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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1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제1독서 : 탈출 11,10─12,14
복 음 : 마태 12,1-8
1 그때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사이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4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그도 그의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지 않았느냐?
5 또 안식일에 사제들이 성전에서 안식일을 어겨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에서 읽어 본 적이 없느냐?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8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예전에 방송 프로를 통해 알게 된 책이 있습니다. 책 제목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개소리에 대하여’(해리 G.프랭크퍼트)
이 책에서 개소리를 영양가 없이 무작정 내뱉은 어른들의 말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개소리가 어떤 거짓말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말입니다.
“이게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자녀는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내가 이렇게 된 건 다 당신들 탓이라는 거 인정하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기 욕망을 솔직하면서도 품위 있게 말해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반대가 될 때가 참 많습니다. 자기 욕망을 꼭꼭 숨기려고만 합니다.
그럴싸한 말을 하고 있지만, 자기를 드러내려는 말뿐입니다.
결국 위와 같은 개소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개소리를 통해 자신이 얻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오히려 사람과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끊어지고 맙니다.
서로가 상처가 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겸손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맨 앞자리가 아닌 맨 끝자리를,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닌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개소리’보다 진정한 사랑이 담긴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말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가던 중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가지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에 걷는 행위도 금지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1km 이상을 걸으면 율법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밀밭 사이를 걸었다는 것을 고발하는 줄 알았지만,
밀 이삭을 뜯어 먹었다고 항의합니다. 율법을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밀 두 이삭 이상을 따면 추수가 되고, 손으로 이삭을 비볐다고 타작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자기들은 옳고 예수님은 틀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율법을 확대해석했던 것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바리사이들의 이 말들은 분명히 ‘개소리’가 됩니다.
자기를 드러내려는 ‘개소리’입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으로 사람을 잘 살게 하려는 것이지, 율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지금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
어떻게 이런 ‘개소리’를 남발할 수 있습니까?
우리도 ‘개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와 아픔을 주는 말이 아닌, 희망과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대립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성지순례가 끝났습니다.
4월에는 요르단 이스라엘, 5월에는 그리스 터키 그리고 6월에는 이탈리아엘 다녀왔습니다.
이탈리아 순례는 제가 3년 동안 주일 미사를 도와주는 부르클린 성당 공동체와 함께 했습니다.
이번 순례에는 함께한 순례자들 이름을 처음부터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종신부제품을 받은 리차드 부제와 아내 세라피나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 다니엘과 브라이언 그리고 엄마 프란체스카,
가브리엘과 라파엘 그리고 엄마 보나, 요한과 바오로 그리고 엄마 요세피나가 있습니다.
모녀가 온 프란체스카와 나오미가 있습니다.
부부가 함께 한 마르꼬와 수산나, 마태오와 수산나, 요셉과 벨라데따, 프란치스코와 안나,
요한과 아녜스, 유스티노와 비아가 있습니다.
혼자 오신 스텔라, 헬레나, 페트리시아, 세실리아, 레지나,
율리안나, 안나, 마리아, 카밀라가 있습니다.
LA에서 합류한 프란치스코와 프란체스카 부부가 있고, 코네티컷에서 합류한 마틸다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부른 경우가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라고 부르신 제자 12명이 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요한, 토마, 바로톨로메오,
시몬, 유다, 가리옷 유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필립보, 마태오”가 있습니다.
비록 가리옷 유다는 주님을 배반하였지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지상의 순례를 마쳤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보았던 자캐오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자개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하셨습니다.
자캐오는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자캐오에게 "이 집은 구원 받았다."고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던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라뽀니'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마리아는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베드로를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사랑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물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새겼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었고, 마귀를 쫓아내었고,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성지순례는 오래된 교회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높은 절벽에 있는 수도원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성물을 사고, 유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지순례는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었던 성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 또한 성인들을, 모범을 따라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성지순례의 횟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번을 갔어도 삶의 태도가 변하여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한 번도 가지 못했어도 이미 이 세상에서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오늘 예수님께 ‘안식일’에 대해서 토론을 합니다.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계명으로만 안식일을 바라보면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단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정신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의 정신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안식일에 세상의 것을 떠나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느님의 영광 안에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선을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사람을 살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맞습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이들이 영원한 안식도 누린다
전삼용 요셉 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에서 밀 이삭을 뜯어 먹다가
바리사이들에게 들켜 비난당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고 하시며,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라고도 하십니다.
왜 당신의 제자들이 명확하게 안식일을 어기고 도둑질까지 하였는데 죄가 없다고 하실까요?
또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심선미 씨는 무당이었다가 하느님을 만나 회개한 사람입니다.
몸이 갑자기 아프고 자신 안에 신들이 들어 있음을 알았을 때 신내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신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편해져야 할 텐데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신들은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았고 학대하였으며
그녀는 결국 죽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몰라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배를 탔을 때 벌어지는 일입니다.
반면 자수성가한 억만장자 글렌 스턴스는 100달러(약 12만 원)와 고물 트럭 한 대만 가지고
90일 안에 100만 달러(약 12억 원)의 부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챌린지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동네에서 막일부터 시작하고
그것으로 축제 때 풍선을 팔고 그것으로 중고 자동차를 수리해서 팔고
그다음은 집을 사서 수리해서 팔아 그 이익 1억 원 정도로
언더독이라는 바비큐 브랜드를 런칭합니다.
그 마을에 커다란 바비큐 행사가 있다는 것을 기회로 잡아 1등을 하여 상표 가치를 높였습니다.
안타깝게도 그의 가게 평가액은 75만 달러였습니다.
어쨌든 10만 원으로 석 달 만에 10억을 번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석 달 동안 월급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는 이들은 최선을 다하면서도 왠지 모를 확신에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을 고용한 글렌 스턴스라는 사람이 매우 친절하고 자신들을 존중해주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확신에 찬 그의 행보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의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습니다.
잡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심선미 씨 마음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글렌 스턴스는 자신을 따르는 10여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돈도 주지 못하고 고생만 시키지만 그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꼭 이 사업을 이뤄낼 수 있고 결국엔 그들을 행복하게 할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전이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안식 안에 머무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라는 배를 탔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어떻게 되나?’를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안식을 누립니다.
이것이 참 안식처를 찾는 방식입니다.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에 절대 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마르 3,4)라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사람을 살리는 일에 전념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기 때문에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창조사업에 뛰어든 이는 이미 자신을 그리스도께 봉헌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은 이미 그리스도의 안식 안에 있게 됩니다.
전쟁터에서 군인이 적군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이유는 그 책임이 나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못된 나라를 선택한 것은 본인 책임이 될 수 있겠지만,
그 나라 안에서는 그런 사람은 영웅이 됩니다.
우리도 하느님 창조사업에 뛰어든 이들은 이미 피 흘림, 곧 죽음을 향하고 있습니다(갈라 2,19-20 참조).
“그러니 그와 같은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게,
우리 모두 저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힘씁시다.”(히브 4,9-10)
우리가 참 안식으로 가고 있음은 믿음으로 느끼는 평화의 감정으로 잘 알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안식일이란 깊은 의미를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기보다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일주일에 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쉬면서,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
즉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쉬는 날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느님 안에 정신과 육체가 편안히 쉬는 날이다.
이 휴식은 그래서 인간의 건강을 위해서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나 살기 힘들다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대한
감사의 행위와 인간의 건강을 위하여 제정된 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고
오로지 돈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신의 건강까지도 잃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지금은 더구나 5일제를 시행하고 있다.
일주일에 40시간 근무를 의무로 하고 있고 휴식을 하게 하는 것은
생산을 위한 충전의 시간도 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하느님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은총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1절).
여기서 밀밭은 세상이며, 안식일은 휴식의 날이고,
밀 이삭은 미래의 믿는 이들의 수확 때 얻게 될 결과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에 들로 나가신 것은,
세상에 오시어 인류라는 밭에 뿌려진 밀을 보러 오신 것이다.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자,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선생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2절) 한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아히멜렉의 이야기로 해결하신다.
다윗과 그 일행이 허기로 지쳐서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을 부탁한다.
아히멜렉은 여자들을 멀리했는지 묻고는 사제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주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호세6,6)라는
말씀을 떠올린 아히멜렉은 그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즐겨 받으시는 희생 제물은 인간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재를 지킨다는 것은 재를 지킨 후 그것이 이웃 사랑으로 실현될 때, 그 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되지 못한다면 재를 지키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이 법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은 사람을 위해서 지켜져야 한다.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이러한 재를 지킬 때는
이러한 마음으로 재를 지키고 그것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결시키도록 해야 한다.
형식을 채우지 못한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위할 줄 알고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그래서 더욱 성숙한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일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이 일을 트집 잡은 것은
남의 밭의 이삭을 뜯어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했다고 해서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그렇다면 대체 하느님께서 안식일을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탈출기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는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 참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야훼께서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나와 너희 대대에 걸쳐 세워진 표이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는 안식일을 새운 이유와 안식일의 정신이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태 12,8)
이처럼 우주 만물의 주권이 그분께 있음을 알기에,
모든 것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 안에서 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쉬는 것인가?
곧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 말합니다.
“~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을 위하여 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하여 쉬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병행 본문인 마르코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그런 까닭에 오늘 복음에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자비로운 일, 그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성전에서는 희생 제물을 드리면서 정작 형제에게는 꼬투리를 잡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 자신이 사랑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12,7)
주님!
오늘만이라도 형제를 단죄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인 까닭입니다.
희생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바로 진정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이 흠 없는 제물, 사랑의 제물 되게 하소서.
아멘.
민동규 다니엘 신부
찬미 예수님!
“내가 원하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께서 지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희생 제물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에는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하느님이 베푸시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베풀길 바라는 것이 ‘자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느끼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바로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베풀고 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해주고 또 나눠주는 그 순간
우리는 하느님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렇게 우리를 통해서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비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느님이 내게 얼마나 큰 자비를 베푸셨는지 말입니다.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오늘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오늘을, 미안하다고 말 할 수 있는 오늘 하루를
자비로이 베푸셨음을 우리는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순간 알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 손길을 통해 나가는 하느님의 뜻이 모두 ‘하느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가 이렇게 하면 예수님이 얼굴을 찌푸리지는 않으실까?’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비이고 도구입니다.
자신 있게 자비를 베푸십시오.
내가 베푸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에 하느님께 나를 맡기십시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자비입니다.
미역국 VS 소고기뭇국
여러분은 둘 중 어떤 것을 더 좋아하시나요?
미역국? 소고기뭇국?
개인적으로 저는
소고기뭇국은 겨울에 많이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 뜨끈한 뭇국은 얼어있던 온몸을 녹이는데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소고기뭇국은 그 외에도 기력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소화를 돕는 무가 그 주재료기에 속에서 탈이 나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미역국 역시 제가 좋아하는 국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여성들은 해산한 후 미역국을 먹습니다.
해초류가 피를 맑게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일에 미역국은 생일상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우리 삶에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소울푸드 국물입니다.
둘 중에 하나를 오늘의 국으로 고르라면
저는 미역국을 먹겠습니다.
그 이유는 말입니다….^^
법을 先行하는 법제정 정신
박상대 마르코 신부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는 유대교의 핵심은 야훼 하느님께 대한 唯一神觀이다.
이는 유대인들이 다신론적인 근동 아시아 세계 안에서
오랜 시간과 노력을 거쳐 얻어낸 그들 신앙의 핵심이다.
신앙은 무릇 내용(contents)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행위(action)를 수반해야 하듯이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유대교 신앙의 내용은 그분이 내려주신 율법(토라, 모세오경)이며,
신앙의 행위는 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을 실제로 지킨다는 것이 곧 그들 신앙의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하느님과 동일시되는 율법을 준수하는 데 있어서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 안으로 율법의 관리와 해석을 담당하는 그룹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랍비(선생)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이 선생들이 관리하고 해석하면서 ‘시행세칙’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탈무드(Talmud)>이다.
탈무드는 유대교 율법의 시행세칙과도 같은 것으로서 율법의 해설, 口傳(미슈나),
전통적 관습, 축제, 민간 전승 등을 총 망라한 책으로서
유대인의 정신적, 문화적인 유산으로 평가된다.
탈무드는 약 1만 2천 권의 엄청난 규모로서 유대인들 지혜의 총집합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도 이 책은 계속 기록되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고생하며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고 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율법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 관하여 다시 한번 들려주신다.
마태오복음사가는 原典이 되는 마르코의 같은 대목(2,23-28)을 참조하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다.”(27절)는 말을 삭제하였다.
그 이유는 자칫 이 부분이 안식일 법을 폐기하려는 의도로 착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오는 이미 예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는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을 통하여 율법의 완성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 복음에서 마태오는
‘안식일’과 ‘제자들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를 놓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의 대립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1-2절)
율법은 ‘이웃집 밭에 서 있는 곡식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는 것은 괜찮지만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된다.’(신명 23,26)교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제자들의 행위는 범법행위가 아니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안식일법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의 행동(1사무 21,1-10)과 아론과 그의 아들들,
즉 사제들에 대한 안식일의 예외규정(레위 24,9)을 들어 그들의 생각을 흩어버리신다.(3-5절)
오늘 복음의 요점은 사람의 아들이 바로 法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8절)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예수님을 지칭한다.
그분은 메시아의 상징인 다윗이나 대사제인 아론보다 크신 분이시며,
유대교 신앙의 요랍인 예루살렘 聖殿보다 크신 분이시며, 율법의 주인이시다.
어떤 법이든 그 법이 제정되기까지의 정신이 있다.
이 말은 법을 제정하는 정신이 제정된 법을 先行한다는 말과 같다.
오늘 복음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나에게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 마태 9,13)는 구약의 인용이
바로 율법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祭祀는 곧 규정된 율법이요, 慈善은 이 율법을 제정한 정신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좋은 양심과 도덕이 법을 앞질러 간다는 말씀이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강 세레나 수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살다 보면,
라떼를 참 많이 들이키게 됩니다.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라떼(나 때에)는 말이야~’하고
불쑥 밀고 들어와 이러쿵 저러쿵
불필요한 조언들을 첨언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나게 되지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런 조언들은 대게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라 떼 (나 때)는 그러셨는데
지금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거나,
‘라 떼에 대한 이미지’가 지극히 개인적이고
과대포장 되어 있어
공감을 불러 일이키지 못할 때가 많아요.
그런 영양가 없는 조언들을 듣다 보면
오늘의 이 복음이 떠오릅니다.
“안식일의 밀이삭... 그래서, 뭣이 중헌디??”
무엇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율법의 정신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네가 평가받고 단죄받고 싶지 않은 것처럼
타인에게도 너의 과대망상에서 나오는 그런
자기중심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마라.”
“너는 오로지
모든 것을 알고, 판단하고, 주관하는 나,
주님만을 믿고 따라라.”
“네가 지금부터 이웃에게 할 일은 불필요한 첨언이 아니라
행동하는 사랑의 표현, ‘자비’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내 생명의 주인이시며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출처] 마태 12,1-8 연중 제15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