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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 18-22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이창동 감독의 ‘밀양’ 영화는 용서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신애가 결혼해서 ‘준’이란 아들 하나를 낳고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죽게 됩니다. 남편을 잃은 신애가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가게 되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밀양’이 암시하는 ‘은밀한 햇볕’이 길 위나 차안에 은밀하게 드려지는 것이 이 영화 전체를 이끌어 가는 플릇입니다. 밀양 가까이 내려갈 때 쯤 신애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나게 되고, 이 일로 카센터 사장인 종찬이와 신애가 조우하게 됩니다. 종찬이는 신애를 보자 연정을 느끼면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신애는 남편의 고향이라고는 하지만 처음 가게 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돈이 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투자할만한 곳을 알아봐달라고 종찬이에게 부탁합니다. 종찬이는 부동산 업자를 소개시켜 주게 되면서 신애가 돈이 많다는 소문이 나게 됩니다. 이 소문은 신애 아들 준이 다니는 학원 원장의 귀에 까지 들리게 되면서 원장이 신애의 돈을 노려 아들을 유괴하고 결국 죽이고야 맙니다.
아들을 믿고 맡겼던 원장이 범인이란 사실이 믿기지 않던 신애가 시간이 지나면서 아들이 죽었다는 생각에 정신분열까지 이르게 됩니다. 처음 밀양에 내려왔을 때 약국 아주머니로부터 전도 받았을 때에는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세상에 어떻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 있느냐’며 반박하던 신애였지만, 아들을 잃고 나서 교회에 다니기로 하고 심령치유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신애는 이 집회에서 통곡하게 되고 신애 안에 있는 울분과 한을 다 토해 내게 됩니다. 한을 토해내는 장면은 배우 전도연 연기가 돋보였던 명장면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이렇게 신애는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생활에 점차 적응해 가던 신애는 길거리 전도에 열중하기도 하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신애 옆에는 조금은 불량스럽지만 항상 신애 뒤에서 작고 큰 어려운 일을 도와주는 종찬이가 밀양이 되어 따뜻하게 품어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신애는 용서하라는 설교를 듣고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살인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몇몇 성도들과 함께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신애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과 대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괴범의 얼굴이 죄책감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평안해 있었습니다. 신애는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이제 예수를 믿게 되었고 당신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기로 했으며, 그 말을 하기 위해 왔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유괴범은 태평스런 얼굴로 “내가 이곳에 와서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얼마나 마음이 평안한지 모르겠다. 당신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니 너무 감사한 일이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 이어서 “내가 하나님께 모든 죄를 다 아뢰었더니 자신의 죄를 다 용서해 주었다.”고 말합니다. 유괴범의 이 말을 들은 신애는 도저히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 혼란에 빠진 채 땅에 그만 주저앉고 맙니다. ‘아니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은 무슨 권리로 저 사람을 용서한단 말인가? 내가 용서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인가?’ 라고 반문하면서 하나님에 대해 반항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하나씩 차례차례 어기면서 노골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용서하러 갔는데 범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으니 그것이 질투가 나고 화가 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혼란에 빠져 있는 신애에게 항상 종찬은 마지막 까지 곁에서 지켜봐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신애가 머리를 자르고 있을 때 종찬이가 거울을 비춰주면서 신애의 얼굴에 따뜻한 햇볕을 반사시켜 주는 것으로 결말을 내립니다.
이창동 감독은 작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이 영화를 제작했다고 합니다. 벌레이야기란 ‘자신이 용서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 먼저 용서해 버려서 더 이상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벌레라’는 요지의 스토리입니다.
밀양은 교회가 용서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고 있는 지를 돌아보게 한 영화였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도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용서받았다는 사죄 편의주의에 빠져 있지 않은지 깊이 생각하게 한 영화입니다. 동시에 용서하지 못한 신애의 잘못을 보기보다는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는데 결론적으로는 형제의 죄를 사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범죄한 형제가 있거든 그 사람과만 상대하라. 권고를 들으면 그 사람을 얻은 것이지만 듣지 않으면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도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과 세리로 여기라’ 이 말씀은 범죄한 형제를 구제하도록 애쓰라는 말입니다.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란 말도 용서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또 강구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범죄한 형제에 대해 끝까지 용서하고 받아들이도록 애쓰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형제의 죄를 용서하는 일은 땅에서 푸는 일인데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이렇게 되묻습니다. 21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줘야 합니까? 일곱 번 까지 하면 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취지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 6:14 절에서 하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여기서도 용서는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이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지만 용서는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어떻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집안을 망하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내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아간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는 십자가를 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용서하기가 얼마나 어려우셨는지 하나님께서도 쉬이 사죄 언도를 내리는 방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으로 용서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형이 얼마나 고통 스러운 것인지 알아야 십자가의 의미가 분명해 집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아홉가닥의 채찍으로 매를 맞으셨는데 가닥의 끝에는 쇠부치나 뼈조각으로 갈귀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채찍을 내리치면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100키로-120키로 이상 되는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형장 까지 지고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서 대못을 두 손과 발에 박히시고 메달려 있을 때 몸의 하중이 생기게 되면 대못에 박힌 손과 발은 찢어져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50cm가 넘는 가시로 된 관을 쓰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 머리에 피가 흘러내렸고, 로마 군병이 허리에 창을 찔러 물과 피를 따 쏟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육체의 고통, 정신적 고통, 영적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고통으로 우리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용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입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게 되면 받게 될 엄청난 고통 때문에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공생애 3년 동안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거기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될 것이란 수난고지를 세 번씩 하실 때마다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될 것이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제 성금요일 그 하루 간의 십자가 고통을 넘기시기만 하면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그렇게 십자가 지는 것을 피하시려는 기도를 간절하게 하셨을까? 이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서를 찾아 보자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굳이 십자가라는 고통스런 과정 없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생명의 역사는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기는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을 통해 확정하시려 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게 되기 때문에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견뎌 보기로 하셨지만, 만약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앞으로 십자가를 져야 할 때 그 고통 때문에 십자가를 피하거나 혹은 신앙 마저 저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그게 가장 고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을 까요? “하나님, 저는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따르는 자들이 이 고통스런 십자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떠나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꼭 이 방법만이 당신의 뜻입니까? 누군가 반드시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문제가 해결 됩니까? 희생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까?” 라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느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전에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져야할 십자가 중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해도 그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주님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고통스런 십자가를 져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란 말씀은 끝까지 용서해주란 말이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을’ ‘모든 경우에’ 용서하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통회 기도도 사죄 편의주의에 빠져서 쉽게 쉽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지는 고통 스런 기도여야 합니다.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이 여순반란 사건 때 빨치산 공비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두 아들을 잃은 손 목사님께서는 그 비극적인 일을 믿음으로 이겨내시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두 빨치산을 아들로 삼았다고 합니다. 손 목사님 마음의 아픔을 뒤로하고 이들을 용서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자신도 십자가를 지는 고통으로 용서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용서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고통이 아닌 미움과 증오라는 사망의 고통이 자리를 잡게 되면서 자신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게 됩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원한의 고리를 만들어 과거 원한에 사로잡혀서 원한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증오의 노예가 되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살면 현재도 미래도 없는 삶 과거 밖에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70-80년 대 시골장터에 간이 천막 영화가 상영될 때 주로 전쟁 영화거나 활극 영화가 대부분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돌아온 애꾸눈’ 활극이 있는데 내용은 복수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무림의 고수인데 원수의 손에 죽습니다.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아들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얘야 나를 죽인 원수를 복수해다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무림의 고수가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복수를 하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결국 아버지와 아들은 복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복수 외에는 다른 삶을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다 죽습니다. 땅에서 풀지 못하여 메인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룟유다를 그리게 되었을 때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모델로 삼고 그리고자 했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이 그림에 자신의 원수의 얼굴을 영원히 새겨 놓고 싶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려던 그의 손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나중에야 용서하지 못한 마음 때문인 것을 깨닫고 용서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용서한 그 날 밤에서야 비로소 그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예수님의 얼굴을 완성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입니다. 마 5:25에서 형제와 사화한 후에 예배를 드려야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루치아노 파바로티,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를 가리켜 세계 3대 테너라고 합니다. 이 둘 중 도밍고와 카레라스는 1984년부터 앙숙이었다고 합니다. 이 둘 모두 스페인 출신인데 도밍고는 마드리드 출신이고, 카레라스는 카탈루냐 출신인데 카탈루냐 사람들이 마드리드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마드리드로부터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 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정치적 이유로 예리한 각을 세우며 활동했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 곳에서 공연 초청이 있더라고 두 사람은 상대방이 같이 초청되지 않는 다는 조건으로 초청에 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87년 카레라스의 인기가 치솟을 즈음 불행하게도 백혈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10%의 생존율에 지나지 않는 백혈병과 치열하게 투쟁하느라 심신이 쇠약해져 더 이상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번 돈은 미국 시애틀에 치료차 다니느라 거의 모든 재산을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피나는 투병에도 불구하고 백혈병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쯤 카레라스는 마드리드에 ‘ 헤르모스’ 재단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보냈는데 이 재단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마침내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이 재단은 백혈병 환자를 돕는 단체였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카레라스는 다시 테너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많은 돈을 벌게 되어 헤르모스 재단에 기부금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카레라스가 이 재단의 정관을 흝어 보다가 뜻밖의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 재단을 설립한 이사장이 다름 아닌 도밍고였습니다. 나중에 도밍고가 재단을 설립하게 된 이유를 알게 된 카레라스는 두 번 놀랐다고 합니다. 도밍고가 설립한 이유는 바로 카레라스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도밍고는 카레라스가 자신의 도움을 받는 다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줄곧 이름을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카레라스는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카레라스는 어느 날 마드리드에서 열린 도밍고 공연장에 찾아 갔습니다. 카레라스는 공연 도중 무대 위로 올라가서 도밍고 발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공개적으로 감사의 말을 건넨 뒤 그 동안 미워했던 자신의 허물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밍고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힘껏 안았습니다. 위대한 두 세계적인 테너의 우정이 싹트는 순간이었습니다.
한 기자가 도밍고에게 당신의 유일한 경쟁자인 카레라스를 구하기 위해 헤르모스 재단을 설립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세상이 그런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을 잃는 다는 것이 애석할 뿐이었습니다.” 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용서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만약 용서한 다면 이 용서의 은총은 용서한 자에게 흘러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