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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제1독서 : 이사 55,10-11
제2독서 : 로마 8,18-23
복 음 : 마태 13,1-23
1 그날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나와 호숫가에 앉으셨다.
2 그러자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예수님께서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물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자,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4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다.
5 어떤 것들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6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7 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렸다.
8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9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10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11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12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13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15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16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18 그러니 너희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19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20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21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22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23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에 대림 특강을 위해 호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북반구에 살고 있었던 제가 적도 이남인 남반구에는 처음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차이가 있을까 싶어서 별 준비 없이 호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도착과 동시에 새롭고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한국과 전혀 다른 계절 체험이었습니다.
한국은 12월이라 추운 겨울인데, 호주는 너무 더운 한 여름이었습니다.
남반구와 북반구 날씨가 정반대라고는 들었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습니다.
막연하게 아는 경험과 실제로 경험해서는 아는 것은 분명히 달랐습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막연하게만 사랑의 주님, 평화의 주님, 일치의 주님이라고 말할 뿐,
이런 주님을 체험하는 곳에는 가려 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니 주님과 대화를 나눌 수 없고,
성경을 읽지 않으니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의 것만을 쫓으며 사니
일상 안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실제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창 시절 수학 문제 풀던 것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수업 중에 문제를 직접 풀어주십니다.
그러면 그 뒤에 이 문제가 시험에 나오면 저절로 풀게 될까요?
배운 문제를 자기가 직접 풀어봐야 시험 문제의 답을 맞힐 수 있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주님이지만 우리 역할에 따라 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말씀, 주님 뜻을 직접 실천해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냥 온갖 부정적인 마음으로 불평불만만 하면서 주님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이지요.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꾸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땅의 마음을 갖추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길에 뿌려지고, 돌밭에 뿌려지고, 가시덤불에 덜어진 마음과 같았습니다.
좋은 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냥 버려집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냥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직접 몸으로 따라야만 실제로 구원의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농부는 좋은 땅에 씨를 뿌리지, 나쁜 땅에 씨를 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나쁜 땅의 모습을 갖춘 우리의 마음에도
당신 말씀의 좋은 씨앗을 뿌려주십니다.
주님의 사랑을 직접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 때문에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번 이탈리아 성지순례를 갈 때였습니다. 성지순례 가이드께서 제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팬데믹 때입니다. 신부님이 매일 올려주는 복음 묵상 글이 제게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만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성지순례 온다는 것을 알고 밀라노 두오모 성당의 미사를 애써서 잡아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의 복음 묵상 때문에 위로를 받는 것에 대한 작은 보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저도 처음 만나는 분이지만 마치 오랜 친구처럼 반가웠습니다.
형제님 덕분에 밀라노 두오모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그 미사에 우간다에서 온 신부님이 함께 미사를 하고 싶다고 하여서 공동 집전하였습니다.
신부님은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고 우간다로 돌아가기 전에 밀라노에 잠시 들렸고,
마침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에 함께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매일 올린 복음 묵상 글이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3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 씨, 토양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씨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능력과 재능을 강조할 것 같습니다.
건강한 사람,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 말을 잘하는 사람, 외모가 준수한 사람,
장애가 있는 사람, 지적인 능력이 부족한 사람, 유전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토양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환경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사람, 화목한 가정에 태어난 사람, 부유한 집에 태어난 사람,
부모가 늘 다투는 집에 태어난 사람, 가풍이 있는 집에 태어난 사람,
태어나면서 고아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환경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뀌기도 합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씨는 싹이 나지 못할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좋은 환경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일부러 나쁜 토양에 씨를 뿌릴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결실을 맺기 어렵고,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말을 할 때는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쁜 마음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심하게 하면
그 약을 사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강론을 하는 사제는 본인이 하는 강론을 삶으로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자들은 사제의 강론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면 말은 그럴싸하지만 삶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허영을 나무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 확신이 있어야 할 것이고,
우리가 걸어가는 발자취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느껴져야 할 것입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들의 말과 행동입니다.
그것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가 좋은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에 흔들린다면,
시련과 고통 앞에 무릎을 꿇는다면 우리가 전한 말씀이 열매 맺기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기도하고, 확신에 차서 성실하게 살아간다면
비록 척박한 토양이라도 하느님께서는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순교의 시대에도 교회는 찬란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나 풍요로운 시대에도 교회는 활력을 잃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했고, 열매를 맺지 못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토양이 아닙니다. 그 토양을 만들어가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입니다.
내가 말씀으로 무장하면 복음의 씨앗은 꽃이 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형제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계시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는 땅이 가물고,
채소가 병이 들면 양수기를 가지고 물을 대기도 하고, 약을 치기도 하고,
우리들의 정성을 다 기울여 농작물을 키우고 많은 소출을 얻도록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금 우리 마음의 밭은 어떤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내 마음에 기도의 거름은 충분히 주고 있는지,
내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의 열매는 잘 자라고 있는지,
지금 내 마음에 하느님 은총의 비가 촉촉이 내리는지
아니면 욕심과 이기심의 비가 시기와 질투의 바람과 함께 내리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립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말씀으로 늘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이 시간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뿌린 씨가 어떤 것은 길에, 어떤 것은 돌밭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그리고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우리나라 농사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갈릴래아 농부들이 일상적으로 체험하던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밭을 갈고 두둑을 만든 다음 씨를 뿌리지만
팔레스티나에서는 씨를 먼저 뿌리고 밭을 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 이해를 갖고 보면 알아듣기가 쉬울 것입니다.
비유에서 나오는 씨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밭은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네 부류의 다른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 중에는 길바닥 같은 딱딱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대개는 배움이 많거나 자기의 가치관이 뚜렷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입니다.
신앙에 관해 얘기하려고 하면, ‘좋은 사람이나 믿으면 되지. 나에게는 얘기하지 마라’하는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아주 완고한 사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딱딱한 흙덩어리로는 도자기를 빚을 수 없습니다.
물렁하게 반죽을 해야만 도자기를 빚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도 그렇습니다. 딱딱한 생각을 가지고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부드러운 생각을 가져야만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은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혹 들어도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듣고 맙니다.
들을 귀가 있어야 합니다. 귀를 열어달라고 기도합시다.
창세기 2장16-17절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
“너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어도 된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는 따 먹으면 안 된다.
그 열매를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듣기는 했지만 진지함이 없이 건성으로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고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길에 떨어진 씨앗을‘새가 와서 먹어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13장 19절에는 길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누구입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야단을 맞은 적 있잖아요.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다면 언제 악한 사람이 되느냐? 그야말로 사탄이 되느냐?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길바닥 같은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의 사람은 돌밭과 같은 울퉁불퉁한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그 마음에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여 신앙이 오래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나 시련, 갈등이 있으면 성당을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이 왜 저 모양이야?’ 하며 상처를 받고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의지가 약해서 결심을 하고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했다가도 자신이 손해를 보거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죠.
신앙생활은 때로는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돼. 생색도 안 나는 일을! 궂은 일을 ….
서운한 소리 들으면 금방 성당 안 나와요, 내가 왜 저런 미운 사람을 바라봐야 하냐고…
신앙이 있는 사람은 그런 사람을 바꿔놓죠.
앙갚음을 하는데 얄미울 정도로 사랑으로 앙갚음을 해요.
‘미운 놈에게 떡 하나 더 준다.’고 더 잘해줘요. 먹고 떨어져라! 가 아닙니다.
세 번째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은 들은 말씀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재물이나 세상 것들에 대한 유혹 때문에
신앙의 정신대로 나누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일은 꼬박꼬박 지키고 자기의 건강이나 취미생활에는 충실하지만,
단체활동이나 봉사활동 할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아직 세상이 중심이 되어서 매사를 자기 위주로 계획하고 시행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맺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은 걱정이 많아요, 왜?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니까
쓸데없는 데 머리를 많이 써야 합니다.
가시덤불의 특징은 금방 자라나는 겁니다. 뽑아도 뽑아도 금방 큽니다.
그래서 정말 정신 차려야 합니다. 소유, 지배, 권력, 명예욕은 뽑아도 뽑아도 쑥쑥 자라요.
네 번째의 부류의 사람은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을 실천해서 선한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느 땅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 예,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좋은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상대로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영, 숨을 불어넣어 주셨는데
나쁜 땅이 어디 있어요, 다 좋은 땅인데 가꾸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씨앗을 주시는 겁니다. 열매를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의 수고와 땀이 필요합니다. 가꾸어야 하는 거죠.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협력이 어우러져서 수확하게 되는 겁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열매는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말씀을 듣고도 말씀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1독서 이사야서의 말씀대로입니다.
비와 눈이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게 하듯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이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반드시 뜻하는 바를 이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농부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여러 번 김을 매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면서 추수를 기대합니다.
열매를 거둘 때 한없는 기쁨과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인생이라는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심은 것을 거두게 됩니다.
많이 심고 잘 가꾸는 이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고 가꾸지 않는 사람은 적게 거두며
아무것도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게 되는 법입니다.
속담에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하였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내 마음의 밭을 제대로 가꾸지 않기 때문입니다.
능력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돌밭, 가시덤불의 상태에서 듣기 때문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은 부드럽고 우리의 마음은 단단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자주 듣게 되면, 마음이 열려 하느님을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교부 푀멘).
주님께서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13,9)고 하셨습니다.
귀 있는 사람이란
‘말의 의미를 깨닫는 사람, 이해하는 사람, 경청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가 귀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숙달된 자동차 정비사는 차의 소리만 들어도 어디에 고장이 있는가를 알아냅니다.
훌륭한 지휘자는 수많은 악기 소리 중에서도 잘못된 음을 금방 잡아냅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땀이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합니다.
우리의 귀는 어디에 훈련되어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영어, 수학, 과학에 관한 말은 잘 알아듣는데
하느님께 관한 말씀에는 문맹인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밝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에는 어두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듣지 않아도 될 것들은 얼마나 잘 듣고 또 많이 아는 줄 몰라요,
연예인 이름을 줄줄 외우고 그의 경력, 활동.. 등등. 언제 무엇을 했는지 까지…
스포츠, 신문, 잡지는 꿰차고 앉아 있으면서도 성경 말씀에는 아주 깡통인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배움이 많지 않은 분인데도
성경 말씀을 장, 절까지 외우고 그 뜻을 잘 알아듣는 분도 계십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정말 귀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느님 말씀을 듣고 또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니겠어요.
부제 서품식에서 복음서를 수여하는데 주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읽는 바를 믿으며, 믿는 바를 가르치고,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말씀의 씨앗을 우리 모두에게 주셨고
우리는 그 말씀을 듣고 믿고 가르치고 실행함으로써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러분이 귀 있는 사람이 되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큰 은혜가 주어져도 받아들이고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과 다음 주일 전례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 비유는 알아들으려 하는 자세, 삶 속에 실천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예수께서는 배에서 비유를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군중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는 모습은,
아마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보다는 그분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즉 제사보다는 잿밥에 있었기 때문에 그분에게서 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 같다.
이 비유의 말씀은 팔레스티나 상황에서 사실에 근거한 비유의 말씀이다.
그 지방의 환경이 그렇다. 조그만 땅덩어리, 돌투성이인 밭들,
농사를 짓기 위해 가시덤불을 헤치고 만든 좁은 길들의 모습이다.
이렇게 거친 땅이지만 모두 죽어버리지는 않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씨를 뿌렸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제자들의 믿음을 더해주시고자 하신 비유이다.
이는 그래서 믿음에 대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씨를 뿌리는 분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예수께서는 많은 씨앗이 실패하더라도 결실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당신 제자들에게 확신시키려 하신다. 그분의 사명은 씨뿌리기에 비교될 수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역사 속에 이미 시작되었고, 그 나라의 구원 힘은 힘차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내적인 자세이다.
복음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우선 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이 기쁘게 들은 복음의 내용을 생활 속에서 일치시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문제는 하느님의 말씀이 최대의 결실을 낼 수 있는 땅이 준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신다(18-23절).
길바닥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가시덤불과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에 이르기까지
말씀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 설명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각별한 정성으로 보호되지 않는다면 시들어 죽는다.
즉 하느님의 말씀은 피상적이고, 세상 이익에 대한 애착 등에 집착되어있을 때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는”(19절) 사람들과
“그 말씀을 듣고 깨닫는”(23절) 사람들로 구분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23절)의 열매를 맺는데,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들이다.
이 깨닫는다는 것은 지적으로나 신학적 통찰력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의미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올바로 깨닫는 것이다.
이제 그 말씀이 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그 밭에 있는 모든 돌과 잡초 가시덤불을 없애는 수고를 하여야 한다.
이 수고가 없으면 수확은 실패할 것이다.
수확이 실패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그 말씀을 바로 받아들여야 할 땅, 즉 우리 각자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 능력을 찬양하고 있다.
비와 눈의 의미는 그 말씀의 풍부한 생산력과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힘을 말한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본질적으로 지닌 변화와 쇄신의 능력이다.
하느님 말씀의 능력은 그분이 원하시는 바를 인간들의 차원을 넘어서
또는 그 반대의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또 우리의 마음에 맡겨진 생명의 씨앗이 결실을 보지 못할 수 있으므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 마음의 밭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모든 만물이 생겨나온(창세 1장)
태초의 그 말씀의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도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장차 우리에게 계시 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선물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18.22-23).
하느님의 말씀은 모든 세대에 걸쳐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다.
그들에게서 그 말씀이 결실을 거둘 수 있으려면
먼저 신앙을 가진 우리들의 삶을 통한 결실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신앙을 가진 나에게서 결실을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그 결실을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 말씀의 씨앗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마음의 밭에 있는 자갈이나,
잡초, 가시덤불 같은 장애가 되는 것들을 모두 없앨 수 있는 ‘수고’가 기꺼이 따라야 한다.
그 수고가 없이는 결실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뿌리내리는 데 방해가 되는 세상과 세상의 이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은 좋은 토양으로 준비된 우리 마음과 우리의 삶 속에서
큰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맺은 열매가 백배가 된 것도 있고
육십 배가 된 것도 있고 삼십 배가 된 것도 있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 (마태 13,8-9)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말씀이 있는 존재 이유’, 곧 ‘말씀이 왜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루기 위해서 있습니다.
곧 실현(성취)되기 위해서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으로는 열매 맺기 위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리는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1)
제2독서에서는 이러한 ‘말씀의 실현’을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피조물만이 아니라, 성령을 첫 열매로 받은 우리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우리의 몸이 속량 되기를 기다리며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로마 8,23)
복음에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결론처럼 마지막 구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었는데,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가 되었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3,8-9)
'분명 나에게도 말씀의 씨앗이 뿌려졌을 터인데, 지금 나에는 몇 배의 열매가 맺혀 있는가?'
'사실 내가 몇 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
질문해보게 됩니다.
이는 나는 어떤 땅인가라는 질문이라기보다 어느 땅을 얼마나 일구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씨앗이 떨어질 때 좋은 땅이었는가 보다도,
씨앗이 뿌려지면 그 땅은 그 씨앗으로 말미암아 좋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은 씨앗과 함께 일구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땅의 사람은 땅을 지배하지 않고,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밭에서 일할 줄 알며 하늘을 쳐다보고, 함께 땅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땅을 윽박지르지 않고, 갈라놓거나 파헤치지 않으며, 땅을 매만지며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로 씨앗을 품은 농심입니다.
곧 뿌려진 씨와 함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소명을 짊어진 사람일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 안에 그분의 사랑, 그 씨앗이 뿌려졌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에게도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마태 13,10) 여쭈었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3,11)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먼저 “하늘나라”가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늘나라”는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열어 보여주시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이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허락되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은혜를 베풀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않은 까닭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13,12)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똑같이 하늘나라를 가르쳐 주셨고, 똑같이 기적을 보여주셨지만,
그들이 하늘나라의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차별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는 자는 더 받아들여 넉넉하게 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겨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분명 그들에게 먼저 보여주고 들려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초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둠이 초래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마태 13,15;이사 6,10)
사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셨지만,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그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인간의 논리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였을 것입니다.
이 문장을 주의 깊게 보면, 주어가 “그들”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게 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가 자신들의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를 요한복음 사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5)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들으면서, 이처럼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지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받아들인 제자들에게는 행복이 선언됩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6)
<오늘의 말·샘 기도>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좋은 땅일수록 뿌린 씨앗만이 아니라 뿌리지 않은 잡초도 잘 자라기에
시련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열매를 맺는데 당연히 있기 마련인 죽음의 길에서 도망치지 않고,
어떤 처지에서도 방관자로 살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기꺼이 죽어 열매를 맺는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아멘.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우리는 때로 ‘팔자타령’을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평생 직장이라고 믿고 또 자부심을 가졌던 회사에서 그만두게 된 형제님을 만났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작은아들이 교통사고가 났는데 다행이도 생명은 건졌지만,
전신에 상처를 입고 겨우 숨만 쉬는 정도였습니다.
그 형제님은 한숨을 쉬면서
‘제 팔자가 그런가 봅니다. 요즈음 계속해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네요.’
이런 경우를 우리는 흔히 운명, 또는 숙명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한편 생각하면 오즉 실망하면 그런 소리가 나오겠느냐?고 동정 어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불행에 부닥치다 보면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신세타령, 아니면 운명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예정론, 운명론으로 흘러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좋은 땅으로 결정된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의 차이는 있지만
그의 이론은,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한 면에서는 맞는 것이다.
그런데 극단적인 예정론은 하느님께서 미리 구원으로 이끌지 않는 사람은
어떤 믿음의 행동을 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이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온건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구원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지만
인간의 정성과 협조가 함께 할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느님께 구원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그 구원에 다가갈 수 있지요.
물론 구원의 결정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복음에로 우리가 나아가야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때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에 또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우리는 복음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좀 더 귀를 기우립시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시대에 농사법은 농부가 씨를 뿌린 다음 땅을 갈아엎었습니다.
팔레스틴 땅은 대부분 사막이고 농작을 할 수 있는 땅이라고 해도 돌들과 덤불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농부가 씨를 뿌릴 때 어떤 것은 사람이 다녀서 다져진 길에, 돌밭에, 가시덤불에,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길, 돌밭,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결국 그 씨는 죽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하시려는 결론은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속 설명해 주십니다.(마태 13,18-23절)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길바닥은 믿음이 약한 사람,
돌밭은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신앙의 어려움이 일어나면 없어지는 사람,
가시덤불은 세상 걱정, 재물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을 말하고
좋은 땅은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로 설명하시는데 사실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사 6,6-10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아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마음이 굳을 대로 굳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지요.
주님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며 세상에 사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성실한 삶이 함께하면 분명 우리는 좋은 땅이고
그 열매는 삼십, 육십, 백배가 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자세히 보면 주님께서 비유의 말씀을
제자들이 질문하고 다시 주님께서 설명하시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만 이 비유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씀과 더불어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 지지만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받은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주님께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비유 말씀은 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이해하기 쉽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떤 마음의 자세로 사느냐에 따라 이 비유 말씀도 못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구원을 전적으로 인간의 노력과 실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극단적인 구원관도 문제이지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해 보아도 소용없다는 극단적인 예정론도 또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졌습니다.
다만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 초대에 응답하며 성실하게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초대하시고 인간은 하느님의 초대에 협력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래전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제들과 이런저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뙤약볕에 일하다 보니, 지나가던 동네 노인들이 수시로 멈춰서시고는
‘그렇게 하는 거 아니여.’ 라며 훈수를 뜨시는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때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풍성한 수확에 기뻐도 했지만,
투자한 모종이나 줄기값도 못 건진 때는 속도 많이 상했습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시선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우리 한명 한명을 눈여겨보신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끽하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라고 이 세상에 보내셨는데,
평생 울적하게 살면서, 아무런 결실도 거두지 못했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얼마나 슬퍼하실까? 걱정입니다.
팔레스티나 지방 농부는 씨앗 자루를 손에 들고
작년 추수 이후로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들판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립니다. 다음에 쟁기질을 합니다.
씨앗의 운명은 쟁기질이 끝난 후에 결정됩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앗에서는 아무런 수확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굶주린 새들이 즉시 날아와서 쪼아 먹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돌밭에 떨어진 씨앗 역시 해가 떠오르면서 오래 가지 않아 메말라 죽어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앗은 가시덤불이 훨씬 더 빨리 자라면서
연약한 싹을 질식시켜 버리기에 성장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은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라는 놀라운 수확을 거두게 됩니다.
씨앗 한 알을 유심히 살펴보면 참으로 보잘 것 없습니다.
우선 작습니다. 기대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씨앗 안에는 엄청난 생명력과 폭발적인 에너지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한 인간 존재는 수많은 가능성과 폭발적인 에너지를 소유한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작은 씨앗 하나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결코, 원치 않으십니다.
원형 그대로 남아있기보다는 발아되기를, 풍요로운 결실을 맺기 위해
스스로를 내려놓기를, 썩어 없어지기를, 그래서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되고 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안 콘실리아 수녀
오늘 좋은 땅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참으로 알아 듣기 쉽게
그 당시의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하셨다.
우리가 가진 자기애와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질식할 때가 종종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다양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자라지 못하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
길에 떨어진 씨앗, 흙이 많지 않은 돌밭, 가시덤불,
그리고 .. 좋은 땅이다.
좋은 땅 말고 다른 땅에 떨어진 씨앗들도 말씀은 듣는다. 하지만 깨닫지는 못한다.
말씀을 듣는 것을 넘어서 깨달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말씀을 듣고 깨닫지 않으면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고 복음에서는 말한다.
우리는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 말씀을 성찰할 시간.
깨달음을 얻을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어쩌면 하느님의 말씀은 다 날아갈 수도 있다.
주님! 좋은 땅이 되고 싶습니다.
돌을 골라내고 가시덤불을 거둬내고
내 마음의 밭이 좋은 땅이 되기를 청하고 또 원합니다.
정말 좋은 땅이 되고 싶습니다.
떨어진 씨를 정성스레 품어 안을 수 있는 땅의 그 넉넉함을 닮고 싶습니다.
그 땅과 같이 되어 진정으로 떨어진 씨를 품을 때
비로소 나는 씨뿌리는 이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선하고 예쁜 사랑의 열매를 맺어 나눌 수 있는
그런 좋은 땅이 되고 싶습니다.
[출처] 마태 13,1-23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