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자료를 참조했습니다..저작권때문에 다른 곳에 퍼갈 수 없음을 양해바랍니다.
답사 참가자들은 프린트해서 한번 읽고 오십시요.
예천의 문화유물들이 더욱 아름답게 보일겁니다.
답사참가자들께 생생한 사진과 지도가 포함된 자료집을 제본해서 나눠드리겠습니다.
답사때 뵙겠습니다.
07:00 서울 압구정동 공용주차장 출발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
09:30 회룡포 (뿅뿅다리를 건너 가을동화 촬영지를 찾아서)개별차량 합류지점
10:30 용궁향교(내성천을 바라본 경관이 일품)
12:00 점심 청포정식 (전국을 달리는 청포집: 054-655-0264)
12:30 동본리 석불입상(보물 427호), 3층석탑(보물 426호)
13:00 예천권씨종택 및 종가 (보물 457호)
13:30 초간정(권문해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한 정자)
14:00 용문사 ( 보물 684호 윤장대와 후불목각탱 )
16:00 도정서원(약포대감을 생각하며 내성천 감상)
17:00 개심사지 5층석탑(고려 석조예술의 백미)
17:30 예천출발
21:00 서울 도착 예정
1. 버스
이종원/아르테미스/형아/향기야/인덕원참새/궁금이 엄마/동행인/짱구99/동행인/흐르는 강물처럼/kec80/다두/나니아연태기/포도주스/밥줘/하늬바람/채윤/퉁가리/성윤/인어공주/날쌘돌이/숙이/들바람/요시/오우가/비평가/딸/나는처녀/박준영/samuel/왕비/비상/찬미/시몬/세실리아/친구/관조/관조짝/엄지왕/해피포유/가바다/라파엘/소양강/조은억새/ssera
예 천
예천은 단술 예(醴)와 샘천(泉)을 쓴다. 풍요와 자연의 '내음'이 지명에서 우러난다. 예천은 충효의 고장이기도 하다.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이던 약포 정탁, 철종 때 효자로 이름난 야계 도시복이 대표적이다. 충의 정신은 예천여고 출신인 신궁 김진호로 이어졌다. 예천진호국제양궁장도 그런 정신에 맞닿아 쉬이 지나칠 수 없다.
개 관
경상북도 북서부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은 안동시, 서쪽은 문경시, 남쪽은 상주시와 의성군, 북쪽은 영주시와 충청북도 단양군에 접하고 있다. 면적은 660.97㎢ 이며 인구는 5만3,816명(2003년 기준)이다. 1읍 11면 265리가 있으며, 군청 소재지는 예천읍 노상리이다.
자연환경
소백산맥이 충청북도와의 경계를 이루어 군의 북부는 해발 1,000m이상의 산지가 연속되어있고, 동쪽과 서쪽의 군계에도 높은 산이 많으며 남쪽으로 향하면서 높이가 점차 낮아져 구릉지로 변한다. 서남쪽에는 경사가 완만하여 낙동강 및 내성천 유역에 일부 평야를 이루고 있어 기름지고 농경에 알맞은 지역이다. 대표적인 산으로는 동쪽에 주마산, 학가산, 서쪽에 국사봉, 매봉, 북쪽에 묘적봉, 가재봉 등이 있다.
역 사 :
[고대] 예천은 삼국시대에는 신라의 최북단인 수주현으로 있었고 통일신라 제35대 경덕
왕 16년에는 영안(풍산), 안인, 가유(산양), 은정(상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
천군이 되었다.
[고려] 그뒤 예천군은 보주로, 양양, 청하로 불렀고 1204년(신종7) 남도초토 병마사 최
광의가 경주의 신라 부흥군과 이곳에서 싸워 승리한 것으로 인하여 지주 보사로
다시 승격되었다. 축산현은 995(성종14) 용주로 개편되어 자사가 임명되었으나
1005년(목종8) 폐지되었고, 1012년(현종8) 용궁군으로 고쳐져 상주목에 속하였
다.
[조선] 고려 후기의 읍격을 그대로 유지한 채 보주는 1413년(태종13) 보천군으로 고쳐졌
다가 1416년(태종16) 다시 예천군으로 되었따. 용궁현은 1413년 감무를 현감으로
고쳤다.
[근대] 1895년 예천군과 용궁군으로 편제되어 안동부에 속하였고, 1896년 경상도에 속하
였다. 1906년 동로면과 화장면을 문경군에, 다인면을 비안군에 편입했고, 1914년
용궁군이 예천군에 통합되는 동시에 안동군에서 감천면을, 풍기군에서 상리면과 하리면을 편입하였다. 1937년 예천면 노상동 등 16개 동이 편입되고 예천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 속 : 청단놀음, 제애밟기, 도해따기, 마당굿, 별신굿 등이 있다. 청단놀음은 무언극으
로 무용에 가까운 탈놀이인데, 외마치, 살풀이 장단, 세마치 가락의 장단으로 연
주되는 농악에 맞추어 여덟째 놀음판까지 벌어진다.
특 산 물 : 예천군의 명품으로 한국관광공사에서 지정한 예천쌀(옹골진미, 맥반석쌀, 용궁진
상미)이 있다. 예천읍은 동충하초 및 누에가루, 양잠, 쪽파 등이 많이 생산되며
용문면은 금당꿀, 사과, 건고추, 마늘이 유명하다. 상리면, 하리면에서는 인삼과
잎담배, 사과, 호두, 은풍준시가 유명하고, 감천면에서는 사과, 고추, 자색감자,
토마토 등, 호명면은 금싸라기 참외, 유천면은 상황버섯, 표고버섯, 개포면은 청
양풋고추, 보문면은 학가산 산더덕, 학가산 전통메주, 고구마가 유명하다. 용궁
면은 예천 참우, 진상미, 포도, 수박이 유명하다. 양잠은 전국 1위이며, 땅콩,참
깨 등은 도내 으듬이고, 예천 참우는 고급육으로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관혁동에 주천이란 샘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달 뿐 아니라,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철엔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고 한다. 정유재란때 울산지방의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예천을 지나던 양호라ㅗ 하는 명나라 장수가 이 샘의 물을 마셔보고 감탄한 나머지"과연 예천이구나-중국에도 있는 지명으로 단술처럼 맛이 좋은 샘이 있다고 함)
회룡포
물길이 돌아가면서 마치 학의 목줄기 마냥 한쪽에 가느다란 연결선만 남긴 채 마을 전체를 섬으로 만들어 버린 곳이며 천혜의 오지를 찾아 숨어든 사람들이 더 이상 오갈 데 없는 큰 강 물속 섬에 숨어버린 듯한 곳이 바로 경북 예천의 회룡포의 모습이다. 낙동강의 상류인 내성천이 또아리를 틀듯이 둥글게 강줄기를 몰아 나가면서 외쪽에는 깊고 높은 담을 만들고 아래쪽에는 넓은 모래사장과 시원한 소를 만들어놓았다. 옛날에 용이 날아오르면서 크게 한바퀴 돌아간 자리에 강물이 흘러 만들어졌다는 곳. 그래서 이름이 회룡포다. 또한 회룡포를 가장 잘 내려다 볼 수 있는 강 앞의 산도 비룡산이다.
회룡포를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비룡산. 정상에 회룡포를 굽어볼 수 있도록 전망대까지 마련되어 있다. 전망대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회룡교를 건너 곧바로 우회전해 산길을 넘으면 장안사로 들어가게 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전국 명산 세 곳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위로는 금강산, 아래로는 양산, 중간이 이곳 비룡산이다.
장안사에서 종루옆으로 난 오르막길을 오르면 흰색칠을 한 큰 불상이 서 있고, 바로 오른쪽으로 철도목 계단이 길게 산위로 연결된다. 계단을 따라 5분 정도만 오르면 비룡산 정상. 그곳에 회룡대라 씌여진 전망대가 있다. 마을과 들을 사이에 두고 동그랗게 돌아나가는 물길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이곳에서 산책로를 따라 제 2 전망대와 산성까지 다녀와도 30여분정도면 된다.
회룡교에서 장안사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직진하면 작은 마을하나를 지나서 강변앞에 이른다. 건너편이 회룡마을이다. 강물이 적을 때는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건너갈 수 있다. 또한 도로 끝나기 직전 비룡산 등산로입구에 회룡포 간판이 서 있는데, 이곳으로 들어가면 비룡산 시비를 지나 전망대로 오를 수 있다. 이외에 차를 가지고 회룡포마을까지 들어가고 싶다면 개포면 쪽으로 가서 개포면 우체국 앞에서 회룡마을로 들어가는 작은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회룡포마을에는 7, 8년 전만 해도 20여 남짓 가구가 살았으나, 모두 도회지로 떠나고 지금은 9가구 15명의 주민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마을은 논밭까지 합쳐 5만평 정도이다. 한바퀴 도는데 1시간도 채 안 걸린다. 이곳은 1997년부터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기반시설을 조성하였으며, 2004년부터 생태체험 관광지로 조성하게 된다. 회룡포 주변 둑길에는 소나무를 심었고, 주변에는 잔디를 심은 공원과 산책로가 들어섰고 봉수대를 97년 11월 복원완료하였다. 원래는 ‘의성포’라 불렸으나 물돌이동으로 유명해지면서 이웃 고을인 의성군에 가서 회룡포를 찾는 웃지 못할 일이 많아지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이곳 주민들은 주로 벼농사와 고추농사로 생계를 잇는다. 가을걷이 준비가 한창인 이즈음엔 들판만큼 넉넉한 인심도 만날 수 있어 좋다. 회룡포는 준서와 은서가 통학할 때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용궁향교
용궁향교는 옛 용궁현의 구읍(현 용궁면 향석리)에 있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이다. 현재는 교통이 발달해 용궁면소재지까지 10분이면 가지만 향석초교가 개교하기 전 용궁초교까지 너무 멀어 향석·대은리 아이들은 용궁향교에서 수업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태조 7년(1398)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처음 세워졌으나 정종 2년(1400)에 불타 없어졌던 것을 중종 7년(1512) 이곳에 복원했으나 선조 25년(1592)에 다시 불타버렸다.
그래서 그 후 선조 36년(1603)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인조 14년(1636)에 세심루를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정유재란(1597)에 명나라 장수 마귀(痲貴)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울산으로 가던 길에 공자위패를 모셔놓은 향교 대성전에서 쉬려고 앉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성전의 굵고 긴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고 한다. 벼락치는 듯한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위세 당당하던 그는 혼비백산하여 단걸음에 대성전 밖으로 뛰쳐나와 달아났다고 한다. 마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고 차츰 제자리에 놓여지게 되었습니다. 현재 향교에는 공문 5성위를 비롯하여 송4현 및 국내 18현 등 27위의 성현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 가을에 석전제를 올리고 있다.
개심사지오층석탑(보물 제53호)
높이는 4.33m, 기단 너비는 2.15m이다. 1010년(고려 현종 1) 건립된 것으로, 예천읍의 동쪽을 흐르는 한천(漢川) 건너편 논 가운데 서 있다. 고려 전기에 창건된 개심사에 있던 탑이었으나, 절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현재는 논 한가운데에 서 있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4면마다 둥근 테두리 선을 새기고 그 안에 머리는 짐승, 몸은 사람인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차례로 조각하였다. 위층 기단은 4면의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면을 나눈 다음 그 안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겨 놓았다. 팔부중상은 불법을 지키는 여덟 신의 모습을 새겨놓은 것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에 걸쳐 석탑의 기단에 많이 나타난다.
기단의 맨 윗돌은 그 윗면에 몸돌을 받치기 위한 연꽃무늬의 괴임돌을 놓았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한 특징이다. 사리나 법경을 봉안하는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에는 문고리 모양을 조각하고 그 좌우에 인왕상(仁王像)을 새겨 두었다. 지붕돌은 밑면에 모두 4단씩의 받침을 깎아두었으며,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있어 탑 전체에 경쾌함을 실어 준다. 기단에 남겨진 기록을 통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세워진 탑임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매우 온화하여 좋은 비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탑이다.
개심사지오층석탑의 명문과 내용
경북 예천에는 보기든문 석탑 1기가 조성되어 있다. 논 한가운데 서 있는 이 석탑은 하층기단-탑신부 에 이르기까지 단아하면서도 많은 수의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또한 석탑은 여러 글들로 가득한데, 이 가운데 상층기단부 갑석의 낙수공 부분과 석탑의 동쪽 상층기단부 면석 에는 건탑과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二)、以下上臺中石東面
棟梁戶長陪戎校尉林長崔祐母主副棟梁□□邦祐?弘爲身心上報之佛恩爲國正功德普及於一切辛亥四月八日立
-허흥식氏 외 국립문화재 연구소 판독」
먼저 갑석부분의 명문을 살펴 보면 상원 갑자 (이후) 47년 뒤 통화 27년(경술년) 2월 1일 건탑을 시작하여 (두번째 부분) 이듬해 4월 8일날 석탑이 완성되었다고 기록되었고, 이때, 광군 □6대(隊), 수레 18대, 소 1000마리, 10간이 들어갔다 고 하였다. (여기서 광군의 隊는 1대를 기준으로 25人으로 구성되는데, □안의 글자 판독이 불가능하여 정확한 인원수는 규정짓기 어렵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의 명문 전반적 해석 연구에 의해 □부분의 수치를 40으로 설정한 바 있다. 물론, 석탑에 새겨진 명문을 본다면 이러한 설정은 심히 의심스러운 바가 있으나, 뒤에 나오는 수레, 소, 기타 등등의 인물의 정황을 토대로 본다면 총 합량에 사용된 광군의 숫자는 46대=1150명으로 집계됨이 옳을 것이다.)
<참고자료: 오른쪽 부터 '광군□'>
또한, 승려, 속인, 선랑등 1만여명(완성까지의 동원숫자로 추정)이 이 공사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나고, 미륵향도와 치향도로 불리는 향도에서 각각 36人, 40人, 기타 50人의 인력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각 고을과 관아에 소속된 공인들로 판단되며, 이 사람들은 각기 책임자를 선정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의 책임관을 각기, 상평, 장사, 행전, 선랑, 대사 이라 칭한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으로 상층기단면석동쪽에 새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건탑을 주창한 이들로, 호장 배융교위 임장, 최우, 모주, □□와 방우가 있고, 이들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를 위하고, 공덕을 바로세우기 위하여 건탑했다는 글이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석탑이 완성된 것은 신해년(현종 2년, 1011) 4월 8일 이라 한다.
석탑에 나타나는 두개의 명문의 내용은 서로 쓰인 때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상층기단갑석에 새겨진 명문은 1010년 3월 3일 이후에, 상층기단동 쪽면석에 새겨진 것은 1011년 4월 8일에 쓰여진 것으로 기단갑석부분의 명문은 석탑을 만드는 과정 중에 쓰여졌으며, 기단 동쪽면석의 명문은 석탑을 완성하고 나서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두 시점을 기준으로 개심사지석탑의 수요, 공급, 목적성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석탑에 나타나는 두개의 명문의 내용은 서로 쓰인때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상층기단갑석에 새겨진 명문은 1010년 3월 3일 이후에, 상층기단동쪽면석에 새겨진 것은 1011년 4월 8일에 쓰여진 것으로 기단갑석부분의 명문은 석탑을 만드는 과정중에 쓰여졌으며, 기단 동쪽면석의 명문은 석탑을 완성하고 나서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1)1010년 2월 2일 : 건탑의 제창자는 호장 배융교위 임장을 비롯한 5인이다. (수요측)
건탑은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공덕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 (건탑의 목적)
2)1010년 3월 3일 :석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는 총 126명의 공인과 1만여명의 사람이 참여하였다.(공급측) 광군 46대(1150여명)이 동원되고, 수레 18대, 소 1000마리와 10간이 들어갔다.
3) 1011년 4월 8일 : 석탑이 완성되었다.
동본리 석불입상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에 있는 통일신라 말기의 불상. 보물 제427호. 높이 346cm. 단판복련(單瓣覆蓮)의 연화대좌 위에 서 있는 거구(巨軀)의 석불로 신체비례는 4등신(四等身) 정도로 유아와 같은 비례이다. 길다란 직사각형을 세운 듯한 신체에는 굴곡이 별로 없어 전체적으로 평면적이며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둥글넓적한 얼굴에는 내적 평화가 깃든 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나발(螺髮)이 뚜렷한 육계는 높이가 낮아졌으나 통일신라말기의 불상들에서처럼 머리와 구별하기 어려운 정도는 아니다. 목은 굵고 짧으며 보수한 흔적이 남아 있다. 어깨의 폭은 비교적 좁아서 움츠러든 듯한 느낌을 주며 신체에 바짝 붙여 조각된 오른팔은 왼팔과 마찬가지로 짧고 두툼하며 손으로 옷자락을 살짝 쥐고 있다. 왼손은 기형적으로 보일 만큼 가슴에 붙여 조각되어 있는데, 엄지와 새끼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안으로 굽힌 채 손바닥을 내보이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변형된 여원인(與願印)으로 짐작된다.
법의는 통견(通肩)으로 입었는데 신체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옷주름은 허리까지는 평행으로 내려오다가 허벅지 부분에서 Y자 모양으로 갈라져 동심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옷주름 표현은 719년에 조성된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의 형식에서 변형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양식이 자리잡고 난 후 다양한 양태로 변화·발전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신체와 옷주름의 표현 등에서 사실감이 줄어들고, 얼굴도 넓적해지고, 조각수법도 섬세한 묘사력이 떨어지는 등 9세기 무렵의 조각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동본리삼층석탑(보물 426호)
예천읍 한천(漢川) 북쪽의 석조여래입상(보물 427호)앞에 자리하고 있는 탑이다.탑과 불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절터였음이 분명하지만, 절 이름은 알 수 없다. 기단부는 윗층 기단 아래가 파묻혀 있어서, 원래 기단이 2층인지 1층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현재는 윗면에 경사진 돌이 있고, 기단의 가운데돌을 그 위로 얹고 있다. 가운데돌은 4장의 널돌로 짰는데 각 면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기고, 그 사이에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해 놓았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부처의 네 신을 뜻한다. 탑신(塔身)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짜고, 각 층 몸돌의 네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는 1·2층이 5단, 3층이 4단인데 1층의 몸돌이 2 ·3층보다 두드러지게 큰 점이 독특하다. 지붕돌 추녀의 밑은 반듯한데 마무리부분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으며, 빗물을 받는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다. 머리장식으로는 노반과 복발이 돌로 되어 남아있지만, 훗날에 보충한 듯 하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몸돌의 줄어드는 비율과 지붕돌의 크기 등에 짜임새가 있는 아름다운 탑이다.기단의 가운데돌에 새긴 사천왕상의 조각수법도 형식화되지 않은 멋을 보여준다.지붕돌 밑면의 받침수가 줄어들고 있는 점이나 각 부분의 아래에 새긴 괴임돌이 간략해진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건립된 탑으로 짐작할 수 있다.
금당실 전통마을
태조 이성계가 정말 이곳으로 도읍지를 옮겼다면 역사는 어떠했을까. 한양 사람들이 과천 아닌 문경새재에서부터 기어왔을지 모른다. 태조가 도읍지로 삼으려 했을 만큼 금당실(金堂室)은 명당이었던 모양이다. 북으로 백두대간 소백산맥 자락이 둘러쳐져 있고, 남으로 낙동강이 굽이친다.
지금은 많이 떠났지만 함양 박씨 집성촌이었다. 원주 변씨 고택에다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저택이 있던 곳이다. 마을 서쪽 입구에는 수령이 150년도 넘은 울창한 송림이 조성돼 있다. 북서풍을 막아주는 물리적 역할 뿐 아니라 마을의 품위를 더한다. 360 여가구 900여명이 사는 이곳은 문화재청 주관 아래 복원공사가 한창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도읍지로 삼으려 했다는 금당실 마을. 세월의 무게를 담은 담장과 옛 가옥은 금당실의 힘이다. 돌담길은 거의 복원됐고, 군데군데 고택들이 되살아나고 있다. 아직 손길이 닿지 않은 담장과 옛 집은 세월의 풍파가 그대로 얹혀 있다. 골목길이 하도 구불구불해 돌아나올 때 조심해야 한다. 새우장수가 길을 잃어, 새우 한사발을 주고 길을 물어 나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보존의 미덕으로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각광받는다. 박길상 이장(56)은 "촬영하겠다고 시도 때도 없이 온다"며 "가만있어도 가만 둘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조용한 마을로 남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금당실 마을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 했던 곳으로 십승지지의 하나이다. 이곳은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무덤, 함양 박씨 3인을 모신 금곡서원, 함양 박씨 입향조 박종린을 모신
추원재및사당(민속자료제82호), 조선 숙종때 도승지 김빈을 모신 반송재고택(문화재자료제262호), 원주 변씨 입향조 변응녕을 모신 사괴당고택(문화재자료제337호), 구한말 세도가 양주대감 이유인의 99칸 대저택 터가 있으며, 이외에도 개량된 고택들이 많은 전통마을이다. 그리고 용문중학교를 중심으로 500여m 가량 뻗어 있는 100여년 넘은 소나무와 용문면사무소 앞 300년 된 성황당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안식처와 휴식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10승지지(十勝之地)
十勝之地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열군데의 땅. 승지란 원래 경치가 뛰어나거나 지형이 풍요한 곳을 말하나, 한국에서는 굶주림이나 전쟁을 피할 수 있는 피난처라는 뜻이 강하다. 민간의 풍설에 의하면 한국에는 10개소의 승지가 있어 십승지라 한다. 그 중에 조선 중엽의 도인 남사고(南師古)가 정한 십승지가 가장 유명하다. 그에 따르면 십승지는 풍기(豊基)의 금계촌(金鷄村), 안동(安東)의 내성(奈城), 보은(報恩) 속리산(俗離山), 운봉(雲峰)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동점촌(銅店村), 예천(醴泉)의 금당동(金堂洞), 공주(公州) 유구천(維鳩川)과 마곡천(麻谷川) 사이, 영월(寧越)의 정동(正東) 상류, 무주(茂朱) 무풍(茂豊)의 덕유산(德裕山), 부안(扶安) 변산(邊山)의 호암(壺巖), 성주(星州)의 만수동(萬壽洞)이다. 이들 십승지들은 대부분 오지에 있으므로 전란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도 십승지의 위치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6·25 등을 거치면서 백성들은 이러한 십승지를 찾아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 풍기의 금계촌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1970년대까지도 독립된 공동생활체를 유지하였다.
십승지에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다. 십승지를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라 하여 흉년, 전염병, 전쟁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십승지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은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가야산, 지리산등 명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이 높고 험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차단되어 있는 곳이다. 십승지는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통로가 대개 한 곳 밖에 없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곳으로 험한 계곡과 협곡으로 되어 있다. 또 산이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공간에 수량이 풍부한 평야가 있어서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1년 농사지어 3년을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대개 십승지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적으로 가치가 별로 없는 곳으로 발전이 없으며 전쟁이 일어나도 적들의 접근이 전혀 없다. 결론적으로 십승지는 발전보다는 미래에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피난과 자손 보존의 땅이다. 따라서 한때 난리를 피하기는 좋은 곳일지는 모르지만 여러 대를 살면서 번창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곳일 수도 있다.
1. 영월 정동 상류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2. 봉화 춘양 일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일대)
3.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리 일대)
4. 공주 유구 마곡 두 강 사이 (충남 공주시 유구읍 사곡면 일대)
5. 풍기 차암 금계촌 (경북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일대)
6. 예천 금당동 북쪽 (경북 예천군 용궁면 일대)
7. 합천 가야산 남쪽 만수동 일대 (경북 합천군 가야면 일대)
8. 무주 무풍 북쪽 덕유산 아래 방음 (전북 무주군 무풍면 일대)
9. 부안 변산 동쪽 호암 아래 (전북 부안군 변산면 일대)
10. 남원 운봉 두류산 아래 동점촌 (전북 남원시 운봉읍 일대)
풍광 수려한 명당 중 명당 예천권씨 종택(보물 제457호)
초간 권문해 선생 종가는 초간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택지로는 전국 10대 명당에 속할 만큼 풍광이 수려하다. 예천읍내는 물론 맑은 날이면 안동 하늘이 가깝게 보인다. 동쪽 금당실 마을의 송림도 여기서 보면 병풍을 두른 듯 확연하다.
조선조 영남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주택이다. 초간 선생의 조부인 권오상이 선조 22년(1589)에 세웠다. 다소 높아 보이는(약 1.8m) 석축 위에 초석을 놓은 것이 인상적이다. 별당 대소제는 4칸의 팔작기와집으로 보물 제457호이다.
초간 선생의 친필일기인 초간일기가 경내 백승각에 소장돼 있다. 13세 종손인 권영기씨(69)가 집을 지키고 있다. 주변 다른 기와집도 고풍스럽다. 엄연히 사람 사는 민가이므로 둘러볼 때는 정숙해야 한다.
예천 권씨 종택은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인 초간 권문해의 조부인 권오상이 지은 집인데, 이 명당에 터를 잡을 적에 만석꾼이 부자가 나는 자리와 당대의 학자가 날 자리를 놓고 비교하다가 학문하는 자리를 택했다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육간대청이 넓은 사랑채가 앞으로 나와 있고, 마루와 안채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편이라 별당채라고도 한다. 이 사랑채 건물은 15세기 말엽의 건물이며 보존 상태도 좋은 편으로서 보물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정면에서 보면 동쪽의 여섯 칸은 대청 마루인데,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가 권위를 내세우고 있는 듯 하며 서쪽 두 칸은 온돌방이다. 옆면에서 보면 점차 높아 가는 지세에 따라 집이 층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쪽 온돌방보다 뒤쪽 온돌방은 지붕이 높고 한단 높아진 공간은 다락으로 이용되며 이 다락의 위치는 안채의 평면과 일치하게 된다. 이런 지세의 차이 때문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은 두 단으로 이루어진 축대 위에 설치되었으며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평면의 구성을 보면 안방이 서쪽으로, 대청이 동쪽으로 벌어져 있으며, 안방의 서쪽으로 한 칸짜리 도장방이 붙어 있고 남쪽으로 세 칸짜리 부엌이 길게 이어져 있는 점이 매우 색다르다. .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그대로 개방하였고 옆과 뒷면은 판벽을 치고 그 중앙에 판장문을 달았다. 밖에서 보면 소박한 건물이나 사랑대청 천장을 올려다보면 주택 건물에서는 보기 드물게 공을 들여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 놓은 놓았다. 이 건물의 보호 구역 안에는 대동운부군옥(보물 제878호), 초간일기(보물 제879호), 해동잡록(유형문화재 제170호)등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예천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안동권의 학맥과 풍속을 함께 하고 있는 고장으로 곳곳에 오랜 기와집들을 볼 수 있는 전통의 고장이다. 초간정에서 나와 용문중학교를 지나 용문면사무소 앞에서 우회전하여 조금만 가면 운치있는 집 예천권씨종택을 만난다. 초간정에서 종택까지의 시간은 5분이다. 500년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가 입구에서 우리를 반긴다. 이곳은 실제로 후손이 거주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사랑채의 문을 불쑥 열었다가 어른이 계셔서 큰 실수를 했다. 백배 사죄를 하고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평소 예의바른 권선생님이 안채에 사람이 살고 있으니 가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하여 들어갔다.
종택의 대문을 들어서면 육간대청이 넓은 사랑채가 앞으로 나와있다. 안채와 마루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매우 독립적인 편이라 별당채라고도 한다. 임진란 이전에 세운 건물로 남아있는 것이 드문 편인데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다. 보물 제457호인 종가별당과 연결되어 평면 구성된 옛날 가옥으로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의 조부 권오상(權五常)이 선조 22년(1598)에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 뒷산이 반달모양으로 싸안고 좌측으로 백마산(白馬山)이 청룡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아미산(娥眉山)이 백호를 이루어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도 유명하다. 전체 건물은 낮은 뒷동산을 배경으로 다소 경사진 대지 위에 동남향으로 배치하였다. 사랑채는 전면에 돌출되어 있으며, 안채는 뒷쪽으로 자형을 이루고 있다.
본래는 대문간채와 사랑채 왼쪽에 연접한 부속채가 있었으나 철거하였다 한다. 보물로 지정된 사랑채는 평지 위에 막돌 허튼 층쌓기로 높게 축대를 쌓은 위에 세우고 난간을 돌려서 다락집 모양으로 꾸민 별당식 건물이다. 평면 구성은 건물을 향해서 왼쪽에 1칸의 온돌방을 꾸미고, 오른쪽 3칸에 넓은 대청을 들였다. 온돌은 내부를 다시 두 방으로 구분하고, 대청 앞면은 문짝 없이 그대로 개방하였으며, 옆과 뒷면은 판벽(板壁)을 쳤는데 그 중앙에 두짝 여닫이문을 달았다.
뒷면에는 어간에만 외짝문의 출입구를 만들고, 그 밖으로 쪽마루를 깔았다. 안채는 2단으로 높이 쌓은 축대 위에 세우고, 중문 앞에 계단을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높고 웅장해 보인다. 정면 3칸 중 왼쪽 1칸이 안방이고, 나머지 2칸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으로 전면이 개방되었다. 왼쪽에 도장방을 단칸으로 설치하여 안방과 부엌에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3칸의 부엌은 도장방 앞으로 안방과 연접하여 길게 뽑았다. 사당은 안채 오른쪽 후방에 배치하였다.
정면의 어간에는 양여닫이문을, 협간에는 외여닫이 궁판 세살문을 달았다. 어간 중앙에 수직으로 중간설주가 있는데, 이것이 문받이를 겸하고 있으며, 위쪽으로 밀어올려서 떼어낼 수 있도록 하였다.
별당 뒤 야산 밑에 서고(書庫)에는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部群玉)》 판목(版木) 677매와 14대째 전해지는 옥피리,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 전질 120권이 보존되어 있다. 보존 상태가 우수한 조선 중기 건물로 조선 건축의 구조와 양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별당채는 잡석으로 높이 쌓은 축대위에 세우고, 중간 앞에 여러 단의 축석을 쌓아 건물 전체가 매우 높고 웅장하며 고졸한 멋을 풍긴다.
이 구역안에는 조선 중기 영남 지방 사대부가의 대표적 별당식 건물인 예천권씨종가별당(보물제457호), 대동운부군옥책판교본(보물제878호), 초간일기(보물제879호), 해동잡록(유형문화재170호), 수령 500년 넘은 향나무(도지정기념물 제110호) 등 다수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1984년 12월 24일 중요민속자료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이 권씨종택은 후손인 권영기씨가 소유·관리하고 있다. < 엄 동 인 >
초간정
예천읍에서 928번 지방도로를 이용해, 용문면에 도착해서 용문사로 가는 길에 왼쪽으로 초간정의 입구가 보인다. 수령이 꽤 오래되어 보이는 수림 사이로 거대한 암반 위에 조선시대의 정자 초간정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정자 아래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초간정 정면에 서서 정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선인들의 멋스러움과 자연친화적인 삶의 지혜를 느낄 수 있으며, '누가 여기에 정자를 지을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인물이 궁금해진다.
아무렇게나 자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울창하고 작은 바위 계곡에 정자 하나 서 있을 따름인데 말이다. 어디서 어디까지를 정원이라 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에서 우리 옛 정원의 참 멋을 발견한다.
계류 건너편 바위 언덕. 우거진 송림 아래 벤치에서 건너편 초간정사를 감상할 수 있게 돼 있다. 저 선경 속에 잠깐이나마 머물다 내려왔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저 선경을 빌어 정사를 짓고 종일 머물렀던 이가 초간 권문해(權文海, 1534~1591)다.
예천이 본관으로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서애 유성룡과 학봉 김성일 등과 동문수학했다. 좌부승지·관찰사를 지내다 말년에 강직한 자리로 유명한 사간 벼슬을 지낸 인물이다. 어지러운 정세를 피하고 부모의 간병을 위해 10년 가까이 고향 예천으로 내려와 초간정사를 짓고 학문에 몰두했다.
초간이 남긴 큰 업적 가운데 하나가 <대동운부군옥>이라는 박물지이다. 단군이래 선조 임금 때까지의 국토와 지리, 국호와 성씨, 효자와 열녀, 신선의 이름과 꽃이름, 나무이름 등 우리나라의 자연, 인문 환경을 집대성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곳이 이곳 초간정사이다. 초간정사를 품은 산수정원의 자연미는 결국 고유한 민족 문화를 담은 백과사전을 편찬한 초간의 자주정신을 담은 그릇인 셈이다.
학문이 바다와 같다는 초간의 이름처럼, 예천 권씨 가문은 이후로도 명예와 부귀보다는 학문을 닦고 인덕을 높인 가문으로 이름 높다. 초간정사는 별채 도서관 역할을 했다. 초간정사 옆에 딸린 작은 살림집에 기거하며 학문 수양에 정진할 뿐 굳이 제자를 받지 않았다 한다. 어느 날 한 유생이 초간을 찾아와 과거에 급제하고자 학문을 청하니, “초간정사 난간을 백 바퀴 돌면 뜻을 이룰 것이다” 고 대답했다 한다.
그런데 마지막 100바퀴째를 돌던 유생이 그만 발을 헛디뎌 난간에서 떨어져 깊은 소에 빠져 죽어버렸다고 한다. 99바퀴를 돌고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열중한 초간의 뜻을 모른 유생의 죽음이 남의 일 같지 만은 않다.
실개울 두 줄기를 받아들여 정사 앞에서 세 굽이를 치며 돌아나가는 계류는 예천 용문사에서 흘러내려온다 하여 용문천(龍門川)이라 부르고 있었다. 이 용문천은 한천과 몸을 섞어 내성천으로 흘러간다. 내성천의 하류가 용궁면(龍宮面)이다. 재미있는 상상 한 가지.
용궁면의 용이 휘돈 곳이 물돌이로 유명한 예천 용궁의 회룡포(回龍浦)다. 그렇다면 용문천은 용궁의 입구다. 초간정사 앞의 작은 암곡은 묘하게도 좁게 패여 비윗살이 한결같이 물 흐르는 방향으로 쏠려 있다. 용이 뚫고 지나간 흔적이다. 450년 전 여기에 정원을 조영한 초간은 이걸 알고 있었을까.
산수정원의 진경(眞景)은 정원의 위치에 있다. 자연을 받아들여 생활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초간정사는 자연을 벗하는 여행과 일상생활의 경계를 허무는 위대한 힘이다.
용문사 개요
용문사는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용문면 내지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울창한 거목들 사이에 서 있는 일주문을 지나면 풍경소리, 목탁 소리가 청아하게 울려 퍼져 조용하기 그지없는 산사에 다다랐음이 실감난다.
용문사는 이 고장 출신 두운선사가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의 큰 뜻을 품고 두운선사를 방문하고자 동구(洞口)에 이르니, 갑자기 바위 위에서 쌍용이 나타나더니 절로 가는 길을 인도했다고 하여 태조는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다. 고려 명종 원년(1171)에 태자의 태를 절의 왼쪽 봉우리에 묻고 창기사로 고쳤다가 다시 용문사로 고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백산 용문사에는 국내 최고를 자랑하는 것이 있다. 대장전은 보물 제145호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아한 맞배지붕의 균형미를 보여주는데, 고려 명종 3년(1173)에 건립된 최고 오래된 목조 건물로 옛 맛을 느끼며 보려면 자운루 밑으로 해서 대장전을 바라보면서 가는 것이 더 낫다
대장전 안에 있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보관대인 윤장대, 대추나무에 불상을 조각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목불좌상 및 목각탱(부물 989호), 불국사의 것보다 규모가 더 웅장한 사천왕상이 있다. 그 외에도 조선 세조3년에 경상감사와 예천군수에게 전지를 내려 절을 잘 보호하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한 용문사 교지(보물729호)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으며 예천군 내에서 가장 큰 사찰이 용문사다.
용문사의 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김룡사본말사지 金龍寺本末寺誌》에 따르면, 신라시대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두운이 이 산의 동구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 하여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으며, 절을 짓기 시작하였을 때 나무둥치 사이에서 무게 16냥의 은병(銀甁)을 캐어 공사비에 충당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후삼국 정벌 중에 이 절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훗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 936년(태조 19)에 칙명으로 이 절을 중건하였고,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였다. 이후 이 절에는 두운의 법맥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영련은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도하다가 조응(祖膺)에게 법(法)을 전하였고 조응은 제자 자엄(資嚴)과 함께 여러 법당과 승방 등을 건립하였다.
1165년(의종 19)에는 왕의 칙명으로 중수하였으며, 1171년(명종 1)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로 바꾸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어 낮에는 《금광명경 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의식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이 법회를 끝마친 뒤 다시 선문구산(禪門九山)의 승려 500명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그때 단속사(斷俗寺)의 선승 효돈(孝惇)이 《전등록 傳燈錄》 《능엄경》 《인악집 仁岳集》 《설두집 雪竇集》 《염송》 등을 강(講)하였다.
1173년 나라에 내란이 일어나자 3만 승재(僧齋)를 열고 1180∼1182년에 대법회를 열었는데, 개태사(開泰寺)의 국통 전치(顚緇)가 강을 맡았다.
1478년(성종 9) 소헌왕비(昭憲王妃)의 태실(胎室)을 봉안하고 1480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중수하여 성불산 용문사라 하였으나, 1783년(정조 7) 문효(文孝) 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는 다시 소백산 용문사로 고쳤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폐허화된 것을 열파(悅坡)·상민(尙敏)·부열(富悅) 등의 여러 승려들이 힘을 모아 1840년대에 공사를 마쳤다.
이 절에는 세 가지 이적이 있었는데, 첫째는 두운의 창건 때 용이 영접한 일이고, 둘째는 은병을 캐어 절을 공사비에 충당한 일이며, 셋째는 절의 남쪽에 9층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할 때 4층탑 위로 오색구름이 탑 둘레를 돈 일이다.
문화재로는 윤장대(輪藏臺:보물 684), 용문사 교지(보물 729), 목불좌상 및 목각탱(木刻幀:보물 989), 대장전(大藏殿:보물 145), 자운루(경북문화재자료 169)가 있으며, 그밖에 현존하는 당우로 진영각(眞影閣), 명부전(冥府殿), 응진전(應眞殿), 회전문(廻轉門), 범종루, 강원, 천불전(千佛殿), 일주문, 요사채, 두운암(杜雲庵)과 1984년 화재로 모두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普光明殿), 응향각(凝香閣), 단하각, 해운루 등이 있다.
용문사 대장전(보물145호)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대장전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은 시기는 알 수 없고 전하는 기록에 조선 현종 11년(1670)에 고쳤다고 하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건물의 모서리 부분에는 용머리, 연꽃 봉오리와 같은 조각을 해 놓았고, 안쪽 부분에는 더욱 화려한 장식을 하여 당시의 정교한 조각과 장식 솜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삼존불 뒤의 나무로 조각한 벽체는 건물의 가치를 더욱 높이고 있으며, 불단 양쪽 옆으로 불경을 보관하는 회전식 윤장대(輪藏臺)를 만들어 놓았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뛰어난 조각 솜씨와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윤장대(보물 제684호)
龍門寺輪藏臺 경상북도 예천군(醴泉郡) 용문면(龍門面) 내지동(內地洞) 용문사 경내 대장전에 있는 목조경판고. 높이 4.2m, 둘레 3.15m. 대장전 불단 좌우에 1대씩 설치된 회전식 윤장대이다. 대장전이 1670년(현종 11) 중수되었는데, 윤장대는 사적기의 내용으로 보아 조선 중기 것으로 추정된다. 2대가 모두 같은 수법으로 제작되었는데, 바닥을 8각으로 뚫고 축을 세워 지도리로 경장을 받치고 천장에 축을 고정시켜 회전할 수 있게 만들었다. 마룻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원주 상부에 8각당우를 만들고 다출목의 다포와 8각옥개를 조각했다. 각면에 8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 문에는 빗살무늬창살, 서쪽 문에는 꽃무늬창살이 조각되어 있고, 내부는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보관할 수 있다. 아랫부분에서 바닥 상부까지는 팽이처럼 점점 경사진 모양으로 판목을 대었으며, 한 쪽 모서리에 횡목 손잡이를 마련, 경장을 돌릴 수 있도록 했다. 윤장대는 대장전이나 장경각처럼 경전을 보관하는 한편,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용문사 대장전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으로, 내부에 불경을 넣고 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의례를 행할 때 쓰던 도구이다.
마루 밑에 회전축의 기초를 놓고 윤장대를 올려놓았으며, 지붕 끝을 건물 천장에 연결하였다.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1기씩 놓여있는데 화려한 팔각정자 형태이다. 아래부분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고, 난간을 두른 받침을 올린 후 8각의 집모양을 얹었다. 8각의 집모양에는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각 면마다 8개의 문을 달았다. 문은 좌우로 구분되어 4개의 문에는 꽃무늬 창살이 다른 4개의 문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정교하게 꾸며져있다. 문을 열면 8면에 서가처럼 단이 만들어져 경전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였다. 보존이 잘 되어있고 8각형 모양의 특이한 구조수법이 돋보이는 국내 유일의 자료로, 경전의 보관처인 동시에 신앙의 대상이 되는 귀한 불교 공예품이다.대장전을 창건할 당시 함께 제작된 것인지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단장하면서 만들어진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용문사목각탱(보물 989호)
숙종 10년(1684)에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목각후불탱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기본구조는 상하가 긴 사각형이지만 좌우로 구름무늬 광선을 표현한 둥근 모양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중앙에 모셔진 본존불은 넓적한 얼굴, 날카로운 눈, 작은 입 등에서 다소 수준이 떨어지는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두 손은 모두 무릎 위에 올렸는데 왼손은 손가락을 위로, 오른손은 아래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어 아미타불의 손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은 두꺼운 편이며, 간략한 몇 개의 선으로 신체와 옷을 구분하여 주름이 없다면 신체의 근육으로 여길 정도다.
본존불 이외의 상(像)들은 상·중·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아랫줄에는 사천왕상이 본존의 대좌(臺座)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다. 가운데줄과 윗줄에는 각기 좌우 2보살씩 8대 보살이 배치되고, 윗줄의 보살 좌우에는 다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은 모습의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미를 살리고 있다. 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기법을 보여주며, 불과 보살상 사이의 공간에는 구름, 광선 등을 배치했다. 목각탱의 앞면에는 삼존목불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본존상의 경우 머리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었고, 신체는 둥글며 옷은 두꺼워 신체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각탱과 같은 기법으로 동일한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임에는 확실하지만, 목각탱의 상에 비해 가슴표현이 유기적이며 조각기법에서 조각가의 정성을 엿볼 수 있다. 하단에 표현된 조성기(造成記)에 의하여 숙종대의 작품이 분명하며, 17세기 후반 조각양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므로 역사적 의의가 매우 높다.
용문사 팔상탱(보물 1330호)
팔상탱화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이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폭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제3폭에는 설산(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탱화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
고려건국에 이바지한 두운스님
두운대사는 신라말의 고승으로 소백산 용문사를 창건한 개산조이며, 고려건국에 이바지 하였다. 그는 용문면 두천리에서 태어 났으며 속성은 신씨로 청운의 뜻을 품고 범일국사를 모시고 뗏목을 타고 황해를 건너 당나라에 가서 경, 율, 론, 삼장을 두루 익히고 돌아왔다. 당시 사회가 혼란하고 삼국이 분열되어 중생구도와 국태민안을 위하여 이곳에 수행하던 중 하루는 운우가 자욱하여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때 구척 거구의 한 장수가 나타나 "나는 왕건의 사람인데, 고승 두운대사가 이곳에 머문신다기에 뵙고자 오다가 산문 밖에서 청룡 두 마리가 길을 인도하여 이르렀으니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도탄에 허덕이는 만 중생을 거하여 주소서." 하며 애원하였다.
대사께서는 "꽃을 꺾어 밭 가운데 둔 들 얼마동안이나고울 수 있겠느뇨? 청춘이 머무르지 않는 것은 달리는 말과 같고 사람이 목숨이 덧없기는 산골짝을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오늘은 비록 살아 있으나 내일을 보장하기 어렵거늘, 그대는 나를 어느 길로 인도코자 하느뇨" 하고 거절하니, 왕건이 오체투지하여 재삼 간곡히 부탁하기를 "무엇 때문에 삭발하고 가사를 입었습니까? 지금 이 시국에 대사께서 입으신 옷이나 입안의 밤이 쉽게 소화가 되겠습니까? 바라건데 인연이 있어 만나게 되었으니 부디 만 중생을 건실 수 있는 스님의 슬기를 저에게 빌려주소서." 했다.
수행에만 전념해온 대사도 왕건의 얼굴에 덕이 넘치고 말씨가 간절하여 경륜이 넉넉하니 반드시 이 사람이야말로 난세를 수습할 군왕이 될 기상이라 하여 그를 초당으로 인도하여 그의 청을 받아 들였다. 이에 왕건은 절 이름을 용문사라 하였으며 대사는 그 후 그를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두운대사는 용문사이외에도 풍기의 희방사, 남해의 용문사를 창건하고 양평의 용문사를 중건했다고 전해지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가 이르는 곳마다 호국불교의 큰 가람을 이룩하고 겨레의 마음속에 부처님을 공경하는 마음과 나라 사랑하는 지혜를 심어 주었다.
도정서원
藥圃 鄭琢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한 祠堂이다. 尙賢祠라 편액한 사당은 道正書院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렀고 담장의 정면에는 사주문을 세워 출입케 하였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자연석쌓기한 기단 위에 柱座가 있는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으며 기둥의 상부에는 初翼工으로 장식하였다. 평면은 전면에 반 칸 규모의 개방된 퇴칸을 두었으며, 架構는 五樑架의 겹처마집이다.
도정서원(道正書院)
정탁(1526∼1605)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정탁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대사헌, 이조판서, 서원부원군 등 여러 벼슬을 지냈고 천문·지리 등 여러 분야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웠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사형집행 전에 구한 인물이다.
조선 인조 18년(1640) 처음 지은 사당은 강당을 더해 숙종 23년(1700) 도정서원으로 승격하였고 정조 10년(1786)에는 정탁의 셋째 아들인 성리학자 정윤목을 제사지내기도 하였다. 고종 3년(1866)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손실되었으나, 97년 복원하였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강당은 앞면 4칸·옆면 2칸 건물로 주위에 난간을 두른 누각 형태의 건물이다.
이 건물은 조선조(朝鮮朝) 선조(宣祖)때의 약포 정탁(藥圃 鄭琢)(1526∼1605)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인조(仁祖) 18년(1640)에 세운 사당이다. 숙종(肅宗) 23년(1700)에 강당(講堂)채를 세워 도정서원(道正書院)으로 승격시키고, 그의 3자(子)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을 배향(配享)했다가 고종(高宗) 3년에 훼철(毁撤)되었다.
사당채는 정면(正面) 3칸 측면(側面) 2칸으로 되어 있고 강당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전면(前面)에 난간(欄干)을 돌려 누각형식(樓閣形式)을 취하였다.
'97년 국비보조사업으로 동·서재, 전사청, 누각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정탁
[鄭琢, 1526(중종 21) ~ 1605(선조 3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본관은 청주(淸州). 예천(醴泉) 출신.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68년(선조 1) 교리(校理)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 예조판서·형조판서·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좌찬성으로 몽진(蒙塵)하는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이순신(李舜臣) 등의 명장을 천거하기도 했다.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으며, 1604년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경사(經史)·천문·지리·상수(象數)·병법(兵法) 등 여러 방면에 걸쳐 학식이 깊었으며, 저서로 《약포집》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예천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간(貞簡).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던 정탁은 1594년에는 김덕령·곽재우등의 명장을 천거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옥에 갇히자 무고함을 극력 주장해 백의종군토록 하는등 뛰어난 학문과 강직한 성품으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서당, 서원, 향교
조선시대 교육기관에는 서당, 서원, 향교, 4학, 성균관이 있는데 서당은 초등교육기관이고, 향교는 지방의 중등교육기관, 4학은 한성을 중심으로 한 중앙의 중등교육기관이며, 성균관은 국립 대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사학으로서 서원을 설립하여 교육을 담당하게되고 향교는 점차 교육적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서원과 향교의 차이점은 서원은 사학, 향교는 관학이고, 서원에서는 우리나라 선현에 대해서만 배향을 하나, 향교는 중국선현까지 배향하는 점이 크게 다르다. 서원과 향교는 공통적으로 선현에 대한 제사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기관이지만 설립주체가 서원은 사림양반이 세운 사학이고, 향교는 국가에서 지방교육을 위해 세운 관학이다.
'사액서원'은 왕의 친필로 쓴 액(현판)과 서적, 노비, 학전을 하사 받은 서원으로 우리나라 서원의 시초인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은 후에 국가로부터 사액서원으로 인정받으면서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아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사액서원으로 지정되면 국가로부터 많은 혜택이 주어지므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사액서원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는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재정적 부담이 되고 한편으로 서원이 사림양반의 세력 근거지가 되기에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서원 철폐령을 내려 600여 개가 넘던 서원을 47개로 정리하였다.
서원은 교육을 통해 인재를 키우고 선현들에 대한 제사(교육과 선현봉사)를 지내는 두 가지 기능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유교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모아 정치에 반영하는 기능도 담당하였다.
서원이 사림양반의 이익집단으로 점차 변모하고, 면세 및 면역의 특권을 이용하여 서원전을 늘리면서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여 국가 입장에서는 양인 숫자의 감소 및 과세지의 축소로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원의 융성으로 국가에서 마련한 관학으로서의 향교가 침체되고 쇠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원은 한마디로 말하면 성리학적 고급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조선 중기에 주로 설립되었던 조선조 최고의 학당이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사학으로서, 물론 서원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오늘날의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서원의 설립자는 대 유학자나 그를 흠모하는 후학이 설립과 운영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물론 조선시대 내내 서원이 성리학 연구를 전제로 한 도학서원의 성격으로 설립과 운영이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원수가 급격히 늘어나고 기능도 본래의 추구했던 교육기능보다는 선현의 향사 중심으로 성격이 변모하여 '시우'와도 구분이 안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사회에서 서원이 갖는 역사적 의미나 서회적 의미는 서원의 개설을 계기로 향촌에서 학문을 닦는 풍토가 무르익게 되었고 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인사가 대부분 당대 명성을 떨치었던 거물들이었기에 해당지역민들의 정신적인 귀감이 되어 효제 충신의 정도를 깨우치게 하기도 했다.
서원기능의 핵인 사당과 강당은 서원건축의 시작이다. 이는 서원의 설립이 선현을 봉사하고 아울러 유학강론에 주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정신적인 지주가 되는 사당과 현세적인 강당은 사원의 기본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서원에서 건립되었다.
또한 서원건축의 기본적인 배치구도는 서원이 입지한 지형이나 건립시기, 기타 지역에 관계없이 모두 전면에 강학구역을 두고 후면에 제향구역을 두는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으로 일관된다.
향교/ 서원의 차이점
국립/ 사립(사액서원의 경우는 나라에서 어느 정도 지원)
지방교화 기능으로 인해 도시 중심부에 위치/교육을 강조. 조용하고 경치 좋은 도시외곽
중국 사람까지 제사를 드림/우리나라 사람만 제사를 드림
교수진은 과거 급제자나 중앙관리/유명한 학자나 양반
평민이나 양반 누구나 입학가능/양반의 자제만 입학가능
설립 시기는 고려시대부터/ 설립 시기는 조선중기 16세기(1500년대)부터
예천과 양궁
예로부터 활의 고장으로 그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특히 우리고장 출신 김진호 선수가 1979년 세계 양궁선수권대회에서 사상 첫 5관왕을 차지하며 세계무대를 주름잡는 신궁(神弓)으로 탄생하면서부터 지속적인 우수선수 발굴 육성과 지역 양궁 저변확대에 기여하고자 1983년 남·여 2개의 양궁팀을 창단 운영하여 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100여명의 선수가 활약한 예천양궁선수단은 김수녕, 장용호, 양승현, 김성남, 한희정 등 10여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였으며 각종 국제 및 국내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300여회의 입상과 각종 훈·포장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2000년 호주 시드니에서 개최된 제27회 하계 올림픽에 참가한 우리팀 소속 장용호, 김수녕선수가 남·여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김수녕 선수는 개인동메달을 획득하였고 2004년 아테네에서 개최된 제28회 올림픽에서 장용호 선수가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하고 우리 지역을 세계속에 널리 알리는데 기여하였습니다.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양궁경기의 세계적인 대회를 훌륭히 치러냄으로써 예천이 세계양궁의 메카로서 위상을 높이고 아울러 역량과 성장 잠재력을 재확인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천호예술원
1998년 3월 14일, 폐교가 된 이 곳 보성초등학교에 전기장판 한 장만을 달랑 들고 터전을 삼겠다고 들어온 것이 엊그제 일 같습니다. 그 몇 년간 작가촌을 꿈꾸며 몸살을 지펴가며 각오를 다져왔었지요. 교실 한 칸 한 칸을 개성있는 작업공간으로, 전시관으로, 손님들의 쉼터인 차방(茶房) 등을 꾸미고, 운동장에는 연못을 파고 잔디와 꽃나무를 심으며 조각공원으로의 기반조성을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마침내 사단법인 천호예술원이라는 미완의 결실을 보게 되었고, 비로서 외부로의 개방을 조심스레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현대를 가리켜 문화예술의 시대라며 외치고들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들의 위치는 여전히 불안하기만 하고 그나마 변변한 작업장 하나 가질 수 없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저희 천호예술원은 작가들에게는 자유로운 창작의 산실이 되며, 지역민들에게는 문화공간으로의 역할을 다 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한 일환으로 상설갤러리의 운영 및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한 미술강의의 개설, 체험 및 감상학습의 장이 되어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그리고 전국 조각공모전을 개최하는 포부 또한 밝혀둡니다. 지금까지 밝힌 청사진들은 지금까지 준비해 왔던 인고의 시간만큼 분명 그 결실을 맺어갈 것입니다.
천호예술원이 완성된 궤도에 올라서서, 후배들에게 물려 줄 유산으로 길이 남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 비록 경제적으로는 그렇지 않으나, 정신적인 풍요는 그 누구 못지않게 누리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전시실(천호갤러리) ]
2002년 6월 천호예술원 오픈과 함께 천호작가 전시회를 시작으로 각종 단체(문화,예술)의 전시회가 열리는 곳입니다. 천호 작가들의 상설전과 함께 야심찬 작가들의 기획전 및 전시장 대관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방문하시는 모든분이 자유로이 관람하실 수 있는 전시실 입니다.
[ 문화의 방 ]
천호 작가들과의 교감과 함께 강의 및 토론 실습을 통해 문화와 예술, 취미미술을 경험하고자 하는 여러분의 공간 입니다.다.
[ 조각공원 ]
야외의 푸른 잔디위에 조각및 조형 예술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는 조각공원과 여러분의 휴식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첫댓글 아휴~~애 쓰셨어요..이 많은 자료 찾고 또 정리하고...답사 자료집 모은게 꽤 되네요...ㅎㅎ
처음 가 보는 예천에 기대가 많이 됩니다. 참고 잘 하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