아 대륙의 3대 세력권 지도』 참조) 그러므로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3대 세력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바탕위에서 해양세력의 중심이었던 고구려의 역사도 비로소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북방 유목세력의 대표주자는 흉노족이다.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경계로 삼고, 서쪽으로는 멀리 유럽에 이르는 광활한 초원지대를 주무대로 활동했다. 오늘날의 몽고와 내몽골자치주, 청해성, 신장지구, 티벳자치구에 이르는 광할한 지역이다. 이들은 일정한 거처가 없고,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수렵과 목축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로 인하여 자유분방하고 개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삶은 기후와 자연환경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하늘을 중시하는 천존사상天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들은 때로는 구름처럼 모이고, 때로는 새떼처럼 흩어지며 드넓은 초원지대를 지배하였다.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는 한漢족이다. 만리장성 이남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지역이 주 활동무대였다. 오늘날의 산서성, 섬서성, 하남성, 호북성, 사천성 등의 지역이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함으로써 안정적이고 폐쇄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의 삶은 땅에 깊숙이 뿌리박고 있었으므로 땅을 중시하는 지존사상地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며, 주변은 오랑캐라는 배타적인 중화제일주의 문화를 잉태하였다.
동방 해양세력의 대표주자는 한민족이다.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지역 및 일본열도 등을 주무대로 한 동이족의 영역이다. 이들은 정착생활을 함과 동시에 드넓은 바다를 무대로 어로와 무역활동을 영위하였다. 그리하여 유목세력과 농경세력의 중간적인, 안정적이면서도 개방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주 무대로 광범위한 무역활동을 영위함으로써 사람을 중시하는 인존사상人尊思想이 문화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대이상을 구현하였다.
2. 아시아 3대 세력의 중심지 고찰
이제 이들 3대 세력의 중심지를 살펴보자.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는 이들 3대 세력의 중심지를 배경으로 전개되었다.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족과 남방 농경세력인 한漢족의 중심지는 중국의 각종 역사서에 잘 나타나 있다.
남방 농경세력의 대표주자인 한漢족의 중심지는 낙양과 장안이다. 낙양과 장안은 험준한 진령산맥이 배후를 보호하고 황하와 위하渭河 등이 앞을 보호하며, 수로를 통하여 각지의 물산들이 드나들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다. 한漢족의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므로 더 이상 언급을 요하지 않는다.
북방 유목세력은 물과 풀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생활하였으므로 특별히 도시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흉노족은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하였는데 천자와 같은 뜻이다. 선우가 거주하는 곳을 선우정單于庭이라 하였으며, 이곳이 흉노의 중심지이다. 내몽골자치주의 음산산맥 부근이 흉노의 선우정이 있던 곳이다. 흉노는 한漢족들과 전쟁에서 밀리면 고비사막을 넘어 현재 몽고의 수도인 울란바트 부근으로 선우정을 옮겼다. 그러므로 흉노의 대표적인 중심지는 내몽골자치주에 위치한 음산산맥과 현 몽고의 수도인 울란바트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동방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낙랑은 그 위치가 오리무중이다. 낙랑의 위치가 어디이며 왜 그곳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해양세력의 중심지인 낙랑의 위치는 한민족의 상고사 뿐 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꼭 알아둘 필요가 있다.
(1) 해양세력의 중심지 낙랑
동방 해양세력인 동이족의 중심지는 낙랑이었다. 낙랑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이다. 만성현滿城縣은 이름 그대로 조선왕 만滿의 도읍지를 가리키며, 이곳이 고조선의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다. 필자는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에서 이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다. 여기서는 이곳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지정학적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발해만은 특수한 해류의 흐름이 존재한다(아래의 『발해만의 해류 지도』 참조). 태평양 한가운데서 발생한 쿠로시오 해류의 한 갈래가 황해와 발해의 가운데를 타고 북상하면서 낙랑지역으로 흐른 후 발해만의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특수한 흐름을 갖는다. 그러므로 한반도와 중국 동해안 어느 곳이든 배를 타고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서면 북상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낙랑지역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낙랑지역에 도달한 배는 양쪽 해변을 따라 남하하는 해류를 타고 자동적으로 원하는 지역으로 갈 수 있다.
이처럼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가 낙랑지역과 한반도 및 일본과 중국 동해안 곳곳을 연결하는 바다의 고속도로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래 『발해만의 해류 지도』에서 붉은색 화살표가 북상하는 해류를 나타내며, 푸른색 화살표는 남하하는 해류를 나타낸다. 발해만 중심을 북상하는 강력한 해류가 낙랑지역으로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다에서의 항해가 해류와 바람에 의존하였던 고대에서 이러한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는 낙랑지역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상고시대 아시아대륙의 모든 바닷길은 낙랑으로 통하였다.
발해만의 해류 지도
둘째, 낙랑지역은 백석산(갈석산)과 발해 그리고 세 겹의 강물이 보호하는 천연의 요새였다. 낙랑지역의 서쪽에는 태행산맥의 끝자락인 험준한 백석산(갈석산)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으며, 동쪽에는 드넓은 발해가 펼쳐져 있고, 남북으로는 세 겹의 강물이 낙랑지역을 보호하고 있었다. 낙랑의 바깥지역을 영정하와 호타하가 감싸고, 그 안쪽으로 거마하와 사하, 마지막으로 역수와 당하가 낙랑의 중심지인 왕검성(만성현 일대)을 감싸고 흐르는 철옹성과 같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낙랑지역은 발해를 건너 수군으로만 공략이 가능한 지리적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 전한 한무제의 수군을 이용한 왕검성 공격(BC 108년), 고구려의 낙랑회복(AD 37년), 후한 광무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점령(AD 44년), 삼국시절 위 명제의 바다를 통한 낙랑점령(AD 238년),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회복(AD 313년) 등이 모두 발해를 통한 수군 공격으로 이루어졌다.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셋째 낙랑지역은 북방 유목세력의 중심지인 음산산맥과도 비교적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북방 유목세력과 동방 해양세력의 경계에는 대흥안령산맥의 끝자락인 험준한 대마군산大馬群山이 가로막고 있으며, 현 중국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거용관이라는 유명한 관문을 통해서만 왕래가 가능하였다. 그리하여 상곡에 위치한 거용관을 통하여 유목세력과 해양세력 간 교역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를 통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북방 유목세력인 흉노와 남방 농경세력인 한漢족 간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상곡에서 거용관을 거쳐 어양(오늘날의 북경지역)에 이르는 지역은 흉노족이 식량과 군수물자 등을 확보할 수 있는 생명선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마찬가지로 한漢족들은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흉노의 생명선과 같은 이 지역을 차단하기 위하여 이중으로 장성을 쌓는 등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낙랑(보정시 부근)에서 어양(북경시 부근), 양평(천진시 계현부근) 등에 이르는 지역은 아시아 상고사의 최대 요충지로 부각되었다.
넷째, 역사적으로 황하하류는 그 흐름이 여러 번 바뀌는데, 상고시대에는 황하가 낙랑쪽으로 흘러서 바다로 들어갔다. 황하는 농경세력의 중심지인 낙양과 장안으로 각종 물자를 배로 실어 나르는 생명선과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낙랑에서 황하의 뱃길을 통제하여 낙양과 장안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래 지도는 『중국역사지도집』 ‘전국시대 북연’의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고대에는 황하가 낙랑(현 보정시, 붉은색 동그라미 표시)쪽으로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붉은색 동그라미 속의 무수武遂라 표시된 곳이 낙랑군 수성현으로 갈석산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지금까지도 수성현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북송시대의 국방서인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이곳 수성현이 진秦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난 곳이라서 수성遂城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낙랑지역은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 및 방어에 유리한 천연의 요새라는 점, 그리고 북방 유목세력 및 남방 농경세력의 중심지와 원활하게 교통할 수 있는 지리적인 위치 등으로 인하여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2) 해양세력의 기타 중심지
해양세력의 중심지도 시대를 따라 변천하였다. 특히 황하 하류 흐름의 변화, 유목세력과 농경세력 및 해양세력 간의 역학관계, 시대를 따라 변하는 해수면의 높이, 발해만 지역의 지진 등 잦은 천재지변 등이 그 원인을 제공하였다. 고구려 시대의 요동인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은 대흥안령산맥과 태행산맥이 북쪽과 서쪽을 막아주고 동쪽과 남쪽으로는 발해만을 굽어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지역이다. 대도시가 건설될 조건을 모두 갖추었다. 특히 해양세력의 중심지를 결정짓는 강력한 요소는 해류의 흐름이다.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같이 발해만의 특수한 해류는 하북성 전 지역이 해양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해양세력의 중심지는 시대를 따라 낙랑(현 하북성 보정시), 요동성(현 하북성 계현), 평양성(현 하북성 창려현) 등으로 변천하였다.
3. 아시아대륙 3대 세력의 대립구조
아시아대륙의 상고사를 수놓은 결정적인 요인은 북방 유목세력과 남방 농경세력의 끊임없는 갈등구조였다. 그 갈등의 최전선이 만리장성이다. 북방 유목세력을 대표하는 흉노과 남방 농경세력을 대표하는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는 만리장성을 경계선으로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피로 물들였다.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흉노족과 한漢족의 전쟁은 창과 방패의 대결이었다. 막강한 기동력을 갖춘 흉노의 공격, 성곽 및 풍부한 물자를 동원한 한漢족의 수비가 핵심이다. 때로는 한漢족들이 흉노를 선제공격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이 최선의 수비이다’는 관점의 공격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흉노는 왜 끊임없이 한漢족을 공격하였을까? 그리고 그에 맞선 한漢족의 최선의 방어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아시아 대륙의 상고사를 푸는 열쇠이다. 그 해답은 만리장성이 가지고 있다.
만리장성은 농경세력인 한漢족의 팽창주의 정책의 산물이다. 만리장성 이남의 섬서성과 산서성 지역은 본래 흉노의 땅이었다. 기원전 300년 경 한漢족의 팽창으로 흉노는 만리장성 남쪽의 따뜻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상실하고 만리장성 북쪽으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사막과 초원과 추위 등의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열악한 환경은 흉노족을 강인하게 단련시켰다. 그리하여 강력해진 흉노는 끊임없이 만리장성을 넘어 한漢족을 공격하였다.
흉노에게 있어 만리장성이란 한漢족들이 자신들의 땅에 들어와서 ‘이곳은 내 땅이다’고 인위적인 담장을 두른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리장성을 지키려는 한漢족과 만리장성을 무력화 시키려는 흉노의 대결은 필연적이었다. 흉노족와 한漢족은 서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동방 해양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했다. 막상막하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흉노와 한漢족의 대결에서 해양세력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좌우되었다. 그리하여 만리장성을 경계로 유목세력인 흉노와 농경세력인 한漢족과 해양세력인 한민족의 생사를 건 장엄한 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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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대사란 무지 했갈리는 듯 합니다. 글쓰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자기의 주관적 개념으로 접근하니 이해하기도 어렵고요
낙랑이 평안도가 아닌 요동에 있다는 걸 인정하고 글을 읽다보니 이 글이 전부 와 닷지는 않지만 조금은 이해될듯 하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열정적으로 활동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한민족의 고대사가 많이 헷갈리는 것은 요동이라는 지명이 여러차례 지명이동되었고, 고구려 평양이 여러곳에 있는데 고구려는 각 평양으로 천도할 때마다 그곳이 왕검성이라는 설을 유포하였고, 한족의 역사가들은 고구려 평양성마다 한나라 낙랑군이이라는 기록을 남겨 한민족 상고사가 매우 혼란스럽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본래의 왕검성이자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곳이 바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이지요. 그곳에는 지금도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수성현은 진秦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므로
수성현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기록도 있습니다. 이렇듯 낙랑군 수성현의 지명이 남아있고, 그곳이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라고 분명한 기록이 있는곳은 이곳 밖에 없습니다. 또한 만성현滿城縣이라는 이름도 조선왕 만滿의 도성임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곳이 갈석산이라는 건가요?
“태강지리지에 말하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사기색은』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으며, 그 갈석산이 진나라 장성이 시작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갈석산의 위치를 알면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알게되는 것이지요. 그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의 해변가에 있었으며, 다행히도 현대 과학의 발달로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하류 해변가가 어디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의 백석산(또는 백석산의 한 봉우리인 낭아산)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인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에서 갈석산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참조바랍니다. 갈석산을 알아야 한민족 상고사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