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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5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외식하며 남을 추켜세워 주는 듯하나 결국 상대를 걸려 넘어지게 하려는 악함이 숨겨져 있나이다.
나의 이 악함을 하감하옵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입술로는 주의 복음을 선포하나 나의 손은 그것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중적인 나를 보나이다.
주의 공의의 심판만이 나에게 합당하오니 주의 심판으로 나를 살리소서.
나의 악함을 주의 공의로 교정하셔서 새롭게 하소서.
주님만이 나를 새롭게 하실 수 있사오니 성령님이시여, 나를 외면하지 마시고 나를 장악하소서.
나의 부정함과 더러운 죄들을 셀 수 없사오니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옛 사람은 오늘도 주의 십자가에 못 박아 거룩한 불구자로 살기 원하오니 영적 하루살이로 하루를 살게 하소서.
주의 것 되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12:13-27.
제목 :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14.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5.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16.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17.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18.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19.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20.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21.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22.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23.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25.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6.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 나의 묵상
오늘 본문에 앞선 1-11절까지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패역함을 지적하는 포도원 농부들의 비유가 나온다.
그리고 이어지는 13-17절에는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들이 제기한 납세에 대한 논쟁이 나온다.
그보다 앞서서 11:27-33절에서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논쟁을 벌인 바 있는 유대 지도자들은 본문에서 또다시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시도를 한다.
이는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그들의 집요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 13절에 나오는 ‘그들’은 문맥상 포도원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듣고 난 후에 화가 나서 돌아간 산헤드린 회원들이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고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몇을 보냈다고 하였다.
여기서 ‘보내다’는 헬라어 원어로 ‘아포스텔로’가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그저 단순한 심부름을 보내는 의미의 ‘펨포’와는 달리 보내는 자와 보냄을 받는 자의 아주 깊은 관계성과 그 임무를 함축적으로 내포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아포스텔로’라는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선지자들을 보내거나 또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실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사도로 보내실 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그리고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그저 단순한 심부름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과 선지자, 예수님과 사도라는 아주 특별한 관계성 속에서 보내고 또한 보냄을 받은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 중에서 몇을 예수님께 보냈다는 것 역시 단순한 심부름 차원을 넘어서 그들에게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는데 그 목적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대적하고 넘어뜨리는데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참 생명을 위해서 보내시지만,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곧 대적자들은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그 구실을 찾기 위해서 보낸 것이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들은 납세 문제로 예수님을 시험한다.
그런데 이들은 갖은 아양을 떨면서 예수님께 접근한다.
그것을 모르실 리 없는 주님은 그들의 외식함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고 하신다.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으로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옳지 않은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명쾌한 답을 내려주신다.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하시면서 거기에 그려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신다.
사람들이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자, 주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이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을 듣고 나자 깜짝 놀랍게 여겼다.
한편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을 또 시험한다.
아들 7형제가 있는데 큰 아들이 결혼하였으나 아들이 없이 죽었다.
이럴 때는 대를 잇기 위하여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아 형의 상속자로 세워주는 법이 있다.
이것을 이름하여 계대결혼법이라 한다.
(신 25:5-6)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 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가지 말 것이요, 그이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 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
이같은 계대결혼법에 의해서 둘째도 형수를 취하였으나 그 역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고 셋째부터 막내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되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다면 도대체 부활 때 그들이 살아나면 이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을 꾸짖으면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신다.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있을 때는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가지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가지 않고 하늘에 천사들과 동일하다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에 대하여 출애굽기 3::1-6절의 말씀을 인용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 사두개인들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으로 긴박성을 더하여 말씀하신다.
(26-2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육신의 죽음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죽은 것이지, 하나님의 입장 곧 영원의 시간 안에서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다.
모세 당시에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은 분명히 육신적으로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당신 스스로 말씀하신다.
이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음을 확증하는 증거이다.
욥이 고난을 당한다.
어찌 보면 애매한 고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결코 애매한 고난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안에 벗겨지지 않는 자기 의의 때를 벗겨내시기 위하여 그 엄청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다.
그런 고난이 아니면 욥 안에 있는 자기 의라는 죄악의 때를 벗겨낼 수가 없음을 잘 아셨기 때문이다.
욥은 동방에서 의인이요 하나님을 잘 섬겼고 정직하며 부자였다.
그런 그가 하루 아침에 그 많은 재산을 다 날려버렸고 게다가 7남3녀의 10자녀를 다 잃고 말았다.
이 일이 있기 전, 욥은 자녀들의 생일이 되어 생일잔치를 끝내고 나면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혹여 자식들이 잔치를 하면서 범죄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염려로 인하여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는 욥의 신앙이 굉장히 돈독하고 깊어 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다 잃고 난 뒤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그에게 예배를 드린다.
(욥 1:20-21)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처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와 찬송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그 믿음에 박수치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욥의 이런 고백이 온전한 믿음에서 나온 고백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욥 3:25-26)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
그가 자녀들이 생일잔치 후에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이나 재산과 자녀들을 모두 잃고 난 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양을 드린 것은 그의 참된 신앙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자기 의로 인함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이 혹여 자녀들의 죄로 인하여 날아갈 것을 염려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던 것이며, 그런 고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한 것 역시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나타내 보이기 위한 외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로와 격려 그리고 회개를 촉구하는 말에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응한다.
욥은 철저하게 자기가 행위로 보였던 것을 자기의 믿음의 결과인 것처럼 변론한다.
물론 욥의 친구들이 와서 욥에게 하는 말은 철저하게 땅의 것에 속한 것들이었다.
욥 네가 하나님께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너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부어주실 것이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케 될 것이다.
뭐 이런 말들로 욥을 회유하고 회개를 촉구했으니 이런 말들이 욥의 마음을 움직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욥을 비롯하여 친구들의 공방전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개입하신다.
하나님은 욥의 자기 의를 벗겨내시고자 이렇게 말씀하신다.
(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결국 욥 안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그 의를 벗겨내시려고 작정하시고 천지창조와 관련한 이야기를 쭉 말씀하신다.
그가 아무리 똑똑하고 부자였다 할지라도 그 말씀 앞에서는 유구무언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욥 40:3-4)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그리고 욥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철저히 회개한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자신이 행위로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자신의 의가 되어 결국 자신이 하나님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죄만큼 큰 죄가 없다.
왜냐하면 자기 의란 내가 하나님 되려고 하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직접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욥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재와 티끌 가운데 앉아 철저히 회개하였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욥의 곤경을 돌아보시고 그에게 갑절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욥 42:12-13)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모든 가축은 갑절로 주셨는데, 자녀들은 처음과 똑같이 7남3녀 곧 10명만 주셨다는 것이다.
말씀대로라면 자녀도 20명을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는 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간 곧 영원의 시간 안에서는 앞서 육신적으로 죽은 10명의 자녀들 역시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10명의 자녀와 욥의 옆에 육신적으로 살아 있는 자녀 10명을 합하면 20명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시다.
나의 어머니가 어제 새벽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천국에 가셨다.
사람들은 이를 죽었다고 말한다.
물론 크로노스의 시간 안에서는 죽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먼저 보낸 자식의 입장에서 인간적으로는 슬픔이 있지만 영원의 시간 안에서는 여전히 살아계시기에 그 슬픔을 넉넉히 삼킬 수 있는 것이다.
오늘부터 조문이 시작된다.
모든 장례절차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임하기를 소망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식된 도리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죄송함이 가슴을 아프게 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 사람으로서 주를 믿고 주님의 품에서 안식을 누릴 어머니를 생각하면 또한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위로가 됩니다.
주님...
이것이 유대인들이 행했던 고르반이 되지 않게 하시고 어머니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깨달았던 것을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나눌 수 있는 종이 되게 하소서.
누가 나의 어머니입니까?
누가 나의 형제요 자녀들입니까?
육신의 가족관계를 넘어 새로운 가족관계의 개념을 정립하셨던 주님과 같이 내 육신의 가족에만 머무르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두가 형제요 자매인 것처럼 오직 내게 주신 영혼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여 주의 자녀 되게 하소서.
결코 실수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