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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제1독서 : 탈출 1,8-14.22
복 음 :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도둑놈은 도둑놈을 알아본다고 합니다.
운동선수도 상대방을 보고서 운동선수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봅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같은 계통에 살고 있으면 상대방을 알아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을 누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당연히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쉽게 판단합니다.
특히 옳고 그름에 대해 판단 내릴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 모습이 맞다고 단정을 짓기 전에 자신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게 살지도 않으면서 하는 판단은 절대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놈이 도둑놈을, 운동선수가 운동선수를,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보는 것처럼,
상대에 대한 알아차림은 그 모습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틀린 점을 발견했다면 내 안에 그 틀린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이 늘 필요합니다.
‘내 안에 그 모습이 있구나. 그래서 이렇게 판단하는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평화를, 친절을, 기쁨을….
그래야 다른 사람에게서 내가 가진 것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뜻이 아닌,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점을 통해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뜻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하신 첫마디가 ‘평화’일 정도로
평화를 강조하신 분이신데, 왜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평화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악에 순응해서 얻어지는 거짓 평화가 아닌, 참된 평화를 가져오시기 위해
칼을 들어 거짓 평화를 잘라 버리라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칼이란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세상의 모든 악을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세상의 관점을 가지고 편하고 쉬운 것,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울 수 있는 것만을 따르는 것이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의 모습으로 보이는 자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에 맞게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 중에 베네치아에 가는 일정이 있었습니다.
배를 타고 성 마르코 성당으로 가던 중에 스마트 폰의 화면이 멈추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는데 참 난감했습니다.
액정을 고치는데 1달 정도 시간이 걸리고,
그 과정에서 다른 스마트 폰을 빌려야 했습니다.
사진도 찍고, 문자도 확인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거라 생각하니
마음에는 거센 풍랑이 불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도 해야 하는데 마음은 온통 스마트 폰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을 비우고 뉴욕에 가서 고치기로 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주위에 있는 분들이 사진도 찍어주었고, 미사도 잘 봉헌했습니다.
음악을 연주하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니 한국음악을 신청하면 연주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를 신청했습니다.
감미로운 한국 노래를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감사의 인사를 드리니 이번에는 ‘도라지와 아리랑’을 연주해 주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 광장에서
한국의 음악을 들었고, 박수를 쳐 주었습니다.
풍랑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희들 곁에 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을 털어버리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스마트폰을 충전기에 연결하니 전원이 들어오면서 화면이 켜졌습니다.
스마트 폰은 액정이 고장 난 것이 아니고 전원이 방전된 것이었습니다.
화면이 켜지면서 제 마음도 평온해졌습니다.
예전에 이순신 장군의 ‘명량’을 보았습니다.
주인공 최민식의 연기와 실감나는 해상 전투 장면도 기억에 남지만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지만, 일본군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의 전투에서 모두 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모함으로 감옥에 갇혔고,
겨우 풀려났지만 배는 고작 12척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는 ‘두려움’이 팽배했습니다.
일본에서 300척이 넘는 배가 다시 왔고,
이번에는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가득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부하들이 머물던 집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갈 곳이 없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말을 들은 부하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영화 말미에 아들이 이순신 장군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이순신 장군은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은 상대방에게도 있기 마련이다.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우리는 능히 이길 수 있다.”
명량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화약을 가득 실은 배에 남편이 있었고,
그 배는 이순신 장군이 있는 대장선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육지에 있던 아내는 그 배를 향해 포탄을 쏘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비록 남편은 죽을지라도 이순신 장군의 대장선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지에 있는 백성들은 모두 옷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고,
남편은 화약을 실은 배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두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는 히브리인들을 억압하고,
남자 아이들을 강물에 던져서 죽게 하였습니다.
파라오가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된 원인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두려움은 나와 상대방을 갈라놓고, 불신의 벽을 쌓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기준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의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신 기준은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부귀함도, 건강도, 생명도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의 강을 건너 영원한 삶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넘어서면 마음에 위로가 오고, 그것이 지속됩니다.
반면에 두려움은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식별력과 함께 정확히 이해해야 할 구절입니다.
착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단이나 사이비 교주들이 악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몇몇 이단에 빠진 자녀를 구해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부모님들을 참으로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들딸들은 사이비 교주에게 얼마나 세뇌되었는지, 더 이상 아버지를 아버지로 보지 않습니다.
가족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마태 10,35-36)라는 말씀은
절대로 아들이 아버지와 불목하고, 딸이 어머니와 소식을 끊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등을 돌리라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 모든 대상이나 가치 그 위에 하느님을 두라는 강조 말씀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하느님의 위치가 급격히 추락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듯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시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걱정됩니다.
세상 만물의 창조주께서 우리를 당신 모상대로 만드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하느님께서 우리를 너무나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 외아들조차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과분하게도 그분을 통해 우리를 부활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매일 아침 눈만 뜨면 백번 천번이고 감사드리며,
세상 모든 것 위에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흠숭해야 마땅하겠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분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분을 투명인간 취급하며, 그분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분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큰 배은망덕이며, 얼마나 하느님께서 슬퍼하실 일이겠습니까?
오늘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토록 우리가 애지중지하고 큰 가치를 부여하는 재물이나 부동산, 은행 잔고!
영원할 것 같지요?
어쩔 수 없이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들은 어느새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꼭 붙들 수 없는 것입니다.
그토록 우리가 사랑했던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만해도 그토록 든든한 보루였던 부모님, 형님, 존경했던 스승님, 은사님, 절친들,
정말이지 영원할 것 같았는데, 언제나 제 곁에서 든든히 저를 지켜줄 것 같았는데,
하나 둘씩 결국 다들 먼저 떠나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결국 다 떠나가고 사라집니다.
사랑도 지나가고, 청춘도 지나갑니다.
젊음도 사라지고, 생명도 저물어갑니다.
결국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영원불멸의 하느님, 그분만이 남습니다.
이토록 고마우신 하느님에게
가장 큰 사랑과 존경, 흠숭과 찬미를 드리라는 교훈의 말씀이
바로 오늘 복음의 요지입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스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대,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마태 5,9) 곧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 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 행복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2013.11.15)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마태 10,40)
주님!
아침처럼 어김없이 찾아온 당신을
지나가는 행인처럼 무심히 흘려보내지 않게 하소서.
반겨 맞아들여 상처받을 줄을 알고,
부둥켜안고 눈물 흘릴 줄을 알게 하소서.
넘어지고 쓰러지신 당신과 함께 아파할 줄을 알고,
더 이상은 당신을 피하지 않게 하소서
찔리고 못 박히신 당신과 함께 거부당할 줄을 알고,
조롱당해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억울해도 허물을 뒤집어쓸 줄을 알고,
수없이 거부당하면서도 용서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십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 신앙생활을 이어갈 때
우리에게 기쁨이 되어주고 희망이 되어줍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칼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혹시 그거 아시나요?
12사도들은 각기 다른 자신만의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는 열쇠가 상징이고, 사도 바오로는 커다란 칼과 책입니다.
특히 사도 바오로의 상징인 커다란 칼에 집중해보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그의 서간과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겨 주었습니다.
특히 어떤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지,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 마귀의 꼬임인지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무엇이 믿음의 길인지 알려주었습니다.
즉, 사도 바오로가 들고 있는 큰 칼의 의미는 하느님 쪽과 세상 쪽을 가르는 칼을 의미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칼의 의미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는 길인지,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겸손인지,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위선인지
우리에게 명확하게 그 둘을 갈라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어제도 그 갈림길에서 서성였고 오늘도 서성였습니다. 내일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렇게 선함과 사랑을 선택하는 것은 늘 고뇌와 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칼을 주심은 하느님 아버지를 따르는 길을 어떤 길인지 명확하게 보여 준다는 뜻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입니다.
적당한 긴장감은 좋은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목이 따갑고 조금 부어 있었습니다.
외출 채비하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두근두근
코로나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시간이 끝나갑니다.
누구누구님~
음성입니다.
살짝 긴장했던 제 마음을 그렇게 풀렸습니다.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겠습니다.
적당한 긴장은
우리를 활력 있게 합니다.
우리를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우리를 느슨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평화 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 10장, 파견설교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판견 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겠으나,
靑天霹靂 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風飛雹散 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팔단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9,8)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며느리,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 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