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 한강으로 인해 모처럼 서점들이 바쁜 모양입니다. 우리 세대와는 다른 시선으로 쓰였기에 <채식주의자>를 처음 읽어 본 늙은 독자들은 읽고 나서 다시 읽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독자들이 작가의 마음을 읽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 또래쯤 되는 마광수 교수는 외설적인 글을 썼다고 뭇매를 맞다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즐거운 사라> 책 한 권으로 교수직까지 박탈당했던 그를 지금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맞지 않아도 작가의 속내는 왜곡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또래쯤 되는 노벨문학상 작가 튀르키예의 오르한 파묵 Orhan Pamuk은 작가의 글쓰기는 ‘바늘로 우물 파기’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당나라 이태백을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이태백이 붓을 꺾고 유랑할 때 산중 오두막집에서 하룻밤을 머무는데 그곳 노인이 숫돌에 무언가를 열심히 갈고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도끼를 갈고 있었습니다. 무얼 하려느냐고 물으니 바늘을 만들기 위해 그런다는 겁니다. 이태백으로서는 황당하게 보였겠지요. 한참을 그 모습을 보던 이태백은 문득 큰 깨달음을 얻었답니다. 그리고는 바로 집으로 돌아와 다시 붓을 잡았고,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마부작침磨斧作針,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 천 년을 훌쩍 뛰어넘어서도 작가들이란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잠시 작가의 글을 읽는다고 글쓴이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읽을 수는 없겠지요. 명작들을 두고두고 읽는 이유일 겁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이 바늘로 우물 파기와 다름 아니라는 생각도 듭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두고두고 상대의 마음을 읽을 때 진정한 우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